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24. 20:11

 

여기 우리 반의 班史가 나의 태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우리는 紅專 대변론을 했고, 우리는 반드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즉 '백색 부르주아계급 전문가'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홍색 후계자'가 될 것인지를 변론했습니다. 나는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습니다.

 

"2반의 변론회에서 xxx[첸리췬] 동지는 '나는 한 마음으로 학문을 추구했고, 자신의 노동을 통해 한 걸음씩 올라갔다. 나는 도서관을 헤집고 다녔지만,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맛있는 음식을 추구하지 않았고, 양옥집과 자동차를 추구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한 권의 책과 한 칸의 방 그리고 한 잔의 차만을 추구했다. 어떻게 악취 나는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고상한가. 어떤 이가 그에게 묻는다. '너는 도서관을 헤집고 다녔지만 다른 이를 방해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너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줄을 서서 영화표를 사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 사도록 하고, 밥을 먹을 때도 친구가 대신 가져오는데, 이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아닌가? 다른 사람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 후 분석에 치중했다. '바로 심각한 개인주의 때문에 완강히 白專의 길을 걷는다. 따라서 반우파투쟁 가운데 심각한 오류를 범했고, 수많은 우파의 발언을 동정했으며, 절대 당을 보위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는 공청당원 입장을 완전히 상실한 심각한 오류이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xxx 동지는 이 백전의 길이 얼마나 사악하고 악취 나는지 초보적으로 인식하도록 하라.'"

 

나에 대한 비판과 나의 반박으로부터 당시 나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한 권의 책과 한 칸의 방 그리고 한 잔의 차가 있는 서재 생활을 동경했습니다. 이는 당시 시대에 '백전의 길'을 견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나는 여전히 작가의 꿈과 학자의 꿈을 견지하고 있었고, '지식과 우정 그리고 사랑'을 추구했으며, 여전히 입학시절과 젊은 시절의 이상을 품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사상을 결론지으면서, 나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잊히지 않는'부르주아계급의 절대적 민주, 자유, 인도, 우의의 추구'를 이야기했고, 생활 속에 네 가지가 점점 많아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노동시간이 너무 많고, 정치학습이 너무 많고, 집체학습이 너무 많고, 정치활동이 너무 많았습니다. 나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것들이 나의 자유와 독립을 방해하고, 억압되고 부자유한 느낌을 받았으며, 아주 강렬한 고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한번은 참지 못하고 小組회의에서 아주 긴 발언을 했습니다. 제목은 '인정과 우정을 호소함'이었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크게 훈계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첸리췬은 1956년에 입학한 대학생활이 1년 후 반우파 운동이 시작되면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한 권의 책과 한 칸의 방 그리고 한 잔의 차". 사회와 학교의 분위기가 바꾸기 전에 소년 첸리췬은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인문학자의 자세에 끌려 있었다. 남에게 해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기 좋아하는 식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반우파 운동의 회오리바람 속에서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반사"의 인용된 대목 안에 첸리췬의 이름이 "xxx"으로 표시되어 이름이 가려져있는데, 이것은 당 지부에서 정리할 때 감싸 준 결과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당시의 분위기에 잘 맞추지 못하지만 똑똑하고 착한 소년으로 보여서 은근히 비호해준 사람들이 있었을 것 같다. 그런 비호 때문에 이를 악물고 서둘러 태도를 바꿀 필요도 덜 절박했을 것 같고.

 

비판 내용 가운데 "수많은 우파의 발언을 동정"했다는 지적에 유의하게 된다. 비판하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비판을 독하게 해야 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첸 소년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내용까지 쏟아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學人의 기본자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인용한 어느 대목에서처럼, 친구를 비판해 놓고 비판한 사실조차 잊어버릴 만큼 학인의 자세를 지키기 어렵게 만든 상황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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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아마 이는 사실일 것이다. 민족이란 건 생각하기에 따라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오랫동안 핏줄기를 같이하여 온 한 겨레라는 사실이 인류 역사에 있어서 수얼치 않은 힘을 나타내는 일이 적지 아니 있다. 이에 비기면 정치적인 어떠한 힘은 그것이 아무리 강한 것일찌라도 허잘 것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가장 좋은 본보기를 우리들의 가까운 과거에서 찾아낼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대륙으로 남양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히고 그 발판을 다지기 위하여 조선과 조선민족을 아주 통으로 삼켜버릴려고 가진 간악한 짓을 다할 제 그 모라치는 정치적 힘은 회호리바람처럼 거쎄고 소낙비처럼 줄기찬 것이었다. 그러한 서슬에 민족의 넋이 바람바지에 선 등불처럼 하마 까무러칠 뻔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였다. 많은 조선사람은 겨레의 앞길에 대하여 암담한 생각을 지니었었다.

 

조선말을 쓰지 말라 하면 스스로 혀를 굽혔고 성을 갈라 하면 이름까지도 바꾸었었다. 어머니 무릎에서 배운 모국어를 버리는 것도 수얼치 않은 고통이려니와 조선사람의 감정으로 성을 간다는 건 진실로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일본사람 중에서도 설마 하고 어려워한 사람들이 많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 큰 파란을 겪지 않고 아주 보기좋게 이루워졌었다. 이에는 내남 없이 모두 놀랐다. '민족'이란 허망한 낱말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지 않었다.

 

조선의 목덜미를 잡은 일본의 힘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들도 영영 그들의 손아귀에서 놓여날 길이 없을 것 같고 이대로 가면 조선민족도 아이누족처럼 이 지구 위에서 영영 살아저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었다. 그럴 수밖에 달리 길이 없을 것이라고 아주 단정해 버리는 사람도 없지 않었다. 민족을 배반하는 모든 행동은 이러한 近視眼的인 판단에서 울어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 한 번 굴러서 제이차세계대전에 일본과 그 동맹국이 패하여 우리 땅으로부터 그들이 물러나게 되자 한 때 숨죽은가 하였든 민족의 넋이 얼마나 굳센 힘으로 다시 소생하였던가. 오랜 역사와 높은 문화를 가진 민족은 일시적인 외부의 힘으로 말미암아 쉽사리 시들어버리지 않음을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적확히 보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바이 허망한 말이 아님을 우리는 몸소 겪어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뜻 아니한 三八선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조국은 두 동강으로 잘리었다. 민족의 삶의 기틀인 동맥은 끊어지고 겨레의 마음은 갈갈이 찢기었다. 우리는 이러한 부자연스러운 삶의 지옥에서 헤어날려고 그 동안 여러 모로 발버둥질치고 몸부림처 보았으나 이에서 버서나기는 새로이 이제는 남북으로 두 개의 정부가 나뉘어 서서 이대로 가면 민족의 分裂이 아주 굳어저 버리는 것이(固定化) 아닐까 하는 이조차 생기게 되었다. 양심적인 청년일수록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의 이러한 사태에 조금도 비관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장내를 達觀하고저 한다. 민족의 분렬은 어듸까지든 일시적 현상이고 머지않아서 반드시 우리는 다시 한 덩이로 뭉처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이른바 希望的 觀測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를 공부하는 한낱 학도로써 깊은 確信을 가지고 하는 말이다. 어찌하여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하면 오늘날 우리 국토의 양단과 민족의 분렬은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울어난 必然的 귀결도 아니고 또 우리 겨레가 이러한 사태를 처음부터 바라고 좋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외부의 힘으로 말미암은 本意 아닌 일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三八선의 잘림은 어찌 생각하면 우리 국토의 슬픈 宿命일는지 몰으나 결코 민족 역사의 必然的 귀결이 아니다. 또 이러한 민족의 히생을 미끼로 사리사욕을 도모하는 무리나 일당일파의 정치적 야망을 획책하는 무리가 바이 없을 리는 없지만 이것은 어듸까지나 분렬의 결과이고 이러한 나뿐 결과만으로 미루어 짐작하여 우리 민족이 본시부터 분렬을 바라고 좋아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타면 우리의 本意가 아니요 우리의 역사에서 울어나지 않는 이러한 일시적인 어긋난 현상은 반드시 바루어지는 날이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씨워진 부자연스러운 굴레는 그것이 한 때 사람들의 눈에 아무리 강한 것으로 느껴지더레도 버껴지는 날은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진리임을 우리는 가까운 과거에 있어서 몸소 겪어왔기 때문에 美蘇 간의 세력 항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우리 민족의 불행은 조만간 묵삭어질 것으로 믿는 바이다.

 

미국과 소련의 겨룸은 그것이 오늘날 세계를 억눌르는 너무도 거창한 潮流이긴 하나 이 숨막힐 듯한 회호리바람은 결코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하여 우리 겨레의 불행을 아주 굳어져 버린 사실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미소 간의 이른바 冷戰은 그것이 너무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기 때문에 일정한 한도에 이르면 반드시 터처지고야 말 것이다. 그것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통하여설지 혹은 평화로운 타협을 통하여설지 혹은 그도저도 아니고 대규모의 혁명을 통하여설지 그는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조만간 두 개의 세계는 그 균형을 잃을 것이다.

 

그리되는 날 조선은 갈러저 있으라 해도 갈러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억지로 휘어진 남ㄱ은 그를 억눌러서 휘어지게 한 힘이 풀려질 때 맹렬한 기헤로 本然의 자태에 돌아갈 것이다. 良識을 가진 겨레의 思惟와 行動은 일시적인 현상에 현혹되지 말고 우리 민족은 반드시 한 덩어리로 다시 합쳐진다는 信念의 토대 위에서 움지겨야 할 것이고 한 거름 더 나아가 겨레의 모든 힘을 그 길로 솔리게 해얄 것이다.

 

老子[?]의 말에 "회호리바람은 아무리 거쎄어도 한나절을 잇대어 부는 일이 없고 소낙비는 억수로 퍼부으면 퍼부을수록 진종일 계속하는 일이 없느니라"(颱風不終朝 聚雨不終日)한 말이 문듯 머리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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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16. 9. 20. 11:31

 

하지만 이 세대는 역시 아직 젊었습니다. 역시나 매우 천진했습니다. 그들은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범한 가장 큰 오류는 내가 보기에 역사적인 큰 오해입니다. 어떤 오해일까요? 바로 그들이 모택동을 같은 노선이라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캠퍼스의 우파들은 예외 없이 모택동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날카로움과 재주를 뽐냈던 임희령도 모택동을 이야기할 대에는 일종의 동경을 드러냈습니다. 그려는 모택동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며, 호풍 문제 같은 것이 오류의 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작은 오류라고 했지요. 스탈린과 비교해볼 때, 그는 오류를 발견하고, 경험을 총화하고, 교훈을 흡수하는 것을 잘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판단을 하기도 했습니다. "작금의 마르크스주의자는 하나는 티토이고, 하나는 톨리아티이며, 하나는 흐루쇼프이고, 하나는 모택동이다. 모택동은 흐루쇼프, 티토, 톨리아티와 같은 공산주의운동의 개혁파이며, 현 단계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자이다."

 

나는 담천영이 '우파' 가운데 가장 머리가 좋고 사고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모택동이 "영원히 우리를 지지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분석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힘써 위로부터의 정풍운동을 지지할 책임이 있다. 우리의 친애하는 모택동 동지가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는 이번에 아래로부터의 민주운동을 지도하여, 이를 파괴성이 가장 작은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담천영 등은 중국에서 위로부터의 개혁과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상호 촉진하는 국면이 출현하기를 희망했음이 분명합니다. 이는 줄곧 중국 대륙의 개혁자들의 기대이자 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줄곧 1980년대까지 중국의 개혁자는 여전히 이런 꿈을 품고 있었습니다. 1957년의 대학생들은 이러한 기대와 선량한 염원으로부터 출발했지만, 한 가지 오판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택동이 개시한 정풍운동이 바로 그들이 희망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이고 그들이 개시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운동과 일치하며 서로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모택동 본인과 청년 대학생들이 마음이 통하고 서로 지원하는 전우라고 오인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미 아주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꿈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고 짝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친애하는 모택동 동지'에게 희망을 거는 동안에도, 이 '친애하는 모택동 동지'가 일찍이 이미 1957년 초에 당내에서 "현재의 대학생은 다수가 착취계급 출신이고, 그들의 배후에 그들의 부모가 서 있으며, 모두 우리를 적대하고 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의 부모를 대신해서 말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택동은 일찍이 대학의 불안 분자를 처리하고 '불안정 요인'을 배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단지 학생들만 몰랐을 뿐입니다.

 

1956년 들어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 시대를 극복하는 새로운 노선을 들고 나왔을 때 마오쩌둥도 그 뒤를 따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중국 안팎에 팽배했다.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雙百 방침'과 공산당의 노선 조정을 바라보는 듯한 '整風 운동' 이 기대감을 더욱 부풀려주었다. 그러나 이 정책들은 나중에 "뱀을 때려잡기 위해 굴에서 끌어내는" 유인책으로 해석되었다. 마오쩌둥이 흐루쇼프 노선을 '수정주의'로 비난하고 대대적 反우파 운동을 일으킨 뒤의 해석이다.

 

1956-7년 쌍백 방침에 호응한 대학생들은 좌우 노선에 앞서 중국의 전통적 지식인 역할을 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굳이 좌우를 따진다면 중도 좌파가 그 주류라 할 것이다. 첸리췬이 林希翎, 譚天榮 등 그 주동자들에게 깊은 애정과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그들의 주장에 공감하고 마오쩌둥에 대한 기대감도 공유했을 것을 알아볼 수 있다.

 

반우파 운동의 타격 대상은 우파라기보다 '지식인'이었다고 볼 것이 아닌지, 첸 선생의 서술을 보며 생각이 떠오른다. '學人'의 전통적 역할은 중국 역사의 한 요소다. 신문화운동 이래 공산혁명의 과정에서도 그 역할이 컸고, 마오쩌둥의 뛰어난 지성이 그 역할을 대표했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일어나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진 '反지성' 운동이 이후 역사 전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중국현대사의 중요한 한 측면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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