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한 선생이 오늘 아침 보낸 메일에서 이런저런 얘기 끝에 박현채 선생 말씀을 꺼냈다가 그분이 말년에 소설 쓸 생각을 하셨다는 얘기를 붙였다. 놀라운 이야기여서 "박현채, 소설"로 검색을 해보니 백기완 선생의 회고가 눈에 띈다. 단 두 분끼리의 <민족경제론> 제1회 출판기념회 기억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두 번째로 기억나는 대목이다.
“거 박 교수, <민족경제론>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좀더 대중 속으로 파고들려면 소설도 한번 써보는 게 어떻겠수. 논리적으로 다가서면서 아울러 정서적으로 다가서는 방법 말이외다.”
떡하니 이래 말을 했더니 박 교수의 반응이 이랬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을 한번 써봤으면 했었는데, 아주 내 속을 정통으로 치는구려. 하지만 소설이란 재주도 있어야 하고 또 사물을 볼 때 정서적으로 접근하는 끼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허, <민족경제론>의 겉만 보질 말고 그 바닥을 치는 물살을 보시라니까. 그냥 이야기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정말 그런 것 같수?” http://blog.naver.com/tnt62sik/130000737210

 

박 선생 고심의 자취를 더 찾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학문을 포기하고 소설 생각 하는 마음과 통하는 뜻이 그분에게도 있었을 것 같다.

 

내가 과연 소설을 쓰게 될지는 한참을 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소설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진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마침 홍명희문학제 발표를 맡게 되어 그 의미를 파고들 계기가 되었는데, 세상에 내보내고 싶은 메시지가 벅찰 정도로 큰 것일 때 소설이라는 형식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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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홍명희가 생각한 "정치"는 근대국가의 정치와 다른 개념이었을 것 같다. 비교를 위해 내놓을 근대국가체제의 정치 개념으로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편리하겠다. 1919년 뮌헨대학 강연을 나중에 정리한 것인데 내가 직접 읽어본 것은 아니다. 마침 번역하고 있는 벨의 <The China Model>에 인용된 것만으로 웬만큼 참고가 되겠다.

 

베버의 이 글에서 제일 유명한 대목이 국가란 "어느 지역 내에서 물리적 힘의 합법적 사용을 독점하는 공동체"라고 한 도입부의 정의다. 이것부터 근대 국민국가의 특성을 반영한 정의다. 봉건적 전근대국가에서는 여러 층위의 권력이 포개져 있는 것이 정상이었다. 근대국가의 권력 독점 현상이 정치의 의미에도 차이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이 정의에 이어 권력의 정당성(legitimacy) 이야기가 나오는데, 전통적 정당성, 카리스마적 정당성, 법적 정당성의 세 갈래다. 베버는 강연의 중심 목적이 카리스마적 지배의 특성을 밝히는 데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선지자나 전쟁영웅, 또는 군중대회나 의회의 선동가가 보여주는 카리스마에 헌신한다는 것은 그 지도자가 소명을 타고난 지도자임을 인간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전통이나 법률 때문이 아니라 지도자를 믿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것이다. 그 지도자가 일시적 시운에만 의지하는 날라리가 아니라면 그는 자신의 소명을 위해 살고 사업에 몸을 바칠 것이다. 추종자와 협력자들의 헌신은 지도자의 인격과 그 특성들에 향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한 제도 하의 '정치'가 아니라 '리더십'의 일반적 특성이라 할 것이다. 사회의 움직임이 전통과 법률의 틀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 개인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는 것이 그 이치다. 치세에는 전통과 법률의 힘으로 사회가 돌아가기 때문에 영웅의 역할이 필요가 없다.

 

베버가 카리스마적 정당성을 중시한 것은 근대국가체제가 본질적으로 난세의 성격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君君 臣臣 父父 子子"의 전통적 원리가 인정되지 않는 것이 전근대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난세다. 기계적으로 평준화된 정치제도에는 그 자체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없고, 매 순간 겉으로 드러나는 힘에 휩쓸리게 되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난세 아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정치의 큰 변화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통해 일어나기 마련이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동아시아의 유교 정치사상에서도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유교 정치사상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도덕성에 압도적 비중을 둔다. 베버가 생각하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이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세상은 악마의 지배를 받는 세상인 만큼, 정치에 나서는 사람, 즉 힘과 권력을 수단으로 택하는 사람은 악마와 계약을 맺는 것이며, 그의 행동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악한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는다는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가 많다.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치의 미성년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영혼이든 다른 사람의 영혼이든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 구원을 정치의 길에서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는 다른 종류의 목적을 추구하는 활동이고 폭력을 통해서만 결과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버는 이 세상이 "악마의 지배"를 받는다는 전제 위에 정치를 본다. 유교사상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일시적으로 빠져 있는 난세를 벗어나 치세로 돌아가는 데 목적을 두는 것이기 때문에 평시의 권력자보다 도덕성에 더 투철해야 하는 것인데, 베버가 생각하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악마의 지배", 즉 난세의 논리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를 "직업"(vocation)의 의미로 제한해야 하는 것이다. 유교사상에서 정치의 주체인 군자(君子)가 "不器"의 존재인 것과 대비된다. 군자는 밥 먹고 숨 쉬는 것까지 모든 일을 법도에 맞추며 살았고, 그것이 바로 정치였다. 인민을 이롭게 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지만 방법에서 義와 理를 등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義理를 등지면 작은 이익 때문에 큰 이익을 해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근대국민국가에서는 "폭력을 통해서만 결과를 얻는", 미시적 득실에 몰두하는 전문가들에게 정치를 맡기게 되었다.

 

홍명희의 세대에서 선비 정신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1930년대까지도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거부하고 난세를 벗어날 희망을 지키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은 계속 험해져서 그들이 이승에 있는 동안 치세 회복의 기미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이제 난세의 원리가 무너져 가는 것을 느끼며, 내가 태어날 때부터 길들여졌던 난세의 원리를 벗어나기 위해 선현들에게 배울 것을 찾는다. 특히 지금의 난세가 닥치고 있을 때 그 앞머리를 겪은 분들의 경험과 궁리에서 참고할 것이 특히 많지 않을지.

 

Posted by 문천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리고 민주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의 중간파 노선이 좌절되고 말았기 때문에 '정치가'로서 홍명희의 면모는 중시받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치'의 뜻을 너무 좁게 보는 근대적 세태도 작용하는 것 같다. 세상의 나쁜 일을 줄이고 좋은 일을 늘이려는 노력으로서의 원론적 '정치'를 생각한다면 정치적 의지를 빼고 홍명희를 생각하기 어려울 것 같다.

 

홍명희의 최대 업적은 물론 <임꺽정>이다. 그 집필에 매달려 40대 10년을 지냈다. 그의 정치적 의지를 살피는 데 이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의 성격을 논하는 데 제일 많이 인용되는 작가의 말이 이런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에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지요. 그것은 조선문학이라 하면 예전 것은 거지반 支那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사건이나 담기어진 情調들이 우리와 유리된 점이 많았고, 그리고 최근의 문학은 또 歐美 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洋臭가 있는 터인데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조선 거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情調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情調"라는 말에서 정치적 의미를 찾아내는 논평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 말에 담긴 정치적 의미가 그 일생의 정치적 행보를 설명해 주는 것 같고, 그 의미에 비추어 본다면 그의 정치적 의지가 매우 강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홍명희는 23세 때 망국과 함께 부친의 자결을 겪었다. 2년 후 탈상하자 중국과 싱가포르에 가서 지내다가 1919년 귀국하자마자 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 그 후 언론계에서 일하다가 신간회 결성에 주역으로 나서는 한편 <임꺽정> 집필을 시작했다.

 

그 자신이 부친의 유언을 평생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만년에 술회했거니와, 홍명희가 부친의 뜻 살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을 것은 인지상정으로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의 1919년 귀국은 외부에서의 투쟁보다 내부에서의 정진이 합당한 길이라는 결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928년, 홍명희는 18년 전 부친이 돌아가실 때의 나이가 되었다. 모색을 마치고 행동에 들어가야 할 때였다. 이 때 그는 한편으로 신간회를 추진하면서 한편으로 <임꺽정> 집필을 시작했다. 신간회는 여러 사람이 어울리는 일이었으므로 한 사람 마음대로 될 일이 아닌 반면 집필은 혼자 밀고 나갈 수 있는 일이었다. <임꺽정>에 더 큰 비중을 두었을 것을 짐작한다.

 

부친은 "國破君亡, 不死何爲"란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뜻을 살리는 길은 나라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상해에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고 있을 때 홍명희가 귀국한 것은 밖에서 몸을 움직여 싸우는 것보다 안에서 마음을 움직여 할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닐까. 그 할 일이 9년 동안 좁혀져 <임꺽정>에 이른 것 아닐까.

 

정치의 본질을 묻는 자공의 질문에 "兵, 食, 信" 세 가지로 공자가 대답하는 대목이 <논어>에 있다. 셋 다 지키지 못할 때 어느 것을 버리느냐 묻자 "去兵"이라 대답하고, 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하고 묻자 "去食"이라 대답한다. "信"이 제일 근본이라는 것이다.

 

임금이 백성에게 "信"을 지키는 것이 나라 지키는 길이다. 그런데 임금이 없어지고 회복될 전망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백성 사이에 "信"을 세워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같은 민족공동체에 속한다는 소속감이 필요하다.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洋臭"의 얕은 맛에 현혹되어서는 "信"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조선의 "情調" 살리는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은 것이다.

 

<임꺽정> 집필은 "復國"의 인프라 작업이었다. 그 성과는 아직도 번듯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지금도 독자들에게 "복국"의 뜻을 심어주고 키워주고 있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어느 정치가보다도 한민족의 '복국'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