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막바지에 트럼프의 섹스스캔들이 엄청나게 터져나왔다. 원래 그리 점잖은 인물은 못 되는 줄 알고 있던 사람들도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여론조사도 큰 타격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 그러지 않아도 불리하던 게임이 완전히 끝났다고 많이들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그렇지가 않았다.

 

섹스스캔들은 도덕성과 관련된 매우 민감한 문제다. 뇌물이나 직권남용보다 사람들 눈길을 쉽게 끌고 마음을 크게 흔드는 일이 많다. 그런데 이번에 약효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은 클린턴 후보의 남편 덕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쾌한 회고는 아니지만 빌 클린턴의 섹스스캔들을 한 차례 돌아봐야겠다. 애초에 문제가 터진 것은 1994년 5월 폴라 존스의 고소 때문이었다. 3년 전 아칸소 주지사 시절의 클린턴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주장이었다. 곡절 끝에 클린턴은 1998년 11월 존스의 배상 요구액 85만 달러를 지불하되 폭행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클린턴의 변호사는 범죄 사실을 부정하면서 정상적인 일과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돈을 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폴라 존스 사건은 그 뒤에 터질 리윈스키 사건의 서막일 뿐이었다. 1995-97년 중 클린턴과 아홉 차례 성관계를 가졌다고 리윈스키가 진술하기에 이르는 사건이다. 당시 뉴스를 보며 혀를 찬 사람이 많았다. 폴라 존스 사건을 잡아떼고 있는 동안 또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니. 존스의 배상 요구에 서둘러 임한 것은 리윈스키 사건에 따른 탄핵 절차가 임박했을 때였다.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이 앞장선 공화당이 클린턴의 공격에 총력을 기울이고 주류언론도 동조했다. 그러나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한 사실이 1998년 11월초의 중간선거에서 드러났다. 공화당이 5석을 잃었는데, 야당이 중간선거에서 손해를 본 것은 60여 년 만의,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 무렵 나는 어느 글에 이렇게 썼다.

 

민주당이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둔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원들 못지않게 패배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파헤치기에 열 올리던 언론인들이다.

 

<워싱턴포스트지>의 칼럼니스트 오버홀서는 언론이 심판자의 역할을 자임하던 종래의 오만을 반성할 기회라고 말한다. 언론은 사실을 만들어내는 기관이 아니라 전달하는 기관일 뿐이며, 그것도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실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는 선거 몇 달 전부터 클린턴의 스캔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무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오버홀서는 지적한다. 대통령을 평가하려면 대통령 업무의 수행실적을 보면 됐지, 사생활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유권자들의 뜻을 언론이 묵살해 왔다는 것이다. 워터게이트의 환상에서 언론인들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자아비판이다.

 

빌 클린턴은 이 사건에 대응하는 자세에서 인간적으로는 바닥을 드러냈지만 대통령 직은 꿋꿋이 수행했다. 그때 그가 쓴 말이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였다. 원래는 심리학에서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회피하는 무의식적 방어기제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인데, 그는 개인적 문제와 공적 임무를 구분해서 대응한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클린턴의 열성 지지자인 포르노 출판업자 래리 플린트는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냐며 클린턴 탄핵에 앞장선 공화당 정치인들의 스캔들 제보에 백만 달러 현상금을 걸어 화제거리가 되었다. 실제로 하원의장 물망에 오르던 밥 리빙스턴 등 공화당 몇몇 지도자들이 플린트의 저격으로 낙마하기도 했다. 깅그리치도 탄핵 실패 후 의장직 사퇴에 이어 자신의 혼외관계가 드러난 후 의원직까지 사퇴했다.

 

집무시간 중에 집무실에서까지 일을 저지른 엽기적 행각의 주인공 클린턴은 그런 대로 무사히 임기를 마친 반면 그의 도덕성을 비판하던 정적들이 훨씬 작은 꼬투리로도 더 큰 타격 받는 것을 보며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말을 떠올리던 생각이 난다. 도덕성을 무기로 휘둘렀기 때문에 그 칼끝이 자기를 향했을 때는 꼼짝 못하게 된 것 아닌가.

 

힐러리는 남편의 스캔들에서 피해자 입장이었지만, 그를 지켜준 것이 너그러움보다 정치적 득실에 따른 것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 후 상원의원, 국무장관으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 인상이 더욱 굳어져 여성적 이미지가 흐려졌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감동을 일으킬 잠재력이 약해진 데다가 트럼프의 도덕성 공격도 무뎌졌으니, 리윈스키 스캔들의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가 막중하다 하겠다.

 

지금 박근혜 사태를 보면서도 도덕성 문제로 흥분하기보다 냉철한 비판이 제도적 문제에 집중되기 바라는 마음이 든다. 도덕성 문제는 비판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믿고 권력을 맡겼던 사람들에게 도덕적 문제가 보이면 비판적으로 살피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비판이 도덕적 문제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보다 실제적인 문제를 철저하게 파헤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떠나는 이승만의 초라한 모습에 감상을 느끼다가 반세기가 지나도록 "개돼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꼴이 되풀이된다.

 

클린턴의 '구획화'는 불리한 상황을 최소한의 피해로 견뎌내는 전략이었다. 박근혜 측에서 궁리할 어떤 전략도 '구획화'의 범주를 아마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너무 늦게 들통났다는 것이 박근혜에게 불운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꼬리를 자르려 해도 몸통과 너무 꽉 붙어 버렸으니.

 

Posted by 문천

 

정말로 놀랐다. 공화당 후보 자리 꿰차는 정도는 있을 법한 일로 생각했다. "business as usual"이 한계에 왔다는 경고 정도로 보고, 토크빌이 그린 "미국의 민주주의"가 10년가량은 더 계속될 것으로 짐작했다. 미국이 속으로 이렇게까지 무너져 있는 줄은 몰랐다.

 

경고 정도 올 때가 되었다고 본 것은 미국이 처한 상황이 파시즘 득세에 유리했던 1930년대 독일 상황과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가장 큰 유사점은 "정치 실패"다. 국가사회 운영에서 정치의 역할이 형편없이 퇴화해 있는 가운데 국내외 여건이 악화할 때 아웃사이더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민주당에서 샌더스의 강력한 도전도 이 상황이 만들어준 것이다.

 

샌더스의 실패와 트럼프의 성공이 엇갈린 데는 우연한 요인도 있겠지만, "정치 실패" 상황에서 새 선수가 등장할 때는 "화끈한" 선수가 유리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 같다. 샌더스는 아웃사이더라도 클럽 회원이 아닐 뿐이지 선수는 선수였다. 그가 꺼내는 얘기는 종래의 정치판에 비해 새로운 것이지만 다 "말이 되는" 얘기다. 반면 트럼프는 선수도 아닌 진짜 아웃사이더, 룰도 모르고 언어도 모른다.(또는 무시한다.) 그를 찍어준 사람 중에는 그의 메시지가 미더워서가 아니라 그냥 "다르니까" 찍어준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내가 투표권 있어도 트럼프를 찍었을 것 같다. 주류가 해 쳐먹는 거야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지만, 미국은 지나친지 오래다. 정치 전통을 그만큼 가진 나라의 (소득불평등 등) 사회 붕괴가 어떻게 대한민국 같은 독재국가랑 비슷한 수준에서 놀 수 있나? 게다가 종래 정치지도자들이 불공정-불평등 체제를 아무리 싸고 돌더라도 겉으로는 아닌 체하던 것에 비겨도 힐러리는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그에 비해 트럼프에게는 희망이 있다. 당장 뭐를 잘해줄 희망까지는 아니더라도, 모순을 서둘러 드러낼 희망은 있지 않은가.

 

파시즘 공부를 더 할 필요가 있다. 2차대전 이후 파시즘이 범죄용어처럼 되어버린 것은 세계적 현상이거니와, 우리 사회처럼 정답만 좋아하는 사회에서는 너무나 공부를 게을리해왔다. 그런데 그 풍조에도 뭔가 매력이 있기에 일세를 풍미한 것 아닌가. 미국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파시즘 대두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번져가고 있다.

 

마침 손에 잡은 책 <정치가 우선한다>(셰리 버먼 지음, 김유진 옮김)가 좋은 참고가 된다. 사회민주주의를 서술한 책이지만, 20세기 초의 세계적 정치 실패 상황에서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가 등장하는 장면 속에 파시즘의 원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백년 전의 많은 사람들에게 파시즘은 큰 희망을 주고 매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아주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그 매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랬다가 나쁜 결과를 가져온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확실히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비슷한 비극을 되풀이할 위험이 느껴지는 상황이다.

 

Posted by 문천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