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9. 14:01
 


오늘은 아내와 둘이서 갔다. 아내는 한 달만에 가는 것이고, 나는 그 사이에 세 번째다. 아내가 한 달에 세 번 쉬는데, 그 중 한 번을 시어머님께 바치는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어머니가 요양원에서 편안하신 것을 확인하니까 이렇게 여유가 생겼다. 시내의 병원에 계실 때는 특별히 조심스러우실 때가 아니라도 일 끝나고 병원 들르는 것을 당연한 일과로 여겼었는데.

아내를 먼저 올려보내고 나는 아래층에서 볼일 본 다음 10분 후에 올라갔다. 아내와 함께 복도 가 테이블에 앉아 계시다가 다가오는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오늘은 좀 시큰둥하시다. 뭔가 심사가 복잡하신 것 같다.

아니나다를까, 몇 마디 나눈 뒤 얼굴을 찌푸리며 밑도 끝도 없는 말씀을 하신다. "야, 기협아, 난 참 마음이 슬프다."

"네, 어머니? 뭐가 슬프세요?" 최대한 슬픈 표정을 지어야 말씀이 잘 나오실 것 같다.

"이제 살 날이 길지 않은 것 같아서..."

"네, 어머니, 그 말씀 들으니 저도 마음이 슬프네요." 일단 맞장구는 쳐 놓고 이게 무슨 가닥인지 눈치를 살핀다. 같이 지내던 분이 돌아가신 분이 계셨나? 무슨 이상한 꿈이라도 꾸셨나?

한참 말씀이 더 없으셔서 내가 반격에 나섰다. "어머니, 슬프긴 하지만... 사람 산다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예요? 그래도 어머니가 그걸 똑바로 바라보실 수 있다는 게 저는 다행스럽고 고마워요. 언젠가 떠나시리라는 사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신다면 어머니도 얼마나 더 힘들고 저희들도 얼마나 더 괴롭겠어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묵묵하시다가 분위기를 일신하듯 노래가락 화법으로 다시 넘어가신다.

이런 대목에서 노래가락 화법의 의미가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사고력은 원활하시고, 몸은 부자유스러운데 생각에는 거침이 없으시다. 혼자 누워 한바탕 생각에 잠기셨다가 누가 와서 말을 걸거나 식사하러 움직이려면 잠겨 있던 생각을 벗어나고 잊어버리시지만 여운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짙고 옅은 여러 층위의 생각들이 마음속에 겹쳐져 움직일 것이다. 복층적 심리상태는 일반인에게도 어느 정도 나타나는 것이지만 어머니 같은 상태에서 그 층이 특히 더 두터울 것 같다.

누군가 특정한 상대를 응대할 때, 마음속의 여러 층위 생각이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노래가락의 힘에 의지하시는 것 같다. 또,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여러 사람을 응대하실 때는 어느 상대에게도 적당히 통할 수 있는 융통성을 역시 노래가락의 힘에서 얻으시는 것 같다. 치밀하게 따져서 화법을 선택하시는 것은 아니겠지만, 가르치는 일을 오래 한 습관이 거의 본능처럼 그런 힘을 가진 화법을 끌어내는 것이 아닐까싶다.

생각해보면 퇴직 후 다년간 수필 쓰신 필법에도 이 노래가락 화법과 통하는 면이 있었다. 특정한 개인의 특정한 경험과 생각을 서술하면서 독자들의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내 입장에 집착하지 않는 관조의 자세 덕분이었다. 경험과 생각의 주체인 자아를 객체화시킴으로써 독자와 사이에 벽을 허물고 함께 나누실 수 있었던 것이다. 퇴직 때까지 자식들과 제자들을 가르쳐 온 습관과 퇴직 후의 집중적 수행이 겹쳐져 관조의 자세가 이뤄지신 것이리라. 수행하실 때 염불선을 좋아하신 흐름이 지금의 노래가락 화법에 이르신 것 같다.


노래가락 화법으로 넘어가신 뒤에는 짖궂은 장난기가 평소보다 많으셨다. 특히 나를 욕하는 재미가 쏠쏠하셨다. 몇 마디 오고가다가 내가 드린 무슨 말씀에 대꾸가 불쑥 "그렇다, 이 쌍놈아~"로 나오셨다. 지금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드린 말씀에 욕 먹을 아무 빌미도 없었는데 제풀에 욕이 나오셨다. 두어 차례 "쌍놈" 소리 들은 뒤에 정색하고 "어머니, 저를 욕하시는 게 재미있죠?" 하면 "그래, 이 쌍놈아~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이 너 욕하는 거다, 이 쌍놈아~ 그 재미에 나는 산다, 이 쌍놈아~" 흥에 겨워 저절로 증폭되는 것이었다.

2년간 계시던 병원을 떠나 반년 전 이곳으로 옮기신 후 늘 마음이 편안해 보이시거니와, 나를 "쌍놈"으로 몰아붙이실 때는 정말 더할 수 없이 마음이 편하고 흥겨우시다. 나 꾸짖는 재미는 병원에서부터 붙이신 것이다. 병원에서 내가 한바탕 호통을 듣고 나온 뒤에 간병인 한 분이 "아드님이 그렇게 잘하시는데 왜 꾸짖으세요?" 여쭈니까 흐뭇하게 웃으면서 "그눔이 나한텐 꿈쩍 못한단 말이야." 하시더라는 얘기를 전해듣기도 했다.

그때는 꽤 다양하던 욕설 내용이 지금은 노래가락 "쌍놈"으로 정형화되었다. 병원에서는 간병인, 간호사들에게도 "쌍년" 소리를 많이 하셨고, 더러 진짜 분노의 마음을 담은 것도 있었다. 이곳에 와서 얼마간 욕설이 계속되다가 두 달 가량 지나면서 욕을 끊으셨다. 그러고서 조금씩 다시 시작해 요즘은 꽤 도로 즐기시게 되었는데, 분노의 마음이 전혀 안 담긴, 순전한 애교성 욕설이다. "쌍놈" 타령 들으러 모여든 간병인 몇 분이 오늘 아침 목욕시켜 드리면서 "쌍년" 소리 많이 들었다고 서로 자랑하듯 한다.

아침의 욕설 사태 고발이 이어지고 있는 동안 어머니는 "무슨 얘기 하는 거야? 나랑은 상관 없어." 하는 표정으로 시치미를 떼고 아무 말 없으시다. 자아를 객체화하는 관조의 자세가 정말 경지에 오르셨다. 그러다가 치료사 김 선생이 끼어들어 요즘 자세 바꾸실 때나 치료해 드릴 때는 괜찮으신데 목욕 때는 조금 힘들어 하시는 것 같다고 얘기하자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러나 입은 아직 떼지 않으신다. 욕설 사태에 대한 책임 문제가 아직 지나가지 않았으니까. 다 알아들으면서 저렇게 시치미를 떼시다니, 정~말 교활하시다.


한 시간 반 가량 모시고 앉았다가 피곤하다고 하셔서 눕혀 드렸다. 오랫동안 앉아 계셔서 자세가 불편하셨을 뿐인 듯, 누워서도 정신은 초롱초롱하시다. 반야심경 암송에는 아무 거침이 없으셨고, 금강경 몇 꼭지 읽는 데는 평소처럼 눈으로 읽다가 머릿속에서 외우다가 오락가락하신다. 그런데 외우시는 대목에서는 통상적인 독경 방식을 벗어나 노래가락 화법을 적용시키려는 경향이 전보다 더 뚜렷이 나타난다.

독경이 끝났을 때 외출에서 돌아온 원장님이 들어왔다. 12월호와 1월호에 실린 내 글을 틈날 때마다 읽어드리면 좋아하신다고 얘기하니까 어머니가 내게 눈을 돌리고 "그 글을 네가 쓴 거냐?" 물으신다.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네가 뭘 안다고 글을 써!" 불호령이 떨어질 각오를 하고 있는데, "그러냐? 잘 썼다. 고맙다." 하는 부드러운 말씀.

잠시 후 "그래 <불광>에 계속해서 글을 쓸 거냐?" 물으시기에 "네, 어머니께서 안 써 주시는데 저라도 써야지요. '꿩 대신 닭'이라고 하잖아요?" 했더니 고개를 바로 하고 한참 허공을 바라보다가 말씀하신다. "그래, 거기 쓰는 건 좋은 일이다. 잘 쓰거라."

다른 어느 일에 대해서보다 구체적인 관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일이다. <불광>에 글 쓰기가 그분에게 오랫동안 매우 중요한 일이었던 사실을 비춰 보여주는 관심이다. 그리고 내가 어머니 글 쓰기를 이을 만한 마음가짐이 되었다고 판단해 주시는 것 같다. 그 동안 아버지 일을 이어서 한 것은 이것 저것 꽤 있었지만, 이제 어머니 일도 잇는 것이 있다니, 이런 일 생각하면 내가 효자 중에도 특종 효자 같은 기분이 든다.

원장님과 이사장님이 내 <불광> 글 쓰기를 반가워하는 데는 또 다른 의미도 있을 것이다. 이 요양원은 시설이나 서비스나 매우 훌륭한데, 그 사실이 충분히 알려지지 못한 것이 내가 보기에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이런 글에서 이곳의 좋은 점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것이 반가울 것이다.

나도 어머니가 편안하고 쾌적한 생활조건을 누리시는 이곳의 좋은 점을 더 많이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좋은 조건 제공하는 데 보답하고 싶기도 하고, 어머니가 함께 지내시기 좋은 도반들께서 이곳을 고려할 기회가 더 많아지기 바라는 실제적 동기도 있다. 그러니 내 글에 더러 <세종 너싱홈> 홍보물 같은 냄새가 나더라도 독자들께서 혜량해주시기 바란다.


(이 글은 <월간 불광> 2월호에 기고할 글의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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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