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에 다녀온 후 내게 수호천사가 생겼다. 고교 3년 선배인 법무관 정아무개님이 나와 같은 무렵 같은 사단에 배치되었는데, 그분이 내 봉변 소문을 듣고 나를 가엾이 여기게 된 것이었다. 기억이 확실치 않은데, 아마 보충대 차 상병이 연락해 줘서 사령부 가는 길에 인사드리고 점심을 얻어먹었던 것 같다.
정 법무관은 첫눈에 '열혈남아'였다. 기분좋을 때 웃음도 통쾌하거니와 화났을 때 그 부리부리한 눈에 힘이 들어가면 누구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내 영창 경위를 묻고 나서 결연한 한 마디로 그 얘기를 마무리한 기억이 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김 일병 고생했어. 앞으로 내가 있는 동안 김 일병 신분은 내가 보장하겠어!" 그러고는 다른 화제로 바꾸며 화통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분은 약속대로 2년 동안 내 수호천사 노릇을 해줬다. 떠도는 얘기로는 사단 간부들 회식하는 자리에서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이 의무 참모에게 큰 소리로 내 얘기를 했다고도 한다. 한국 사회의 중요한 인재인데, 군에서 맡아가지고 있다가 제대로 돌려보내야지, 이유도 없이 영창에 굴리다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옆에 있던 헌병 참모 얼굴이 벌개지더라는 얘기도 있고. 그분이 성격이 괄괄한 데다가 노골적으로 나를 감싸줬기 때문에 누가 지어낸 얘기였으리라 생각한다.
2년 후 그분이 떠날 때는 나도 중고참 축이 되어 부대에서 지내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 형편이었다. 행정 담당 중고참이 되면 아는 게 너무 많기 때문에 잘못 건드리면 다치는 수가 있어서 간부들도 조심스럽게 대한다. 나도 정 법무관의 후광 아래 너무나 많은 일탈이 있었기 때문에 숨 죽이고 조심하며 잘 지냈다.
그러다가 만기를 6개월 가량 앞둔 어느 날 작은 충돌 하나가 있었다. 나와 같은 무렵 소위로 왔다가 막 중위 단 애가 하나 있었는데, 영 덜떨어진 애였다. 고 녀석이 당직을 선 후 신새벽에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전원 연병장에 집합! 열외 없음!"을 때린 것이었다. 나는 집합 명령과 구보 명령에는 응했지만 "대가리 박아!"에는 응하지 않았다. 고 녀석 얼굴이 새빨개져서 폴짝폴짝 뛰었지만 내게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내 보직을 바꾸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령을 그만두고 취사병이 되었다.
2백명 인원 밥을 해주는 취사장에 두 명이 있다가 내가 가서 세 명이 되었다. 의무대라서 취사시설이 잘 돼 있기 때문에 충분하고도 남는 인원이었고, 모든 집합에서 최소한 한 명은 원천적 열외니까, 그리고 식생활에 애로가 없는 자리니까 괜찮은 보직이었다. 그런데도 험한 일이란 통념이 있었고, 따라서 권 중위가 나를 그리 보낸 것이었다.
취사장 갈 때 나도 말년 바라보는 고참이었는데, 진짜 말년 고참 하나가 거기 있었다. 아직도 이름을 기억한다. 서진삼 병장. 나보다 4개월 가량 고참인데, 수송부 정비병으로 있다가 선임하사의 미움을 받아 꽤 오래 전부터 취사장에 와 있었다. 공고 나와서 공장 다니다가 군대 왔다고 하는데, 좀 모난 성격으로 보이는 사람이지만, 나는 은근히 정이 갔다.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면서도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랄까? 함께 지내면서 내 먹물을 우습게 보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존중할 만한 면은 존중해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나도 그의 고지식함에 어이없을 때가 있으면서도 좋아하고, 얼마간의 경의도 품었다.
그래서 몇 달 동안 참 잘 지냈다. 말년 고참들이면서도 서로 일을 미루지 않았다. 일거리 하나 생겼을 때 서 병장의 전형적인 접근 방식. "이 일은 중요한 일이므로 쫄병한테 맡길 수 없다. 그렇다고 왕고참을 귀찮게 할 일은 아니다. 따라서 중고참인 김 병장이 해야 한다. 그런데 김 병장은 이런 일 할 능력이 없는 등신이다. 따라서 본관이 한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달려드는 것이다. 일종의 독특한 리더십인데, 솔직히 말해서 당시의 군대에선 잘 안 통하는 리더십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통했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안해 보던 짓들을 배워가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내며 서로의 사람됨을 웬만큼 익혔을 때 하루는 한가한 시간에 서 병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를 꺼낸다. "김 병장, 나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화장실 가고 싶다는 얘기도 진지한 표정으로 하는 양반인지라 나는 별 긴장감 없이 대꾸했다. "말씀만 하십시오, 서 병장님."
"어? 정말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는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 달만 있으면 서 병장님 안 보고 살 수 있는 판인데, 무슨 부탁인들 못 들어드리겠습니까?"
서 병장, 씩 웃더니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내 건네주며 펼쳐보라고 눈짓을 한다. 열어 보니 뭔가 빽빽하다. 들여다 보니 '서진삼 리스트'였다. "*월 **일 **시 행정관 닭 두 마리", "*월 **일 **시 인사계 쌀 한 가마", "*월 **일 **시 대장 기름 한 통", "*월 **일 **시 김 대위 라면 두 줄" 식으로 소소한 비리들의 메모가 가득했다.
뭐라고 응대해야 할지 난감해서 내용이 무척 재미있다는 듯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는데 서 병장이 얘기한다. "김 병장이 높은 사람들 잘 통하는 거 알어. 전번 법무관 같은 분께 전해 달라고 부탁할까도 생각했었어. 그런데 아무래도 내 손으로 처리할 일이야. 소원수리를 내고 싶어. 그런데 나는 글을 못 쓰잖아. 김 병장이 이걸 글로 정리해 주면 고맙겠어."
이거 참... 당시 군대의 '관행'에서 벗어나는 특출한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드러나면 연루된 사람들이 혼이 나거나 최소한 땀을 빼게 될 일들이다. 의무대의 장교, 하사관 가운데 내가 진심으로 존중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권 중위처럼 진짜 이상한 넘들 두엇 외에는 인간적으로 이해 못할 사람이 없었고,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소한의 배려를 서로 나누며 지내는 것이 괜찮았다. 나는 보수적인 인간이니까.
그런데 서 병장이 그 사람들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갈 일을 꾸미며 내게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봤다. 그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그는 군대생활을 통해 특정인에게 분노를 쏟은 일이 내가 아는 한 없는, 드문 사람이었다. 그는 체제를 미워한 것이었다. 말로는 이 조그만 일들이 모두 사병들을 착취한 나쁜 짓이므로 그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비리를 저지르고 이웃을 괴롭히게 하는 체제를 미워한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정색을 하고 내가 말했다. "서 병장님, 그런 일 안 하시기를 저는 바랍니다. 여기 걸리는 사람들 중에 혼 나 마땅한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여기 적혀 있는 일들은 적절하고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 병장님 생각이 옳은 것은 인정합니다. 글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꼭 제출해야 할지는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고맙네. 내가 뭘 더 바라겠는가?"
그리고 며칠 동안 우리는 틈만 나면 그 일에 매달렸다. 메모만으로 알아보기 힘든 맥락을 그에게 확인받기도 하고, 과연 제출해야 할지 토론도 했다. 내가 집필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는 나를 철저히 보호해 줬다. "취사장 한 명 빼고 집합"에 제대를 한 달 앞둔 그가 나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사나흘 걸렸던 것 같다. 에이4 용지에 빽빽하게 열네 장인가? 이 작품이 아직도 어느 문서창고에 보관되고 있을지 모르겠다. 워낙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문서였으니까.
서 병장이 제대할 때 나는 말년휴가 나와 있었는데 그가 보충대에서 전화해, 자기 나가는 날 용산에서 보자고 했다. 역 앞에서 만나니 씩, 특유의 웃음을 짓고 "김 병장님, 이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동안 죄송했습니다." 한바탕 웃음을 나눈 다음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보이며 "이걸 이제 집어넣을 참인데, 혼자서는 용기가 날지 자신이 없어서 김 병장을 불렀어요." 한다. 나는 "안 넣으셔도 됩니다. 그런 기록을 모으고, 또 소원수리를 작성한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듭 얘기했지만 그는 더 이상 말 없이 뚜벅뚜벅 소원수리함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넣었다. 돌아서서 나를 보고 한 마디 했다. "아~ 이제 정말로 제대한 기분이다!"
서 병장이 제대하고 두 달쯤 지나 내 제대가 두 달쯤 앞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난 데 없이 행정반으로 오라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들어가 보니 행정관 자리에 사복 하나가 앉아 있는데, 눈매가 날카롭고 예리한 인상이었다. 앞에 앉으라 하더니 책상 위의 종이를 돌려 내게 보여주며 묻는다. "이거 김 병장 글씨가 맞습니까?" 서 병장의 소원수리를 복사한 것이었다.
나는 즉각 눈을 들어 그 사람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그러자 그가 일어나며 말했다. "나랑 좀 갑시다." 행정반 앞에 대 놓은 찦차에 올라 바로 헌병대로 갔다. 헌병 참모의 찦차였다.
헌병대 행정반에 들어가니 헌병대 대원은 아무도 없고 또 한 사람 사복만 있었다. 둘이서 소원수리 작성한 경위를 확인하는 데 얼마 시간도 걸리지 않았고, 언성 높이는 일도 없었다. "협조해 줘서 고맙다"는 말로 회견 같은 취조를 끝내고 혼자 돌아가라고 한다. 정문을 걸어나오는 내게 위병이 "다~안결!" 경례를 올리는데, 그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부대에 돌아가니 간부들은 모두 똥 씹은 표정이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다. 취사반에 돌아가 하던 일 하고 있는데, 행정반 사병 하나가 와서 헌병대 갔던 일을 묻다가 귀뜸해준다. 왔던 사복들이 "CID"라고. 우와~ 전설처럼 듣기만 하던 그 CID? 그 뒤에 들은 얘기로 보면 CID인지 뭔지는 몰라도 무지하게 쎈 데서 나오기는 나왔던 모양이다.
저녁 시간에 권중위가 나 보고 더플백을 싸라고 했다. 내일 아침 전출 간다고.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알겠다고 하는데 자기가 덧붙인다. "철책선 안에 한 번 들어가서 박박 기어 봐!"
이튿날 새벽, 퇴실환자 두엇과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연대 의무중대로 전출 갔다. 행정반 앞에 앰뷸런스가 서니 최 병장이 나오다가 더플백 내리는 나를 보고 묻는다. "김 병장님 오셨어요? 전출병이 있다고 하던데, 어떤 놈이예요?" 연대 의무중대 행정병은 초년에 상급부대인 사단 의무대로 전령 다니는 게 보통이다. 상급부대랍시고 거만하게 구는 일이 많아서 티꺼우니까 쫄병만 보내는 거다. 그런데 나는 마주치면 점잖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편이라서 이 친구들 사이에 평판이 좋았다. 최 병장은 나보다 두어 달 아랜데, 당시 자기 부대에선 최고참이었다.
내가 태연하게 "전출병? 나야, 나." 하니까 놀라 자빠진다. 그 날 저녁 예정돼 있던 신고식이 '환영의 밤'으로 둔갑해 한 잔씩들 거나하게 했다. 상급부대라면 괜히 티꺼워하는 기분에다가, 하급부대로의 전출병이라면 꼴통일 테니까 군기를 확실히 잡아야겠다고 별르고들 있었는데... 김 병장님과 얼마동안이라도 같이 지내게 되어 영광이라고 고참들이 야단들을 하니까 졸병들도 덩달아 흥겨워들 한다. 하기사 하룻저녁이라도 신고식보단 '환영의 밤'이 더 좋으니까.
그곳 중대장은 군의관 중에 드문 터프가이였다. 다음날 나를 불러놓고 간단명료하게 얘기한다. "나는 네 말년 생활을 최대한 편안하지 못하게 하라는 부탁을 받고 있다. 그래서 너를 내 눈에 안 보이는 곳에 보내려 한다. 불만 있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민통선 안에 배치되어 있던 대대의 의무지대로 그 날로 건너갔다. 지대장인 군의관은 내가 온 것을 보고 히죽히죽 웃으며 "김 병장 여기서 보니 반갑구먼. 사고만 치지 말고, 소원수리만 쓰지 말고, 우리 아이들이랑 잘 지내게. 아 참! 자네에게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구보를 시켜주라는 권 중위의 부탁이 있는데, 내가 직접 살펴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게." 하는 것이었다.
지대에 내보내는 것도 쫄병들이었다. 너댓 명 지대원 중에 최고참이 군대생활 절반쯤 한 친구였다. 중대 본부의 왕고참들이 엄명을 내려 놓기도 했겠지만, 나 같은 풍운아와(CID 조사까지 받은!) 몇 주일 함께 지내는 것이 지루한 군대생활에 좋은 양념이기도 할 것이어서, 나는 지대장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았다. 특별한 신분으로 특별한 대접을 꼭 받아서만이 아니라, 지대원들이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분위기가 나는 너무 좋았다. 사람 수가 적은 데라서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앞서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작부터 이런 데서 근무했으면,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제대한 몇 달 후 사단 작전처에 근무하면서 나랑 친하게 지내던 P가 휴가 나온 길에 보고 싶다고 해서 만났을 때 얘기를 들었다. 얼마 전 참모총장이 전 육군 모든 부대로 내려보낸 지휘서신에서 서 병장 소원수리 내용과 상황을 적시하며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모든 지휘관들이 각별히 유의하라 했다고.
서 병장과 나,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도 진보와 보수 사이의 한 차례 접촉사고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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