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6. 08:35

입으로 다시 진지를 드시게 된 지 한 달이 됐다. 8개월간 튜브피딩을 하시던 끝이라 처음에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아직 기력이 많지 않으신데 배탈이라도 한 번 하시면 큰 타격이 될 수 있으니까.

거의 미음만 권해 드리면서 이틀 지내고 나니 소화 능력에 마음이 놓여 고기 삶은 것을 갈아 미음에 섞어 드리고 병원에서 나온 간 채소반찬도 조금씩 권해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따로 연시도 속을 긁어두었다가 조금씩 권해 드렸다. 권해 드리는 것을 못 잡수신 것이 없고, 소화시키지 못하신 것도 없다. 연시만은 대변이 늦어지시기에 사나흘 후부터 배 중심의 과일믹스로 바꿨다.

제일 좋아하시는 것이 과일이다. 감 드시면서 황홀해 하신 일은 당시에 적었지만, 그 후 배-사과-바나나-딸기-귤 등을 적당히 섞어 간 것, 언제 꺼내놓아도 대환영이시다. 처음엔 "햐~ 달다!", "야, 너무 달다!" 하는 감탄사가 절로 따라 나오다가 차츰 덤덤해지신 편이지만, 첫 숟갈을 물고 눈을 반짝이시는 것은 아직도 그대로다.

처음엔 500cc 병에 담아 가다가 1주일쯤 지나면서는 1000cc 병으로 바꿨지만 이틀이 못 간다. 소화와 용변에 다 좋으실 것 같아 드실 수 있는 대로 거의 제한 없이 드리다가, 며칠 전 검사에서 혈당이 조심스럽다는 주의를 받고 드시는 양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 제한이 표현력 발전에 자극이 되기도 한다. 부탁, 간청, 요구, 호통, 등 온갖 화법이 이런 상황에서 재개발되는 것이다. 수량 감각에도 자극이 되신다. 오늘 낮에 병을 꺼내 놓으면서 "어머니, 의사 선생님이 이것도 너무 드시면 안 된대요. 아홉 숟갈만 드세요." 하니까 진지한 표정으로 "열아홉 아니구?" 하신다. 정말 유머 감각은 예전보다 더 좋으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세 숟갈 드신 뒤에 "몇 숟갈 드셨어요?" 하니까 "셋," 한 숟갈 더 드신 뒤에 "몇 숟갈 남았어요?" 하니까 "다섯," 대답이 즉각 나오신다. 그런데 여섯 숟갈 드시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눈을 묘하게 뜨고 내 얼굴을 쳐다보며 "이제 절반 먹었네." 하신다. 어이 없는 내색을 감추고 "네, 많이 드셨네요." 하고 더 드리니 정확하게 세 숟갈 더 드신 다음 정색을 하고, "야, 조금만 더 먹자." 하셔서 "네, 그러세요, 어머니. 세 숟갈 더 드시죠." 하니까 고개를 마구 끄덕이시고, 맛있게 세 숟갈을 더 드신 다음 선선히 물러나신다.

오늘 같은 날은 매우 평화로운 상황이었다. 어제는 뭔가 심기가 좀 삐딱하신 편이었는데, 절반 넘게 남은 병을 꼭 바닥내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잡수셨는지, 종당에는 주먹까지 휘두르시고 (주먹을 들먹이시면 편리한 위치에 머리통을 갖다대야 한다. 그래야 팔 운동이 되시니까.) 주 여사가 쫓아와서야 겨우 진압을 해드릴 수 있었다.

심기가 삐딱하신 것은 그저께, 내가 서울에 일이 있어 못 가고 아내만 갔던 날부터였다. 아내에게 얘기 들으니, 다른 일 하고 있는 여사님들을 당신한테 와달라고 안달하시고, 목청도 꽤 높이시더라고 했다. 아내에게 말씀하시는 데도 장난기를 넘어선 심술기가 느껴졌다고 하고, 여사님들은 어머니께 꼬집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다.

심술까지 회복되신다면 정말 대단한 회복이시다. 작년 가을 자유로병원에 계실 때는 간병인 학대범으로 온 병원에 소문이 나실 정도였다. 안 여사란 이가 몹시 당했다. 겨울 되면서 기력이 떨어지시고, 또 모시는 재주가 좋은 김 여사로 바뀌면서 그 증세가 사라졌는데, 이제 기력이 그만큼 좋아지셨나, 대견스럽다. 지금 여사님들과 관계가 워낙 좋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않는다. 꼬집으셨다는 게 내 머리통 때리시는 정도겠지.

어제는 심술 회복 소식을 들은 터라 조심스럽게 관찰하며 비위 맞춰 드리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살펴 보니, 분명히 삐딱하시다. 장난처럼 호통을 치시는데, 조금만 삐끗하면 역정으로 바뀔 소지가 느껴진다. 결국 난감한 장면을 맞고야 말았다. 진지 드실 때부터 똥이 마렵다고, 일으켜 앉혀 달라고 거듭거듭 조르시는데, 1년 가까이 누워서 볼 일 잘 보시던 분이 웬 유난을 떠시나? 종이까지 달라고 하신다. 겨우 식사를 마치신 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요구가 그치지 않으셔서 체면불고하고 다른 일 하고 있는 주 여사를 불러 임무를 넘겨드렸다. 대변까지 받아드려야 효자 되는 거라면 난 효자 못하겠다.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 대 피우고 바람 좀 쐬다가 내려와 보니 아직 볼 일을 못 보셨다고 한다. 무척 불안한 기색이시다. 곁에 앉아 있는데, 불쑥 나를 보고 "야, 너무 아프다!" 하신다. 깜짝 놀라 (오랫만에 들은 말씀이다.) "어디가 아프세요, 어머니?" 하니까 "이게 걸렸어. 양쪽 사이에." 하고 얼굴을 찌푸리신다. 내가 더 있어 봐야 도움도 안 되겠고, 차라리 내가 없어야 여사님들이 제대로 도와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전 일하러 갈래요, 어머니, 재주껏 누세요." 하고 일어나려 하니까 "어디 가니?" "집에요, 어머니." 하니까 오늘따라 별나게 "갔다가 금방 와야 한다." 하신다. "네, 금방 다녀올께요, 어머니." 하고는 병원을 나올 수 없어 아래층에 가 설 후에 한 번 이야기하기로 하고 있던 김 (간호)과장에게 갔다. 몸은 많이 회복되셨어도 정신이 불안정하시니 가급적이면 중환자실에 계속 계시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다시 올라와 보니 그 사이에 볼 일은 보셨다.

기력이 없으실 적에는 얼마 모시고 있으면 노곤해 하셔서 쉬시는 것을 보고 나올 수 있었고, 기력을 되찾은 뒤로는 대체로 내가 일하러 가야 한다는 사정을 이해하시는 듯, 어떤 날은 떠나는 내게 "넌 가서 일해라, 난 여기서 놀께." 하기도 하셨다. 그런데 어제는 내가 떠나는 것을 무척 아쉬워하시는 기색이셔서 좀 길게 모시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차현실 선생이 오셨다. 이만큼 회복되신 것을 보고 반가워 눈물까지 글썽일 듯하다. 그래서 차 선생께 어머니를 양보하고 집에 돌아왔다.

오늘은 최근 이틀 간의 불안정하시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일어설 때도 아무 동요 없으셨고, 이마에 뽀뽀를 신청하니 "쬐끔만 하거라." 하고 선선히 내놓으신다. 아마 의식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회복되면서 일시적인 불안정이 나타나신 것 아닌가 싶다. 용변은 앉아서 보는 일이란 강박까지 되찾으셨으니, 어느 수준까지 회복되실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식욕이 정말 왕성하시다. 그저께부터 "배고프다"란 말을 입에 달고 지내시고, 한 번은 진지 갖다드리는 여사님에게 "다들 많이 먹으면서 왜 나만 이렇게 쪼끔 주냐?"고 투정까지 하셨단다. 그래서 오늘 점심부터는 미음을 죽으로 바꿨는데, 정말 '식은 죽 먹기'로 가볍게 비우신다. 그리고는 식판 치우려는 것을 못 치우게 하고 "뭐 더 없냐?" 하신다. 두유를 드리니 한 팩 다 드시고야 만족스러운 기색. 그리고도 소화제(과일 간 것)도 드실 만큼 드신다. 식생활 대책을 더 적극적으로 마련해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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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물리학과에 들어갈 때 내 꿈은 과학자에서 노벨상으로 좁혀져 있었다. 노벨상이 동네 강아지 이름이 아니라는 건 열아홉 살이나 된 놈이 물론 모를 수 없었다. 그래도 그 꿈을 꼭 쥐고 있었던 건 벼락부자 누깔에 뵈는 게 없는 격이었다. 꾸준히 우등생 노릇을 해 왔다면 주제 파악이 좀 쉬웠을 텐데... 고3이 되면서 '천하 경기'의 전교 1등을 난 데 없이 하게 되면서, 그리고 그것이 서울대 전교 수석은 아니라도 이공계 수석까지 이어지면서, 나는 내가 천재라는 확신에 빠져 있었다.

그 확신은 동기생 대다수가 공유한 것이라서 더욱 빠져나오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 애 있는 줄도 몰랐던 놈이 어느 날 갑자기 깃발 날리며 나서니까 다들 놀라자빠졌다. 고3 내내 나는 '평민 영웅'이었다. 매달 치는 모의고사에서 내 석차가 올라가면 다들 괜히 좋아하고 내려가면 괜히들 아쉬워했다. 한 번은 짖궂은 친구들이 대표를 뽑아 내게 실험을 걸었다. 김종민이라고 문화부 장관 한 녀석, 무지하게 잘 노는 재밌는 친구가 나서서 모의고사 전날 늦게까지 맨투맨으로 나랑 놀아줬다. 당일치기 못하게 해서 결과를 보겠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당당히 1등을 해 보이자 '평민 영웅' 신앙은 더욱 굳어졌다.

천재의 환상은 내 인생에 큰 흔적을 남겼다. 커 오는 동안 내내 가지고 있던 총체적 열등감을 극복한다는 좋은 효과도 있었지만, 그것은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음미하게 된 측면이고, 나는 오랫동안 이 환상의 부정적 영향을 가지고 고심했다. 일상적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행동의 선택에까지 '상식적' 판단에 저항감 내지 거부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몇 해 전까지 어머니에게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 환상을 그분이 부채질하셨던 것이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특별한 길을 가야 한다"는 일종의 엘리티즘이 자식들을 닥달하는 그분의 지론이었다. 나이 50이 넘도록 어버이 탓을 하고 살다니... 난 참 못난 놈이다. 그래도 근년 들어 어머니에 대한 반감이 지워진 것은 내가 드디어 '천재 컴플렉스'에서 벗어난 조짐일까?

2학년 올라갈 때 사학과로 전과한 것이 내 인생의 많은 것을 결정한 큰 고비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천재 컴플렉스를 그 고비에서 바로 벗어난 것은 아니라도 차츰차츰 벗어날 길을 찾아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아직까지도 '대중'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래도 보통사람들과의 관계를 이만큼 편안히 여기고 즐기게 된 데는 역사학을 인간관계의 탐구로 여기며 오랫동안 공부해 온 덕분이 크다고 생각한다.

전과를 격려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대감을 가졌을 만한 분(예컨대 당시 충남대 사학과 교수로 있던 고종사촌 기돈 형님)들도 전도양양한 물리학도의 장래를 포기하는 일에 당당히 찬성하고 나설 수 없는 분위기였다. 물리학과 교수들도 "이런 인재가 아니면 누가 노벨상을 바라보겠습니까?" 하며 어머니를 부추겼다. 나 혼자의 고집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나 자신 석연치 않다.

 

역사학이 좋아서 전과를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물리학을 떠나고 싶었다. 물리학이 싫어진 것도 아니었다. 대학 들어와 수학과 물리학의 본 모습을 대하고 보니 내가 그때까지 생각해 온 것과 크게 다른 것이었다. 내 적성으로 볼 때, 겸손한 마음으로 임했다면 재미를 붙일 만한 분야였다. 그러나 노벨상을 목표로 매진해 갈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 학기 지나고 나자 분명히 알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떠나고자 한 것은 노벨상의 꿈이었다. 물리학은 'collateral damage' 였던 셈이다.

손쉽게 전공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전과였고, 당시의 서울 문리대는 문과와 이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넓었다. 물리학과 떠날 마음을 먹고 둘러보니, 이과는 모처럼 맘 먹고 도망치기에 너무 가까운 곳이라서 문과 쪽을 건너다보게 되었다. 첫 선택은 사회학이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그런 대로 셈본 실력을 활용할 여지가 커 보여서였다. 그런데 그 해에는 사회학과에 빈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사학과였다.

역사학이 뭐하는 건지, 나는 일반 고졸자의 인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 이력 중에 "서울 문리대 사학과 조교수"란 항목이 있어도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도통 모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한문과 옛날 책에 얼마간 익숙했다는 사실 외에는 사학과를 특별히 고를 이유가 없었다. 정말 어쩌다 가게 된 것이 사학과였다.

이렇게 천둥벌거숭이로 사학과에 뛰어든 나를 당시 사학과 선생님들이 바라보며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이 오갔을지, 이제 생각하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사학과는 인기 학과가 아니었다. 서울대 전교 수석급 인재가 온다는 데 기대감을 품는다는 것은 나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성칠 교수'의 아들이 사학과에 나타난 것을 보면서 어떤 감회를 느끼는지는 당시의 나로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사학과의 원로 교수는 한우근, 고병익, 민석홍 제 교수로 서울대 사학과 1~2회 졸업생들이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해방이 되자 서울대로 편입했다가 졸업한 분들인데, 1회가 47년 졸업이었다. 45년까지 경성제대였고, 46년 한 해가 '경성대학'이란 이름이었는데, 아버지는 그 해에 졸업했다. 69년에 내가 사학과에 가서 마주친 원로 교수들이 졸업반일 때 아버지는 강사와 조수(조교) 신분으로 그분들과 접했고, 그분들이 졸업할 때 조교수로 취임한 것이었다.

93년 <역사 앞에서> 출간을 계기로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거니와, 사실 나 자신도 87년 그 일기를 처음 보면서 아버지의 구체적인 모습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의 "서울대 사학과 조교수" 이력이 그저 자리 하나 채운 것이 아니라 서울대 사학과, 나아가 한국 역사학의 진로를 상당 부분 좌우할 잠재력을 가진 존재였다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된 것이었다. 비명에 가신 그분의 아들이 입학시험도 거치지 않고 어느 날 불쑥 사학과에 나타났을 때,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던 교수분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한우근 교수님이 99년 돌아가시기 전 명륜동 댁에 종종 찾아뵈면서 당시의 소감을 더러 듣기도 했다.

학교 다닐 때는 아버지 존재의 의미를 거의 모르는 채로 사학과에 다녔다. 한문과 영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쫓기는 느낌 없이 여유롭게 공부를 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내놓고 생각하면 역사학의 의미가 무엇인지, 학문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노벨상 생각하며 물리학과 들어가던 때와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다. 85년 이후 유럽의 학풍에 접하면서 새로운 생각과 느낌을 키우고 있던 위에 87년 이후 아버지 일기에서 얻은 자극이 겹쳐져 나 나름의 학문관을 세우게 된 것이다.

69년의 전과 당시에 나는 향후 겪게 될 변화의 방향을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연이 많이 작용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버지의 뜻과 자세에 접근해 온 사실을 놓고 보면 우연이라고 생각해 온 요인들 중에도 뭔가 필연적인 측면도 더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어느 시점까지는 나 스스로 전과를 한 게 잘한 짓이었는지 어쨌는지 회의가 수시로 들곤 했었는데, 근년에는 그런 회의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이제 올 데까지 온 모양이다.



Posted by 문천
 

흐~ 조회수가 안 올라가니 낚시질이라도 할까요?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걸로 이해해 주세요. 중딩 시절까지는 연대기 식으로 더듬어 왔는데, 고딩 이후로는 계속 그렇게 하기가 어렵네요. 기억나는 것이 너무 많으니 어차피 뽑아서 적어야 되고... 또 마주쳤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는 게 기억을 특정한 방향으로 굳혀버리는 문제가 있겠어요. 아직 모든 걸 생각대로 털어놓을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내 삶을 빚어오는 데 큰 작용을 한 사건이나 주제들을 정리할 수 있는 대로 올려볼까 합니다. 이 글쓰기의 목적은 벗는 데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백주 대낮에 곱지도 않은 몸매로 홀랑 벗고 한길에 뛰어나가서야 좋은 꼴이 아니겠죠. 더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더 적합한 장소를 찾아야죠. 우선은 옷자락이 바람에 날려 속살이 살짝살짝 드러나는 정도로 노출 욕구를 달래겠습니다.

어느 첫 번째나 마찬가지로 첫 키스가 주는 자극과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겠죠. 저는 상당히 큰 자극을 당시에 받았고, 그 의미를 되새김할 기회도 많이 가졌습니다. 이제 그 얘기를 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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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3학년 때니까 나는 21살, 연이는 19살이었다. 연이는 우리 집 '식모방'에 머물며 식모 노릇도 조금 해주고 있었지만 식모는 아니었다. 어쩌다 그리 된 것이었고, 얼마나 오래 그렇게 머물고 있을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원래 연이는 마당 끝의 안채에 살았었다. 신안군의 어느 섬에서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서울 와서 안채에 세들어 있던 자기 이모님에게 얹혀 지내며 요리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집이 갑자기 지방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우리 집에는 형들이 유학을 떠나고, 오랫동안 살림을 살아주던 나영이 누나도 결혼해서 나가는 바람에 집안이 썰렁하던 참이었다. 연이는 방을 쓰는 대신 아침저녁 밥상을 차려주며 지내기로 했다.

1년 남짓 안채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나는 당연히 연이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가냘픈 몸매에 얼굴도 곱상하고 행동도 얌전한 연이에게 여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남녀관계에 우리 또래치고도 영 자신이 없는 머스마였다. 그리고 지난 여름 J와의 괴로웠던 하룻밤을 잊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J는 초딩 때부터 선망해 온 내 마음속의 선녀였다. 대학 선배로 만난 그 오빠 M과 친하게 되어 그 집에 열심히 놀러다닌 데도 J에 대한 흑심이 작용한 것이다. M이 J의 친구들과 함께 해수욕장에 가자고 할 때 나는 뛸듯이 기뻤다. 그날 밤 텐트에서... M은 안전을 위해 남자 둘이 양쪽 바깥에 눕고 여자들이 가운데 눕자고 했다. 그리고 J가 내 곁에 누웠다.

1초도 눈을 붙이지 못한 하룻밤이었다. M과 J의 뜻을 알고 고마워하면서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웠다. 원래부터 자신 없던 남녀관계에 더욱 자신감을 잃었다. 그 후 어두움 속에 누워 있으려면 시도 때도 없이 텐트 안의 그 밤이 떠올라 욕망과 부끄러움을 되살리며 진저리를 치곤 했다.

만리포의 그 밤이 지난 몇 달 후 초겨울부터 연이가 한 지붕 밑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M은 유학을 떠나고 나는 두 번 J를 찾아가 바보같은 소리만 하다가 돌아오고는 발을 끊고 있었다. 그런 차에 연이를 아침저녁으로 마주치게 되면서 처음에는 '여자'로만 보이던 것이 차츰 '연이'로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려웠다. 여자로 의식하든 연이로 의식하든 내 눈빛에 어떤 '바램'이라도 나타날까봐 조심스러웠다.

국사 연구실에서 시간을 많이 보낼 때였다.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가 막 갈라졌지만 나는 사학과 마지막 학번이어서 연구실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한국사상사로 졸업논문을 썼으면 하는 생각으로 국사 연구실에 자리를 잡고 열쇠도 하나 얻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15분 거리였기 때문에 별 일 없는 날은 저녁 후에도 연구실에 가서 지냈다.

어느 날 저녁 후, 초겨울이라 벌써 캄캄해진 시간에 대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은행나무 곁에서 나직이 "오빠!"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연이가 나무에 기대 서 있었다. "응, 연이냐?" 하는데 아무 대꾸가 없었다. 뜻밖의 상황에서 말을 걸어오는 데 나는 벌써 긴장하고 있었다. 말없이 내 눈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연이에게 다가설 때 내 머리속은 바쁘게 돌아가면서 한편으로는 멍~해지고 있었다.

그 후 몇 주일 동안 저녁 후의 키스는 우리 둘의 일과가 되었다. 말은 별로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 몸짓을 통해 연이를 아끼고 좋아하는 내 마음을 제법 잘 표현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몇 번은 욕정에 강하게 휩쓸리기도 했다. 한 번은 낮에 둘이서만 집에 있을 때. 또 한 번은 대문간의 키스만으로 아쉬워 광에 들어가 서로의 몸을 더듬었을 때... 나 자신에게 자신감이 있었다면 뭔가 저질렀을 것이다.

떠나기 전날에야 떠난다는 사실을 연이는 내게 말했다. 요리 공부는 할 만큼 했고, 고향에 맞춤한 일자리가 생겼다고. 그리고는 23년 동안 연이와 나는 소식 없이 지냈다.

 

제주도에서 혼자 지내고 있을 때 연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피차 헤어질 때보다 나이가 곱절이 되어 있을 때였다.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서울 가는 길에 연락하니 하룻밤을 자기한테 맡겨달라고 했다. 그러마고 했다.

오후에 도착해 공항으로 마중나온 연이와 바로 호텔에 들었다. 처음으로 침대를 함께 했지만 큰 흥분은 없었다.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였다. 내가 할 얘기보다 연이에게 들을 얘기가 훨씬 많았다.

연이는 옛날 일에 대해 위악적인 태도를 취했다. 자기는 서울 오기 전부터 남자를 알았다고. 오빠가 좋기도 했지만 자기가 오빠를 꼬신 것은 오빠를 내것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계산 때문이었다고. 그런데 마주쳐 보니 오빠가 사람 구실 하려면 길이 너무 먼 것 같아서 포기했다고. 고향에 간다고 우리 집을 떠난 후 서울에 있으면서 회사를 다니다가 사장님이 꼬시기 좋은 사람이기에 꼬셔서 결혼했다고. 덕분에 고등학교도 못 나온 촌년이 제법 호강하면서 살게 되었다고.

연이의 얘기에 과장은 있을지언정 사실과 어긋나는 것은 아닐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웃으며 들어줄 수 있었다. 연이는 내 소식을 꾸준히 더듬어 왔는지, 아니면 뒷조사라도 했는지, 그때까지 내가 겪어온 행적을 대충 알고 있었다. 결혼했다가 이혼하면서 겪은 어려움까지도 얼마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얘기를 하다가 내가 말했다. 그 때 연이 꼬심에 넘어갔다면 훨씬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거 같은데, 그 때 내가 너무 못났었어, 하고.

그러자 연이가 음흉한 미소를 날리며 (진짜 음흉해 보였는데, 기분나쁘게 음흉한 건 아니었다.) 하는 말이, 난 계산이 빠른 년이예요, 지금 오빠 찾은 것도 다 속셈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데, 가만 생각하니 존경심도 들지 않고 애틋한 마음도 들지 않는 사람을 이용할 생각만으로 꼬셔서 여태 살았는데, 지금까지 정조차 제대로 쌓이지 못한 바에야 다른 길을 찾아볼 생각이 든다고. 오빠에게는 존경심도 들고 애틋한 마음도 드는 터인지라 오빠랑 지금부터라도 살아보고 싶다는 얘기였다.

연이의 제안에 진심으로 감사해 하며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함께 저녁을 먹은 후 연이를 집에 돌려보내고 호텔방에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음흉하건 어쨌건 연이에게 믿음이 갔다. 의도와 능력이 모두 미더웠다. 연이에게 남은 인생을 맡기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자신이 서지 않았다. 연이가 가정을 버리고 취할 만한 행복을 내가 마련해 줄 수 있을지. 자기 가정이 '보호할 가치가 없는' 가정인 것처럼 연이는 얘기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보호할 가치가 없는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얽매여 있었다.

전화로 몇 번 얘기하다가 답답했는지, 연이가 한 번 제주도로 찾아왔다. 그리고 연인보다 남매 같은 사이로 헤어졌다. 얼마 후 전화하니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연인 아닌 오빠는 이용할 데가 없어서 잘라버린 모양이다.

 

오랫만에 연이와의 첫 키스를 떠올려 보지만, 정말 고마운 키스였다. 계산에 따라 꼬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자기는 얘기했지만, 그리고 그 설명을 나도 대충 믿지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텐트 안에서 내 옆에 온 밤을 누웠으면서도 내 행동을 기다리기만 하던 J는 나랑 별 차이 없이 못난 아이였다. 연이는 자기 책임 아래 행동을 취했고, 덕분에 나는 전과 다른 자신감을 얼마간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괴롭히고 만 일이 적지 않아 회한으로 남아 있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더 나쁜 짓을 할 여지도 많았다. 그 시점에서 연이에게 받은 자극은 조금이라도 잘못을 줄이는 데 확실한 도움이 되었다. 연이의 '일편흑심'에 감사해 마지 않는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