2016. 9. 18. 12:12

그때 나는 어렸고, 나의 진짜 생각을 그대로 꺼내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신문에서 이 우파들이 당과 사회주의에 반대한댜는 내용을 보았고, 우리는 공청당원으로서 이를 반대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반우파운동을 지지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나는 방향을 돌려, '반우파운동이 어쩌면 부작용을 가질 수 있고, 지식인으로 하여금 다시는 감히 말을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결론은 두 가지 해로움이 있다면 더 작은 쪽을 취해야 하며, 사회주의가 물론 더 중요하므로, 따라서 나는 반우파운동을 옹호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옹호였지만, 반우파운동에 '해로움이 있다'는 말조차도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현장에서 나는 즉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의 처지가 매우 위험해졌습니다. 이때 당은 나에게 하나의 임무를 주었습니다. 나로 하여금 우리 반의 江씨 성 가진 '우파' 학생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비판 발언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 이때 내게는 단지 한 가지 결정밖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가자, 최선을 다해 발언하자.'

 

나는 비판회의에서 두 차례 발언했습니다. 이 동학은 이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고, 줄곧 보관해왔습니다. ... 나는 그의 회고록을 보고서 매우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나 자신이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매우 고통스러웠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자책했습니다. 첫째, 왜 나는 발언했는가? 둘째, 발언하여 친구를 다치게 했는데, 어찌 이를 스스로 잊었는가? ...

 

나중에 나는 글을 한 편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의 발언 원문을 스캔하여 올리고, 나의 반성을 쓰는 것입니다. 이 글은 중국 남방에서 아주 영향력이 있는 간행물 <隨筆>에 발표되어, 역시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같이 공개적으로 참회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우파를 비판했던 많은 좌파는 현재 모두 침묵하고 있고, 직접 책임을 지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대학생 시절 반우파 운동 속에서 겪었던 한 가지 일의 회고에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첫째, 당시의 분위기가 획일적이었다는 사실. 둘째, 사상 통일을 위해 조금 불온한 자를 불온한 자의 비판에 앞세우는 以夷制夷의 수법이 사용되었다는 사실.

 

셋째, 비판에 동원되었던 조금 불온했던 자가 스스로 비판했던 내용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능동적 행위가 아니라 당시 상황 속에서 부득이한 것이었으므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싶어했을 것 같다. 그리고 스스로 용납하기 힘든 행위 내용을 잊고 싶은 무의식의 작용도 있었을 것 같다. 이렇게 내키지 않는 행동을 거듭하면서 자기반성의 기회를 갖지 못하다 보면 결국 애초에 원치 않던 체제에 순응하고 마는 것 아닐까.

 

넷째 사실,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바뀐 뒤에도 과거를 드러내 반성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데도 생각할 점이 많다.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면서도 과거의 자신에 대한 반성을 못한다면 새로운 시대에 대해서도 또 한 차례 순응하는 것일 뿐이지, 시대를 열어가는 입장에 서지 못한다. 첸리췬의 반성은 힘들고 괴로운 것이었겠지만, 그런 반성을 해 내기에 읽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자기가 겪은 시대상을 마음 깊이 전해줄 수 있는 것이다.

 

법학자 이항령 씨가 두 차례 반성문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일이 있다. 일제시대에 관리 노릇 한 것을 해방 후에 반성한 것과 독재시대에 지도층 인사 노릇 한(못한?) 것을 민주화 후에 반성한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나도 눈여겨 봤는데, 그의 진심으로부터 가르침을 얻으려는 노력보다 냉소적 반응이 많았다. 그분의 반성이 개인의 반성에 그치고 사회의 반성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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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16. 9. 16. 13:11

모택동은 지식인에 대해 무수히 많은 말을 했습니다. 다들 어떤 것이 그의 진정한 생각인지, 어떤 것이 전략적인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현재 나를 포함하여 일부 연구자들은 지식인에 대한 모택동의 진정한 생각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1920년대 대혁명의 시기에 쓴 한 편의 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현재 <모택동 선집>의 첫 번째 글로 실려 있는 "중국 사회 각 계급 분석"에서의 한 가지 판단입니다. ... 우리는 이것이 아마도 가정 진실한 모택동의 생각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모든 지식인은 모두 "극단적인 반혁명파"이거나 또는 "半 반혁명파"이다. ...

 

그는 실제로 '프티부르주아계급'과 혁명의 대상으로서의 '대지주 및 대부르주아계급'을 동등하게 본 것이고, 따라서 그의 분석에서 지식인은 부르주아계급에 속할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와 결탁한 '대지주 및 대부르주아지계급'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당과 대립될 뿐 아니라, 국가와 민족 이익과도 위배됩니다. 이런 이유로 모택동은 지식인들, 특히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개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지식인들을 '망당과 망국'의 근원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과거 그가 지식인을 '반혁명파'라고 한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이렇게 모택동은 사실상 계급의 입장뿐 아니라 민족의 입장으로 지식인을 심판대 위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1949년 모택동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아마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더욱 근본적으로 지식인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표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毛皮論'입니다. 그가 보기에 지식인은 이리저리 떠나니는 독립적 지위가 없는 '털'과 같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가죽' 위에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프롤레타리아계급 쪽에 붙거나, 또는 부르주아계급 쪽에 붙게 되고, "가죽이 없으니, 털은 종속될 뿐"이라며, 근본적으로 지식인의 독립적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 이는 존재론적으로 매우 철저하게 지식인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1956년 2월 흐루쇼프가 비밀보고서로 스탈린 시대를 비판한 소련공산당 20차 대회를 계기로 중-소 관계의 변화와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차례 격동이 시작된다. 이때 절대화된 마오쩌둥의 영도력이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이끌어 가게 되는데, 그 영도력의 중요한 한 측면이 지식인에 대한 태도다. 1956년 북경대학에 입학한 첸리췬은 이후 자신의 정체성을 '지식인'으로 지키게 되고, 그로 인해 많은 고심과 고생을 하게 되므로 중국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생각은 중화인민공화국 60년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서도 하나의 중요한 측이 된다.

 

Posted by 문천
2016. 9. 13. 10:16

 

이어서 나의 어릴 적 생활 속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주로 1953년 이후에 발생합니다.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입니다. 우리 세대에는 보편적 심리가 있었는데, 열네 살 이전에는 소년선봉대 대원을 하는 것이고, 열네 살 이후에는 응당 공산주의청년단에 참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자연히 입단 원서를 냈습니다. 나는 당시 학교 전체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공인하는, 성품과 학업 모두 우수한 착한 학생이었는데도 입단을 거절당했습니다.

 

입단을 주선해준 친구는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사상-정치-행동에서 반혁명 부친과 반드시 확실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열네 살 소년의 마음에 아버지는 신성한 것이었고, 혁명도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둘 사이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너무나 잔혹했고, 물론 납득할 수 없었지요.

 

입단을 주선했던 사람은 좋은 친구였고, 내가 공청단에 가입하기를 희망했습니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와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으며, 할 이야기를 마친 후에는 절박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기를 그가 희망하는지, 나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둘은 매우 긴장하여, 나도 그를 보고, 그도 나를 보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시간이 되어 그는 묵묵히 일어났고, 나도 묵묵히 그를 입구까지 배웅했습니다. 공기가 너무 무거워 질식할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정말 다시 오지 말라고 그에게 충고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친구는 여전히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는 조직이 그에게 부여한 임무였고, 또 친구로서 그의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갑자기 이러한 아버지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을 생각하니 아주 무서웠습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정신적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어 나는 두 번째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문 교사 한 분이 나를 아주 좋아했고, 이 때문에 나는 문학과 연구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계몽해준 이 선생님께 반드시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의 자랑스러운 문하생이었다는 이유로 재난이 초래되었습니다.

 

1955년 반혁명 숙청운동 시기였습니다. 선생님은 이전에 국민당 계통 신문사의 편집자를 맡았었고, 해방 후에는 교사로 자리를 배분받았습니다. 그런데 국민당과의 관계로 인해, 그는 스스로가 국민당이 남긴 특수임무자임을 인정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그는 물론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학교의 지도부는 나를 시켜 그를 움직여보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은사와 당 사이에서의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나는 선생님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발언했습니다. 발언 후 선생님은 학생들의 도움에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는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나에 대한 그의 실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를 마주할 수 없었으며, 그 후 다시는 그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듣기로 그의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고 했고, 나는 그를 매우 동정하면서도 시종일관 감히 만나지 못했습니다. 문혁이 끝나고서야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이미 실명한 상태였습니다.

 

"군사부 일체"라 하는데, 이 중학생은 父도 부정하고 師도 부정하라는 요구를 君에게 받았군요. 나는 이 충격이 해방 후 4년 만에야 이 어린이에게 닥쳤다는 사실에 일단 주목합니다. 인민공화국 수립 후 몇 년간 합작 노선의 연장선 위에서 포용적인 정치 분위기가 이어지는 동안 이 어린이는 별 고민 없이 좋은 학교에 진학해서 마음껏 소질을 키우고 있다가 1당독재를 굳히는 단계에서 충격에 마주치게 된 것이군요. 일전에 올린 그 어머니 이야기를 돌아보면, 어머니는 이런 방향의 변화를 내다보고 극도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이미 취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스승에게는 무슨 회한을 남길 이야기를 이 중학생이 했는지 모르겠으나, 아버지를 부정하지 못하던 마음가짐을 보면 스승에게도 극단적으로 등을 돌리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지도부의 요구에 최소한 부응하면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의 발언을 하는 '타협'을 시도했을 것 같군요.

 

합리적 사고에 익숙하던 이 중학생이 '타협'이 가진 위험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을 것이 짐작됩니다. 도리에 맞는 범위의 이야기를 하려고 애썼겠지요. 그러나 지도부가 스승을 핍박하는 뜻에 맞는, 적어도 그 뜻에 어긋나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굴레가 됩니다. 그래서 스승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 굴레가 사람들을 더욱더 적극적인 '타협'으로 끌고 가게 됩니다.

 

첸 선생이 이 이야기를 나중에라도,(36년 후인 1991년의 글에 적었던 것이라 합니다.) 괴로워 하면서라도 털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 대단한 일입니다. 어느 선 이상의 '타협'을 거부할 수 있었던 덕분이라고 생각되는데, 험난한 세월 속에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며 그가 살아올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 있었는지, 앞으로 그가 겪어 나갈 일을 계속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