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5. 09:16

한 주일쯤 전에 관찰한 한 가지 특이사항을 미처 기록하지 못하고 좀 더 관찰한 뒤로 미뤄둔 것이 있다. 누우신 채로 천장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처들어 뭔가 짚어나가는 시늉으로 입으론 뭐를 웅얼웅얼하신다. 가만 들어보니 수를 세시는 것이고, 그 대상은 전등, 환풍기, 스프링클러 등 천장에 붙어있는 동그라미들인 것 같다. 내가 천장으로 눈길을 돌리니까 내게도 들리도록 중얼거리신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헷갈리네."

사흘쯤 전에는 식사를 위해 윗몸을 세워놓은 상태에서 방안을 저끝까지 둘러보시며 또 뭔가 헤아리신다. 이번에는 침대 갯수다. 내가 따라서 쳐다보려니까 말씀하신다. "야, 저쪽으론 몇 개냐? 여기선 잘 안 보이네." 그 줄에 네 개라고 말씀드리니 뭔가 성이 안 차시는 기색으로 끄덕거리셨다.

그런데 어제저녁 병실에 들어서며 보니 윗몸을 세우고 앉아계신 거야 식사 준비겠지만, 간병인들이 둘러서 있고 어머니 얼굴에 활기가 대단하시다. 가만 보니 손에 펜을 들고 계시고 식판 위엔 종이가 펼쳐져 있다. 내가 온 것을 알아차리시곤 반색을 하신다. "야! 너 잘 왔다."

다가가 펼쳐진 종이를 보니 "7+4+2=B"라고 적혀 있다. 이게 뭔가 궁리하고 있는데 어머니 말씀, "네가 셈본은 썩 잘하지?" 이제 파악이 됐다. 침대 수를 파악하고 계신 것이다. 창가를 따라 7개, 반대편 벽을 따라 네 개, 그리고 어머니 계신 이쪽 옆벽으로 두 개, 그리고 "B"로 보였던 것은 "13"이었다. 아마 앞쪽은 여사님 어느 분이 적어드리고, 답은 어머니 친필이어서 좀 이상하게 보인 것 같다. 아무튼 대단하시다. 이제 그 정도 덧셈도 하시고, 숫자를 쓰기까지 하신다.

이번에 의식을 되찾으면서 새로 태어나신 것과 같은 측면도 있을 것이다. 살아오시는 동안 쌓여 온 기억이 상당부분 남아는 있지만 일반 사람들과 같은 연속성이 없다. 8개월간 지내신 혼미상태가 그 이전과 지금을 가르는 또 하나의 단층이 되었을 것이다. 1년 전까지의 당신 모습이 기억에 떠오르시더라도 완전한 '나'가 아닌, 또 하나의 객체처럼 인식되시는 면이 있을 것 같다.

'나'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지 않다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 또한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나를 편안하게 대하실 때는 아들로 인식하시는 것 같지만, 뭔가 요구가 떠오르실 때는 경어체로 바뀌시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간병인들에 대한 친밀감과 의존성이 크신 것도 이번에 의식이 돌아오신 후의 경험이 그 이전의 기억과 다른 차원의 '현실'로 인식되시기 때문일 것이다.

의식이 명료해지고 지속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새 인생의 틀이 잡혀가시는 것 같다. 천장의 동그라미 숫자, 방 안의 침대 숫자를 파악할 의욕은 공간을 파악하려는 욕구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시간의 파악 욕구도 뒤따라 드러나지 않을지? 늙으신 어머니 모시는 데 아동심리학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는 것 아닌가?

나에 대해서는 과거의 기억도 크신 데다가 새 인생 속의 역할도 뚜렷해서 그 사이의 연결도 안정된 틀이 만들어져 가는 것 같다. 아내에 대해서는 과거의 기억이 거의 없으신 것 같다. 근년의 경험은 입력도 불완전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현재의 역할에 대한 인식은 잘 자라나시는 것 같다. 그저께 정 교수의 논문을 검토하느라고 내가 바빠 아내가 혼자 가 뵈었는데, 며느리 대접이 차츰 좋아지시는 모양이다. 아내가 다녀온 얘기를 하면서 많이 웃었다.

"당신 어머님 완전 양면패예요!" 하고 아내가 웃기에 무슨 말인가 물으니, '양면패'란 상황에 따라 이쪽 면을 내놓기도 하고 저쪽 면을 내놓기도 하는 야바우를 뜻하는 것으로, '기회주의'를 풍자하는 말인가 보다. 간병인 한 분이 어머니와 아내 곁에 와서 "할머니, 아들이 더 고와요, 며느리가 더 고와요?" 묻는데 못 들은 척 대꾸를 않으시기에 재차 "며느리가 아들보다 더 곱죠?" 하니까 "지금은 그렇게 말해야겠지." 하시더라고. 그 말씀에 다시 "아드님이 왔을 때 물으면 아들이 더 곱다고 하시겠죠?" 하니까 "그땐 그래야겠지." 또 "두 분이 같이 왔을 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 하니까 "그땐 둘이 똑같이 곱다고 해야지." 하시더란다.

어머니가 지금 상태에서도 꾀 부리시는 것을 보면 참 교활한(!) 분이시라는 아내 의견에 동의해 마지 않는다. 금강경을 더 읽어달라고 지시해 놓고 듣다가 눈을 감고 주무시는 시늉을 하신다. 읽던 장을 끝내고 책을 치우려 하니까 눈을 살짝 뜨고 "나 자는 줄 알았지? 메롱!" 하시는 표정. 떠나기 전 뽀뽀 신청에는 유난히 완강하게 거부하는 척 하시다가 세 번째 부탁에야 비싸게 양보. 방을 나오는데 뒤에서 "야!" 소리쳐 부르시고는 "인사도 안 하고 가냐?" 하시기에 어리둥절했더니, "내가 소중히 여기는 분들이니 너도 인사 잘 해야 된다." 간병인 여사님들 얘기다. 마침 강 여사가 방으로 들어오던 참이라 거기 대고 허리 굽혀 정중하게 인사하니, 나보다 두어 살 아래인 것 같은 강 여사, 당황해서 쩔쩔매다가 어머니 하명 사항을 알려드렸더니, 깔깔 웃으면서도 감동먹은 눈치다. 이런 분을 교활하시다고 하는데 반박할 길이 어디 있겠는가!

정 교수 논문 얘기가 나왔는데, <역사 앞에서> 재편집을 맡은 정병준 교수가 그 작업을 위해 쓴 논문 "김성칠의 삶과 글" 초고 보내준 것을 그저께 받아 살펴본 다음 어제 학교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친구 일하는 태도와 방식 모두 정말 맘에 든다. 덕분에 오는 6월에는 <역사 앞에서>의 새 판이 예정대로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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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