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자유가 엘리트 집단의 권력 남용을 폭로하는 데 효과가 있었을 것이고, “비교적 대등한 수준의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다양한 사회적 집단들의 출현으로 종래의 여러 공화국에 나타났던 빈-부 간의 심연을 메울 수 있는다원적 사회로 들어서고 있다는 생각도 건국 시조들의 마음에 위안을 주었을 것이다. 11표의 원칙으로 세워진 민주주의체제 안에서 부유층이 경제적 전횡을 저지를 염려는 극히 적을 것으로 여겨졌다. 사회경제적 차이를 인정하고 처리하고 반영하는 장치를 만듦으로써 부유층의 힘을 억제하려는 노력을 건국 시조들이 기울이지 않은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1835년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 위협으로 지적한 것은 오히려 빈곤한 다수가 정치권력을 써서 부유층을 수탈할 위험이었다. “이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국민의 다수는 재산을 가지지 않았거나 일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없을 만큼 재산이 적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보통선거권은 사회의 통치권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제도다.”

그 후 200년 동안 산업자본주의의 급속한 발달이 이뤄지고 그에 따라 부의 집중과 빈부 격차의 확대가 일어나게 될 것을 건국 시조들은 예상도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환경 보호, 무기 규제, 금융기관 통제 등의 이슈를 놓고 자금력과 조직력이 강한 소수 이해관계자들이 무력한 다수를 물리치고 자기네 입장을 관철시키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정치에 시간과 노력을 쏟을 여유가 없기 때문에 강한 상업적 또는 이념적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들이 공익에 부합하는 변화를 가로막거나 자기네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추진하는 등 정치과정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부유층이 자기네 이해관계를 분명히 파악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를 가질 때 이런 현상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정치에 대한 돈의 영향력은 오늘날 모든 민주주의사회의 골칫거리가 되어 있고, 미국은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심한 편이다. 2차 대전 직후 수십 년간 사회 전체가 번영을 누리던 시기와 달리, 지난 수십 년간 대다수 미국인은 극소수의 초부유층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져 왔다. “1979년부터 Great Recession 직전까지 최상위 1퍼센트가 총 가구소득의 36퍼센트를 거둬 갔다. 고용주 제공 의료보험, 연방 조세, 그리고 모든 정부 지원을 넣은 계산이다. (...) 2001년에서 2006년 기간의 경제 성장은 더욱 뒤틀려서 최상위 1퍼센트의 소득이 전체의 53퍼센트에 달했다.”

소득격차 확대의 원인으로 승자의 보상을 극대화시킨 기술 변화와 세계화가 흔히 지목된다. 찰스 A 쿱천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노동자의 소득을 감소시키는 1차적 원인은 전 지구적 경쟁에 있다.” 그러나 미국의 불평등은 다른 부유한 민주주의국가들보다 늘 빠르게 심화되어 왔다. 제이콥 S 해커와 폴 피어슨은 그 중요한 이유가 부유층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정부 정책이 바뀌어 온 데 있다고 주장한다. 기업과 금융 부문의 로비활동으로 인해 공무원들이 다수의 희생으로 소수의 이익을 가져오는 방향으로 미국 정치와 미국 경제의 규칙을 고쳐 써 오게되었다는 것이다.

세법에서 시작해 규제 완화, 회사 운영방법, 사회안전망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미 부유한 집단의 국부(國富) 점유율을 기록적 수준까지 높여주는 정책을 정부가 채택하도록 기업 측이 압력을 가해 왔다. 2008년 금융 공황 이후까지도 가장 책임이 큰 은행들의 정책결정자와 입법가에 대한 영향력은 계속되었고, 그 결과 연 수입이 5천만 달러를 넘는 개인의 숫자가 2008년에서 2009년 사이에 다섯 배로 늘어났다. 2009-2010년의 경제회복 과정에서 소득 증가의 93퍼센트가 상위 1퍼센트에게 돌아갔다.

늘어나는 부의 분배가 부유층에 집중된다 하더라도 빈부 격차의 확대가 그 자체로는 걱정할 일이 아니다.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소외계층의 운명이다. 존 롤스의 정의론에 따르면 소외계층에도 이득이 돌아가는 한 소득 격차는 문제꺼리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더 가난해지고 있다. 2012년 미국 통계청 보고에 따르면 빈곤층 비율이 2009년의 14.3퍼센트에서 16퍼센트로 치솟고 아동의 20퍼센트가 여기 포함된다고 했다.(1993년 이래 최악의 수준이다.)

빈곤층 중에서도 극빈층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2011년 정부 지원 빼고 하루 2달러 이하의 생계비를 쓰는 가구 수가 1996년에 비해 갑절로 늘어났고 280만 명의 아동이 여기 포함됐다. 간단히 말해서 문제는 초부유층이 더 부유해지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극빈층이 더 가난해지는 데 있는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