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되어 내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 미술반 활동이었다. 어머니와 큰형의 압력 아래 나는 입학하자마자 미술반에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술은 초딩 때도 음악, 체육과 함께 혐오과목의 하나였는데...

과외활동은 원칙적으로 학생 각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기 있는 부서에서는 담당 교사나 선배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스크리닝을 해서 원하는 학생들만 받아들인다. 미술반은 경기에서 수질 관리가 제일 잘 되는 부서의 하나였다. 단결력이 잘 형성되어 있어서 선생님이 나설 필요 거의 없이 선배들이 알아서 분위기를 지킬 수 있었다. 과히 험하지 않으면서도 답답한 범생이 동네는 면할 만큼 활기도 있는 분위기였다. 당시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에 입시가 따로 있었지만, 내부 진학율이 70%가 넘었고, 일반적인 인식은 하나의 6년제 학교였다. 미술반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하나의 미술관 안에서 한 덩어리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미술반에 몰아넣은 데는 묻지 않아도 두 가지 이유가 뻔하다. 하나는 앞서 피아노로 시도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 척박한 정서를 어떻게 좀 했으면 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미술반 분위기가 좋은 것을 큰형 경험을 통해 알고 계셔서 그 분위기 속에서 내가 지내기를 바라신 것이다.

미술반 분위기의 절대적 배경은 '최 선생님'께 있었다. 최경한 선생님은 수십 년 지난 지금 생각해도 인격이 정말 훌륭하신 분이고 교양도 넓은 분이셨다. 내가 이해하는 '유머'의 본질은 그분을 모델로 한 것이다. 표정을 굳히고 호통 치시는 모습을 1년에 한 번이나 뵐까? 동양 고전에도 상당한 조예를 가진 분이거니와, 미술반을 이끈 최 선생님의 자세는 '덕치德治'의 전형이었다.

경기에는 당시의 일반 교사들과 다른 특이한 교사들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군사정부에서 공립학교 교사가 한 학교에 5년 이상 근무하지 못하게 하는 '순환근무제'를 강제하면서 내가 입학할 때 많은 교사들이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 교사들 중에 우리 학년과 '입사 동기'들이 절반쯤 되었고, 그들 대부분은 여러 모로 묵은 교사들보다 자질이 처지는 축으로 보였다.

동창회 일을 맡아볼 동문 교사 등 두어 분만이 순환근무제의 예외로 인정되었는데 최 선생님은 그런 경우였다. 미술반은 그분의 조그만 이상향이었고, 그곳을 지키고 가꾸는 일을 그분은 대단히 좋아하셨다. 그분은 고등학교에 계셨고, 중학교에는 다른 선생님들이 (번갈아) 계셨지만 그분들도 최 선생님을 자기 선생님처럼 대했다.

미술반의 스크리닝 기준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미술 실력이었다. 내가 넘볼 수 없는 기준인데, 고3이 되어 있던 큰형 빽으로 들어간 셈이다. 그런데 한참 지난 후 생각하면 형 빽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미술의 의미를 기능에 제한시켜 보지 않던 최 선생님의 철학을 배경으로 실기 능력 향상보다 미술의 의미에 대한 이해 증진을 활동 목표로 여기는 인문적 분위기가 당시의 경기 미술반에는 은연중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솜씨도 없고 사교성도 없는 신입생이지만 큰형을 겪어본 선배들은 "저 형 동생이면 진짜 이상한 놈은 아닐 거야." 생각했을 것이다.

학교가 파하면 미술반 가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화판 들고 몇몇씩 떼를 지어 나가 인근 주택가나 삼청공원 같은 데서 수채화에 한두 시간 매달려 있다가 미술반 들러 집에 돌아가기도 하고 미술관 안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가기도 했다. 미술반원들이 가족 다음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다.

큰형 동기가 일곱 명 여러 해 팀웍을 다져 와서 '7형제패'란 이름으로 통한 것이 가장 막강한 학년이었다. 학교에서 난다긴다 하는 깡패들도 이 패거리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벌집이니까. 당시 고3이라 미술반에 많이 나오지 못했는데, 유독 '홍빈이 형' 하나가 자주 출몰해 후배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서울시립대 강홍빈 교수 얘기다. 장난끼가 얼마나 심한 분이었는지. 다른 방식으로 후배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또 한 분은 영상원의 최민 교수. 학생 시절의 작품 수준에 최 선생님과 미술을 계속한 대선배들까지도 탄복하고 있었다.

제일 많이 어울린 것은 역시 우리 동기들과 1년 선후배들. 동기로는 응용미술로 나간 백용 군과 건축가가 된 김석주 군이 있었다. 둘 다 수준 높은 실력가들이어서 우리 학년의 수준을 내가 힘껏 끌어내려도 둘이서 버텨나갈 수 있었다. 백용은 어린 나이에도 꿈꾸는 듯한 눈빛에 자기 세계를 가진 듯한 조숙한 인상이었고, 김석주는 '돌기둥'이란 이름답게 중후한 체격에 순박한 품성으로 미술반의 편안한 분위기를 지키는 데 큰 몫을 했다.

1년 선배로는 홍빈이 형의 뒤를 잇는 개구쟁이 '건혁이 형', 안건혁 선배(국토개발원?)와 대조적으로 얌전한 색시 같은 서정기 선배(서울의대 소아과), 그리고 이름이 가물가물한데 이영준 선배던가가 있었다. 이영준 선배는 돈화문 앞 익선동에 김석주와 같은 골목에 살아서 그 두 집을 오가며 같이 많이 놀며 정을 쌓았는데 고교 입시에 실패한 후 같이 지내지 못하게 된 것이 무척 아쉬웠다.

1년 후배로는 김민기의 존재가 내 기억을 압도한다. 나긋나긋하게 생긴 애가 성질이 은근히 되바라져서 선배 놀려먹는 데 각별한 취미를 가진 아이였다. 내가 보기로는 선배나 후배나 나 빼곤 다들 그림을 잘 그렸는데, 민기 그림은 최민 선배 이후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몇 해마다 한 번씩 얼굴 마주칠 때 중학교 시절을 바로 떠올리게 하는 힘이 어느 선배 후배보다도 강한 것을 보면 제일 사람됨이 변하지 않은 편인 것 같다.

11월마다 화신 화랑에서 전시회가 있었다. 1년 동안 그린 그림 쌓아놓은 데서 뽑아 거는데, 좋은 그림이 너무 많아 뽑기 힘들어 하는 반원들 틈에서 걸 만한 것이 도저히 없는 나는 민망하기만 했는데, 그래도 선생님과 선배들이 "이거 괜찮네." 하고 한두 점을 뽑아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다른 작품들을 돋보이게 하려는 뜻이었는지, 정말 치졸한 그림에라도 열심히 그리려는 뜻이 보였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자리도 조금 민망한 정도로 넘어가고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미술반 분위기의 '똘레랑스' 정신 덕분이었다.

또 하나 미술반의 큰 연례 행사는 여름 캠프였다. 1학년 때는 오대산 월정사에 갔었다. 전쟁 때 불탄 절을 아직 중창하기 전이었는데 두 가지 일이 특히 기억난다. 하나는 내가 식중독에 걸려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여러 사람 쩔쩔 매게 한 일. 또 하나는 상원암에 올라가 범종을 탁본하고 있는데 노스님 한 분이 다가와 최 선생님에게 말씀 걸었던 일이다. 이상하게 그 오래된 대화의 내용이 대충 생각나는 것 같다. 스님 말씀인즉, 탁본이란 말을 한자로 쓴 걸 보니 '탁'이 아니라 '척' 자를 써 놨던데, 어째서 '탁본'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 선생님이 "네, 저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요, 어느 분 말씀을 들으니까 ...... 그래서 탁본이라 할 때는 '탁'으로 읽는다는 걸 알게 됐지요." 하니까 스님이 "아, 그런 거군요." 하고 물러가셨다. 스님 가신 뒤에 우리를 둘러보며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니라 내가 탁본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시험을 치신 거란다. 다행히 합격한 모양이다." 하고 웃으셨다. 그 농담의 뜻은 나중에야 차츰 알게 되었다.

또 한 차례 참가한 캠프는 이천군 신둔면 수광리의 도자기 캠프였다. '지 대장'이라 불리는 장인의 요에 보름간 달라붙어 지냈다. 요즘은 한 달에 두 번씩 어머니 뵈러 가는 길에 지나가는 동네인데, 당시에는 엄청나게 외진 곳으로 느껴졌다. 더구나 우리가 수광리 있는 동안 홍수로 광진교가 떠내려가서 (당시 서울 인근의 한강다리는 용산과 노량진 사이의 인도교와 철교, 그리고 광진교 셋뿐이었다.) 집에 어떻게 돌아가나 걱정까지 하던 생각이 난다. 도자기 요의 보름 생활이 도시에서 살던 중학생에게 얼마나 많은 새로운 것을 보여주었을지는 일일이 설명할 것 없이 읽는 분들의 상상에 맡긴다. 한 가지 생각나는 최 선생님의 이 때 말씀. "도시 사람들, 차 타고 지나가면서 보고는 시골이 살기 좋을 것 같다고들 하지. 하룻밤만 모기 물리며 지내 보면 바뀔 생각인데."

이렇게 넓고 깊은 미술반 활동을 거치고도 미적 감각이 시원찮은 것을 보면 정서적인 면에서 내가 '병신'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앞서의 피아노 경험에 비해 미술반 활동은 그런 대로 많은 변화를 내게 가져왔다. 그림에 어떤 의미가 담길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osted by 문천
 

저택'에서 살게 되고도 집밖에서의 내 존재양식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입성은 "네모 안의 네모" 수준을 지켰고, 돈은 명절 때나 만져보는 것이었다. 아, 돈! 학교 앞 가게나 노점에서 군것질 사먹는 애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학교에서 나와 그 구역을 지나가는 동안에는 마음의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5학년이 된 후 학교 성적이 분단장급까지 올라섰다. 100명 반에서 10등 안에 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분단장은 대개 성적 순으로 나눠주는 건데, 나는 그 범위에 겨우 들게 되었지만, 성격이 소심하고 붙임성이 없는 데다가 지난 4년 동안 해먹어 본 경험도 없기 때문에 그런 건 잘난 애들이나 하는 거라 치부하고 교실 한 구석에서 "투명인간이 되었으면" 하면서 존재감 없이 지낼 뿐이었다.

잘난 넘들 보면서 주눅드는 인생을 5년째 지내 왔지만 5학년 때 반장넘은 해도 너무했다. 1300명 가운데 1등을 자기 전유물로 여기는 넘이었으니...  우리 집 저 아래쪽에 명륜동1가 시절 우리 단칸셋방 비슷한 집에서 다섯 식구가 살던 넘이니 치마바람 탓을 할 수도 없고... 그넘 이름이 이준구인데, 지금 서울대 경제학 교수 노릇 하고 있다. 초년의 가난이 정운찬 못지 않았던 넘인데, 그걸 코에 걸고 살지 않는 게 신통하다.

드디어 6학년이 되고 석차가 반에서 5등 안에 들게 되니 경기중학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큰형은 경기중에서 경기고로 올라가 있었고 작은형은 경기중에 떨어져 동성중에 다니고 있었다. 동성중학 출신으로 동성중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고종 기돈 형님의 후광까지 겹쳐 그 학교에서는 스타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당시 2차 남학교로는 동성과 대광의 끝발이 제일 좋았다.) 아무튼, 집안의 실적으로 보면 경기 합격 확률이 반반이었다.

그런데 쿠데타가 일어났다. 내가 군사정권 미워하는 데는 내 진학을 힘들게 만들었다는 사적인 원한이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전까지는 각 학교가 각자 시험문제 내고 알아서 채점해 뽑았다. 그런데 군사정부는 전국 모든 중학교에 공동출제를 실시했다. 이것까지는 큰 불만 없다. 체력 실기를 넣어 엄청나게 큰 비중을 두게 한 게 문제다. 학과가 150점에 체력장이 25점. 나처럼 몸이 약하고 굼뜬 놈에게는 재앙이었다. 학과도 공동출제를 하니까 경기 같은 학교에선 변별력이 크게 줄어드는데, 체력장에서 혼자 20점이나 까먹고 어떻게 경쟁에 끼어들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 얘기를 하다가 적은 적이 있지만, 이 체력장 쓰나미에 몰려 경기중학을 완전히 포기하고 집 가까운 보성중학으로 마음을 굳히기까지 했다. 그런데 가을이 되면서 성적이 반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참에 체력장 완화 소식이 날아들었다. 25점 중 5점을 참가만 하면 기본점수로 준다는 것이었다. 체력장의 손해가 4점 가량 줄어든다는 얘기였다. 이 4점이 결국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기중 커틀라인이 149점이었는데, 내 득점은 153점이었으니까.

마지막 순간에 결심을 하고(내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가) 경기중학에 원서를 넣어 요행히 합격했다. 이 기억을 더듬으면서 내가 그냥 보성으로 갔다면, 또는 경기에 떨어져 동성으로 갔다면 내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전국의 열두 살 어린이들에게 이런 끔찍한 고비를 만들어주던 야만스러운 풍토... 지금은 없어졌다고 할 수 있을지.

학과 150점 가운데 9점을 깎였고 체력장 25점 가운데 13점을 깎였다. 당시 체력장에서 5점 이상 깎일 학생은 경기중학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동기 입학생 420명 가운데 지체장애자가 하나도 없었다. 정말 군사정권의 야만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준 정책의 하나였다.

그런데 학과만으로는 내 점수가 합격자 중에서도 몇 등 안에 든 것이었다는 사실을 여러 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중학교 내내, 그리고 고딩 초년까지도 나는 커틀라인을 살짝 넘어 요행으로 마름모 명찰을 달게 된 넘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낙제 위험 안 느끼고 지내는 것만 그저 다행이었다. 고3 때 난 데 없이 전교 1등을 밥먹듯이 하게 되어 "내가 왜 이럴까?" 어리둥절해 할 때 한 친구가 말해줬다. "넌 중학교 들어올 때부터 베스트 텐(전교 10등 안쪽)이었잖아?"

중학교 입학시험이란 것이 나이 어린 학생들에게 지나친 압박이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입시 준비는 훗날처럼 혹독한 것이 아니었다. 6학년에게도, 재수생에게도 "Life goes on."이었다. 경기 가면 더 좋은 일이지만 보성이나 동성 간다고 해서 아주 나쁜 일이라는 생각은 나도 어머니도 하지 않았고 일반인들도 대개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좋은 학교 진학은 보너스처럼 주어지는 기쁨이지만, 그 실패를 인생의 좌절로 여기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명륜동으로 이사한 후 집에 피아노를 들이고 레슨도 받았다. 어머니가 좋은 옷은 안 사주셔도 애들 영양공급에는 사정이 힘들 때도 기준을 엄격히 지키셨는데, 돈 걱정 않게 되니까 마음의 영양도 생각하시게 된 결과였겠다. 형들은 시작하기에 너무 늦어서 제쳐놓고 영아와 나를 위해 피아노를 장만하신 건데, 피아니스트로 키울 꿈도 혹 영아에게는 꾸셨을까? 내게 대해서는 척박한 정서를 걱정하셨던 게 분명하다. 한 번 어떤 색깔이 제일 좋으냐고 물으시는데 "회색이요." 내가 대답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다는 말씀을 나중에 하시곤 했다. 그런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세계문학전집을 섭렵한 뒤 과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였으니까.

명륜1가, 전에 살던 집 근처의 선생님 댁에 레슨 받으러 다녔다. 참 좋은 선생님이었다. 세상 모든 선생님이 이 분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선생님만 좋다고 레슨 성과가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몸치란 사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확인되어 있던 사실이지만, 이 레슨을 통해 음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몸치 겸 음치. 대학 이후로는 둘 다 벗어났다.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장애자는 아니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성장과정의 심리상태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 그 문제가 표현력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글을 제법 쓰게 되고도 말하기는 그보다 영 힘들어하는 문제. 음악을 많이 즐기지 못하는 아쉬움. 36세 때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유럽의 동료 연구자들과 좋은 친구관계를 맺고 지내게 되었는데, 한 친구가 지적해 준 일도 있었다. 자네만큼 교양을 갖춘 사람이 왜 음악을 그렇게도 즐기지 못하냐고. 음악을 교양의 기본으로 여기는 유럽 친구들에게 기형적인 문제로 보였을 것이다. 지금 크게 만회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 결함이 내게 어떤 문제를 파생시킬 수 있는지는 늘 조심스럽게 살펴야 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
 

이 집은 대단한 집이었다. 오늘은 생활 얘긴 접어두고 집 얘기만 적겠다.

명륜동 3가 33번지. 이 집에 사는 동안 결혼해서 분가했기 때문에 내 본적이 번지수도 멋진 이 주소로 되어 있었다.

명륜동 입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성대 정문 앞을 지나 3백 미터 가량 지점에서 왼쪽 비스듬한 골목으로 150 미터 가량 들어가 왼 쪽 작은 골목의 끝집. 성대와 담이 붙어 있는 이 집에 이사를 들어가면서 나는 내 눈을 믿기 어려웠다. 180여 평의 대지 중 허름한 별채가 들어앉은 남쪽 끝 40평 가량은 울타리로 막혀 있었는데도, 나머지 땅만 해도 너무나 광활했다. 북쪽 모퉁이의 대문과 건물 사이의 정원만 해도 흔치 않은 규모인데, 건물 앞쪽으로는 완전히 운동장이었다. 혜화동 집에서 우리 자랑거리였던 은행나무보다도 더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정원 모퉁이와 운동장 모퉁이에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일본식 목조건물 안에 들어가면 더더욱 어안이 벙벙했다. 현관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응접실, 그리고 앞을 가로지르는 복도 남쪽으로 건너방, 대청, 안방, 널찍널찍한 방들이 늘어앉아 있었다. 화장실로 향하는 왼쪽 복도와 나란히 2층의 조그마한 두 개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고, 오른쪽 복도는 북쪽의 조그만 '식모방' 앞을 지나 서쪽 끝의 부엌과 욕실로 이어졌다. 42평의 건평이 요새야 별 거 아니지만, 당시에는 대궐이었다. 이만한 크기의 집은 당시 서울 시내에 아마 몇백 호 안 되었을 것이다.

50년대 후반 서울 인구 증가에 따라 새로 도시화된 지역의 하나가 정릉리였고, 값이 오른 밭을 팔아 이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한참 지낸 뒤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어머니는 형편이 되자 아이들이 자라날 안정된 장소를 구한 것이었다. 이사 당시 큰형이 고1, 작은형이 중1, 내가 초5, 영아가 초3이었다. 어머니는 86년 정년퇴직 하신 후 이듬해에 이 집을 성대에 팔았다. 2000년경 동숭동에서 지낼 때 산보삼아 그쪽을 지나다 보면 건물을 그대로 두고 성대에서 고시생 합숙소로 쓰고 있었고, 연전에 성대 강연하러 갔을 때 지나며 보니 건물이 철거되어 있었다.

골목에 나가 애들이랑 뛰어놀 나이가 지나기도 했지만, 나가 놀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애들을 끌어들여 놀 때가 많았다. 이사 후 얼마 지나 북쪽의 정원을 치우고 탁구대를 놓았다. 아직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대단한 호강이었다. 정릉리 땅값이 오른 덕분에 우리 집은 돈 걱정이 필요 없는 극소수의 범위에 들게 된 것이었다. 피아노, 냉장고, 텔레비전 등 당시에는 흔치 않던 물건들이 우리 집을 채워 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들이 돈을 만지게 하지 않았고 지나친 사치를 경험하지 못하게 했다. 학교에 가면 언제나와 같이 우리는 없는 집 아이들이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같은 반 아이들과 함께 고갯길을 넘어오다가 한 아이가 너희 집이 어디냐고 묻기에 마침 건너다보이는 집을 가리키며 "저기, 성대 모퉁이에 있는 2층집이야. 은행나무 두 개 사이에." 했더니, 이 아이 눈이 둥그래져서 다른 애들한테 "야, 이 자식 얌전한 놈인 줄 알았더니 뻥이 되게 심한 놈이었구나." 하고 분개해 마지 않은 일도 있었다. 이렇게 돈을 모르고 자라난 것이 훗날 가난뱅이가 될 조건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고, 가난뱅이 신세도 과히 불편하지 않게 지낼 수 있는 밑천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널찍한 집으로 옮김에 따라 일어난 첫 번째 변화는 책이 늘어난 것이었다. 전쟁 중에 책이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남은 책이 정릉 집의 골방 하나를 채우고 있었는데, 이것이 모두 넘어왔다. 책이란 것은 모두 읽을 수 있는 것이라던 생각을 나는 바꿔야 했다.  그러나 읽을 만한 것도 있었다. 가장 심대한 영향을 내게 끼친 책은 <임꺽정전>. 의형제편과 화적편 세 책씩 여섯 책이 있었다. 몇 번을 거듭 읽었는지 모른다. 아버지와 내 문체에 통하는 점이 있다는 평을 더러 듣는데, 부자가 함께 벽초 문체에 영향받은 결과가 아닐까 싶다.

책 얘기 나온 김에 명륜동 초기의 독서 얘기를 조금 붙인다. <임꺽정전> 못지 않게 많은 시간을 들인 대상이 <삼국지>였다. 집안에만 몇 가지 판본이 있어서 이 판본 저 판본을 보다가 나중에는 영창서관 판 <현토 삼국지>까지 읽어냈다. 한문에 토씨만 붙인, 당시의 초딩이 접근할 수 없는 수준의 책이었지만, 내용을 바싹하게 익혀 놓은 책이기 때문에 어림짐작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기분으로. 내 한문 읽기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는 영어 만화책. 미군부대에서 암시장으로 흘러나오는 품목의 하나가 책이었는데, 책이 많지 않던 당시에는 지식시장에서의 비중이 작지 않았다. 큰형이 영어 공부를 위해 만화책 중 점잖은 편의 것을 사다놓곤 했는데, 만화가게에서 보던 애들 만화와는 수준이 다른 물건이었다.(Jughead와 Archie, 그리고 Dennis the Menace 시리즈, 월트 디즈니 만화들이 제일 분량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ABC를 배우기 시작한 중1 때부터 그림을 보고 스토리를 상상해 가며 이것을 보고 또 보고 하는 가운데 영어 어휘력과 독해력이 저도 모르게 늘어나, 아직까지도 밥벌이의 보루로 버티고 있다. 한글이든, 한문이든, 영문이든 닥치는 대로 부딪쳐 가며 익힌 것이 언어능력을 확보하는 데는 나름대로 효과적인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큰형의 영어 수준이 높아지면서 만화책이 잡지책으로 바뀌게 된다. National Geographic, Popular Science, Popular Mechanics 등. 나도 큰형 수준을 바짝 뒤따라다니며 이 잡지책들을 소화해 냈다. 중학교 때는 이런 영어 공부의 표가 별로 나지 않았다. 고딩이 되고 보니 그 날고 긴다는 경기 애들 틈에서도 독보적인 차원에 올라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잡지에서 접한 내용을 따라 세상에 대한 인식도 넓혀졌다. 세계문학전집에 묶여 있던 혜화동 시절을 벗어나 세속적 글읽기의 시기에 접어든 것이었다. 형들이 있다는 것이 바지를 물려입을 때는 행복한 일이 아니었지만, 길을 헤쳐준다는 점에선 좋은 면도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