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한 국가의 정책 영향이 그 유권자집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미래 세대나 외국인처럼 투표권을 안 가진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민주주의 정치체제에는 이런 주변 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장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유권자집단과 주변 집단 사이에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일이 있으면 유권자집단의 입장이 관철되기 마련이다.

민주화의 한 가지 문제는 국가 정체성의 정치적 의미가 강화되어 이웃나라와 사이에 긴장을 늘리는 경향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역사가 오랜 사회에는 유권자집단 외부의 존재를 적대시해 온 더 긴 역사가 붙어 있다. 신체적 고문의 체계적 행사라는 극단적 인권 유린의 사례를 봐도 그렇다. 그런 일은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나쁜 정권에서나 행하는 것으로 우리는 보통 생각한다. 물론 가장 지독한 사례는 나치 독일 같은 악명 높은 정권에서 행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리우스 레잘리는 민주주의국가 중에도 고문을 합법화하거나, 준합법적 수사기법으로 인정하거나, 금지되어 있더라도 은밀히 체계적으로 자행해 온 나라들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민주국가에서는 적발이나 책임 문제를 피하기 위해 상처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문 기술이 특별히 개발되어 왔다. “오늘날 민주사회의 고문자들은 까무러칠 정도로 두들겨 패고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기술을 갖추고 있다.” 레잘리는 지난 2백 년간 민주사회에서 개발해 온 각종 깨끗한 고문의 예를 8백여 쪽 길이로 서술해 놓았다. 그중에는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과 베트남 주둔 미군이 사용한 전기고문도 있고, 이스라엘인들이 점령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에게 행한 자세(姿勢) 고문도 있다.

민주적 고문의 또 하나 특징은 외부자를 대상으로 체계적 활용이 되는 경향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시민권과 고문의 관계가 명시되어 있어서 노예, 외국인, 그리고 야만인에게만 고문이 시행되었다. 프랑스 같은 근대 민주주의국가의 경우 고문은 식민지나 전쟁 지역에서 먼저 시행된 다음 중심부로 번져 들어오는 일이 거듭되었다.

오늘날 민주국가의 고문 대상은 노예가 아니라 거리의 자식, 부랑자, 노숙자, 불법체류자 등 악한 존재로 인식되는 하층 집단이다.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집단, 민주제도를 통해 자기네를 대표해 주고 그 이익을 위해 투쟁해 줄 사람을 갖지 못한 집단이 민주국가에서 고문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때로는 대다수) 시민들이 자기네가 민주적 생활방식을 누리는 데 필요한 더러운 일을 환영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의할 때도 있다.

유권자 집단의 외부자 집단에 대한 고문보다는 가벼운 수준의 인권 침해는 훨씬 더 일상적으로 자행된다. (...)

그렇다 하더라도 유권자 집단의 눈치만 살피는 대표자들이 선택하는 비도덕적 정책에 외부자 집단이 손해 보기 쉽다는 사실이 민주주의의 존속에 치명적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선거민주주의의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는 치명적 문제는 선거권을 갖지 않은 어린이들과 미래 세대에게 불리하다는 점이다. 니콜라스 버그루언과 네이선 가델스가 말하는 소비자문화정치가 한 가지 문제다. 유권자들이 끊임없이 당장의 만족을 요구하고 장기적 구조개혁이나 고통스러운 정책에 참을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특정 집단 지원 예산과 공공 부채가 대책 없는 수준으로 팽창하는 것이다.

그리스는 표를 얻기 위해 대중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주려 하는 정치인들과 불가능한 것을 약속해주는 정치인들에게 투표하는 대중이 누구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듯이 서로 손잡고 돌아가는 잘못된 만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가장 큰 경제력을 가진 민주국가 미국과 일본이 격증하는 국가채무를 (일본의 경우 국가채무 규모가 경제 규모의 두 배를 넘는다.) 억제하기 위해 유권자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취해야 할 상황에 몰린다면 선거민주주의의 운명에 진정한 위험이 닥칠 수도 있다.

미래 세대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지구온난화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려면 수십 년에 걸친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데, 선거민주주의는 여러 세대 뒤의 사람들을 위해 지금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정책을 형성하기에 매우 부적합한 체제로 보인다. 철학자 팀 멀건이 그리는 무시무시하고도 그럴싸한 미래세계에서는 자원이 필요보다 부족하고 불안정한 기후조건 속에 인간의 삶이 늘 위태롭다. 생산적 역할을 담당할 수 없게 된 사람들, 중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생존이 허락되지 않는 세계다. 풍요로운 민주주의사회에서 후세에 대한 배려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빚어진 것이라고 멀건은 말한다.

이론상으로는 민주주의사회의 유권자들이 후세를 배려하는 정책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대 간 갈등이 현실로 나타나 (국가가 자기네 입맛을 맞춰주는 데 길들여진) 민주시민들이 미래 세대를 위해 상당한 현실적 희생을 요구받을 때는 세대 간 유대감이 충분히 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오스트레일리아의 탄소 부담금 제도 같은 온난화 방지 정책이 지금의 유권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으로 판명되자마자 포퓰리즘 정권에 의해 폐기되고 마는 것이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유권자들이 50년 후의 사람들을 위해 지금의 자기네 이익을 희생하고 나설 것을 기대할 길이 없다면, 11표의 원칙에 따라 지도자 집단을 선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뒤집어보지 않고서는 인류사회의 지속성을 보장할 길이 없는 것 아닌가?

 

Posted by 문천

언론의 자유가 엘리트 집단의 권력 남용을 폭로하는 데 효과가 있었을 것이고, “비교적 대등한 수준의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다양한 사회적 집단들의 출현으로 종래의 여러 공화국에 나타났던 빈-부 간의 심연을 메울 수 있는다원적 사회로 들어서고 있다는 생각도 건국 시조들의 마음에 위안을 주었을 것이다. 11표의 원칙으로 세워진 민주주의체제 안에서 부유층이 경제적 전횡을 저지를 염려는 극히 적을 것으로 여겨졌다. 사회경제적 차이를 인정하고 처리하고 반영하는 장치를 만듦으로써 부유층의 힘을 억제하려는 노력을 건국 시조들이 기울이지 않은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1835년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 위협으로 지적한 것은 오히려 빈곤한 다수가 정치권력을 써서 부유층을 수탈할 위험이었다. “이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국민의 다수는 재산을 가지지 않았거나 일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없을 만큼 재산이 적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보통선거권은 사회의 통치권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제도다.”

그 후 200년 동안 산업자본주의의 급속한 발달이 이뤄지고 그에 따라 부의 집중과 빈부 격차의 확대가 일어나게 될 것을 건국 시조들은 예상도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환경 보호, 무기 규제, 금융기관 통제 등의 이슈를 놓고 자금력과 조직력이 강한 소수 이해관계자들이 무력한 다수를 물리치고 자기네 입장을 관철시키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정치에 시간과 노력을 쏟을 여유가 없기 때문에 강한 상업적 또는 이념적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들이 공익에 부합하는 변화를 가로막거나 자기네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추진하는 등 정치과정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부유층이 자기네 이해관계를 분명히 파악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를 가질 때 이런 현상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정치에 대한 돈의 영향력은 오늘날 모든 민주주의사회의 골칫거리가 되어 있고, 미국은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심한 편이다. 2차 대전 직후 수십 년간 사회 전체가 번영을 누리던 시기와 달리, 지난 수십 년간 대다수 미국인은 극소수의 초부유층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져 왔다. “1979년부터 Great Recession 직전까지 최상위 1퍼센트가 총 가구소득의 36퍼센트를 거둬 갔다. 고용주 제공 의료보험, 연방 조세, 그리고 모든 정부 지원을 넣은 계산이다. (...) 2001년에서 2006년 기간의 경제 성장은 더욱 뒤틀려서 최상위 1퍼센트의 소득이 전체의 53퍼센트에 달했다.”

소득격차 확대의 원인으로 승자의 보상을 극대화시킨 기술 변화와 세계화가 흔히 지목된다. 찰스 A 쿱천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노동자의 소득을 감소시키는 1차적 원인은 전 지구적 경쟁에 있다.” 그러나 미국의 불평등은 다른 부유한 민주주의국가들보다 늘 빠르게 심화되어 왔다. 제이콥 S 해커와 폴 피어슨은 그 중요한 이유가 부유층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정부 정책이 바뀌어 온 데 있다고 주장한다. 기업과 금융 부문의 로비활동으로 인해 공무원들이 다수의 희생으로 소수의 이익을 가져오는 방향으로 미국 정치와 미국 경제의 규칙을 고쳐 써 오게되었다는 것이다.

세법에서 시작해 규제 완화, 회사 운영방법, 사회안전망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미 부유한 집단의 국부(國富) 점유율을 기록적 수준까지 높여주는 정책을 정부가 채택하도록 기업 측이 압력을 가해 왔다. 2008년 금융 공황 이후까지도 가장 책임이 큰 은행들의 정책결정자와 입법가에 대한 영향력은 계속되었고, 그 결과 연 수입이 5천만 달러를 넘는 개인의 숫자가 2008년에서 2009년 사이에 다섯 배로 늘어났다. 2009-2010년의 경제회복 과정에서 소득 증가의 93퍼센트가 상위 1퍼센트에게 돌아갔다.

늘어나는 부의 분배가 부유층에 집중된다 하더라도 빈부 격차의 확대가 그 자체로는 걱정할 일이 아니다.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소외계층의 운명이다. 존 롤스의 정의론에 따르면 소외계층에도 이득이 돌아가는 한 소득 격차는 문제꺼리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더 가난해지고 있다. 2012년 미국 통계청 보고에 따르면 빈곤층 비율이 2009년의 14.3퍼센트에서 16퍼센트로 치솟고 아동의 20퍼센트가 여기 포함된다고 했다.(1993년 이래 최악의 수준이다.)

빈곤층 중에서도 극빈층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2011년 정부 지원 빼고 하루 2달러 이하의 생계비를 쓰는 가구 수가 1996년에 비해 갑절로 늘어났고 280만 명의 아동이 여기 포함됐다. 간단히 말해서 문제는 초부유층이 더 부유해지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극빈층이 더 가난해지는 데 있는 것이다.

 

Posted by 문천

 

시민 중에서 진지한 정치적 토론에 익숙한 사람들, 자기 관점만이 아니라 다른 관점도 설명할 수 있는 지성을 갖춘 사람들, 높은 수준의 객관성 있는 정치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정치에 잘 참여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은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래서 유권자의 무지 문제에는 직설적인 대책이 필요한 것 같다. 유권자 교육. J T 켈리는 최근의 책에서 프레임이라고 하는 한 가지 인식상의 편향성이 정치적 행위에 끼치는 영향을 논했다. 그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서로 형태는 다르면서도 내용은 같은 표현이 정치적 결정에는 상당히 큰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프레임 효과 같은 인식상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공공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그는 제안했다. 그런데 그가 지적하는 문제는 공공교육이 편향성을 해소하는 효과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런 프로그램에는 비용이 많이 들고 전문성에 대한 존중을 필요로 한다. 미국처럼 큰 정부에 반대하고 엘리티즘을 배척하는 정치문화 속에서 그런 프로그램의 광범한 시행은 바랄 수 없는 일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사실은 인식상의 편향성을 극복할 필요가 제일 큰 바로 그 사람들이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에 전혀 귀를 기울이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브레넌은 The Ethics of Voting 후기에 인식상의 편향성을 벗어나는 요령 몇 가지를 제시했는데, “1년 동안 당신의 지금 관점을 뒷받침하는 글을 아무것도 읽지 마시오.” 같은 식이다. 이런 충고를 사람들이 따른다면 당분간 정치의 장이 극단주의자와 독단주의자에게 점령당하는 정치적 마비상태가 일어날 것이다. 잘못된(비도덕적이거나 비합리적인) 투표를 할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투표를 삼가야 할 것이라고 브레넌은 이야기하지만, 해당되는 사람 중 그의 글을 차분히 읽고 충고를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될까?

브레넌은 말한다. “동성결혼이 구역질나는 일이라는 이유로 반대투표를 하는 사람은 다른 대개의 경우에도 잘못된 투표를 하기 쉽다.” 어떤 동성연애 반대자(또는 독실한 기독교인)가 이 글을 읽고 그래, 맞아! 나는 투표를 안해야 돼.” 하는 반응을 보일까? 무지한 유권자에게 당신의 정치적 신념이 틀린 것이라고 가르쳐줌으로써 투표권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연구결과는 보이지 않는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