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20. 09:34

 

잠에서 깨어 잠깐 자리에 누운 채 수습한 꿈의 기억은 한 장의 추상화처럼 형체는 희미한데 인상은 뚜렷했다.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가까이 느끼는 어떤 사람의 일을 구경하는 장면이었다.

 

젊은 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원숙한, 재능보다 품성에 근거한 名士의 풍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둘러싼 일 몇 가지가 연속해서 나타났는데, 기억을 더듬는 동안 다른 장면들은 흐려져 사라지고 한 장면만 남았다. <사기> "유협열전"에 나올 만한 장면이다. 郭解 이야기의 한 대목이 모델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의 이름을 모르겠으니 "곽해"라 해둔다.

 

곽해가 존경하는 위 연배의 명사 한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이 곽해를 오해하고 서운하게 대하는 일이 있었다. 곽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욕을 당했다며 맞설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곽해가 벗으로 대하는 스님 한 분, 어떤 일에도 움직이지 않는 조용한 분이 나서서 "무슨 오해가 있는지 내가 가보겠소." 하고 일어서 나가니 곽해는 빙긋이 웃으며 전송하고 사람들에게 스님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스님이 저쪽 집에 가서 노 선생 만날 것을 청했지만 그 문인들은 스님이 곽해에게서 온 것을 짐작하고 막았다. 막는 이들이 누구인지 스님이 묻자 수제자가 이름도 밝히지 않으며 "우리는 이 댁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 우리에게 남기세요." 했는데 스님은 이름 밝히지 않는 실례를 따지지 않고 자기 이름을 밝히며 "저는 곽해를 대신해서 선생님을 뵙고자 왔는데 지금 뵙지 못하니 저든 곽해든 선생님 편리하실 때 다시 와 뵙도록 하겠습니다." 하고는 돌아서서 나갔다.

 

수제자가 스승에게 알렸다. "곽해가 보낸 사람이 왔는데, 뜻밖에 아무 조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제가 이름도 밝히지 않았는데 실례를 따지지 않고 바로 조용히 돌아갔습니다." 스승이 대답했다. "네가 배울 사람이 나 하나만이 아니구나. 곽 선생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인 것 같으니 네가 예물을 가져가 내 경의를 전해다오."

 

생각이 높으면 까다롭기 쉽다.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면 일이 이뤄지지 않는다. 곽해와 스님 사이를 출발점으로 신뢰가 확산되는 과정에 품성의 중요성에 대한 내 생각이 비쳐져 나타난 꿈 같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어제가 몽양 선생 기일이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어제 추모식에는 안 갔지만 그제 심포지움은 방청했고 끝난 뒤에 식사와 입가심을 함께 하며 몇 분과 이야기 나눌 시간을 가졌다. 그 때문에 몽양 선생이 내 마음속에 어른거리고 있다가 곽해 비스무리한 모습으로 꿈에 나타난 것이었을까?

 

생각해 보니 그럴싸하다. 그저께 들은 이야기 중 새로운 것 하나가 선생을 그린 웹툰 제작 계획이다. 학술적 연구가 실체를 충분히 세울 만큼 쌓여 있는 이제, 그것을 바탕으로 선생의 모습을 대중에게 확산하려는 노력은 내년의 70주기를 앞두고 적절한 기념사업 방향이라고 나도 동의해 마지 않는다. 웹툰 이야기가 마음속에 남아 떠돌고 있어서 선생의 캐릭터를 그려보려던 자취가 꿈속에서 드러난 것 같기도 하다.

 

Posted by 문천

"그러니 우리 미국인들이여, 국가가 그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보다 그대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를 먼저 물으시오.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어렸을 때는 내 귀에도 케네디 대통령 취임사(1961. 1)의 이 말이 멋있게 들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나 같은 10대 소년은 그렇다치고, 당시의 어른들에게도 이 말의 변태적 의미가 거슬리지 않았단 말인가? 이런 국가파시즘 관념이 "자유진영" 영도자의 감동스러운 말씀으로 통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세상이 많이 좋아지기는 좋아졌다.

 

사드 배치를 놓고 시끄럽다 보니 케네디 생각이 나서 관련 사실을 "Wikipedia"에서 한 차례 훑어보았다. 핵전쟁 위협과 관련된 오판을 열심히 했던 인물이라서 생각나는 거다.

 

1957년 10월 소련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호 발사에 미국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핵전쟁의 양대 무기는 폭탄 자체와 운반수단이다. 폭탄에서는 미국이 앞섰으나 격차가 줄어들어 왔다. 그런데 이제 운반수단에서 소련이 확연한 우위를 보여준 것이다.

 

가상적의 위력을 과장해서 국민을 선동하는 싸구려 정치인은 어디에나 있다. 당시 미국에서 이 '안보 장사'를 제일 열심히 해먹은 것이 케네디였다. 그는 1958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미사일 격차(missile gap)"란 말을 만들어내 톡톡히 재미를 보고, 2년 후 대통령선거에 다시 들고 나왔다. 아이젠하워 공화당 정부의 나약한 군사정책 때문에 미국이 군사적 열세에 몰렸다는 주장이었다.

 

소련은 미국인의 히스테리 반응을 즐겼다. 군사력을 부풀려 선전함으로써 서방진영을 위축시키고 공산진영을 고무할 수 있었다. 흐루시초프는 "우리는 소세지 만들듯이 미사일을 만들어요." 능청을 떤 일도 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U-2기를 이용한 치밀한 정찰로 미사일 격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찰활동이 비밀이었기 때문에 정찰 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 없었다. 1960년 7월 민주당 후보 케네디를 초청해 합참의장, 전략공군사령관, CIA국장의 브리핑으로 비밀 정보를 제공했지만 케네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케네디가 당선된 몇 달 후 미사일 격차는 오히려 미국 측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렇게 없는 위기를 만들어 안보 장사를 해먹은 케네디가 1962년 가을 '쿠바 미사일 위기'로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은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이치일까?

 

캐나다, 멕시코와 함께 미국에서 제일 가까운 이웃나라인 쿠바의 1959년 공산화는 세계대전에서도 본토의 위협을 거의 겪지 않은 미국인에게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케네디 취임 직후인 1961년 4월 쿠바를 침공하려던 "피그 만 사건"의 망신스러운 실패 이후에도 쿠바에 대한 미국의 야욕은 "몽구스 작전"의 형태로 계속되었다. 1961-75년 15년간 연 5천만 달러 예산의 이 작전이 계속되었다고 1989년 노엄 촘스키가 폭로한 바 있다. 2006년 영국의 한 텔레비전 특집에서는 CIA에 의한 카스트로 암살 시도가 638회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카스트로 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케네디 정부의 집요한 시도 앞에서 1962년 5월 카스트로는 흐루시초프와 소련 미사일 쿠바 배치에 합의했다. 10월까지 배치가 진행되어 실전 단계에 접근했을 때 미국은 비로소 이 사실을 확인했다. U-2기 정찰을 통한 상황의 완전한 확인이 케네디에게 보고된 것이 10월 18일이었다고 한다.

 

미사일 쿠바 배치는 소련에게 엄청난 전략적 이익이었다. 소련의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은 아직 개발 단계여서 겨우 4-5기 만들어 놓았지만 실전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 미국은 "미사일 격차" 히스테리를 통해 소련의 10배가 넘는 미사일과 핵탄두를 만들어놓고 최근에는 터키와 이탈리아에까지 배치해 놓고 있었다. 쿠바 배치를 통해 균형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었다.

 

소련 미사일의 쿠바 배치에 대한 조치로 케네디 정부가 우선적으로 검토한 대책은 침공이었다. 피그 만 식으로 깨작거리는 게 아니라 정규전으로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쿠바군이나 이미 배치된 미사일의 반격은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제법상 명분이 없고, 따라서 소련이 유럽에서 펼칠 반격에 대응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10월 28일 케네디와 흐루시초프 사이에 합의가 이뤄져 위기를 종식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쿠바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사드 배치라는 문제를 앞에 놓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살펴볼 점이 있다.

 

위기가 증폭 과정에 있던 10월 7일 유엔총회에서 도르티코스 쿠바 대통령의 연설 중 이런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공격을 받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지킬 것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스스로를 지킬 충분한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득이한 무기, 우리가 갖추고 싶지 않았던 무기, 쓸 일이 없기를 바라는 무기를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그 무기를 쓸 경우 쿠바가 잿더미가 될 것을 쿠바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쿠바가 미국의 침공을 받으면 소련은 쿠바를 버리고 유럽, 특히 서베를린에서 대가를 취하려 할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카스트로가 미사일 배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아서 소련 측이 설득에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럼에도 쿠바가 미사일 배치를 받아들인 것은 "울며 겨자 먹기"였다. 성립한 지 3년이 안 된 정권을 무너트리려고 막강한 미국이 체면 가리지 않고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서 잿더미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미사일 배치를 허용했고, 결국 미국이 쿠바 침공을 획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중국 속담에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는 말이 있다. 사드 배치는 그것을 싫어하는 세력이 이 땅을 공격할 동기를 만들어주는 짓이다. 1962년의 쿠바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경우 미국의 침공을 피할 수 없다는 절박한 조건 때문에 소련 미사일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지금의 한국에게 그런 절박한 조건이 없다면, 사드 배치는 정말 위태로운 불장난일 뿐이다. 전자파 갖고 옥신각신 하는 것은 집에 불을 지르면서 너무 더울까 걱정하는 꼴이다.

 

Posted by 문천

 

김진공 선생과 대화를 튼 것이 지난 2월, 막 나온 <베이징 컨센서스>를 보내주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 왔을 때였다. 중국에서 나오는 좋은 글을 꾸준히 옮겨 내는 역할을 마음속으로 높이 평가하던 터라 반가웠고, 만나서 이야기 나눌 기회도 있기를 바랐는데, 지난 주에야 저녁식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함께 작업을 많이 하는 숭실대 공상철 선생도 함께였다.

 

그리고 막 나온 책 <여덟 번의 위기>를 보내 왔다. 원톄쥔의 글을 더 볼 수 있게 되어 반갑다. 프레시안 기고를 할 때였다면 이 책의 소개글도 그리 보냈을 텐데, 이 책에 관한 생각은 이 블로그에나 올려야겠다. 마침 잘된 일이기도 하다. 내가 중시하는 생각이 많이 담긴 책이라서 한 차례 소개글로는 어차피 아쉽다. 읽어 나가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몇 차례에 걸쳐 올리는 편이 낫겠다.

 

먼저 목차부터 옮겨놓는다. 내용을 꽤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친절한 목차다.

 

서론(36)

 

1장. 발전의 함정과 중국의 경험

1. 외자와 외채의 시각으로 분석한 '중국의 경험'(47)

(1) 중국은 여타 개발도상국과 무엇이 다른가?(48)

(2) 중국의 주기적 경제 위기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57)

2. 위기 해소라는 시각에서 본 중국 발전의 지속가능성(62)

(1)근래 거시적 환경의 새로운 변화(64)

(2) 농촌의 사회경제적 조건의 새로운 변화(69)

(3) 위기의 추세와 정책 제안(73)

 

2장. 1958-1976: 외자와 외채로 인한 공업화 초기 세 번의 위기

1. 제1차 외자 도입의 배경: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지정학적 변화(87)

2. 위기 1: 1958-1960년, 소편의 투자 중단으로 중국에서 벌어진 일(105)

3. 위기 2: 1968-1970년, '삼선 건설' 중의 국가전략 조정과 경제 위기(122)

4. 제2차 외자 도입과 구조조정의 배경: '43방안'에서 '82방안'까지(136)

5. 위기 3: 1974-1976년의 마지막 상산하향(142)

 

3장. 1978-1997: 개혁개방 이후 세 번의 내발적 경제 위기

1. 위기 4: 1979-1980년, 개혁개방 이후 첫 번째 경제 위기(159)

(1) 개혁개방 이후 첫 번째 경제 위기의 특징(161)

(2) 1980년 경제 위기의 도시 지역 '경착륙'과 '삼농'에 의존한 위기 극복(173)

2. 위기 5: 1988-1990년, 개혁개방 이후 두 번째 경제 위기(193)

(1) 1988-1990년 경제 위기의 특징과 내재적 메커니즘(193)

(2) '삼농'으로의 비용 전가와 '농민공 붐'(203)

3. 1988-1994년 제3차 외자 도입의 배경과 목표: 수출을 통한 외화벌이(212)

4. 위기 6: 1993-1994년, 개혁개방 이후 세 번째 경제 외기와 외향형 경제로의 전환((225)

(1) 개혁개방 이후 세 번째 경제 위기의 내재적 메커니즘과 특징(226)

(2) 도시와 농촌이 공동 분담한 1993-1994년의 위기 비용(241)

 

4장. 1997년과 2008년에 발생한 두 번의 '외래형' 위기

1. 현상의 귀납: 60년 동안의 네 차례 외자 도입이 불러온 여덟 번의 위기(268)

2. 위기 7: 1997년 동아시아 금융 위기의 대응조치와 그 영향(272)

(1) 위기의 근원의 변화: 왜 외래형 위기인가(273)

(2) 외래형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개입(282)

(3) 이번 위기가 삼농과 삼치三治에 미친 영향(305)

3. 1997-2008년 제4차 외자 도입: 국내외 '생산능력 과잉'의 충돌(318)

4. 위기 8: 2008년 금융 위기의 대응조치와 그 영향(331)

(1) 위기 발생 이전의 국내 거시적 환경(331)

(2) 2008년 위기의 '연착륙'에서 '민생신정'의 역할(343)

(3) 2008-2009년: 제2차 외래형 위기 발생 후 중국의 대응조치(351)

(4) 두 차례 외래형 위기의 대응 환경과 조건 비교(357)

 

중국 및 세계의 주요 사건(363)

저자 인터뷰: 원톄쥔이 돌아왔다!(391)

후기(415)

옮긴이의 말(418)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