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6. 22:02
 

대학 입학을 앞두고 처음으로 영천군 청통면의 고향을 찾아갔다. 대구 대명동에 있던 고종사촌 영돈 형님 집에 가 큰고모님께 인사드리고 머물다가 하룻밤 다녀왔다. 큰고모님이 그 몇 해 전까지 서울에서 셋째 아드님 기돈 형님 집에서 지내신 것은 기돈 형님이 고와서나 서울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 형제들에게 할머니 노릇 해주려는 뜻이었으리라는 것을 나중에 짐작하게 되었다. 우리도 클 만큼 크고 기돈 형님이 대전으로 옮기면서 큰 아드님 집으로 옮겨가셨었다.

대구도 내겐 처음이었다. 고모님 세 분이 살고 계시던 곳인데, 형들은 중고등 시절에 다녀간 적이 있었지만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고야 처음 가보게 되었다. 청통 고향에는 아마 형들도 못 가 봤던 것 같다.

자식들이 청통만이 아니라 대구 가는 것도 어머니는 과히 좋아하지 않으셨다. 괴로운 기억이 담긴 곳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7년의 결혼생활 중에 시집살이는커녕 시댁에 찾아가 뵙지도 않았다. 고향에는 아버지의 전처가 살아 계셨고,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재혼(일시적으로는 중혼)을 반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 입장이 난처했었다. 작은형까지 낳은 뒤에야 며느리로 인정받으셨다던가?

그리고 아버지가 참혹하게 돌아가신 곳이 청통이었다. 부산 피난 시절까지도 아버지는 고향 갈 일이 있어도 어머니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돌아가실 때도 제사 모시러 혼자 갔다가 변을 당하신 것이었다.

사고 직후 청통에 달려가셨을 때의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몇 번 들은 일이 있다. 매번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대목이 하나 있다. 범인이 바로 잡혔는데, 경찰에서 범인을 보겠냐고 묻는 것을 안 보겠다고 거절했다는 얘기다. 그 뜻을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닫게 된 얘기다. 한 실존 인물을 한없는 분노와 슬픔의 구체적 대상으로 지목하는 것을 꺼리신 뜻을. 지금 적으면서 생각하니, 그 장소와 그 사건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정서적 어려움도 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버지를 저격한 범인은 재판에서 정신장애자로 풀려났다고 친척들에게 들었다. 주변에서는 이런저런 추측이 떠돌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었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자체가 워낙 엄청난 것이어서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만 모든 힘을 모으시겠다고.

 

청통에 가는 것은 큰고모님도 말리셨다. 그러나 고집하지는 않으셨다. 마뜩하지는 않지만, 자손이, 그것도 장원급제하고 돌아온 자손이(나이든 친척들은 서울대 이공계 수석합격을 그런 종류로 이해했다.) 조상 산소를 뵙겠다는 것이 반가우셨을 테니까. 그러면서도 청통에서 밤을 지내지 말라는 당부는 쉽게 거두지 않으셨다. 나를 데려갈 둘째 아드님 세돈 형님이 한참을 설득하고서야 마지 못해 승낙하셨다. 역시 17년 전의 참변을 잊지 못하고 계신 것이었다.

세돈 형님을 따라 하양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청통에 도착했다. 은해사 들어가는 길 갈라지기 전의 면사무소 있는 마을이 신학동이고, 내 본적지로 표시되어 있던 원촌동은 그 뒤로 붙어 있는 마을이었다. 기범 형님 집은 신학동에 있었다.

아버지의 전처 소생으로 2녀1남의 이복형제가 있었다. 맨 위 누님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 밑이 나보다 열 살 위의 기범 형님이었고, 그 밑으로 욱이 누님이 있었다. 욱이 누님은 80년대에 계명대 간 뒤에야 상면하게 되고, 기범 형님을 첫 고향 방문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기범 형님이 그 때 서른도 안 된 나이였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하니 새삼스럽다. 어렸을 때 녹용을 먹인 것이 잘못되었다던가, 모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체수도 작았다. 고향 재산은 그 형님이 물려받았기 때문에 당시까지도 농촌 살림으로는 넉넉한 편이었다고 한다. 큰고모님 집안에서 돌봐줘 온 모양이었다. 형수도 정씨 집안 출신이었다.

기범 형님은 나를 보고 턱없이 좋아했다. 이복이라도 동기간에 만나는 것이 반가운 것은 물론이고, "내게도 이런 장한 동생들이 있다"고 으쓱대는 마음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모자란다고 해서 괄시받으며 자라오고 살아온 데 대한 자격지심이 강했다. 이 자격지심이 십여 년 후 고향을 등지고 부산으로 나갔다가 고달픈 객지생활 끝에 나이 50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형님을 힘든 길로 몰고 간 것이 아닌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오랫만에 생각이 떠오른 형님, 명복을 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산소를 차례로 안내해 준 다음 기범 형님은 인근의 모든 친척집에 나를 데리고 다녔다. 지금은 모두 대구, 부산, 서울 등지로 떠나고 딱 한 집 청통에 남아 있지만, 그때까지도 20여 호가 그곳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집안 족보도 그 때 처음으로 구경하고 배우기 시작했다. 10대쯤 위에서 예안으로부터 왜관 부근으로 갈라져나왔다가 몇 대 후에 거기서 또 청통으로 갈라져 나왔다는 정도를 기억하고 있다. 청통 들어온 지 5-6대 된 할아버지 때까지도 토성에 눌려 행세를 못하다가 할아버지가 걸출하신 덕분에 영천 향교에서도 우리 집안의 존재가 부각되기에 이르렀다는 얘기 등. 뿌리가 아주 깊은 집안은 아니지만, 40년 전까지 그 동네에서 알아주던 집안 하나가 지금은 딱 한 집만 남아있게 되다니... 허망한 마음이 든다.

 

청통은 결국 내 고향 노릇을 별로 하지 못했다. 첫 방문 후 10년쯤 지나 기범 형님이 떠난 후로는 산소들도 자주 찾아뵙게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대구가 제한된 의미로나마 내게 고향의 힘을 발휘했다.

고등학교 동창들 중에 경북중 출신이고 대구에 집이 있던 친구들이 몇 있었다. 대구 가는 길에 그 친구들을 만나니 자기네 중학 동창으로 경북고 나온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여기서 시작해 서울대 교양과정부를 같이 다니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고, 그 친구들이랑 노는 재미에 방학만 하면 대구에 가서 얼마동안이라도 지내게 되었다.

지내 놓고 생각하면 내가 경기 체질이 못 되는 사실이 은연중에 드러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 동창의 일부는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상류사회 분위기를 키워나가기 시작하고 있었고, 나도 거기에 어울릴 만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나는 맥주-양주 마시는 동창들 모임보다 막걸리-소주 마시는 대구 촌놈들 자리가 편했다.

체질 문제는 지낸 뒤에 떠오른 생각이니 견강부회일 수도 있는 것이고, 당시 나는 대구 친구들 몇몇의 인간성에 매료되어 있었다. 근년 내가 워낙 사람을 안 보고 지내와서 그 친구들도 자주 만나지 않지만,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는 친구들이 여럿 있다. 아마 경기 같은 '천하 명문'보다 경북고 같은 '지방 명문' 분위기에서 자라난 '인재'들이 내 엘리티즘 취향에 맞는 면이 있었던 것 같다.

대구에의 끌림은 학부를 졸업할 때 큰 작용을 했다. 군대는 연기하고 봐야겠으니 대학원 진학은 해야겠는데, 서울대 대학원은 가고 싶지 않았다. 민두기 교수 때문이었다. 박사과정에서 결국 충돌하고 말게 되지만, 민 교수는 나와 다른 학문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내 학문관이란 것이 당시에는 확고하게 세워져 있지 못했지만,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는가? 냄새가 벌써 틀렸다. 그런데 당시 서울대 동양사학과에는 고병익, 민두기 두 분 교수만 있었는데 고 교수는 학교 행정에 매달려 있어서 학과 운영은 민 교수가 전횡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유학 가고 싶었지만 군대 문제에 막혀 있고... 서울대는 민 교수에게 막혀 있고... 사립대학은 등록금이 너무 비싸고... 결론은 지방 국립대학이었다. (당시에는 사립대와 국립대 등록금이 몇 배 차이가 났다.) 마침 어머니도 2년간 해외에 나가 계실 참이었기 때문에 영아도 기숙사 들어갈 계획이었고, 나 역시 서울에 있은들 어차피 하숙생 신세를 면할 길 없는 형편이었다. 지방대학이라면? 익숙한 대구를 제쳐놓고 다른 곳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경북대 대학원에 들어갔다. 이상한 넘이 하나 불쑥 나타났는데... 이것을 싫어한 교수들도 있었고 좋아한 교수들도 있었다. 대학원 시절의 성적표를 보면 두 그룹이 확연히 갈라져 보인다. 싫어한 교수들은 서울대 출신이 그곳 교수자리 바라고 처들어온 게 아닌가, 자기 제자들 밥그릇 걱정해준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학계에서 위상을 키우고 있던 민두기 교수와의 관계를 생각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 반가워한 분들 중 서울대 출신들은 말할 것 없고, 경북대 출신 교수들 중에도 리버럴리스트 입장에서 다양성을 반겨준 분들이 있었다. 내 지도교수를 맡아 연구실까지 내주고 마음껏 공부할 여건을 만들어주신 김영하 선생님의 고마움은 잊을 길 없다.

74년 석사과정을 마치고 대구를 떠났다가 81년 계명대학에 부임하게 된 데도 고향의 끌림이 얼마간 작용한 셈이다. 80년도에 막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한 부산 어느 학교에서 오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런데 학교를 가 보니 너무 대학 같지 않아서 안 갔다. (지금도 생각나는 게, 학교 건설계획 중 끝에서 두 번째가 도서관이었고, 맨 끝이 교수연구실이었다.) 그리고 1년 뒤에 계명대학으로 갔다. 부산보다 대구에 더 끌린 점도 다소 있지 않았겠는가?

9년 반 동안 계명대학에서 지내는 동안 내 인생은 여러 면에서 방향 전환을 겪었거니와, 고향에 대한 태도도 그 하나의 측면이었다. 서울에서 출생해 서울에서 자란 내가 고향에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지냈고, 가문에 대한 의무도 최대한 이행하며 지낸 시절이었다. 할머니 같던 큰고모님과 뒤이어 기범 형님을 저 세상으로 보냈고, 욱이 누님을 만나 얼마만큼이라도 동생된 도리를 했다. 계명대학을 떠난 후 뿌리를 지우며 살게 되었지만, 그래도 계명대학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뒷골이 그리 심하게 당기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