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5. 09:21

며칠 전부터 시간에 대한 의식이 자리 잡으시는 것 같다. 회복이 덜 되신 상태에서 이 세상과의 접촉은 한 토막 한 토막 꿈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지. 정신 드셨을 때 인식과 사고 능력은 상당한 수준을 보이셨지만, 오래 지속 못하고 몽롱한 상태에 도로 빠져드셨다. 20년 전 내가 타이포이드 진단을 빨리 받지 못해 십여 일간 코마 상태를 겪던 때와 비슷한 것 아닐지 추측해 본다.

그런데 이제 정신 드신 상태가 정상인과 큰 차이 없을 만큼 길게 지속되시면서 사건들의 시간적 선후관계를 차츰 인식하시는 것 같다. 어제, 금강경 강독이 길어져 평소보다 한 시간쯤 더 앉아 있던 끝에 이제 일어설까, 생각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생각나셨다는 듯이 말씀하신다. "오늘은 늦었구나, 일하러 가야지?"

불경은 워낙 익숙하신 것이라 쉽게 접근이 되시는 것 같다. 그저께는 금강경에 앞서 반야심경을 내가 먼저 한 차례 읽은 다음 손수 읽으시겠냐고 권했더니 서슴없이 낭송을 하시는데, 역시 금강경보다 훨씬 쉽게 독경의 틀을 되살려내신다. 한 차례 읽고서 고개를 갸웃갸웃 하시는 것이 '더 잘 외울 수도 있는데,' 하는 눈치시기에 다시 한 번 읽으시기를 권하니 얼른 응하신다. 역시 첫 번째보다 잘 외우신다.

금강경을 놓고는 약간의 토론도 있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수다원이..."로 시작하는 장 읽기를 마치는데, "야, 너무 어렵다. 무슨 뜻인지 영 모르겠다." 하신다. "어머니, 요 앞쪽은 그런 대로 무슨 얘긴지 알 만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발판으로 뒤쪽에서 '아란나' 얘기 한 것은 저도 캄캄해지네요." 하니까 알아들으시겠다는 듯이 끄덕이신다. 내가 이어 "앞쪽에서 쉬운 얘기 한 게 뒤쪽의 어려운 얘기 끌어내려고 발판을 놓아준 것 같은데, 앞쪽도 알 듯 말 듯하니 어쩌겠습니까? 우리 수준이 그 정돈가 봐요." 하니까 더 크게 끄덕이신다. 합리적인 얘기는 알아들으시기 때문에 초월적인 얘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하시는 것이고, 내가 설명드리는 정도는 석연하게 이해를 하시는 것이다.

오늘은 <밖에서 본 한국사>를 가져갔더니 전번에 보실 때와 반응이 다르시다. 물론 처음 보시는 책이라 생각하신다. 그러나 왜 이 책을 썼느냐, 무슨 얘기를 담았느냐, 물으시는 데는 다년간 논문 심사 하시던 풍모가 되돌아와 있다. 펼쳐서 읽으시려다가 "야, 글자가 너무 작다." 하시기에 펼쳐 보여드리면서 머리말을 읽어드리니, 앞 부분 두 쪽 가량은 문장 하나 끝날 때마다 끄덕끄덕하시다가 뒤쪽으로 가면서 다소 현학적인 얘기가 나오니 시들해지신다.

그저께는 아내도 일을 쉬어 점심때 함께 갔다. 전에 비해 며느리 대접이 많이 좋아지셨다. 아마 전에는 과거의 기억을 상당히 갖고 계신 배경 위에서 기억이 많지 않은 상대가 작게 보이셨던 것이, 지금은 배경이 더 흐려졌기 때문에 지금 나타타는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것 아닐까 생각된다. 며느리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누구든 대하실 때 삐딱하게 보는 먹물적 시각이 곁들일 때가 많았는데, 요즘은 밝고 따뜻한 면이 든든하게 깔려 있다. 그러면서도 유머 감각은 많이 살아 계셔서 다행이다.

어제 갔을 때, 세배 드릴 형편은 아니고, 짐짓 "어머니, 경하 드리옵니다." 점잖게 말씀드리니 어머니도 표정을 점잖게 가다듬으시고 "뭘 경하한다는 건가?" 물으신다. "오늘로 어머님께서 아흔 살이 되셨습니다." 하니까 점잖은 기색이 싹 날아가고 입을 반쯤 벌린 채 눈을 꿈벅꿈벅하시다가 "아흔? 내가? 정말?" 하신다. "네, 어머니, 깜짝 놀라실 일이죠?" 하니까 엄숙한 표정이 되어 한참 저 멀리 눈길을 던지고 있다가 내게로 얼굴을 돌리시고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물으신다. "그래서 뭐 해줄 거야?" 순간 당황했다가 농담 모드로 얼른 돌려 "어머니, 업어드릴께요!" 했더니 "뭘 해줘?" 물으시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으시고 목청을 높여 "징-그-럽-다!" 외쳐 방 저쪽의 간병인들까지 다 돌아보게 만드신다. 눈과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으신 채로.

그저께 아내와 병원에서 나와 전에 계시던 자유로병원에 갔다. 아내가 조 여사에게 해자부리(해바라기씨) 등 준비해 간 간식거리를 전해 주니 더할 수 없이 기뻐하고 감격하더란 얘기는 나오는 길에 들었다. 살펴드리고 있는 환자의 보호자들도 챙겨주는 이가 없는데, 떠난 분들이 잊지 않아 주는 것이 고맙다고. 아내가 조 여사랑 얘기하는 동안 나는 당직으로 나와 있던 간호부장에게 병원 사정을 설명받고 한 차례 둘러보았다. 다시 오신다면 잘해 드리겠다고, 좋을 것이라고, 얘기는 하지만 여기 다시 모시기는 힘들 것 같다. 여기 계실 때도 지나친 능률주의 때문에 간병인과 환자들을 쓸 데 없이 바꾸고 옮기는 폐단이 불안했는데, 그 문제가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 계신 병원을 어떻게든 잘 구워삶아 거기서 가급적 편하게 계시도록 해야겠다. 혹시 회복이 아주 좋으시면 진인선원 같은 불교계 요양원도 생각해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의료시설 없는 곳은 아무래도 곤란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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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