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력을 향한 개방적 경쟁은 선거민주주의의 한 가지 특징이다. 중요한 선거가 있을 때는 치열한 동원과 접촉이 기간 내내 계속되고, 후보들은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 지지를 호소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문제는 이 과정을 통해 사회적 갈등이 완화되는 것이 아니라 격화된다는 데 있다. “네거티브 전략이 선거의 상용 무기가 되었다. 후보와 정당들이 경쟁자들에게 근거 없고 거짓된 비방을 쏟아 부어 유권자들의 반감을 일으키는 데 몰두한다. 미국 언론인 댄 라더가 네거티브는 먹혀요!” 말한 것처럼 강력하고 효과적인 전략이다. (...)

정치집단 사이의 의견 차이는 생활방식과 선()의 기준이 다른 데서 나오는 것인데, 선거는 그 차이를 더 심화시키는 역할을 흔히 맡는다. 가족 간 분규를 툭하면 법정으로 가져가다가 파탄이 더 심해지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다. 선거정치에 참여하는 권리가 사회생활의 다른 영역에서도 권리의식을 키워준다는 토크빌 식 논리가 옳은 것이라면, 대립적인 선거가 다른 영역의 분규를 처리하는 데도 나쁜 모델 역할을 한다는 논리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경쟁적 개인주의자로 구성된 사회에서 사회의 조화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각자 자기 이익이나 자기가 생각하는 공동선을 위해 투쟁하고, 힘센 놈이 이기는 것이다. 사회 조화를 아끼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체제 하에서는 그런 사람들 입장이 불리하다는 문제가 있다.

유교적 윤리관을 생각해 보라. 훌륭한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사회적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이 유교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인간의 정체성이 어떻게 공동체를 통해 형성되는가 하는 묘사적 서술이 아니라 사회의 번영을 위해 어떤 종류의 사회적 관계들이 필요하니까 그런 관계들을 잘 지키고 키워내야 한다는 규범적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화로운 사회적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 차원, 사회 차원, 인류 차원,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

요컨대 유가사상에서 조화를 권한 이유는 가족 간에, 사회 내에, 국가 간에,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다양한 관계가 인류의 번영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삶의 질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사회적 의무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모든 관계는 평화적 질서와 다양성의 존중을 원리로 하는 것이어야 했다. (...)

서양의(Western) 교육수준 높고(Educated) 산업화되고(Industrialized) 부유하고(Rich) 민주적인(Democratic) 사회들이 여러 방면에서 별난(WEIRD) 특성을 보이는 것처럼,(2010년에 일군의 심리학자들이 “WEIRD 사회개념을 제기했다. 이에 해당되는 사회의 총 인구가 세계 인구의 1/8에 불과한데도 심리학 연구의 60-90%가 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행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학술연구의 관점이 이 선진사회들 쪽으로 편향되어 왔다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서양사회에서 조화의 이념을 경시하는 풍조가 다른 사회에서는 큰 반감을 일으킨다. 아무려나, 인간의 행복을 위한 조화의 중요성은 직관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가족이 없는 사람이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평화로운 질서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평화로운 국제질서가 세워지지 않고 자연환경을 무절제하게 파괴하는 세상에서 인류가 번영을 누릴 수 있겠는가?  (...)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책임질 필요가 없을 때, 항의하는 사람이 없을 때, 그리고 상대방의 인격과 개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 나쁜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경쟁적 선거의 역할을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다. 사회의 조화를 뒷받침해 주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키워주기는커녕 정치적 경쟁자를 악마화하는 풍조를 허용하는 정도를 넘어 조장함으로써 인간성을 나쁜 길로 이끄는 것이 선거 아닌가. 게다가 투표소의 칸막이는 투표자가 책임질 필요 없이, 누구의 항의도 받지 않고 행동할 조건을 만들어줌으로써 나쁜 행동의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아닌가.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11표의 원칙을 의심할 필요 없이도 타인을 배려하는 행동양식과 사회 조화를 향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마서 너스봄은 인문학의 도덕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비판적 인식능력과 공감능력을 가진 시민으로 키워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숙의민주주의를 통해 공적 의제들을 공공성에 입각해서 바라보는 시각을 모색할 수 있으며 정치의 세계를 이익과 주장의 평면적 충돌의 장 아닌 상호존중의 분위기로 이끌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문제는 정치가들이 선거의 승리를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려 드는 것을 말릴 길이 없다는 데 있다. 좋은 뜻을 가진 정치이론가들이 경쟁적 개인주의의 물결을 가라앉힐 수 있는 대책을 내놓아 조금의 성공이라도 거둔 실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인터넷의 등장으로 사회적 관계를 오염시키는 무책임하고 야비한 정치적 언설의 확산이 더 쉬워졌을 뿐이다.

 

 

Posted by 문천

 

 

정확한 퍼-센테-지는 잊어버리었으나 昨年 한 해 동안의 통계로 보아 南朝鮮輸出보다도 輸入이 너무 많고 또 그 輸入 중에는 종이가 그중 큰 品目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면 빚을 저가면서까지 들여온 그 종이는 얼마나 有效하게 쓰여졌을까.

解放 後 많아진 것이 政黨이니 음식점이니 하지만 新聞도 그중에 한 목 끼일 수 있을 것이다. 인제 적당한 題號가 없어도 신문은 새로 더 나올 수 없으려니 여겨지는데도 모두들 용하게 좋은 제목들을 붙여가지고 나날이 늘어나느니 신문이다. 그러나 그렇듯 새로운 題號를 생각해내는 데 天才인 그들이 신문의 내용을 얽음에는 웨 그다지도 머리가 둔한지 박여내는 신문의 내용은 열이면 열이 전부가 똑같은 것이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으로선 도저이 한 신문사가 독특한 外報網을 펼칠 수 없으매 UPAP를 뒤늦게 번역한 몇몇 通信을 그대로 베껴내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이를 베껴내어 타이틀을 붙이고 신문 면을 짜는 데도 어찌나 그리 유치하고 졸열한지 때로는 읽는 이쪽이 얼굴을 붉힐 지경이다. 그러나 이 역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이 땅에 신문의 경험을 갖인 사람이 얼마나 많기에 이렇듯 많은 신문에 골고루 有能한 경험자와 기술자가 配置될 것인가. 또 설사 경험자가 아니기로서니 신문 면 하나를 반듯하게 짜낼 만한 교양과 센스를 갖인 사람이 이 무한정으로 늘어나는 신문의 수에 正比例하여 늘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문제는 그런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대관절 그 많은 신문이 신문 자체의 存立에 필요한 最小限讀者를 갖일 수 있을 만치 조선의 신문을 읽는 사람이 그처럼 많을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은 없는 줄을 내가 잘 안다. 없으니까 題目만 다르다 뿐이지 내용은 똑같은 신문을 한 집에서 몇 개식이고 보게 되는 것이다. 讀者칙으로써 본다면 그리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 많은 신문 값을 내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덮어놓고 밀어 넣는 신문을 위해서 온 家族神經과 에너-지를 기우린 綜合作戰이 아니고선 자연히 그런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詩人 盧某와 같은 感傷이 아닐찌라도 나이 어린 중학생이 추운 겨울날에 외투도 장갑도 없이 收金하러 와서 저이는 이걸로 고학합니다.” 하면 여간 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선 승낙 없이 넣은 것이니 값을 못 내겠다던가 하는 말이 나지 않는 것이다. 배달꾼의 말을 들으면 그렇게 무리하게라도 해서 넣지 않으면 신문사나 판매소에서 억지로 떠매끼는 部數消化할 수 없고 어름어름하다간 애꾸진 배달꾼이 題號마저 똑같은 신문을 여나문 벌 보는 결과가 되어서 새벽마다 손발이 꽁꽁 얼어서 신문을 돌린 품값으로 신문 휴지뭉치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종이를 濫費하는 신문의 사태가 輸入超過해서 들여온 종이로 만들어짐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과연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社會의 생활이, 國家의 생활이 이처럼 無軌道的이고 無反省해서도 좋을 것인가. 이처럼 企劃性이 없고 이처럼 政策貧困하여도 總破綻으로 기우러지지 않고 백여낼 수 있을 것인가.

言論 自由民主主義基本 要請이고 또 신문은 言論 自由具現인 것을 모르는 배 아니고 그리고 서투른 신문의 制限拘束이 비저내는 바 惡影響이 지극히 甚刻한 것도 짐작 못하는 배 아니다. 그러나 言論自由라는 것도 반드시 放縱 無責任한 신문의 濫發에서만 올 수 있는 것일까. 內容엔 굴레를 씨워놓고 휴지만도 못한 신문의 濫發黙認, 助長함으로써 言論自由는 確保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처음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 일이 있었다. 신문의 氾濫一時的現象이고 결국은 自然淘汰로 말미암아 신문계가 바로 설 수 있으리라고.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眞正自由主義 經濟社會의 올바른 歸結일 것이라 하여 (이것만을 우리가 希求하여야 할 것이고) 서뿔른 統制獨裁에로 하는 길이니 삼가야 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正數만을 알고 負數分數를 모르는 산술임을 나중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우리 社會經濟界에 있어서도 經濟外的制約이 너무나 크게 움직이기 때문에 素朴經濟理論으로선 할 수 없는 것임과 마찬가지로 신문의 自然淘汰와 같음도 도저히 一片自由主義論으로써만 할 수 없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과연 外國에 빚을 덜컥 지고 그 빚진 종이로 內容이 똑같은 신문을 濫發하여 讀者에게 購讀强勸하여야만 言論 自由確保될 수 있을 것인가. 自律的이던 他律的이던 간에 적당한 統制하여 신문사의 濫立防止하고 有限能力資材效率的으로 利用함으로써 內容充實을 도모하는 한편 言論自由享有할 수 있는 그러한 方法은 과연 없을 것인가. 그건 반드시 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그러한 不可能이 아니련만 우리의 良識으로 그러한 妙策을 세워 낼 수는 없을 것인가.

만일 세상에 천박한 自由를 아무런 節制反省 없이 追求하느라고 몸을 파는 女人이 있다면 우리는 그 賢明함을 찬양해야 할 것인가 그 無謀함을 가엾어 해야 할 것인가. 만일 또 세상에 來日破綻을 돌보지 않고 종한 自由追求하는 蕩子가 있다면 우리는 그 自由를 귀하다 할 것인가 그 無知와 어리석음을 통탄하여야 할 것인가.

그러타고 나는 言論自由犧牲해도 좋으니 當局에서 가혹한 統制를 해야만 한다고 慫慂함은 아니다. 當局文化政策으로서나 또는 文化人들의 自律的協助로서나 우리나라의 貿易 面考慮하면서 言論自由享有할 수 있는 限界 안에서 신문의 濫發로 말미암은 종이의 浪費是正할 수 있는 어떠한 節制가 있을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 바이다.

 

Posted by 문천

상상에는 제한이 없으니 앞으로 몇 십 년 지나다 보면 사람들의 정치관이 크게 달라질 계기가 없으란 법도 없다. 핵전쟁이나 지구온난화, 또는 테러의 격증 같은 암울한 상상도 가능하고, 노동의 기계화로 인한 창조적 활동의 증가나 재생가능한 새로운 에너지원의 발견 같은 밝은 상상도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민주주의 헌정체제가 굳건하다. 하지만 능력주의체제 지도자의 특성들이 민주주의체제에서도 유권자들에게 매력을 발휘할 수 있어서, 선출된 지도자들이 능력주의체제에서 성공을 거둔 방식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려 할 수는 있다.

능력주의 옹호자에게 아마 제일 큰 호재(好材)는 선거민주주의가 아직 자리를 잘 잡지 못한 나라가 많이 있어서 중국이 능력주의체제를 권하고 도와줄 여지가 있다는 점일 것이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기금(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같은 정부출연재단을 통해 외국의 민주주의 진흥을 돕는 것처럼 중국도 능력주의를 위한 국가기금같은 것을 만들어 다른 나라의 거버넌스 개선을 위한 능력주의 정치제도 실험을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다.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능력주의체제 국가들과는 특별한 연대관계를 추구한다고 표명할 수 있다. 반대자들에게는 순전히 상업적 동기에 따른 것이라고 대답해도 된다.

그러나 결국 능력주의 정치제도가 하나의 소프트파워로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중국 자신이 좋은 모범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국내에서 잘 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능력주의 정치제도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줄여 나가면 그 체제의 본질이 외부 사람들의 눈에도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지금 당장은 국내 비판자들과 서부 지역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정책이 해외 언론을 뒤덮고 있기 때문에 능력주의를 옹호하려 하더라도 그 정치체제의 핵심에 폭압성이 있는 것 아니냐는 추궁에 응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판웨이(潘维)의 말처럼, 중국 국가는 억압성을 줄이고 관용성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점. 중국공산당 이름을 바꿔야 한다. 조직의 현재 실체와 그 지향하는 바를 더 잘 표현하는 이름으로 바꿔야 한다. 사실에 있어서 중국공산당은 공산도 아니고 도 아니다. 공산당원을 포함한 중국인 중에 공산당이 더 고급의 공산주의를 향해 진격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능력주의 정치체제는 마르크스도 마오쩌둥도 좋아한 것이 아니었고, 레닌이 생각한 전위당 역시 다른 것이었다. 자본가들까지 포함한 86백만 당원을 가진 중국공산당은 여러 정당 중 하나가 아니다. 많은 집단과 계층에서 능력주의 원리에 따라 선발된 구성원을 모은 복합조직으로서 중국 전체를 대표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다.

중국현능연맹(中國賢能聯盟)”이란 이름이 더 어울린다. 하지만 민주라는 말이 중국의 공식적 정치 담론이나 독립적 지식인들에게 가진 중요성을 감안하고 또 차이나 모델의 민주적 측면이 작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서 듣기에 더 편안한 이름을 찾는다면 민주현능연맹이 어떨까 한다.

공식적 표현의 변화가 능력주의 정치체제를 둘러싼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표현된 이념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책임감을 정부가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중국 정부에 주어진 과제는 그저 능력주의의 길을 뚜벅뚜벅 걷는 것만이 아니다. 내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그 이름을 바르게[正名]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