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되어 내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 미술반 활동이었다. 어머니와 큰형의 압력 아래 나는 입학하자마자 미술반에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술은 초딩 때도 음악, 체육과 함께 혐오과목의 하나였는데...
과외활동은 원칙적으로 학생 각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기 있는 부서에서는 담당 교사나 선배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스크리닝을 해서 원하는 학생들만 받아들인다. 미술반은 경기에서 수질 관리가 제일 잘 되는 부서의 하나였다. 단결력이 잘 형성되어 있어서 선생님이 나설 필요 거의 없이 선배들이 알아서 분위기를 지킬 수 있었다. 과히 험하지 않으면서도 답답한 범생이 동네는 면할 만큼 활기도 있는 분위기였다. 당시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에 입시가 따로 있었지만, 내부 진학율이 70%가 넘었고, 일반적인 인식은 하나의 6년제 학교였다. 미술반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하나의 미술관 안에서 한 덩어리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미술반에 몰아넣은 데는 묻지 않아도 두 가지 이유가 뻔하다. 하나는 앞서 피아노로 시도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 척박한 정서를 어떻게 좀 했으면 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미술반 분위기가 좋은 것을 큰형 경험을 통해 알고 계셔서 그 분위기 속에서 내가 지내기를 바라신 것이다.
미술반 분위기의 절대적 배경은 '최 선생님'께 있었다. 최경한 선생님은 수십 년 지난 지금 생각해도 인격이 정말 훌륭하신 분이고 교양도 넓은 분이셨다. 내가 이해하는 '유머'의 본질은 그분을 모델로 한 것이다. 표정을 굳히고 호통 치시는 모습을 1년에 한 번이나 뵐까? 동양 고전에도 상당한 조예를 가진 분이거니와, 미술반을 이끈 최 선생님의 자세는 '덕치德治'의 전형이었다.
경기에는 당시의 일반 교사들과 다른 특이한 교사들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군사정부에서 공립학교 교사가 한 학교에 5년 이상 근무하지 못하게 하는 '순환근무제'를 강제하면서 내가 입학할 때 많은 교사들이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 교사들 중에 우리 학년과 '입사 동기'들이 절반쯤 되었고, 그들 대부분은 여러 모로 묵은 교사들보다 자질이 처지는 축으로 보였다.
동창회 일을 맡아볼 동문 교사 등 두어 분만이 순환근무제의 예외로 인정되었는데 최 선생님은 그런 경우였다. 미술반은 그분의 조그만 이상향이었고, 그곳을 지키고 가꾸는 일을 그분은 대단히 좋아하셨다. 그분은 고등학교에 계셨고, 중학교에는 다른 선생님들이 (번갈아) 계셨지만 그분들도 최 선생님을 자기 선생님처럼 대했다.
미술반의 스크리닝 기준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미술 실력이었다. 내가 넘볼 수 없는 기준인데, 고3이 되어 있던 큰형 빽으로 들어간 셈이다. 그런데 한참 지난 후 생각하면 형 빽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미술의 의미를 기능에 제한시켜 보지 않던 최 선생님의 철학을 배경으로 실기 능력 향상보다 미술의 의미에 대한 이해 증진을 활동 목표로 여기는 인문적 분위기가 당시의 경기 미술반에는 은연중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솜씨도 없고 사교성도 없는 신입생이지만 큰형을 겪어본 선배들은 "저 형 동생이면 진짜 이상한 놈은 아닐 거야." 생각했을 것이다.
학교가 파하면 미술반 가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화판 들고 몇몇씩 떼를 지어 나가 인근 주택가나 삼청공원 같은 데서 수채화에 한두 시간 매달려 있다가 미술반 들러 집에 돌아가기도 하고 미술관 안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가기도 했다. 미술반원들이 가족 다음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다.
큰형 동기가 일곱 명 여러 해 팀웍을 다져 와서 '7형제패'란 이름으로 통한 것이 가장 막강한 학년이었다. 학교에서 난다긴다 하는 깡패들도 이 패거리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벌집이니까. 당시 고3이라 미술반에 많이 나오지 못했는데, 유독 '홍빈이 형' 하나가 자주 출몰해 후배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서울시립대 강홍빈 교수 얘기다. 장난끼가 얼마나 심한 분이었는지. 다른 방식으로 후배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또 한 분은 영상원의 최민 교수. 학생 시절의 작품 수준에 최 선생님과 미술을 계속한 대선배들까지도 탄복하고 있었다.
제일 많이 어울린 것은 역시 우리 동기들과 1년 선후배들. 동기로는 응용미술로 나간 백용 군과 건축가가 된 김석주 군이 있었다. 둘 다 수준 높은 실력가들이어서 우리 학년의 수준을 내가 힘껏 끌어내려도 둘이서 버텨나갈 수 있었다. 백용은 어린 나이에도 꿈꾸는 듯한 눈빛에 자기 세계를 가진 듯한 조숙한 인상이었고, 김석주는 '돌기둥'이란 이름답게 중후한 체격에 순박한 품성으로 미술반의 편안한 분위기를 지키는 데 큰 몫을 했다.
1년 선배로는 홍빈이 형의 뒤를 잇는 개구쟁이 '건혁이 형', 안건혁 선배(국토개발원?)와 대조적으로 얌전한 색시 같은 서정기 선배(서울의대 소아과), 그리고 이름이 가물가물한데 이영준 선배던가가 있었다. 이영준 선배는 돈화문 앞 익선동에 김석주와 같은 골목에 살아서 그 두 집을 오가며 같이 많이 놀며 정을 쌓았는데 고교 입시에 실패한 후 같이 지내지 못하게 된 것이 무척 아쉬웠다.
1년 후배로는 김민기의 존재가 내 기억을 압도한다. 나긋나긋하게 생긴 애가 성질이 은근히 되바라져서 선배 놀려먹는 데 각별한 취미를 가진 아이였다. 내가 보기로는 선배나 후배나 나 빼곤 다들 그림을 잘 그렸는데, 민기 그림은 최민 선배 이후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몇 해마다 한 번씩 얼굴 마주칠 때 중학교 시절을 바로 떠올리게 하는 힘이 어느 선배 후배보다도 강한 것을 보면 제일 사람됨이 변하지 않은 편인 것 같다.
11월마다 화신 화랑에서 전시회가 있었다. 1년 동안 그린 그림 쌓아놓은 데서 뽑아 거는데, 좋은 그림이 너무 많아 뽑기 힘들어 하는 반원들 틈에서 걸 만한 것이 도저히 없는 나는 민망하기만 했는데, 그래도 선생님과 선배들이 "이거 괜찮네." 하고 한두 점을 뽑아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다른 작품들을 돋보이게 하려는 뜻이었는지, 정말 치졸한 그림에라도 열심히 그리려는 뜻이 보였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자리도 조금 민망한 정도로 넘어가고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미술반 분위기의 '똘레랑스' 정신 덕분이었다.
또 하나 미술반의 큰 연례 행사는 여름 캠프였다. 1학년 때는 오대산 월정사에 갔었다. 전쟁 때 불탄 절을 아직 중창하기 전이었는데 두 가지 일이 특히 기억난다. 하나는 내가 식중독에 걸려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여러 사람 쩔쩔 매게 한 일. 또 하나는 상원암에 올라가 범종을 탁본하고 있는데 노스님 한 분이 다가와 최 선생님에게 말씀 걸었던 일이다. 이상하게 그 오래된 대화의 내용이 대충 생각나는 것 같다. 스님 말씀인즉, 탁본이란 말을 한자로 쓴 걸 보니 '탁'이 아니라 '척' 자를 써 놨던데, 어째서 '탁본'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 선생님이 "네, 저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요, 어느 분 말씀을 들으니까 ...... 그래서 탁본이라 할 때는 '탁'으로 읽는다는 걸 알게 됐지요." 하니까 스님이 "아, 그런 거군요." 하고 물러가셨다. 스님 가신 뒤에 우리를 둘러보며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니라 내가 탁본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시험을 치신 거란다. 다행히 합격한 모양이다." 하고 웃으셨다. 그 농담의 뜻은 나중에야 차츰 알게 되었다.
또 한 차례 참가한 캠프는 이천군 신둔면 수광리의 도자기 캠프였다. '지 대장'이라 불리는 장인의 요에 보름간 달라붙어 지냈다. 요즘은 한 달에 두 번씩 어머니 뵈러 가는 길에 지나가는 동네인데, 당시에는 엄청나게 외진 곳으로 느껴졌다. 더구나 우리가 수광리 있는 동안 홍수로 광진교가 떠내려가서 (당시 서울 인근의 한강다리는 용산과 노량진 사이의 인도교와 철교, 그리고 광진교 셋뿐이었다.) 집에 어떻게 돌아가나 걱정까지 하던 생각이 난다. 도자기 요의 보름 생활이 도시에서 살던 중학생에게 얼마나 많은 새로운 것을 보여주었을지는 일일이 설명할 것 없이 읽는 분들의 상상에 맡긴다. 한 가지 생각나는 최 선생님의 이 때 말씀. "도시 사람들, 차 타고 지나가면서 보고는 시골이 살기 좋을 것 같다고들 하지. 하룻밤만 모기 물리며 지내 보면 바뀔 생각인데."
이렇게 넓고 깊은 미술반 활동을 거치고도 미적 감각이 시원찮은 것을 보면 정서적인 면에서 내가 '병신'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앞서의 피아노 경험에 비해 미술반 활동은 그런 대로 많은 변화를 내게 가져왔다. 그림에 어떤 의미가 담길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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