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학술의 행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이 민 교수다. 순조로운 스승 노릇보다는 타산지석 역할이었지만. 돌아가신 분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적는다는 것이 주저되는 일이지만, 내 과거를 돌아봄에 있어서 빠트릴 수도 없는 일이다.

69년 내가 전과할 때 사학과가 셋으로 갈라졌다. 68학번까지의 학생들은 사학과 소속으로 남아 있었지만 교수들은 세 과로 갈라지고 69학번 신입생부터 세 과로 갈라서 뽑았다. 분과 시점에서 전임교수도 늘려 국사학과에 김용섭 교수, 동양사학과에 민두기 교수가 새로 부임했다. 내가 제일 따르게 될 스승과 제일 맞서게 될 스승, 두 분이었다.

4학년이 되면서 국사 연구실에서 동양사 연구실로 자리를 옮기고 동양사 과목들을 집중적으로 수강했다. 한국사상사에 뜻을 두고 있다가 공부가 어느 만큼 진척되면서 보니 사상사 분야는 중국 쪽을 먼저 닦아놓을 필요가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학부 졸업논문으로는 역법을 살펴보게 되었다. 음양오행설을 더듬다가 역법에 눈이 가게 되었는데, 수학에 기초가 있는 내게 적합한 주제로 생각된 것이다.

사학과 소속으로 동양사 연구실에 매달려 있던 사람은 국사 연구실보다 훨씬 적었다. 62학번의 조동원 선배(전 부산대)가 조교로 상근하고, 복학생인 최갑순 선배(64학번, 외대)와 이성규 선배(65학번, 서울대), 그리고 내가 학부생으로 연구실에 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몇 안 되는 사람이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형제간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민 교수는 동양사학과 후배들 군기 잡기에 바빠 사학과 학번들에겐 별 간섭이 없었다. 당시 문리대에서는 자유방임 분위기가 강해서 강의 운영도 매우 허술했다. 서양사 과목 하나는 교수님 얼굴 한 번 보고 학기가 끝난 일이 있고, 국문과에 가서 들은 국문학사는 세 번 보고 학기가 끝나기도 했다. 그런 심한 경우는 불평의 대상이 되었지만, 웬만한 정도로 대충 하는 것은 피차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민 교수는 동양사학과만은 제대로 된 교육과정을 만들겠다고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강의를 좀 더 빡시게 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나도 생각되었고, 민 교수의 논문도 내용이 충실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학기에 연습 과목을 들으며 논문 지도를 받다 보니 냄새가 이상했다. 왜 근대정치사처럼 중요한 분야를 하지 않고 고대 역법처럼 별 의미 없는 주제를 택하냐는 식이었다.

그분으로서는 전도유망한 제자에게 더 좋은 길을 권한다는 뜻이리라고 좋게 이해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학문의 길과 다른 기준이었다. 물리학을 버리고 사학과를 올 때, 나는 혼자서 재미있게 학문을 파고든다는, 리버럴리스트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학문의 원리를 제대로 적용시키기만 하면 편벽된 주제라 해서 작업의 가치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석사과정 진학할 때 서울대를 피했다. 그분으로서는 제자에게 거부당했다는 모욕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분의 학문적 태도를 비판하는 생각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랑 다르고, 따라 하는 게 재미 없을 것 같아서 피한 것뿐이다. 석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조동원 선배를 대하는 그분의 태도가 중요한 참고가 됐다.

경북대학에서 2년 동안 거의 아무런 지도 없이 내 입맛대로 공부를 파고들었다. 김영하 교수님이 지도교수를 맡아 주고 (당시 박물관장을 맡고 계셔서) 교수연구실을 내가 쓰도록 내 주셨지만, 그분도 리버럴리스트 기질이 대단한 분인 데다가, 나처럼 특출한 학생은 알아서 공부하게 놔둬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도와줄 뿐이지 간섭이 전연 없으셨다.

고대 역법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를 받은 후 미국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런데 군대 문제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1년 지낸 후 서울대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석사까지는 아무 데나 도망가서 할 수 있었지만, 박사과정까지 그렇게 내멋대로 할 수는 없었다. 서울대가 아니면 연-고대와 서강대 밖에 없는데, 그 비싼 등록금 내고 찾아갈 만한 메리트가 없었다.

고병익 교수와 민두기 교수를 찾아가 진학할 뜻을 알렸다. 고 교수야 아버지와의 관계도 있고, 또 그분의 기질도 리버럴리스트 성향이 있어서 내 노는 꼴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면이 있었을 것이다. 민 교수는 나 같이 제멋대로 뛰어노는 넘이 들어와서 분위기 흐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생각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드러내 놓고 반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75년 초 최갑순, 이성규 두 분 선배와 함께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의 첫 박사과정 입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입학 며칠 후에 입대했기 때문에 학생 노릇은 5년 후에나 시작하게 된다.

 

77년 말 33.5개월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나오면서 서울대 박사과정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군대에 있는 동안 유학 길을 알아보았지만 중국과학사를 공부할 뾰족한 길을 찾지 못했다. 이공계통처럼 장학금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처자식도 딸린 몸이 밥벌이를 미룬다는 것도 면목이 없는 데다가 민두기 교수 밑에 들어가 몇 년씩 지낼 일에 흥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취직을 했다.

막 "100억불 수출"을 이룩하고 흥청거릴 때라서 인력 수요가 넘치는 판에 나 같은 공인된 '천재'가 나선다니 의욕적인 사업가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해 줬다. 대봉산업에 먼저 들어가 몇 달 지내다가 (그 때 대봉산업 파리 주재원으로 나가던 홍세화 선배 배웅도 해주고) 더 화끈해 보이는 제세산업으로 옮겼다. 인천 시장 안상수가 그 때 제세산업 이사로 있으면서 나를 붙잡으려고 애써줬고 사장이던 이창우 선배랑도 죽이 맞아서 몇 달 참 잘 지냈다. 그런데 몇 달 있다 보니 일이 내가 바라는 식으로 돌아가지 않기에 그만두고 나왔고, 얼마 후 회사가 무너지고 말았다.

78년 말 회사를 그만두고도 박사과정에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아 이번엔 자영업에 나섰다. 광화문 국제극장 뒷골목에 <인문서적>이란 서점을 차린 것이다. 나는 잘 생각나지 않는데, 한홍구 교수는 이 서점에 들러 나를 봤다고 한다. 뭔 책을 열심히 보고 있는 걸 책방 주인이 보고, 뭔 고딩이가 그런 책을 다 보냐고, 너 가지라고 해서 얻어왔다고. 작년 봄 만났을 때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얘기하는 걸 들으니 그랬던 것도 같다.

79년 초겨울 어느 날 영남대에 들러 정석종 교수와 만나 얘기하던 중에 불쑥 생각났다는 듯 말씀이 "아, 자네 조동원이랑 친하지? 급히 연락하고 싶은데 연락처 좀 주게." 하기에 전화번호를 드리면서 무슨 일인가 물으니, 부산 어느 대학에 동양사 전임을 뽑는데 조 선배에게 권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 선배를 최근 만났을 때 대구 계명대에 가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그 사실을 알려주니, "아, 그런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아깝군." 하고 입맛을 다시다가, "아니, 자네도 박사과정 들어가 놨잖아? 자네 부산 갈 생각 없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마음도 정하지 않은 채로 부산에 가서 이사장 면접을 우선 봤다. 졸업정원제 실시로 교수 충원이 활발한 때였다. 6년 선배인 조 선배가 그 시점에서 전임 들어가는 게 그 이전의 상황으론 정상이었는데, 갑자기 재고 정리 바겐세일이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 분야에선 박사과정 걸쳐놓는 것이 기본자격이었다. 그 때 그 학교에선 나를 오라고 야단이었지만 막상 오라고 하니 공부하는 자세를 풀어버린 지 오래인 나로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연구 분위기가 잡힌 학교라면 일단 가 놓고 보겠지만, 그 학교는 그 때 막 4년제로 개편되던 대학이었다.

그래서 입학 후 5년만에 박사과정에 복학하고(자동복학 자격이 주어지는 마지막 기회에서) 민 교수와 맞닥뜨리게 된다. 고 교수는 당시 총장을(정신문화연구소장이었던가?) 맡고 있어서 학과는 민 교수의 독무대였다. 벌써 전임으로 오라는 데가 있는 상황이니 그리 오래지 않아 전임으로 나갈 전망이므로 민 교수와의 마주침을 그렇게 겁낼 필요가 없었다. 결국 민 교수와 나의 참을성은 두 학기만에 바닥나고 말았지만 그 때는 내가 계명대 교수로 들어갈 때였기 때문에 대미지가 그리 크지 않았다. 시간강사만 나가고 있다가 박사과정 걷어치우려면 신세가 무척 고단했을 거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