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9일자(책 수록)로 1945년의 일기가 끝나고 한 달간 끊겼다가 1946년 1월 30일자로 다시 시작된다. <조선역사> 집필 기간 동안 일기를 중단한 것이다. 1월 30, 31일자, 2월 1, 2일자는 책에 수록되었고 2월 3일자부터 수록되지 않은 일기가 보인다. 음력 그믐날인 2월 1일 서울을 출발해 설날 차례가 지난 후에 영천군 청통면의 집에 도착했다. 대구 출장을 겸해 귀향한 길이었다. 2월 16일자(책 수록) 이후 한 달간 일기가 다시 중단되므로 그 앞까지 여기 올린다.

 

 

12월 29일, 1월 30, 31일, 2월 1, 2일 (발행)

 

2월 3일

어제 오늘 치웁다. 사람들은 立春치위라고 한다.

하도 고단해서 아침 먹고 한참 누웠다가 열한 시 가까이 집을 떠낫다.

瓦村마을 어떤 바람벽에는 아직도 “[나중에 입력]” 하는 삐라가 남어잇고 욱이가 하던 말에

“촌 백성이 뭘 압니꺼

가마니 짜라카만 짜지요

공출 대라카만 대지요“

하든 거와 비추어 보아서 일본제국주의의 포학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와 비슷한 이야기.

대구사람들이 까딱나이까 하는 말을 잘 쓰기에 그 유래를 물엇더니

어떤 청년이 전쟁 중에 강제징용으로 일본 어느 탄광으로 끌려가서 일하고 잇는데 얼마 후에 그 아버지가 또한 강제징용으로 끌려가서 공교로이 한 탄광 같은 일터에서 일하게 되엇다. 그레서 부자가 한 도록고를 앞뒤로 끌고 밀고 하는 중에 늘 서로 주고 받는 말이 아들은 “아버지 조심하이소” 하면 그 아버지는 “오냐 너는 까딱나이까” 하므로 옆에 사람들이 이 問答을 듯고 하도 우수어서 이야기가 되엇다고 한다.

낮차로 대구 드러와서 理財과장 姜信默 씨 댁에서 저녁 먹고 지부장 金英喜 씨 댁에서 잣다. 참사 鄭庚得 씨, 申鉉守 군과도 姜씨 댁에서 함께 소주를 먹엇다.

경북은 공산주의 세력이 지배적인 듯하고 그러므로 有象無象들이 急進 공산주의자가 되어서 生硬한 이론을 휘둘르는 것이 우수웁다. 이 느낌은 이튼날 宴席에서 崔某를 만나서 더욱 그러하였다.

 

2월 4일 흐리다

아침에 支部로 나갓더니 林興植 씨가 내려와 있엇다.

嶺南일보, 民聲일보, 大邱시보의 세 신문사에 인사 다니고 밤에는 各社의 간부들을 불러다 食道園에서 宴會를 베푸럿다. 밤에는 申군의 집에서 자다.

 

2월 5일 개이다

道廳 간부들에게 인사하고 美人 知事에게 금융조합 機構에 대한 설명을 하엿다. 학무과에 가서 金思燁 군과 조선兒童會의 金三出 군을 만낫다.

오후에는 남산정의 큰 누님 댁엘 찾아가 뵈입고 저녁에는 대구고보 옆의 朴時憲 군 댁에 가서 저녁 먹다. 鄭熙俊 군도 오랜만에 만나다.

 

2월 6일 (발행)

 

2월 7일 따뜻하다.

아침에 鄭庚得 씨와 여러 가지로 時事문제에 관한 논의를 하엿다. 좌익 편향이든 이곳 여러 동무와 며칠동안 논의를 거듭한 결과 차츰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점심은 남산정 누님 댁에서 먹고 저녁은 崔燉洪 군의 초대를 받고 다시 姜信默 씨 댁에 가서 酒果를 먹엇다.

子正에 떠나는 급행차를 탈려고 停車場엘 갓더니 차가 네 시간이나 延着되어서 대구역에서 거진 하룻밤을 새엇다. 崔文煥 군과 동행. 朴時憲 군과 鄭正容 형제의 배웅이 있엇다.

 

2월 8일 (발행)

 

2월 9일 개이고 치웁다.

아침에 성모병원엘 가서 기봉이와 안해와 나 세 사람이 모다 牛痘를 맞엇다.

대학에 가서 李本寧 군을 만낫다.

오후에 吳斗煥 군 母子가 찾아왓다.

 

2월 10일 (일) 개이고 치웁다.

浦川의 조선殉敎史를 읽엇다.

믿는 바에 殉하여 죽엄과 慘刑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極限의 참음, 참을성을 보인 데 대해서 저절로 머리가 숙으러진다. 더욱이 그토록 용감하고 苦難을 잘 견듸어난 사람들이 우리 조선사람이고 또 年代도 그리 멀지 아니한 사람들임을 생각할 때 적이 마음 든든하게 녁여진다. 그러나 所信에 忠하는 것은 좋다더레도 盲信的이고 고집불통임은 사실이며 宗敎가 理性的인 反省 없이 牢信될 때는 迷信과 조곰도 다름이 없고 그 弊害도 더하면 더하지 조곰도 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전에 徐廷夏 씨가 찾아왓다.

 

2월 11일 (발행)

 

2월 12일

아침에 와서 出勤簿에 도장을 찍으려니 내 名簿가 없다. 옆에 金周仁 군이 敎務課로 옴겨갓다고 일깨워 주므로 辭令도 주지 않고 出勤簿부터 뜯어고치는 연합회의 행사를 욕해주엇다. 그러나 1월 말일 附의 發令이라니 인제 움즉여야 하겠다. 여러 달 동안 潛稱 指導과장 노릇 한 某君에게는 一刻이 如三秋일 것이다.

이제 數月 동안 신세를 진 指導課를 물러나야 하니 그 동안 함께 지낸 몇 사람의 푸로필이나 그려볼까.

새로 지도과장이 된 金周仁 군. 자신만만한 타잎이나 좀 잘난 체하는 것이 험이랄까. 함께 거리를 걸을나치면 하도 稚劣한 이론으로, 세상 일은 모다 내 혼자 아노라 하는드시 끗없이 지껄이므로 나는 듯는 척 마는 척하다가 내종에 딴전을 붓치고 만다. 그러므로 그와 同行이 되면 골치 앞을 건 각오해야 한다. 年前에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江藤隆三이란 創氏改名한 명함을 披력하고 姓名을 철저하게 고처야 한다고 得意然하게 설명을 하나 세월이 세월이므로 나는 그 아니꼬운 說敎를 謹聽하지 않을 수 없든 쓰듸쓴 經驗이 아직도 새론대 그는 또 이지음 철저한 愛國者然 한다. 나는 잊어도 좋은 것을 잊지 못하는 내 기억력을 원망할 땨름이다. 그러나 바탕이 총명한 사람이니 인제 좀 더 나이나 들고 충분한 自己省察力이 생기면 훌융한 일꾼이 될 줄로 생각한다.

새로이 副參事가 된 崔英植 씨. 제주도 출신. 대단이 표독스럽고 예의를 모른다는 것이 部內의 定評이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제주 말을 聯想한다. 金周仁 군과 正面 衝突이 있어서 과장회의의 決議로 나에게 斷乎한 처치를 해달라는 요망이 金周仁 군으로부터 있엇는데 새로이 副참사로 登場한 것은 意外이다. 별관에 있을 땐 오정 전에 출근하는 일이 별로 없엇는데 이지음은 그레도 제 시간에 나와서 일을 손에 잡고 잇는 것이 다행이다. 전에 同僚로 잇든 某가 物資營團으로 가서 不次 昇進한 것을 못내 羨望하는 눈치이든 그이므로 이번 昇格을 契機로 좋은 비지네스맨이 될 줄 믿는다. 그리고 그는 또 私생활에 있어서 우리들의 좋은 愛國班長이다.

尹錫範. 나이 40을 넘었을 것 같다. 조합 副理事로도 있었으나 子女의 敎育을 위해서 서울 살님을 한다고. 이번에 副참사 못 된 것을 대단이 유감으로 녁이는 것 같다. 그러나 비지네스맨으로 그리 能率的이 아닌 것 같다. 우리 敎務課에 오겟다니 앞으로 두고 보아야 할 일.

李壹鉉. 해방 前에 朝金聯을 떠낫다가 月前에 새로이 복직한 분. 잘 알 수는 없으나 그리 能動的인 事務員이 못 될 것 같다.

成夏鏞. 김주인 군이 데리고 온 사람. 주인 군의 人品으로 미루어 생각할 수밖에 더 알 길이 없다.

金容穆. 내가 데리고 온 사람이지만 明敏한 反面 좀 너무 약지 않을까 한다. 鳳陽 있을 때도 性質이 좀 팩하다는 말이 있엇다.

河又榮. 마음씨는 무등 좋으나 머리의 움즈김이 敏活하지 못함이 흠이랄까 사람이 좀 흐리멍덩한 편이다.

朴時雨. 여기 給仕로 다니면서 善隣상업 夜間部에 通學한다고 한다. 어정어정하고 세월만 보내는 타잎이다.

사람은 너무 가까이 지내면 長点보다도 그 欠点이 많이 눈에 뜨이는 법이다. 한 課에 있으면서 보이는 대로 적으니 이러하나 모다 水準 以上의 좋은 사람들임에는 틀님없다.

오후엔 調査課의 崔씨와 함께 西江의 농장을 보러 갔다. 新舊 농장을 세밀히 檢分하고 車XX, 其他의 農夫들에게 앞으로 일해 나갈 指針을 설명하엿다.

 

2월 15일

그저께 저녁부터 자리에 누어 熱이 사뭇 오르므로 어제 성모병원 의사를 청해다 주사를 맞고 熱은 이내 가시었으나 四肢가 쑤시고 기운이 진해서 이러날 수가 없다.

오늘은 尹錫範 씨가 교무과 豫算案을 가지고 왓다가 가서 漢藥을 지어 보냈으므로 그걸 대려먹다.

 

2월 16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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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