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서>로 출간된 아버지 일기의 대부분, 1950년 이후의 내용은 대형 원고지의 묶음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것을 연전에 이화여대 도서관에 기증했다. 한편 1945년 11월 말에서 1946년 4월까지 몇 달 간의 일기는 공책 한 권에 적혀 있는데 원고지(24자 12행) 80여 장을(양면 인쇄) 양장으로 몪은 고급스러운 공책 측면과 속 표지에는 "隨想"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소화 10년 동경 三省堂 발행으로 뒤쪽 속 표지에 표시되어 있다. 정가는 90전.

 

이화여대에 기증할 때 이 공책을 찾지 못해 뒤쪽 원고만 기증했다. 그런데 연길 집에 3년 만에 와 보니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 하루는 이 공책을 다시 들춰보며 지냈다.

 

예전에 봤던 기억대로 일기의 첫 항목이 "11월 29일 續"으로 되어 있다. 1945년 11월 29일 일기를 아마 이 비슷한 공책에 적다가 내용이 넘쳐 새 공책에 계속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격변의 시대를 역사학도의 눈으로 기록하는 이 일기는 그 전에 시작된 것이다. 언제였을까. 아마 해방과 함께 시작한 것이 아닐까. 봉양 금융조합 이사로 근무하면서 해방 직후의 상황을 기록한 앞 부분을 잃어버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 앞에서> 책과 대조해 보니 빠트린 날자가 꽤 있다. 전쟁 발발 이후는 아무것도 빼지 않고 책에 담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 이 부분에서는 그 점을 느슨하게 했다. 등장 인물 입장을 고려하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빠트린 날자가 이제 보니 생각보다 더 많다.

 

당시 빠트렸던 이유를 이제는 별로 개의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책에 담기지 못한 일기 내용을 이 블로그에라도 올려놓으려 한다. 오늘은 우선 책 속의 일기가 시작하기(12월 1일) 전인 11월 29, 30일 일기 내용을 올린다. 속 표지 이면에 적혀 있는 노래 가사를 앞에 붙인다.

 

 

한글 노래

 

세종임금 한글 펴니 스물여듨 글짜

사람마다 쉬 배워서 쓰기도 편하다.

슬기에 주린 무리여 한글 나라로

모든 문화 그 근본을 밝히러 갈까나.

 

온 세상에 모든 글씨 견주어보아라.

조리 있고 아름답기 으뜸이 되도다.

오랫동안 무친 옥돌 갈고 닦아서

새 빛 나는 하늘 아래 골고루 뿌리세.

 

 

11월 29일 續

 

학생들이 애국운동에 挺身하겠다는 그 기개는 좋으나 그러나 국가사회의 문제는 생각한 만치 그리 수얼하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요, 그 때문에 앞날에 이 땅을 움즉여 나갈 주축이 될 학생층이 硏學의 기회를 놓처버린다면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근시안적으로 목전의 事象에 현혹하지 말고 민족의 백년대계를 심사숙려함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일이다. 진실로 조국의 광복과 동포의 행복을 염원할찐대 학생은 물론이어니와 농민이거나 노동자이거나 학인이거나 정치가이거나 간에 모다들 제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가는 한편 틈 있는 대로 부즈런이 공부하라.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과 딸들이 모다 한 자리에 모여서 가갸거겨를 외이라. 그리고 한글을 이미 깨친 사람은 또 높은 階段을 밟어 올라가라. 그리하여 書冊을 통하여 고금의 先覺들에게서 인생의 바른 길을 배우고 조국 재건의 옳은 방략을 드르라. 그러나 학문에의 길은 길고 먼 것이어서 일조일석에 얼는 무슨 보람을 바라는 것은 잘못이다. 그저 줄기찬 정성과 꾸준한 노력으로 십년을 하로같이 根氣 잇게만 나아간다면 자기도 모르는 새이에 보다 높은 경지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삼천만 하나하나이 모다 이러한 착실한 길로 자기향상을 지향한다면 우리들의 장래엔 광명이 빛일 것이다. 비단 우리들만의 다행에 끄치지 않고 인류문화의 진전에 큰 이바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11월 30일 4시 기상

 

개이다. 오랫동안 따뜻하던 날세가 오늘부터 갑자기 치워지다.

우연히 얻은 내 기침이 잘 멋지 않고 또 새벽에는 기봉이가 칭얼거리기에 오후엔 병원엘 나가보앗더니 公醫 曺씨가 청풍으로 가겟다고 짐을 묶는 중이엇다. 마침 면장 韓씨 新 면장 후보 朴달서 씨 번영회장 朴제훈 씨 등이 모이었으므로 만류해 보자고 제의해 보았으나 지방의 유력자들이 돈 끌어모으기에만 눈이 팔려서 의료시설 같은 복리사업엔 정신이 없는 것 같어서 여의케 될 것 같지 않다. 人無遠慮면 必有近憂란 말이 잇는데 그들의 근시안적인 태도는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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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