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게 확실히 이는 천지개벽의 대변동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원래 국민당 고위관료의 귀부인이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반혁명 가족, 반동관료의 가족이 되었고, 모든 사람이 적대하고 멸시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게 됩니다. ... 그렇지만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 본래 어머니는 우리에게 다 털어놓고 정신적 부담을 덜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대 입을 열지 않고 수십 년간 침묵했습니다. 돌아가실 때조차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

 

어머니는 매우 겸허한 태도로 주변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정부의 모든 호소, 예를 들어 이재민에게 겨울옷을 부조하기, 대약진 시기 동과 철을 헌납하기 등에도 적극적으로 응했습니다. 가도거민위원회가 우리 집에 있는 차고를 이용하여 학습반을 운영하고 싶다고 했을 때에도, 어머니는 흔연히 동의했을 뿐 아니라 모두와 함께 혁명가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가도거민위원회가 집이 부족하다고 우리 집 아래층을 헌납하라고 했을 때에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동의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모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이웃이 이사를 오고 나서도 그녀는 매우 예의 바르게 대했습니다. 나는 그때 뭘 그렇게까지 조심하느냐고 책망하며 물었지요. 어머니는 저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 나중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집 앞이 바로 학교였는데도 홍위병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듣기로는 가도거민위원회가 도와서 여기 노부인이 아주 좋은 사람이니 폐를 끼치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허약해지다가 결국 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나는 당시 일을 하던 귀주에서 한걸음에 남경의 어머니 병상 앞으로 달려왔고, 어머니가 거친 호흡을 이으며 "지난 몇십 년 결국 너희에게는 불똥이 튀지 않았구나"라고 말했던 것을 아주 똑똑히 기억합니다.

 

첸리췬(錢理群, 1939- )이 베이징대학(중문과)에서 퇴직한 후 자원해서 난징의 모교에 가 중학생을 두어 해 가르치다가 학생들의 배척을 받아 물러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나이부터 교양을 불어넣어 주고 싶은 노 교수의 열의가 학생들에게는 시험 준비에 방해로 보였다고 한다.

 

이 일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첸 선생은 젊은이들과의 소통을 평생 중시한 분이라고 들었다. 2009년 가을 타이완의 교통대학에서 강의할 기회를 반가워했을 것도 족히 짐작이 간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를 타이완 학생들에게 강의하기 위해 兩岸의 彼此에 구애되지 않는 서술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한다. 나도 한국사를 국경의 안팎에 구애되지 않는 시각에서 서술하려 애써 봤거니와, 첸 선생이 취한 방법이 나보다 윗길임을 인정해 마지 않는다.

 

왜 윗길인가?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천여 쪽의 책 시작부터 끝까지 마오쩌둥의 모습이 빈틈없이 깔려 있다. 그것도 사람의 모습으로. 마오쩌둥의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그 마음에 중화인민공화국 60년 역사를 비춰본 책이다.

 

등장 인물이 마오쩌둥만이 아니다. 10세 나이에 건국을 맞은 첸 선생 자신의 모습이 모든 장면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자서전'의 내용도 겹쳐져 있는 책이다. 부끄러웠던 일, 괴로웠던 일을 소탈하게 털어놓는 한 지식인의 눈을 빌려주기 때문에 이웃나라 역사지만 남의 역사 같지 않게 읽힌다.

 

첸 선생이 인간을 바라보는 눈길이 얼마나 명징하고도 투철한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도입부의 한 대목을 위에 옮겨놓았다. 틈틈이 읽어 이제 3분의 1 정도 책장을 넘겼는데, 도입부에서 품은 기대감이 계속 충족되고 있다. 번역(연광석)도 아주 좋다.

 

 

Posted by 문천

2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 일기가 중단된 것은 몸이 아파서 때문이었던 듯. 3월 19일자 일기에는 그 동안 있었던 중요한 일과 쌓여 있던 생각들을 길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4월 22일 아주 중단되기 전까지, 이 공책에 남아있는 일기를 마저 정리해 올립니다.

 

그런데 이번에 눈에 띈 사실이 있는데, 이 공책의 모양으로 봐서 1946년 4월 22일자 일기 이후 상당량(3-40장?)의 공책장이 뜯겨 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조수(조교) 신분의 대학 생활을 시작하던 시기인데, 일기를 적었다가 어느 시점에서 없애야겠다는 판단을 한 것인지?

 

 

3월 19일 (발행)

 

3월 20일

요사이는 차표 사기가 몹시 힘든다 하므로 전번에 鉉澈 군에게 손님 차표를 사오라고 부탁하엿더니 용산역에 가서 사지 못하고 和信 옆 旅行公社에 늦게 가서 거기서도 차표는 거진 다 팔리고 느러선 사람은 많아서 아주 못 살 뻔한 것을 언젠가 오래 전에 제가 차표를 살려고 느러섰을 때 늦게 와서 다급해 하는 女人을 제 앞에 넣어준 일이 잇는데 마침 공교로이 이번엔 그 女人이 줄에 서 잇다가 鉉澈이가 차표를 못 사서 애타 하는 것을 보고 줄에 끼워주어서 無難히 차표를 끊을 수 있엇다고 뜻밖에 차표를 사왓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듯고 여러 가지로 느끼는 점이 있엇다.

세상은 넓고도 좁은 것이며 인연이란 묘한 것이다. 착한 일이란 가만한 갚음이 있는 것인 줄 알엇는데 이러케 드러나게 갚음이 잇는 것은 자미난 현상이다.

그러나 이 일 전체를 통해선 역시 倫理的으로 反省해야 할 점이 잇다. 一列의 規律을 깨트려서 어떤 한 사람의 편의를 보아주엇다가 내종에 다시 그 사람에게 역시 같은 수단에 依한 顯報를 받는다는 건 根本的으로 어긋난 일이다. 그러나 切迫한 사정에 잇는 女人의 편의를 보아준 것이 인연으로 내종에 우연한 기회에 그 女人의 아름다운 마음의 선사를 받는다는 건 세상이 효박하고 까다로우면 까다로워질수록 이런 따뜻한 人情의 흐름이 人間 생황에 없지 못할 것이다.

善惡의 갈림은 이러케 보는 角度에 따라서 다르다. 세상 일은 함부로 判斷할 것이 아니다.

[중간부 발행]

아침에 林興植 씨 宅에서 발바리 색기 한 마리를 얻어다 돈암정 집에 갓다두게 하고 競馬場 옆에 잇는 지방법원 출장소에 가서 登記열람을 마치고 平和堂에 들럿다 낮 지나서 聯合會에 出勤하엿다.

오후에는 일직 나와서 大學에 金庠基 씨와 李本寧 군을 만나고 돈암정을 다녀서 朴 선생님과 李哲 군을 찾고 밤늦게 집으로 왓다. 哲 군에게서 語學 관계의 책을 빌려오다.

 

3월 21일

밤에 자고 나니 봄눈이 하야케 왼 누리를 덮엇더니 아침나절 날세가 따뜻해서 눈은 이내 녹아버리고 낮에 法專엘 가니 학생들이 南向 잔디밭 우에 누워 노는 양이 이 어지러운 세상과 치운 봄날세를 잠시 잊게 하는 다사로운 風景이엇다.

哲 군을 시켜서 그저께 內諾은 얻어놓은 일이므로 오늘 勇氣를 내어서 河祥鏞 씨에게 辭意를 表明하엿다. 저녁에는 柳興相 씨, 權五翕 씨가 와서 우리 집에서 특산품전람회 제1회 위원회가 열리엇다. 내가 企劃한 일이 내가 간 후에도 이 사람들의 힘으로 잘 되어 나가기를 心祝한다.

 

3월 22일 (발행)

 

3월 23일

밤에 李載瀅 군과 金周仁 군이 찾아와서 聯合會 일을 걱정하고 우리 세 사람이 손 잡고 推進力이 되어서 部內의 空氣를 革X하고 全國組合의 무기력과 혼미에 빠져 있는 것을 救해내자는 意見을 말하엿다. 나는 매우 좋은 일이라고 대답은 하였으나 이미 正式 辭表를 제출해 있으므로 積極的인 發言은 하고 싶지 않엇다.

 

3월 24, 25, 26일 (발행)

 

3월 27일

감기 기운이 있어서 집에서 쉬엇다.

鮎貝의 雜攷 제1집 新羅王位號 竝 追封王號考를 읽다.

1. 居西干 2, 次次雄 3. 尼師今 4. 麻立干 5. 葛文王

 

3월 28일

종일 봄비 거쎄게 내리다.

몸이 약간 찌부둥해서 講義시간이 臨迫해서 집을 나섯더니 비는 논날같이 퍼붓고 電車는 좀처럼 오지 않고 겨우 얻어 탄 것이 그나마 中途에서 故障이 나고 해서 50분이나 늦어서 학교엘 갓더니 그레도 학생들이 모다 기대리고 있어서 매우 미안하엿다. 그나마 2, 3학년은 午前 시간도 없는 것을 이 雨中에 순전히 내 시간만 드르려고 와서 한 시간 가까이 기대린 것을 생각하니 여간 미안하질 않엇다.

연합회에 들럿더니 충북支部의 柳根喆 씨가 왓기에 함께 나와서 집에서 留宿케 하엿다.

 

3월 29, 30일 (발행)

 

3월 31일

今日 附 朝金聯 解職 發令

 

4월 1일 발행

 

4월 2일

아침부터의 朝金聯 課長회의에 出席, 이것이 最後의 課長회의가 될 것이다.

낮에 란드래이 會長으로부터 解任辭令을 받다. 몸이 갓든해지는 한편 두 번이나 金融組合의 신세를 지고 다시 훌훌히 떠나게 되는 것이 몹시 未安스러웁다.

午後에는 各에 解任 인사를 다니다.

오늘 法專 休講

기봉이 理髮

 

4월 3, 4일 (발행)

 

4월 5일

權五翕 씨에게 事務引繼 해주다.

 

4월 6일

종일 짐 묶으다.

저녁은 李載瀅 군 宅에서 먹다.

元町에서의 마지막 밤을 새이다.

 

4월 7, 8, 9, 10일 (발행)

 

4월 11일

종일 硏究室에서 蕭一山의 淸代通史를 읽엇다. 제15장 61절에 이러한 말이 잇다.

[입력 보류]

 

4월 12일

東星商業의 불타다 남은 形骸가 언제나 보기 숭업더니 오늘아침은 오다보니 그 앞에 벽돌을 갖다 샇어둔 것이 곳 새로운 建設에 着手할 것 같아 보여서 어쩐지 내 마음이 흐뭇해지다.

오랫동안 日帝의 虐政으로 또 전쟁 中의 뒷일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살림살이로 해서 荒廢해진 祖國의 江山에 同胞의 마음속에 하로속히 建設의 굉이가 나려지기를.

 

4월 13, 14, 15, 16, 17일 (발행)

 

4월 18일

金庠基 씨가 연구실에 오서서 趙潤濟 선생을 찾어보앗는가 하고 뭇기에 아직 그럴 겨를이 없엇노라 하니 趙씨가 한 번 보고저 하니 가보는 것이 좋겟다 하고 우스시기에 낮에 學部長室을 찾어갓다. 그 버티고 앉아잇는 모양이라거나 말수작이라거나 學者다운 안존한 氣風이 없는 것이 愛惜한 일이다. 그러나 내 個人에게는 여러 가지 좋은 言辭를 많이 베푸러주어서 감사하다. 詩歌史綱을 통하여 선생님의 學風엔 오래 전부터 敬服하고 잇노라 햇더니 助手로서 學部長님을 진즉 찾아가 뵈입지 않은 怠慢을 용서하시는 것 같다.

 

4월 19일

종일 연구실에서 湛軒說叢을 읽엇다.

午後에 元町 나가서 기봉이 돌 사진을 찾엇다. 엄전한 품이 아주 몇 살 난 것 같어보인다. 노- 하는 버릇으로 혓바닥으로 오른편 볼을 내민 것이 더욱 귀여웁고 이지음의 유니-크한 점을 잘 낱아내엇다.

그 길로 李載瀅 군의 집에 들러서 저녁 먹고 늦어저서 終電車로 동대문까지 와서 동대문서 步行으로 辛苦하엿다. 밤거리를 것는 것은 여러 해 만인 듯 싶다.

 

4월 20일

아침에 일직 大學에 들러서 門어두고 곳 연합회 定期總會에 參席.

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한 組合人들을 邂逅할 수 있엇다.

그러나 회의를 방청해본 결과 모다 제 잘난 체하고 그리고 하치않은 일에 서로 다투고 또 그 雰圍氣가 하도 어수선해서 中途에 구만두고 나오려고 하든 차에 마침 俊圭가 찾어와서 데리고 나왓다.

 

4월 21일

화창한 日요일이었으나 종일 집에 들어앉아서 湛軒說叢을 읽엇다. 안해가 健康에 害로울까 해서 걱정하나 하고 싶어 하는 일이니 그리 害되지 않을 것이며 또 운동은 學校 來往만으로써도 充分하지 않을까 녁임으로써이다.

午後엔 李容兌 씨가 찾아와서 初面 인사 하고 두어 시간 이야기하다 가섯다. 大倧敎의 內容 처음으로 자세히 들을 수 있엇다. 이 老人들의 思想은 陳腐하다고 할 수 있을찌라도 세상이 모다 親日 保身으로 趨向하든 時代에 있어서 眞心으로 民族의 將來를 걱정하고 또 實踐한 그 꿋꿋한 志慨는 우리가 우러러 받들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4월 22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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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12월 29일자(책 수록)로 1945년의 일기가 끝나고 한 달간 끊겼다가 1946년 1월 30일자로 다시 시작된다. <조선역사> 집필 기간 동안 일기를 중단한 것이다. 1월 30, 31일자, 2월 1, 2일자는 책에 수록되었고 2월 3일자부터 수록되지 않은 일기가 보인다. 음력 그믐날인 2월 1일 서울을 출발해 설날 차례가 지난 후에 영천군 청통면의 집에 도착했다. 대구 출장을 겸해 귀향한 길이었다. 2월 16일자(책 수록) 이후 한 달간 일기가 다시 중단되므로 그 앞까지 여기 올린다.

 

 

12월 29일, 1월 30, 31일, 2월 1, 2일 (발행)

 

2월 3일

어제 오늘 치웁다. 사람들은 立春치위라고 한다.

하도 고단해서 아침 먹고 한참 누웠다가 열한 시 가까이 집을 떠낫다.

瓦村마을 어떤 바람벽에는 아직도 “[나중에 입력]” 하는 삐라가 남어잇고 욱이가 하던 말에

“촌 백성이 뭘 압니꺼

가마니 짜라카만 짜지요

공출 대라카만 대지요“

하든 거와 비추어 보아서 일본제국주의의 포학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와 비슷한 이야기.

대구사람들이 까딱나이까 하는 말을 잘 쓰기에 그 유래를 물엇더니

어떤 청년이 전쟁 중에 강제징용으로 일본 어느 탄광으로 끌려가서 일하고 잇는데 얼마 후에 그 아버지가 또한 강제징용으로 끌려가서 공교로이 한 탄광 같은 일터에서 일하게 되엇다. 그레서 부자가 한 도록고를 앞뒤로 끌고 밀고 하는 중에 늘 서로 주고 받는 말이 아들은 “아버지 조심하이소” 하면 그 아버지는 “오냐 너는 까딱나이까” 하므로 옆에 사람들이 이 問答을 듯고 하도 우수어서 이야기가 되엇다고 한다.

낮차로 대구 드러와서 理財과장 姜信默 씨 댁에서 저녁 먹고 지부장 金英喜 씨 댁에서 잣다. 참사 鄭庚得 씨, 申鉉守 군과도 姜씨 댁에서 함께 소주를 먹엇다.

경북은 공산주의 세력이 지배적인 듯하고 그러므로 有象無象들이 急進 공산주의자가 되어서 生硬한 이론을 휘둘르는 것이 우수웁다. 이 느낌은 이튼날 宴席에서 崔某를 만나서 더욱 그러하였다.

 

2월 4일 흐리다

아침에 支部로 나갓더니 林興植 씨가 내려와 있엇다.

嶺南일보, 民聲일보, 大邱시보의 세 신문사에 인사 다니고 밤에는 各社의 간부들을 불러다 食道園에서 宴會를 베푸럿다. 밤에는 申군의 집에서 자다.

 

2월 5일 개이다

道廳 간부들에게 인사하고 美人 知事에게 금융조합 機構에 대한 설명을 하엿다. 학무과에 가서 金思燁 군과 조선兒童會의 金三出 군을 만낫다.

오후에는 남산정의 큰 누님 댁엘 찾아가 뵈입고 저녁에는 대구고보 옆의 朴時憲 군 댁에 가서 저녁 먹다. 鄭熙俊 군도 오랜만에 만나다.

 

2월 6일 (발행)

 

2월 7일 따뜻하다.

아침에 鄭庚得 씨와 여러 가지로 時事문제에 관한 논의를 하엿다. 좌익 편향이든 이곳 여러 동무와 며칠동안 논의를 거듭한 결과 차츰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점심은 남산정 누님 댁에서 먹고 저녁은 崔燉洪 군의 초대를 받고 다시 姜信默 씨 댁에 가서 酒果를 먹엇다.

子正에 떠나는 급행차를 탈려고 停車場엘 갓더니 차가 네 시간이나 延着되어서 대구역에서 거진 하룻밤을 새엇다. 崔文煥 군과 동행. 朴時憲 군과 鄭正容 형제의 배웅이 있엇다.

 

2월 8일 (발행)

 

2월 9일 개이고 치웁다.

아침에 성모병원엘 가서 기봉이와 안해와 나 세 사람이 모다 牛痘를 맞엇다.

대학에 가서 李本寧 군을 만낫다.

오후에 吳斗煥 군 母子가 찾아왓다.

 

2월 10일 (일) 개이고 치웁다.

浦川의 조선殉敎史를 읽엇다.

믿는 바에 殉하여 죽엄과 慘刑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極限의 참음, 참을성을 보인 데 대해서 저절로 머리가 숙으러진다. 더욱이 그토록 용감하고 苦難을 잘 견듸어난 사람들이 우리 조선사람이고 또 年代도 그리 멀지 아니한 사람들임을 생각할 때 적이 마음 든든하게 녁여진다. 그러나 所信에 忠하는 것은 좋다더레도 盲信的이고 고집불통임은 사실이며 宗敎가 理性的인 反省 없이 牢信될 때는 迷信과 조곰도 다름이 없고 그 弊害도 더하면 더하지 조곰도 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전에 徐廷夏 씨가 찾아왓다.

 

2월 11일 (발행)

 

2월 12일

아침에 와서 出勤簿에 도장을 찍으려니 내 名簿가 없다. 옆에 金周仁 군이 敎務課로 옴겨갓다고 일깨워 주므로 辭令도 주지 않고 出勤簿부터 뜯어고치는 연합회의 행사를 욕해주엇다. 그러나 1월 말일 附의 發令이라니 인제 움즉여야 하겠다. 여러 달 동안 潛稱 指導과장 노릇 한 某君에게는 一刻이 如三秋일 것이다.

이제 數月 동안 신세를 진 指導課를 물러나야 하니 그 동안 함께 지낸 몇 사람의 푸로필이나 그려볼까.

새로 지도과장이 된 金周仁 군. 자신만만한 타잎이나 좀 잘난 체하는 것이 험이랄까. 함께 거리를 걸을나치면 하도 稚劣한 이론으로, 세상 일은 모다 내 혼자 아노라 하는드시 끗없이 지껄이므로 나는 듯는 척 마는 척하다가 내종에 딴전을 붓치고 만다. 그러므로 그와 同行이 되면 골치 앞을 건 각오해야 한다. 年前에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江藤隆三이란 創氏改名한 명함을 披력하고 姓名을 철저하게 고처야 한다고 得意然하게 설명을 하나 세월이 세월이므로 나는 그 아니꼬운 說敎를 謹聽하지 않을 수 없든 쓰듸쓴 經驗이 아직도 새론대 그는 또 이지음 철저한 愛國者然 한다. 나는 잊어도 좋은 것을 잊지 못하는 내 기억력을 원망할 땨름이다. 그러나 바탕이 총명한 사람이니 인제 좀 더 나이나 들고 충분한 自己省察力이 생기면 훌융한 일꾼이 될 줄로 생각한다.

새로이 副參事가 된 崔英植 씨. 제주도 출신. 대단이 표독스럽고 예의를 모른다는 것이 部內의 定評이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제주 말을 聯想한다. 金周仁 군과 正面 衝突이 있어서 과장회의의 決議로 나에게 斷乎한 처치를 해달라는 요망이 金周仁 군으로부터 있엇는데 새로이 副참사로 登場한 것은 意外이다. 별관에 있을 땐 오정 전에 출근하는 일이 별로 없엇는데 이지음은 그레도 제 시간에 나와서 일을 손에 잡고 잇는 것이 다행이다. 전에 同僚로 잇든 某가 物資營團으로 가서 不次 昇進한 것을 못내 羨望하는 눈치이든 그이므로 이번 昇格을 契機로 좋은 비지네스맨이 될 줄 믿는다. 그리고 그는 또 私생활에 있어서 우리들의 좋은 愛國班長이다.

尹錫範. 나이 40을 넘었을 것 같다. 조합 副理事로도 있었으나 子女의 敎育을 위해서 서울 살님을 한다고. 이번에 副참사 못 된 것을 대단이 유감으로 녁이는 것 같다. 그러나 비지네스맨으로 그리 能率的이 아닌 것 같다. 우리 敎務課에 오겟다니 앞으로 두고 보아야 할 일.

李壹鉉. 해방 前에 朝金聯을 떠낫다가 月前에 새로이 복직한 분. 잘 알 수는 없으나 그리 能動的인 事務員이 못 될 것 같다.

成夏鏞. 김주인 군이 데리고 온 사람. 주인 군의 人品으로 미루어 생각할 수밖에 더 알 길이 없다.

金容穆. 내가 데리고 온 사람이지만 明敏한 反面 좀 너무 약지 않을까 한다. 鳳陽 있을 때도 性質이 좀 팩하다는 말이 있엇다.

河又榮. 마음씨는 무등 좋으나 머리의 움즈김이 敏活하지 못함이 흠이랄까 사람이 좀 흐리멍덩한 편이다.

朴時雨. 여기 給仕로 다니면서 善隣상업 夜間部에 通學한다고 한다. 어정어정하고 세월만 보내는 타잎이다.

사람은 너무 가까이 지내면 長点보다도 그 欠点이 많이 눈에 뜨이는 법이다. 한 課에 있으면서 보이는 대로 적으니 이러하나 모다 水準 以上의 좋은 사람들임에는 틀님없다.

오후엔 調査課의 崔씨와 함께 西江의 농장을 보러 갔다. 新舊 농장을 세밀히 檢分하고 車XX, 其他의 農夫들에게 앞으로 일해 나갈 指針을 설명하엿다.

 

2월 15일

그저께 저녁부터 자리에 누어 熱이 사뭇 오르므로 어제 성모병원 의사를 청해다 주사를 맞고 熱은 이내 가시었으나 四肢가 쑤시고 기운이 진해서 이러날 수가 없다.

오늘은 尹錫範 씨가 교무과 豫算案을 가지고 왓다가 가서 漢藥을 지어 보냈으므로 그걸 대려먹다.

 

2월 16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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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