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체제와 관계없이 심각한 불평등 문제를 가진 사회에서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걱정해주도록 만들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데는 논리적 설득보다 사회관계의 공유에서 우러나는 공동체의식의 함양이 더 좋은 길이다. 예컨대 일본이나 스웨덴의 부유한 시민들이 높은 조세율이나 부의 재분배를 위한 다른 조치들을 회피할 길이 있더라도 대개 규칙을 따르는 것은 강제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와 유대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자발적 순응의 중요한 이유 하나는 부자들이 부자들만의 공동체에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부유한 사람들도 일반인과 함께 의식(儀式)에 참여하고 일상생활에서도 늘 접촉하기 때문에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느낌을 가진다.

반면 미국에서는 생활공동체들이 인종만이 아니라 정치, 문화, 소득수준에 따라 갈수록 더 분리되어 가는 지리적 이동이 지난 30년간 진행되어 왔다. 자신과 다른 위치와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의견 교환은커녕 마주칠 기회조차 대폭 줄어들어 있다.” 그 결과 미국의 부유한 엘리트 계층은 실업 등 노동자 계층의 문제에 놀랄 만큼 무관심해졌고, 각종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극히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다.

중국에서도 미국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같은 방향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부유층은 연안지대의 대도시에 모여 살고, 그 안에서도 담장을 친 단지 안에 틀어박혀 산다. 그 결과 함께 참여하는 활동이 줄어들고 거리감이 늘어나 계층 사이의 소통이 막혀가고 있다.

계층 간의 사회적 관계를 활성화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대기업 경영자들이 사회와의 연대감을 스스로 키울 것을 기대할 일은 아니다. 세계화 시대의 기업은 자기네 모국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거나 상치하는 이해관계를 가진다. 민주주의국가냐 아니냐에 관계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회계층 융화를 위해 취할 수 있는 정책들이 있다. 부자들의 도둑촌에 담장을 치지 못하도록 도시계획법을 바꾸는 것이 한 가지 예다. 학교 운영비가 지역 예산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정책이다. 부자 동네의 좋은 학교를 부잣집 아이들만 이용하고 가난한 동네 아이들이 여건 나쁜 학교에만 다니게 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 정부의 최고지도부는 소득 격차를 줄이고 싶은 동기를 가졌다고 인정할 여지가 있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 오바마 대통령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부유층 이익을 옹호하는 방향의 대 의회 로비능력을 당해내기 어려울 것이다. 일이 되게 하기는 힘들고 안 되게 하기는 쉬운 미국 정치에서 특수이해관계자의 정책 방해 활동은 꾸준히 늘어나 왔다.

좀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중국에는 반대쪽 문제가 있다. 소득 격차 완화와 계층 융화 정책을 추진할 최고지도부의 능력은 더 크지만 그럴 동기가 별로 없다. 중국 고위 지도자들은 본인이 재산가이거나 대부호들을 친인척으로 가진 경우가 많다.

어느 쪽 체제에 개선의 희망이 더 클까? 지도자의 선량한 의도를 실행할 수 없는 정치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마음만 먹으면 실행할 능력을 가진 지도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쪽이 내 생각에는 덜 어려울 것 같다. 동기 부여를 위해서는 서민층과의 접촉을 늘림으로써 공감과 소통을 늘리는 것이 첩경이다.

미국에서는 오바마 대통령 같은 진보적 정치인들이 빈민가에서 활동하며 서민층과 어울리는 것을 자발적인 정치 수련의 과정으로 삼기도 하지만 그런 안목을 가진 사람이 많지는 않다. 반면 중국에서는 사회적 장벽을 타파할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커지고 있다. 지난 몇 년간 공산당 간부들은 수련 과정의 일환으로 상당 기간(최소 1) 빈곤한 농촌 지역에 파견되어 근무해 왔고, 그들 중에서 장래의 최고지도부가 나올 것이다.

강력한 엘리트 계층이 약자의 처지에 공감하게 만드는 최선의 길이 정치 수련과정에서 다양한 계층과의 접촉을 갖도록 이끄는 것이라면 중국은 좋은 길을 찾은 셈이다. 미국 같은 민주사회의 문제는 지도자들이 계층 간 공감을 확장하기 위한 수련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선거민주주의체제에서는 지도력 형성을 위한 어떤 수련과정도 강제될 수 없다.

이처럼 능력주의 정치체제는 지도자들이 서민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도록 이끄는 의무적 정치 수련과정을 시행하기에 유리한 조건이다. 지금 당장은 소수의 전횡이 미국과 중국에서 같은 수준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하더라도, 중국 쪽에서는 이 문제가 완화될 것을 기대할 만한 합리적 근거가 있다.

 

 

Posted by 문천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2171

 

 

<장석준 칼럼>에 흥미로운 책소개가 보인다. 저자가 프랑크푸르트학파 3세대를 대표하는 사회학자-철학자라는데,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의미를 새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는 위치일 것 같다. 그리고 이 책도 그런 시도로 보인다.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를 "사회적 자유"로 설정하는 것인데, 통상적 근대사상의 '자유'의 원자론적 원리와 달리 유기론적 질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동양사상과 통하는 점을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석준의 설명은 이렇다.

 

출발은 프랑스 대혁명이다. 대혁명의 구호 '자유, 평등, 우애'가 모든 영감의 발단이다. 혁명의 즉각적 수혜자인 자본가들은 이 구호의 첫째 항을 '개인적 자유', 즉 소유권을 바탕으로 시장 경쟁을 벌이는 원자적 개인의 권리로 이해했다. 이에 따라 서유럽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질서가 확산되기 시작했고, 일정한 재산을 소유한 남성들만의 의회가 들어섰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당시 막 상식이 돼가던 이 흐름에 반기를 들었다. 자유를 개인적 자유로 바라본 결과는 자유와 평등, 우애 사이의 모순과 대립이었다. 개인적 자유의 주창자들이 이 자유를 향유할수록 나머지 대다수는 비-자유로 내몰렸다. 자유로운 자와 자유를 박탈당한 자가 나뉘었고, 따라서 평등하지 못했다. 평등하지 못한 집단들 사이에는 물론 우애가 있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응수는 '사회주의'라는 작명 안에 집약돼 있다. 한 마디로 '사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개인들은 이미 '함께' 살고 있다. 사회를 이룸으로써만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될수록 이는 더욱 절실해진다. 개인적 자유 관념은 이런 진실에 눈 감는다. 그래서 사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행위로 나아간다. 이것이 참된 자유일리 없다. '함께' 사는 모든 이들이 '함께' 누려야만 진정한 자유다. '개인적' 자유가 아니라 '사회적' 자유다.

한데 호네트는 사회적 자유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면, 우리의 관심은 상대방에게 끼칠 피해를 걱정하는 수준에만 머물지 않는다. '서로를 위해' 무엇을 할지 생각하게 된다. '서로를 위한' 행동을 하면서 삶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이 경험을 지속, 확대하려 노력하게 된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원리가 중심이 될 때에 비로소 사회가 사회다워진다고 믿었다.

 

나는 근대사상의 원자론 편향을 생각하면서 19세기 초의 '사회주의'가 원자론이 밀어주는 개인주의에 대항하는 입장이 아니었던가, 그것이 <공산당선언>(1848)에서 '과학적 사회주의'에 밀려 '공상적 사회주의'로 전락하면서 '사회주의'의 이름을 빼앗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문명의 위기가 개인주의 극복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생각하며 원래의 사회주의가 되살아나기 바라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장석준이 설명하는 호네트의 관점은 바로 내 소망에 부응하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요 인물이 내놓은 관점이라니 큰 흐름을 대변하는 것으로 기대된다. 어서 이 책을 구해 읽어본 다음 자신감을 갖고 사회주의자가 되어야지.

 

몇 주일 전에도 대니얼 벨 교수와 메일로 주고받던 얘기 끝에 이와 관련된 내 생각을 적어 보낸 일이 있다. 민주주의 정의에서 "by the people"을 "through the people"로 바꿨으면 좋겠다는 내 얘기에 그 의미를 더 설명해 달라고 한 데 대한 응답이었다.

 

When we say "by the people", we tend to think of "people" as a collection of individuals, each of which is the prime subject of government. I hope to mean by "through the people", that "people" is an organic body, which is bigger than the arithmetic sum of its components. The function of "government" can be performed only by the whole body, not by the component individuals. The illusion of the individuals' role as the prime subject has been utilized by organized forces(a part of the whole body) to keep other parts of the body satisfied and quiet.

 

The use of the illusion is a good way of politics, I admit. So long as the organized forces can deal adequately with all kinds of challenges to the society, I have no objection to that way. But when they fail, an alternative has to be sought, and you have to do away with the illusion. For example, if problems with the Nature(resources and environment) can no more be managed in the present way (by technological means), you have to persuade people to change their way of living, and if they still have the illusion that they can decide their own fates, it will be very difficult to persuade them. They will never give up the hope of passing the bomb on to somebody else before it goes off.

 

As cultural evolutionists say, mankind has built up great strength, much bigger than the sum of the strength of all the composing individuals, through the working of societies. The society can deal with challenges which individuals cannot. In the modern world(from 19c on), the importance of the society was neglected, because rapid technological development could block off most of the challenges. Hence individualism. This state has come to a limit. Now we have to recover the society. So, in my thought, the most important task for mankind is curbing individualism. "By the people" is the expression of individualism in politics. (as "property right" is in economy) When I say "through the people" I am hoping that the working of societies, which has brought the human civilization to the present state but has been neglected for two centuries, would be recovered to take care of the human society.

 

I would like to dub what I call for as "socialism". It is different, of course, from the "scientific socialism" in Communist Manifesto. It is the antonym of "individualism". I oppose to individualism because it concentrates on the relationship among people, ignoring the relationship between man and nature. If we consider the relationship with nature, we have to admit that our living conditions are restricted by her. But if we ignore it, we can pursue unrestricted "development", and the powerful people feel free to exploit anything(other people, the nature, whatever) to any degree. That is how we have been making the Earth a very uncomfortable and dangerous place to live in during the past two centuries. To make things easier, the first thing to do is to recover "societies", through the working of which we can make concerted effort to deal with all problems, either pending or to come.

 

So much oratory for now. One thing came up to my mind. Could you write a greeting note for Korean readers? We already have enough of prefaces, so I think a small note telling how glad you are to get a Korean edition will do. The position of Korea in history and in the present reality makes you feel good, doesn't it? Koreans readers will be glad to hear that. It's not an urgent matter. Maybe you can write it before the end of the year, if you feel like it.

 

Yours, O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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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근본적인 문제는 유권자들의 이기심이 아니라 무지에 있다. 현명한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지식을 확보하는 유권자가 많지 않다.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투표하려는 사람들도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목적에 부합한 것인지 제대로 판단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정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적다. 고대 아테네에 비해 이 점에서 지금 상황이 나쁘다는 사실을 白彤東은 이렇게 지적했다.

 

노예노동 덕분에 아테네 시민들은 일상적 노동에서 벗어나 정치에 모든 힘을 기울여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사람들은 시민들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현대 민주국가의 일반인들이 생활수준 유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이것은 자본주의체제만이 아니라 노예제도라는 편안한 죄악을 벗어던진 어느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다.) 자유민주주의나 숙의민주주의의 바람직한 시행을 뒷받침할 만큼의 정치적 역량을 갖추고 정치에 참여할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시간의 부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 비해 오늘날의 민주국가는 규모가 크기 때문에 한 개인의 투표가 결과에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칠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정치에 관심 끄고 그 시간에 다른 일 하는 편이 합리적 선택이 될 수 있다. 제이슨 브레넌은 이렇게 말했다.

 

시민들은 합리적으로 무지하다. 개개인은 정치에 대해 거의 아무런 영향력이 없고 한 표 한 표가 가진 기대효용은 제로에 가깝다. 따라서 정치에 대한 지식이 유권자에게 거의 아무런 가치를 갖지 않는다. 지식의 획득에는 노력과 비용이 든다. 내 한 표가 얼마간의 결정력을 가진다고 생각하면 노력과 비용을 투자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력이 거의 없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아예 신경을 쓰지 않기로 결정할 것이다.

 

요컨대 현대 민주국가의 유권자들에게는 정치적 역량을 향상시킬 시간도 동기도 없는 것이다. (...)

투표자의 무지가 민주주의에 본질적인 장애물이라고 볼 수는 없다. 투표란 모든 사람이 정치적 결정에 동등한 영향력을 갖게 해주는 공정한 과정일 뿐이며, 민주적 결정이 꼭 진실과 정의의 특정한 기준을 지킬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과정의 공정성 그 자체에는 민주주의를 옹호할 큰 힘이 없다. 데이비드 에스틀런드는 말했다. “참으로 공정한 민주적 절차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결정의 권위와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도덕적 의미는 너무 작다. 절차의 공정성만으로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민주적 제도들의 대부분 특성을 설명할 수 없다. 내 주장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동전 던지기보다 공정한 절차가 어디 있겠는가? 법률이나 정책을 무작위로 선택하더라도 공정성은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요컨대 우리가 투표의 절차에 의미를 두는 것은 공정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투표자의 무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집단지성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처음 제기한 이 개념은 작은 집단보다 큰 집단이 더 많은 지혜와 덕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각 개인의 지식이 아무리 불완전하더라도 많은 사람의 견해가 합쳐지면 어떤 형태의 집단지성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에는 증거도 없지 않다. 잘 알려진 경제 전망치를 모아 평균을 내기만 하면 개별 전망치보다 훨씬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균에 들어갈 개별 정보가 상당 수준 지식의 뒷받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효과가 일어날 수 없다(...) 정치에는 잘못된 생각을 얼버무려 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브레넌이 이렇게 말했다. “체계적인 편견을 가진 군중은 예측을 잘할 수 없다. (...) 정확한 예측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집단 내 각 개인의 예측 증력을 향상시키는 것 못지않게 집단 내 인식 경로의 다양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집단지성의 작동을 위해서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터무니없는 생각을 갖지 않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개의 유권자들을 놓고는 이 점을 장담할 수 없다.

투표자의 무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선출되는 정치인들이 투표자처럼 무지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투표자들이 비록 정치제도나 정책에 관해 충분한 지식을 갖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공동체를 잘 이끌어 나가기에 충분한 능력과 경험을 가진 지도자를 알아볼 판단력이다. 설령 정치인들이 선거 중에는 유권자들의 불합리한 요구에 영합하더라도, 당선된 뒤에는 비현실적이거나 부도덕한 것이 분명한 공약들을 예사로 뒤집는다. (...)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투표자의 불합리성을 이런 식으로 견제하는 것으로는 나쁜 정책을 방비하기에 충분치 못하다. 사회과학 연구 결과를 보면 정치인들에게는 유권자들의 요구를 무엇이든 그대로 따르려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사회는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법률을 갖게 되고, 불필요한 전쟁을 치러야 하며, 질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범죄와 환경오염이 늘어나는 반면 복지 수준은 떨어지게 된다.”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한 사회에서 이런 문제가 더 심각하기 쉽다. 혐오와 불신이 넘치는 사회에서는 다수 집단이 민주적 방법을 통해 소수 집단들을 억압하려 드는 일이 많다. 중국의 민주화에 대한 비관론자들이 이 점을 특히 걱정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연방주의나 소수자 인권 등이 헌법상 확립되어 있는 성숙된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는 민족 간 갈등이 완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치를 재앙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여러 가지 비합리성에 대한 대비책은 너무나 빈약하다. CFO(최고재무책임자)의 행태에 관한 어느 연구에 따르면 2007-2008 경제위기 이전의 S&P 지수를 가장 확실히 믿고 낙관적이던 사람들이 자기네 회사의 전망에 대해서도 과신과 낙관의 경향을 보이면서 다른 회사보다 더 많은 리스크를 떠안았다. 카니먼은 말했다. “낙관주의는 사회에서나 시장에서나 좋은 대접을 받는다. 사람들도 회사들도 진실을 말하는 사람보다 위험할 정도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을 더 잘 대우해 준다.”

유감스럽게도 정치인이나 규제 담당자들도 마찬가지로 낙관주의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적어도 재계 사람들의 낙관주의를 견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은 세율을 낮추고 공공지출을 늘리는 투표를 거듭한 결과 공공부채는 산더미처럼 쌓이고 고등교육보다 교도소 운영에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결과를 맞았다. 재산세를 동결시킴으로써 지방자치단체의 주된 세입 근거를 옥죈 1979년의 제13호 주민발의에 따라 주 헌법이 불합리한 개정을 겪은 결과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