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외로 알뜰하게 읽어 주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열받네요. 열받은 김에 열심히 쓰렵니다.
군대 얘기. 여성 독자들은 제목만 보고 그냥들 지나가셨겠지만,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준 일을 빼놓을 수도 없으니... 조회수 절반으로 떨어질 거 각오하고 적어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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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대학 졸업 무렵 병력 자원에 대한 베이비붐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나 현역 징집의 비율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75년 입대할 무렵에는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신체에 대해서는 도무지 자신이 없던 내가 현역으로 가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고 있다가 어쩌다 보니 가게 됐다. '신의 아들'이 아니라 '유력인사 자제'였기 때문이다. 병무 비리가 감당 못할 정도로 심해지자 당국은 대책이랍시고 '유력인사 자제'를 분류, 신검에서 배치까지 최대한 불리한 결정을 하도록 함으로써 민심을 달래려 했다. 그런데 이 '유력인사'에 국회의원, 장-차관이 들어간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일반 대학교수들을 넣은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덕분에 교수 어머니를 둔 내가 치이게 된 것이다.
형들의 학업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어머니는 병역문제에도 얼마간 신경을 쓰셨다. 큰형이 66년 대학 졸업 직전에 해군에 입대한 것은 든든한 빽을 믿어서였다.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 초열 여사의 부군이 함대사령관으로 계셨다. 당시에는 함대가 한국함대 하나뿐이었다. 형은 사령관 숙소 당번병으로 군대생활의 대부분을 지내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69년 제대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랐다.
체수가 작던 작은형은 68년 3학년때 체중미달로 면제받자마자 학부 편입으로 유학가 버렸다. 당시 체중미달 기준은 45킬로였는데 얼마 후 40킬로로 강화되었다. 형의 체중이 45킬로가 안 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의 병무행정 가닥으로, 한 번 재 보고 미달된다고 바로 면제 결정을 바라기 힘들었다. 면제 결정이 확실히 나오도록 뭔가 기름칠이 있었던 것 같고, 당시로서 드문(비용도 많이 드는) '조기유학'을 서두른 것도 병역 문제가 다시 제기될 위험을 의식한 것이었으리라 짐작한다.
형들의 병역 문제 처리를 보아 온 나로서는 내 일도 어떻게 "해주겄지~" 하는 기분으로 졸업 때까지 연기하고 있다가 막상 졸업을 하려니까 막막했다. 같이 놀던 친구들은 대부분 방위로 빠졌고, 빠지는 데 얼마 들더라는 얘기도 공공연히 주고받는데, 나는 '유력인사 자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2년간 안식년(당시에는 그런 이름의 제도가 아니었지만)을 얻어 외국에 나가셨다. 일단 대학원에 들어가 2년 더 연기하고 보기로 했다.
74년 석사를 마치고 바로 훈련소에 갔다. 훈련소 신검에서 즉일귀향인가? 판정을 받고 돌아와, 이만하면 현역 복무를 하게 되지는 않겠지, 하고 지내다가 결혼까지 했다. 박사과정 입학 수속도 밟았다. 그러고 75년 3월 다시 영장을 받아 대구 성서의 강철사단인지 양철사단인지 훈련대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집에 돌려보내 주지 않았다.
6주 훈련을 받은 얘기는 훈련소 생활에 관한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딱히 보탤 만한 게 없다. 대단히 힘들고, 때로 무지 괴로웠지만, 견뎌냈다. 다들 함께 겪는 일이라는 인식이 큰 몫을 했다. 훈련소를 나와 보름만에 영창에 갔을 때는 그런 인식이 없어서 더 괴로웠을 것이다.
'유력인사 자제'는 병과 훈련도 없이 전방 사단으로 보내게 되어 있었다. 성서를 떠난 사흘 후 춘천의 군단 보충대를 거쳐 화천의 사단 보충대에 도착했다. 보충대 막사 앞에 신병들이 열을 지어 서서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막사 문이 열리더니 작대기 셋 짜리가 모자도 안 쓰고 슬리퍼를 끌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오더니 신병 대오 사이를 어슬렁거리면서 놀고 있다. 맨 앞줄에 서 있던 나를 툭 치고 "뭐 이런 고문관까지 다 왔어?" 야지도 놓았다. 그러고 막사에 도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문을 빼꼼히 열고 "야! 한 놈 일루 와! 너!" 외치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넷! 이병 김기협!" 외치고 뛰어들어가려니 "더플백도 가져와!" 하는 것이었다.
보충대 행정반에 들어가 문을 닫고 돌아서려니 지금까지 거들먹거리고 있던 차 상병이 내 손을 부여잡고 굽신거리며 "선배님,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4년 후배라면서. 서류를 보고 선배님 오시는 줄 알았는데, 다른 신병들 이목 때문에 이런 무례한 방식으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사단 안에서는 아무 데라도 가고 싶으신 대로 보내드릴 테니 골라잡으라고 한다.
차 상병은(마에가리지만) 사람이 똘똘한 데다 쩐도 적당히 쓸 줄 알아서 제 몸도 편하게 지내고 (육군 사병 치고는) 보충대 밖에까지 꽤 영향력을 가진 재간둥이였다. 사단장 숙소당번 말고는 아무 거나 찍으라고 하는데, 알아야 면장질도 한다고, 뭘 알아야 찍고말고 하지. 어벙한 꼴을 보고는 차 상병이 그 사이에 들어온 병장 하나와 토론을 벌인다. 사단 사령부에선 저 형님처럼 점잖은("어벙한"이란 뜻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분이 적응하기 힘들 거고... 떨어져 있는 직할대가 좋을 것 같은데... 참, 의무중대에 전령 조수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래서 그 날로 나는 의무중대로 갔다. 전령 조수가 뭐하는 짓인지도 잘 모르면서.
전령은 상급 부대와의 사이에 문서를 전달하는 직책이었다. 의무대에서 작성한 문서들을 모아 사령부로 가져가 해당 부서에 접수시키고 의무대로 올 문서들을 모아 가져오는 일이다. 한 직책을 두 사람이 맡으면 상급자를 사수라 하고 하급자를 조수라 한다. 의무대 전령을 오래 맡아 온 강 병장의 제대가 석 달 후로 다가와 있어서 인수받을 조수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의무대에 가서는 그런 대로 쉽게 적응이 되었다. 만 25세가 넘어 박사과정 입학해 놓은 쫄병을 신기해 하는 분위기가 별난 놈 갈구고 싶어 하는 일부의 욕구를 대충 가로막아 준 셈이었다. 사수 강 병장은 연세대 재학 중에 입대한 친구였는데, 워낙 점잖은 성품이고, 며칠 지내다가 무슨 얘기끝에 자기 친구가 내 친구의 동생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나를 좀 어려워하기까지 하게 되었다.
강 병장이 며칠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가르쳐준 다음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강 병장은 오랫동안 갈구해 온 말년의 편안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 안 되어 일이 터지고 내가 영창에 가는 바람에 강 병장이 다시 전령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8시경 사령부로 출발하려는 참에 환자계가 이등병 하나를 데리고 왔다. 퇴실하는 (군단에는 병원이 있고 사단 의무대에는 '병실'이 있기 때문에 환자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입실', '퇴실'이라 했다.) 군악대 환자를 사령부 가는 길에 데려다주라는 것이었다. 나도 그때까지 이등병이지만 마에가리 일등병을 달고 다니고 있었다.
사령부 앞에서 함께 버스를 내린 뒤 군악대 막사를 가리키며 "저기가 군악대지?"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것을 보고 내 볼일 보러 갔다. 점심 후 마지막 볼일을 보고 버스정류장에 나와 있는데 찦차 하나가 지나가기에 군기 충만하게 "다~안결!"을 외쳤다. 그런데 그 차가 서더니 말똥 하나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전령들에게 외친다. "여기 의무대 전령 있어?"
내가 나서자 펄쩍 뛰어내려 아무 말 없이 나를 뒷자리에 태우더니 그냥 고고씽이다. 그러더니 이 차가 헌병대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아무 설명도 듣지 못하고 영창에 들어갔다. 영창 근무자들에게 한바탕 혼이 나면서 한 마디씩 주워모아 보니, 아침에 데려다준 군악대 신병이 그 길로 막사에 들어가는 대신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가 검문소에서 붙잡혔다는 것이다. 나는 말하자면 '탈영방조범"으로 붙잡혀온 셈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병에게 '인솔'을 맡긴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었다. 헌병 참모가 인솔을 내게 맡긴 자들의 책임을 묻자고 주장하다가 위에서 덮어버리니까 홧김에 눈에 띠는 대로 나를 '납치'해 온 것이었다. 의무대에서도 꿀리는 데가 있으니까 구명에 나서지 못하고, 그냥 그넘한테나 화를 푸시라고 맡겨놓는 상황이 되었다.
영창에 넣는 데는 사법적 입창과 징계성 입창이 있었다. 나처럼 뚜렷한 혐의도 걸지 않고 "버릇 고치도록" 집어넣는 징계성 입창은 아마 원천적으로 불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다. 정당한 입창자들보다 징계성 입창자들에게 가혹행위가 더 심했다. 사법적 입창자들은 다음 단계에 더 높은 곳에서 불평을 털어놓을 기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1주일 동안 영창에서 겪은 가혹행위는 수없이 많았지만, 가장 심한 것은 점심을 굶긴 것이었다. 내가 도착한 이튿날부터 반성을 돕기 위해 징계 입창자들은 점심을 생략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다른 가혹행위는 신체의 고통을 불러오는 것 뿐인데, 이 조치는 입창자들을 생사의 기로로 내몬 짓이었다. "모진 놈 곁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더니, 헌병 참모의 미움을 받는 나 때문에 영창 동기생들의 고생이 더했다. 그래도 그들이 내게 화풀이를 별로 하지 않은 데서 나는 인간성에 대한 조그만 희망이라도 키울 수 있었다.
훈련소보다 영창이 더 괴로웠던 이유를 그 후 간간이 생각하게 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훈련소는 누구나(적어도 많은 사내들이) 겪는 것인데, 영창은 너무나 재수없는 곳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또 하나는 가혹행위의 의도성이다. 훈련소에서는 기본목적이 훈련에 있었다. 단편적인 일탈행위는 있을지언정, 원칙적으로는 훈련의 목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가혹행위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창에서 징계성 입창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헌병 참모 이하 헌병대 전체가 목적의식을 가지고 일사불란하게 저지르는 조직적 행위였고, 이것이 윗선에서까지 묵인되고 있었던 것이다. 훈련소에서 나는 '그들'을 두려워했다. 영창에서 나는 '그들'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증오까지 하게 되었다. 영창은 기껏 혐오밖에 할 줄 모르던 내게 증오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영창에서의 고생은 의무대에서 간부들과 고참들의 동정심으로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 덕분에 제대를 두 달 앞둘 때까지는 다시 헌병대 신세를 지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입대 두 달만에, 그리고 제대 두 달 전에 헌병대 신세를 졌다는 것도 참 공교로운 일이다. 제대 말년의 헌병대 신세 얘기도 다음에 한 번 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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