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5. 09:11

오랫만의 강연 준비에 몰두하느라 며칠 기록을 못했다. 회복에 따라 정신활동이 활기를 더해 가면서 재미있는 모습을 많이 보이시는데 적어놓지 못하는 것이 그 때 그 때 아깝기 그지없지만, 이제 그런 디테일을 시시콜콜히 적다가는 내가 다른 일을 아무것도 못하겠다. 한 사흘마다 생각나는 대로 적으면서 전반적인 흐름만 보이게 하면 되겠다.

나를 놀리는 일에 정말 큰 재미 붙이셨다. 내가 내 자랑 하는 것 같지만, 평생 이만한 장난감 실컷 가지고 노시는 것도 모처럼이시리라 생각한다. 갖고 노는 방법이 하루하루 느신다. 처음에는 내가 드리는 자극에 대한 반응에 장난기를 곁들이는 식으로 시작하셨는데, 차츰 장난칠 꾀를 스스로 만들어내신다.

오늘은 김호순 선생님이랑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셨다. 점심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전화를 돌렸더니 통화중이셨는데,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으려니 왜 넣냐고 물으신다. 김 선생님께 걸었는데 통화중이라고 대답했더니, 못마땅한 기색으로 "무슨 여자가 그리 바뻐?" 하신다. 이제 퇴직해서 안 바쁘시니까 전화통에 매달려 사시나 보죠, 하니까 "그건 그럴 것 같다." 수긍하신다. 몇 분 후 통화가 되어 바꿔 드리니 바로 어제저녁 헤어진 분과 얘기하시는 듯하다. 시간 관념이 의식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신 것 같다.

점심식사에는 세 가지 반찬이 다 드실 만한 것이어서 드신 분량이 많았다. 죽을 좀 남기려 했는데, 하도 맛있게 드셔서 거의 다 드렸다. 바닥에 조금 남았을 때 "공양 잘 하셨습니다, 어머니." 하고 치우려니 "깨끗이 다 먹어야지." 하고 더 달라신다. 그릇을 바닥이 안 보이실 만큼만 기울여 보이며 "깨끗이 드셨는데요, 어머니. 훌륭하십니다." 하니까 조금 미심쩍은 기색으로 포기하신다.

식사 후에는 '소화제'다. 아내가 배와 사과 갈아 500 cc 가량 되는 병에 넣어드리는 것이 이틀 겨우 버틴다. 처음에는 "야~ 달다!" 하고 자극적으로 느끼시던 것이 이젠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반겨 드신다. 지나치게 많이 드시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내가 쓰는 수법은 적당한 대목에서 어머니가 뭐라 그러시기 전에 "어머니, 두 숟갈만 더 드세요. 제 부탁입니다." 하고 엉구럭을 떠는 것이다. 그러면 아들 부탁이니 특별히 먹어 주신다는 듯이 거드름을 부리며 받아 드신다. 두 숟갈 드신 뒤에는 "어머니, 드신 김에 한 숟갈만 더 드세요." 해서 한 숟갈 더 드시고는 책임 완수하셨다는 듯이 만족스럽게 소화제병 치우는 것을 쳐다보신다.

오늘은 두어 숟갈 잡숫다가 "야, 이 좋은 게 어디서 났냐?" 하시기에 "며느리가 만들어 드린 거예요, 어머니." 했더니 "며느리? 그게 누구지?" 하신다. 기억력 감퇴가 시작되신 뒤의 일은 입력부터 잘 안 되신 것 같다. 얼른 사진첩을 꺼내 부부가 어머니 모시고 찍은 사진을 펼치고 짚어 보이니까 한참 들여다보다가 "거 사람이 괜찮아 보이네." 하신다. 요새도 계속 와 뵈면서 구박받고 가는 그 '제자'와 연결은 안 되시는 것 같다. "어머니 보시기에 괜찮으세요? 그럼 내일 데려올께요." 하고 넘어갔다.

오늘 획기적인 진도를 보이신 것은 금강경 강독이다. 소화제를 치운 뒤 "어머니, 금강경을 읽고 싶은데 같이 읽으시겠어요?" 하니까 "그래, 읽자꾸나." 하고 선선히 응하신다. 펼쳐 드리니 낭송을 시작하시는데, 일전까지도 글자를 읽어내려 가시던 것과 달리 절에서 독경하던 가락이 되살아나셔서, 책장을 넘겨드리는 동안 다음 장 앞 부분을 미리 암송하시기까지 한다.

서너 쪽 읽으신 뒤에 끊고 나를 쳐다보시기에 "이제 제가 읽을까요, 어머니?" 하니까 끄덕이신다. 뭐든 말씀드릴 때 꼭 "어머니"를 넣는다. 언젠가 쓰신 수필에서 그렇게 붙이는 것이 정감이 붙어 좋다는 말씀을 하신 것도 있었지만 내게는 따로 실용적 목적이 있다. 내가 당신 아들이라는 사실을 깜빡하실 위험을 줄인다는 목적이다.

평소 현토식으로 읽던 것을 오늘은 어머니 뒤를 따라 독경식으로 읽으니 편안하게 들으며 눈으로 경문을 따라 읽어내려 가신다. 그러다가 호흡을 바꾸는 대목에서 물으신다. "그게 무슨 뜻인지 넌 아냐?" "알 듯 말 듯해요, 어머니. 그래도 자꾸 읽으면 조금 더 알 듯하니까 자꾸 읽는 거죠." "그러니까 너도 확실히는 모른단 얘기지?" "네, 어머니. 확실히는 모르죠." 그러니까 씨익 웃으며 하시는 말씀, "그것 참 다행이로구나." "확실히 모르는 게 뭐가 다행이예요, 어머니?" 물으니까 점잖게 대답하신다. "나는 모르는데 너만 알까봐 걱정했다."

그러고 나서는 읽은 뒤에 해석을 해달라고 요구하신다. 완전 강독시간이 되었다. 대충 합격으로 인정해 주시는 눈치다. 정말 풀이가 안 되는 대목에서 "어머니, 이런 대목은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하면 "그래, 그런 대목이 있지." 선선히 인정해 주신다. 한 장이 끝나면 "조금만 더 읽어다고."를 거듭하셔서 보통 짧으면 10분, 길어야 30분 정도에 끝나는 독경이 오늘은 꼬박 한 시간을 끌었다.

어젠가 그저께에 이어 오늘도 '눈치' 얘기가 잠깐 나왔다. 마구 호통을 치실 때 짐짓 두려워 떠는 시늉을 하고 있는데, "넌 뭘 그렇게 눈치를 보고 있냐!" 하는 호통이 또 떨어졌다. "네, 어머니, 제가 요새 눈치가 좀 늘었어요. 어렸을 땐 제가 참 눈치가 없었죠?" 했더니 옛날 생각이 나시는 듯 호통칠 일을 잊으시고 "그래 눈치 참 더럽게 없었지." 하신다. 근래 일보다 옛날 일이 더 실감나게 느껴지시는 게 많은 것 같다. 오늘도 무슨 말씀 끝에 내가 "제가 원래 눈치없는 놈이잖아요?" 하니까 "그래, 네가 원래 눈치가 없었지." 하고 당연한 일처럼 말씀하신다.

곁을 떠날 때 "어머니 이마에 뽀뽀를 하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하면 순순히 응하실 때보다 의심스러운 눈길로 고개를 가로저으실 때가 많다.(뽀뽀는 원래 다정다감한 큰형의 장기인데, 미련퉁이 셋째가 엉뚱하게 나서는 것이 수상하신 것 같다.) 그럴 때 "아주 살짝 할께요. 승낙해 주세요, 어머니." 엉구럭 떨면 마지 못해 허락하는 시늉이시다. 뽀뽀를 해드리고 나면 감촉도 괜찮은 위에 아들 소원도 들어줬다는 만족감이 겹쳐지시는 듯 기분이 좋아지신다. 나오면서 손을 흔들면 마주 살래살래 흔드실 때가 많다. 그런데 오늘은 바로 뽀뽀를 승낙해 주셨는데, 나오면서 손을 흔드니 뜻밖의 일갈이 나오신다. "아무리 애교를 떨어 봐라!"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09. 1. 27  (3) 2009.12.15
09. 1. 23  (0) 2009.12.15
09. 1. 16  (0) 2009.12.15
09. 1. 15  (0) 2009.12.15
09. 1. 12  (0) 2009.12.09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