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몇몇 사람들의 준론(峻論)은 비록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피리춘추(皮裏春秋)로 치부한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는 내가 애초에 아무아무를 일으켜 그렇게 말하도록 권하고 가르쳐준 것이다. 아무아무는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 그들의 미덕을 이루게 하고, 경들은 일을 참작하고 헤아려 이치에 어긋나는 중에 또다시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니, 성인이 다시 나타난다 해도 사변에 대처하는 방법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권도(權道)는 본디 보통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이 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공부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사변에 대처하고 권도를 쓰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다시 깊이 생각하는 것이 어떠한가?


심환지가 1799년 2월 19일에 받은 어찰 내용의 일부다. 정조는 자신의 '어찰정치'를 비롯한 정국 운용방법이 책략에 의존하는 '권도'임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도의 문제점을 알지만, '사변, 즉 비상한 상황 때문에 부득이한 것으로 생각하고 권도를 행사한 것이다.

순조 이후의 정국을 '세도(勢道)정치'라 하고 정조 초년의 홍국영 등용을 세도정치의 선구라고 흔히 말한다. 정조의 정국 운용방법의 한 측면을 '권도정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홍국영의 등용도 권도정치의 한 양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세도정치의 주체가 세도가였던 것과 달리 정조의 권도정치는 왕이 주체였다. 명분이 모든 것을 정해주는 유교국가의 원리에서 벗어난 점이 있다는 점에서 '권도'이기는 하지만 왕이 주체라 하는 가장 기본 원리는 지켜지고 있었던 것이다. 홍국영의 권력은 왕권에 종속된 것으로서 왕의 승인 하에서만 유효한 것이었다. 그가 외척이 되어 자기 권력에 지속성을 확보하려 하자 정조는 승인을 철회했고 그의 권력은 즉각 소멸되었다.

심환지가 받은 어찰에는 권도가 많이 들어 있다. 짜고 치는 고스톱, 눈가리고 아웅 같은 대목이 거듭거듭 나타난다. 그렇지만 권도가 주종은 아니다. '세도(世道)'를 받드는 자세가 바닥에 깔려 있다. 정조의 정치에서 세도는 목적이고 권도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심환지 어찰집 내용의 놀라운 점 하나는 시파와 벽파에 대한 정조의 태도다. (어찰에는 '時牌'와 '僻牌'로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시파를 가볍게 보고 벽파를 무겁게 보는 것이다. 시파를 여당, 벽파를 야당으로 보는 통념이 뒤집어져 보인다.

벽파 인사에게 보내는 것이라서 본심과 다른 태도를 거짓으로 지어낸 것일 수는 없다. 이 어찰집 안에 폭넓게 담겨 있는 정치관과 시국관에 연결된 태도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 어찰집을 처음 보면서 이 점이 당혹스러웠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싸하게 보이기도 한다. 정조가 정치의 목적인 '세도'를 벽파에게 구하고 방편인 '권도'를 시파에게 구한 것이 아닐지. 권도를 통해 유교정치의 회복을 꾀하는 과정에서 세도 자체가 너무 손상되지 않도록 노심초사한 것이 아닐지.

정조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사변'이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비상한 것인지 여부는 정상적 상태를 규정하는 기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정조는 원론적 유교국가를 정상적 상태로 규정했던 것 같다. 대충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과로사에 이를 만큼 일을 많이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심환지 등 벽파에 대해서도 관리 차원이 아니라 육성 내지 지도 차원에서 임했던 것 같다.

권도까지 구사해 가며 열심히 일해 세도를 되살려 놓으면 권도의 필요도 임금이 과로할 필요도 줄어들기를 정조는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이 오십도 안 되어 갑자기 죽었을 때, 형편이 근본적으로 좋아져 있지 못했던 것 같다.

유능하고 부지런한 임금이 사라지자 시파도 벽파도 정조가 바라던 역할에서 벗어나 정권 경쟁에만 몰두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먼저 정권을 잡은 벽파는 신유박해(1801)를 일으키는 등 편협하고 독선적인 길을 걸었다. 벽파 이념의 궁극적 타당성을 보장해 주던 임금이 없어졌기 때문에 극단으로 흐르는 경향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던 것 같다.

편협한 노선은 반작용을 불러오지 않을 수 없다. 벽파의 배경이던 정순왕후가 1803년 말 수렴청정을 거두고 1805년 초 죽음에 따라 벽파의 권력이 왕비 집안인 안동 김씨에게 옮겨져 세도(勢道)정치가 시작된다. 이 권력 이동 과정을 촉진한 김달순의 옥사를 살펴봄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본다.

정순왕후가 죽은 지 1년이 되어 갈 때 권력 약화를 걱정하고 있던 김관주 등 벽파 거두들은 자기네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사도세자와 관련된 안건을 제기하고자 했다. 사도세자를 비판했던 인물들의 포상을 통해 자기네 당파의 정당성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조가 당쟁의 격화를 막기 위해 사도세자의 일을 일체 따지지 못하게 한 방침이 그때까지 지켜지고 있었다. 이 방침을 뒤집으려 달려드는 것은 큰 위험이 따르는 정치적 모험이었다.

김관주는 외척의 범주에 드는 두 인물, 박종경과 김달순을 설득해 총대를 메게 하고 입궐할 순서와 날자까지 잡아 줬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박종경의 아버지가 집안 망칠 짓이라고 펄펄 뛰며 입궐하지 못하게 가둬놓았다. 이것을 모르고 김달순이 입궐해 자기 몫의 이야기를 했고, 어리둥절한 왕은 벽파가 원하는 반응을 일으켜주지 않았다. 안동 김씨 측에서 이를 기화로 김달순을(그도 안동 김씨이기는 했지만 벽파였다.) 공격해 사사(賜死)에 이르게 했고, 그 과정에서 벽파가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1806년 집권한 안동 김씨는 소명세자의 빈만 풍양 조씨에게 양보했을 뿐, 헌종과 철종의 왕비를 들여보내 1802년에서 1863년까지 한 갑자 넘게 왕비의 친정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헌종 때 일시 풍양 조씨에게 밀려났을 때를 제하고는 조정에서 과거 어느 외척보다도 고위직을 많이 차지했다. 이 시기에 안동 김씨는 보통명사 아닌 고유명사 "세도가"였다. 순-헌-철 3대의 세도정치는 "안김정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조가 죽기 전에 세자와 김조순의 딸을 정혼해 놓은 것이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씨앗이 되었다. 정조가 김조순을 사돈으로 찍은 것은 기대하는 역할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척으로서 세도정치를 행하는 것이 정조의 기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 김조순은 정조의 기대를 등졌을까?

김조순의 집안은 조선 최고의 명문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김상용 형제가 충절의 상징이 된 이래 그 후광 속에서 재상과 거유들이 속출했다. 도덕적-학문적 귄위와 정치적-재정적 실력을 두루 갖춘 집안이었다. 조선 국가체제 안에서 왕실 다음으로 누릴 것이 많은 가문이었다. 김조순 개인보다 그 집안을 특별한 위치에 두고 활용할 뜻이 정조에게 있었을 것이다. 물론 세도를 만들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권도에 이용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권도의 주체인 정조가 사라져버리자 안동 김씨가 권력의 주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권력의 주인이라도 명분 있는 진짜 주인이 아니라 맡아 놓은 권력의 명분 없는 주인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모럴 해저드 사태가 펼쳐졌다. 19세기 세도정치는 백성 괴롭히고 나라 망칠 악의가 있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나라가 나라 구실 제대로 하게 하려는 의지와 힘이 미약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도덕적 해이는 정조조에도 만연해 있었다. 1797년 10월 5일 심환지가 받은 어찰은 이런 내용이었다.


근래에 온갖 일에 대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있다지만, 차마 정리곡(整理穀)처럼 백성을 위해 만들 일에 대해서도 이렇게 잡다한 말이 많고 간사한 폐단이 생겨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중략)... 정리곡은 피곡(皮穀)이다. 봄에 한 알을 나눠주어 가을에 만 알이 익도록 하겠다는 지극하고 성대한 뜻은 미물도 감동시킬 만하다. 그런데 어떤 놈의 관리가 이처럼 공적인 일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는 짓을 하는가? 자애로운 은혜를 널리 펴기 위해 마련한 본뜻이 도리어 원망을 부르는 단서가 되었으니,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리곡은 1795년 화성 행차에서 남은 비용을 백성 구휼에 쓰게 한 것이라는데, 오래된 제도도 아니고 새로 만든 제도까지 왜곡되어 왕을 분노케 한다면 부패 풍조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체제가 해이해진 결과 영조와 정조의 수십 년 노력으로도 만연한 부패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의 권력자는 부패를 억누르려 애쓰기는커녕 권력 유지와 확대에 오히려 부패를 이용하게 되었으니 총체적 난국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623년 광해군 축출 이후의 권력자들이 권력 쟁탈전에 몰두해서 경세의 과제를 소홀히 한 정도의 문제였다면, 19세기 들어와서는 권력 경쟁의 명분마저 도외시하고 돈과 주먹의 현실권력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국가와 백성을 위할 줄 모르는 정치를 넘어 국가를 망치고 백성을 괴롭히는 정치가 된 것이다.

16세기 말에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가 중국 사회의 평화로운 분위기와 문민 질서에 탄복한 이야기를 앞서 인용한 일이 있는데, 그 시기의 명나라와 조선에서는 같은 시기 유럽과 달리 주먹과 돈의 벌거벗은 폭력을 억제하는 유교국가 체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유교국가는 전제왕권이라는 이념의 힘이 재산, 권력, 정보를 장악한 유력계층의 현실의 힘을 견제해 힘없는 백성들을 무절제한 폭력에서 보호하는 기능을 가진다. 19세기 세도정치 하의 조선에서는 이러한 유교국가의 기본 기능이 마비상태에 이르렀다.

유교국가는 대규모 보험체계의 성격을 가진 조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납입금이 많은 고객에게 더 큰 혜택을 제공하지만, 납입금이 거의 없는 고객에게도 최소한의 생존조건을 보장해 주는 보험체계다. 오늘날의 정치론으로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부와 권력의 성장에 한계를 두고 생존조건을 보장하는 체제이므로 부와 권력을 추구할 동기도 약하기 때문에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큰 장애를 일으키지 않는다. 농업사회에 매우 적합한 체제로서 중국과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중세사회의 해체를 몰고 온 것은 무엇보다 생산력의 발전이었다. 잉여생산의 폭이 커짐에 따라 안정성 위주의 중세체제를 벗어나는 원심력이 일어난 것이다. 생산력 증가라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유교국가 체제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해야 할 이유를 나는 떠올릴 수 없다. 오히려 환경과의 관계와 사회 내부의 긴장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유럽식 근대화보다 연착륙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이었을 것 같다. 문제는 연착륙에 필요한 충분한 길이의 활주로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볼 일이 아닐지.

산업화와 자본주의화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식 근대화가 19세기의 세계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 방향의 변화가 가진 문제점이 바로 지적되기 시작했고 대안이 제시되기 시작했다. 문제점은 지금까지 더욱더 명확해져 왔고, 대안 모색은 계속되고 있다. 19세기의 경쟁에서 패퇴한 노선도 그 가치를 다시 검토할 여지가 있는 상황이다.

19세기의 조선은 근대화의 과제 앞에서 유교국가 체제로 경쟁에 나설 자세가 무너져 있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경쟁에 나서기 전에 유교국가 체제를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한 노력이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조선의 실패는 개항 후의 잘못된 선택으로 비로소 결정된 것이 아니라 유교국가 체제를 발전시키기는커녕 유지도 못하고 있던 세도정치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들은 유럽식 근대화를 주축으로 하면서도 각자의 전통을 이와 병행하여 발전시켰다. 유럽식 근대화를 시작시킨 유럽국들까지도 그렇다. 이렇게 살아남은 전통이 근대화의 주변적 현상, 또는 심지어 근대화가 미진한 봉건적 잔재로 폄하되기도 했지만, 근대화의 모순을 완화해 주기도 했고 탈근대화의 열쇠로 주목받기도 한다. 근대화의 성공 여부를 양적 측면보다 전통을 살려낸 질적 측면에 더 비중을 두고 평가하는 편이 더 실질적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조선의 실패는 전통이 철저하게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참혹한 실패였다. 지역적 불평등 구조를 추구하던 당시의 제국주의적 근대화 추세 때문에 이 좌절이 더욱 심화되었다. 지금 시점에서 전통으로부터 찾아낼 가치가 무엇이 있는지 내게 확신은 없다. 그러나 19세기의 실패에서 전통의 좌절이 가졌던 의미가 분명한 것이므로 그 가치를 지금이라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를 느낀다.



Posted by 문천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조 몇 가지를 1890년대의 개화사상가들이 주목하기 시작한 이래 '실학'의 정체를 밝히는 작업이 많은 연구자들의 손으로 쌓여 왔지만, 아직도 그 정확한 범위와 의미에 대해 엇갈리는 의견들이 남아 있다. 이 글에서는 유교국가 조선의 기능이 퇴화하는 과정에서 대응책을 모색하는 노력으로서 실학의 의미를 살펴보겠다.

실학 형성의 배경으로 외래적 요인과 내재적 요인을 구분해서 이야기한다. 외래적 요인이라면 청나라의 고증학이나 중국을 통해 소개된 서학에 자극받은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내재적 요인이라면 조선 국내의 제반 변화, 특히 사회경제적 여건의 변화에 촉발된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두 측면이 모두 작용한 것이고, 실학자 개인에 따라 두 측면의 비중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일반적 요인들보다 더 구체적으로 짚을 수 있는 조건이 있다. 주류 학술이 형이상학 성향으로 경도되는 상황이다. 학술에는 현실과 조응하는 대외적 측면과 내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대내적 측면이 있다. 형이상학 성향이라 함은 대내적 측면에 관심이 제한되는 것을 말한다. A J 에이어가 <언어, 진실, 논리>(1936)에서 형이상학 명제는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고, 실질적 의미가 담기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칼 포퍼는 형이상학 명제에도 의미는 있다, 다만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두 사람 다 형이상학과 경험적 지식 사이의 절연성을 지적한 것이다.

'형이상학'이란 개념도 서양에서 온 것이므로 조선 후기 성리학의 풍조를 이에 맞춰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형이상학 성향"이라 말하는 것은 에이어와 포퍼가 지적한 바 경험적 지식과의 절연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주류 성리학은 학문 자체가 현실적 제도로서 큰 힘을 가지게 되어 외부 현실과 관계 없이 학문 내부 문제에만 몰두하게 된 것이다. 현실과의 조응이 빈 공간으로 남겨지면서 이를 채우기 위한 여러 갈래 노력이 주변부에서 나타난 것이 오늘날 '실학'이란 이름으로 고찰되고 있다.

실학의 '실(實)' 자는 당시 주류 성리학의 공허성과 대비되는 뜻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원래 유가에는 불가의 '공(空)', 도가의 '허(虛)'에 맞서 '실'을 표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송나라 때 성리학이 형이상학의 경향을 키우게 된 것은 불가, 도가와의 경쟁 과정에서 "싸우면서 배운다"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리학이 형이상학에 치중하게 되면서도 현실에 조응하는 경세학(經世學)의 면모를 아주 버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성리학의 발전은 두 측면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 진행되었다.

조선 초기에 정치 이념의 의미를 가진 성리학을 문학 차원의 사장(詞章)과 대비시켜 실학이라 칭한 것도 이 긴장관계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16세기까지는 학술이 정치에 공헌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들어 사림과 여론의 힘이 조정을 압도하는 상황이 되자 학술의 경세적 측면이 퇴화하고 내면적 완결성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현종(1659~74) 때의 두 차례 예송(禮訟)이다.

공자는 예법을 매우 중시했고, 그로 인해 유교국가에서는 예법이 법률체계의 상부구조와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공자 자신은 예법을 경직된 것이 아니라 인정에 따르는 것으로 여겼다. <예기>의 아래 기사처럼 그런 자세를 보여주는 기록들이 있다.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전에 묵었던 여관 주인의 장례에 마주쳤다. 집안에 들어가 곡을 하며 슬퍼했다. 나와서 자공에게 일러 마차 바깥쪽에 매여 있던 곁말을 부의로 주게 했다. 자공이 말했다. "문인의 장례에도 곁말을 부의로 주신 일이 없었는데 옛 여관 주인에게 이런 부의를 하신다는 것이 너무 지나치신 것은 아닐지요?" 공자가 대답했다. "내가 이제 들어가 곡을 하다 보니 슬픔이 밀려들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렸는데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없다는 것을 견딜 수 없으니 시키는 대로 하려무나."


1659년 효종이 죽었을 때, 그리고 1674년 효종비가 죽었을 때 군주의 예가 사대부의 예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한 송시열 일파의 주장은 왕의 권위를 억누르려는 의지로 해석된다. 그 주장의 옳고 그름과 별도로 주목할 것은 학문적 기준으로 현실을 재단하려 한 태도다. 이 태도는 청나라에 대한 척화(斥和) 주장에도 나타났던 것이다. 정치의 원활한 운용을 도외시하는 명분론 경도 속에 조선 후기의 주류 학술은 내면적 완결성에만 집착하는 경향으로 흘러갔다. 학문 속에 곡식도 있고 벼슬도 있으니 다른것을 쳐다볼 필요가 없었다.

효종(1649~59) 초년 김자점 일파가 숙청되고 송시열 일파의 기세가 치솟으면서 당쟁이 격화되기 시작했지만 테크노크랫 성향의 김육 일파가 아직 상당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현종 초년의 기해예송 이후로는 경세의 실무가보다 이념의 기수들이 모든 당파를 영도하게 되었다. 현실과 조응하는 경세적 학문은 현실정치를 등진 은거자들의 몫이 되었다.

초기 실학과 중기 실학의 태두로 일컬어지는 유형원(1622~73)과 이익(1681~1763)의 경력에 이런 상황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두 사람 다 갓난아이 때 아버지를 당쟁으로 잃었다. 유형원은 엘리트 관료들이 통상 관직에 들어서는 나이인 32세 때 서울을 떠나 부안 반계에 은거했고, 이익은 26세 때 부형 노릇을 해온 중형이 옥사하자 벼슬길을 포기했다.

유형원, 이익에서 후기 실학의 태두 정약용(1762~1836)에 이르는 학통은 실학 발전의 가장 두드러진 흐름이었다. 이을호는 이들의 학풍을 '수사학(洙泗學)'이라 이름붙였다. 수와 사는 공자와 맹자가 살던 곳의 강 이름이니, 송대 이후의 성리학을 뛰어넘는 원시유학의 모색이라는 뜻이다.

실학의 실용적 측면만을 살피는 통상적 관점에 포착되지 않는 의미를 그 철학적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원시유학의 모색은 유교국가의 기본 틀을 지키면서 성리학을 대체할 이념적 대안을 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도 혁명적 상황을 맞았을 때 고전시대로의 회귀를 표방한 사례가 왕망, 북주(北周), 측천무후, 그리고 근세에는 강유위의 경우에서 거듭거듭 나타났다.

유가의 시간관이 직선적인 근대 시간관과 달리 순환적인 것이어서 복고 성향이 동아시아 문명을 지배해 왔다는 담론이 정체성 이론의 일환으로 통용되어 왔다. 진보적이지 못하고 퇴행적이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사실 순환적 시간관은 유가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전근대 문명에서 널리 나타난 것이다. 불과 2~300년 동안 통용되어 온 직선적 시간관에 절대적 타당성을 부여할 근거는 없다. 시간관은 칼 포퍼의 말대로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명제다. 혁명적 변화를 신세계의 창조로 보느냐, 고대 질서의 회복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는 우주론 차원의 세계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직선적 시간관이 근대적 특성으로 나타난 사실이 오히려 별도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순환적 시간관에 따르는 복고 성향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여기는 통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는 점만 지적한다. 참고로 덧붙인다면 서학의 창시자 마테오 리치가 제기한 '보유론(補儒論)'도 복고적 개혁의 틀을 따른 것이었다. 송대 이후의 성리학을 타락한 유교라고 비판하며 원시유학의 회복에 기독교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약용이 서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데는 보유론의 학술개혁 방안이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수사학의 학풍은 정통론과 명분론에 매달린 주류 성리학의 퇴행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이데올로기의 모색 노력이었다. 현실에 조응하는 실용적 측면이 주류 성리학과 차별성을 보이는 실학의 특징이거니와, 실용적 측면을 뒷받침할 내면적 원리도 함께 탐구했던 것이다. 관직에 나가 경륜을 펼칠 기회를 가졌던 정약용은 실용적 정책의 제안만이 아니라 학문적 권위를 확보하는 데도 큰 노력을 기울였고, 실학의 풍조를 장려하고 싶었던 정조는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명제의 심판을 정약용에게 유리하게 봐준 것 같다.

유형원과 이익을 거쳐 온 실학의 한 흐름이 정약용에 이르러 현실정치에 작용할 기회를 얻은 것은 정조의 적극적 개혁정책 덕분이었다. 정조의 덕을 본 것은 이가환, 정약용 등 이익 계열 성호학파 관료들만이 아니었다.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도 정조의 지원 덕분에 활발한 활동이 가능했다.

정조의 실학 장려책에 호응한 중요한 두 집단이 성호학파와 북학파였다. 두 집단의 성격 차이는 무엇보다 그 형성 과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 같다. 성호학파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대안 모색 노력의 복류(伏流)가 정조조에 이르러 겉으로 솟아나온 것이다. 사림정치의 틀을 지키되 경세론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임금의 선택을 기다려 온 대안세력이었다. (조선 중-후기 정치의 양상을 '사림정치'로 보는 이성무의 관점을 필자는 지지한다.)

북학파는 이와 달리 정조 당대의 상황 속에서 정조의 학술 정책과 인재 양성책을 통해 일어난 움직임이었다. 성호학파가 사림정치의 틀을 고치려 했다면 북학파는 바꾸려 한 것이므로 더 과격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존 체제에 대한 위협은 성호학파 쪽이 더 강렬했다는 사실을 1801년 신유박해의 표적이 된 데서 알아볼 수 있다. 주류 성리학 입장에서 북학파는 단편적인 일탈에 불과한 것인 반면 성호학파는 체계적인 도전으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실학의 개념 기준으로 통상 '근대 지향성'을 이야기한다. 이 기준을 적용하는 데는 '근대성'의 개념에 대한 보다 엄밀한 검토가 앞설 필요가 있다. 중세체제의 퇴화라는 상황 앞에서 근대화가 필연의 과제였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진행되어 자본주의라는 형태로 퍼져 나간 변화 하나만을 근대화의 절대적 표준으로 삼는 것은 독단이다. 중세체제 극복이라는 의미에서 근대화의 많은 길 가운데 산업혁명-자본주의형 근대화는 한 갈래일 뿐이었다. 그 길을 사람들이 다른 길들보다 많이 걷게 된 것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따른 일이었다.

근대 지향성을 단순히 전통으로부터의 이탈로 보는 것은 특정한 형태의 근대성에 사로잡힌 시각이다. 오늘의 우리가 흔히 "중세사회 해체"라고 말하는 현상이 조선 후기에 진행된 것은 사실이다. 주류 성리학이 이 현상에 대한 대응을 소홀히 하고 있을 때 대응의 필요를 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대책 강구에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 실학자였다. 대책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유교국가든 사림정치든 기존 체제를 최대한 지킴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필요가 있었다. 유교국가와 사림정치가 결국 무너졌다는 결과를 기준으로 포폄을 행할 일이 아니다.

생활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는 박지원의 경우를 보면 물질적으로 상당히 여유 있는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유형원이나 이익처럼 은거지에 파묻혀 살던 사람들은 그보다 검소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연구와 저술에 그만한 노력을 쏟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한계급'의 기본조건은 충족시킨 것 같다. 그런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주변부에서나마 하나의 학풍을 일으키고 키우고 지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국가체제가 아직도 최소한의 건강을 지키고 있던 상태였다. 정약용 이후의 대표적 실학자로 김정희, 최한기 등 특수한 여건을 누린 신분의 인물들만 꼽히는 것을 보면 정조의 죽음을 계기로 국가체제의 건강이 크게 무너진 듯하다.



Posted by 문천
2010. 3. 30. 14:54
(토요일 오후에 갔다가 저녁 후 일죽의 허방 선생을 찾아가 하룻밤 묵고 일요일 아침에 다시 가 뵈었다. 점심 후에 여주의 이모님을 모셔왔다. 원래 생각은 하루이틀 더 가까이 지내면서 살펴보고 싶었는데, 일요일 저녁때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천 시내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들어가니 3시. <불광> 남 보살님이 윤시내 선생님 내외분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앉아 있었다. 윤 선생님은 몇 해 전 어머니 생각하는 글 <불광>에 올린 것을 감명깊게 본 일이 있는 분인데, 귀국한 길에 어머니 뵈러 와주신 것이다.

새로 뵙는 두 분과 인사도 나누기 전에 어머니 인사말씀부터 들어야 했다. "야, 이 쌍누므 자식아!" 내 얼굴이 보이면 얼굴에 웃음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보통이기는 한데, 이 때는 그 웃음에 장난기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세 분이 30분 가량 모시고 있으면서 기분을 무척 고양시켜 드린 것도 같고, 든든한 자식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부쩍 일어나신 것 같기도 했다.

쩔쩔 매는 시늉으로 "네, 어머니. 쌍누므 자식 왔습니다." 하는 꼴을 흘낏 쳐다보고는 남 보살님에게 눈길을 돌리고 본격적인 아들 자랑으로 들어가신다. 저 놈이 천하에 미련한 놈이다, 미련해서 내가 제일 좋아한다, 마치 아들이 불쌍해서 좋아해 주시는 것처럼 으스대신다.

"미련한 게 좋다!" 역설 좋아하시는 취미는 어쩔 수가 없다. 좋은 거 좋아하는 보통사람들 따라하면 자존심이 상하시는 것 같은 이 역설 취미가 참 질색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부동산 투기를 해도 남들이 인식 못하는 장점이 있는 땅이라야만 마음내켜 하셨다. 아니, 땅의 가치를 남들이 인식 못하는 데만 찾아다니면 땅값은 누가 올려주는데?

쓰러지시기 전까지 절에서 굳이 지내시던 것도 그렇다. 남들 다 하는 것처럼 편안한 아파트에서 살지 못하시는 이유가 뭔지? 병원에 모신 뒤에도 꼼짝 못하실 만큼 기력이 떨어지시기 전까지 불쑥불쑥 "나 집에 갈 테야." 사람들을 난감하게 만들곤 하신 것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한다. 주어진 여건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마음.

지지난 겨울 회복되시면서부터 마음이 참 편안해지셨다. 이곳으로 옮겨올 때도 "기협아, 나 여기가 좋은데 여기 그냥 있으면 안 되니?" 하셨다. "네, 좋으실 대로 하세요. 그런데 저쪽도 괜찮은 데거든요? 가 보고 마음에 안 드시면 도로 모셔올께요." 하고 모셔왔는데, 도착한 두 시간 후 말씀, "야, 여기 참 좋다. 여기 그냥 있어도 되는 거니?" 그 후 9개월 동안 지내면서 다른 곳 생각이 나실 때도 있고 이곳을 불편하게 느끼실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현실을 아끼는 마음, 그에 대해 고마워하는 마음이 가득차 일상적 굴절에 크게 흔들리지 않으시는 것 같다.

이 아들 놓고도 이런저런 좋은 점이 있어서 좋아한다 하시지 못하고 미련해서 좋아한다고 뒤집어서 말씀하시는 데는 종래의 비판적 습관도 작용하는 것이겠지만, 이제 그리 치우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손자가 예뻐 어쩔 줄 모르는 할머니가 "우리 보배둥이!" 하기보다 "우리 똥강아지!" 하는 마음. 역설을 위한 역설이 아니라 더 강한 긍정을 위한 역설이다. 그래, 미련퉁이 노릇 해드리지, 뭐. 똥강아지 노릇 하는 애들도 있는데.

남 보살님은 어떤 사람인지 상당히 분명한 기억이 일어나시는 것 같고, 윤 선생님 내외분은 정확한 파악이 안 되는 상대겠지만 깨끗하고 따뜻한 인상이 역시 편안하게 느껴지시는지, 자신만만하게 쇼맨쉽을 발휘하신다. 내 어떤 태도를 상대방이 좋아할지 정확하게 파악해서 그에 맞춰주는 솜씨가 능수능란하시다. 이렇게 사교 잘하시는 모습을 예전에 뵌 적이 없다. 지나치게 강하시던 자의식을 가라앉히고, 사람이 사람을 아끼고 잘해주려는 본능이 거침없이 살아나게 된 것이다. 성불은 몰라도 보살도에 이르신 것은 분명하다.

세 분 손님은 어머니와 함께 있는 한 순간 한 순간을 편안하고 즐겁게 누리셨을 것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의 집에 이 손님들을 맞아들이신 것이다. 손님을 즐겁게 해주려고 별난 음식을 내오고 별난 대접을 한 것이 아니다. 내 마음자리가 이렇게 즐겁고 편안하니, 같이 누릴 만하면 누립시다, 하고 열어주고 보여주신 것이다.

어쩌다 한 번 찾아온 이 손님들은 어머니를 도반(道伴)으로 여겨 어머니의 마음자리에 대한 어떤 기대를 품고 찾아온 분들이다. 이런 분들 응대하는 것은 그 기대에 맞춰 하나의 역할극처럼 해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응대가 한바탕 역할극이 아니라 진면목이라는 사실은 같이 생활하는 분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아볼 수 있다.

간병인 송 여사님은 딸처럼 대하신다. 두 분 사이의 수작이 자연스러운 것을 보면 긴 생활을 통해 든든하게 자리 잡은 관계다. 다른 간병인들도 어머니를 좋아하고 잘해 드리는 분들이 많지만, 송 여사와는 각별한 교감이 이뤄진 것 같다. 순환근무제 때문에 직접 모시는 위치는 곧 바뀌겠지만, 그렇게 마음이 통하는 분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복이다. 그러고 보면 송 여사의 이 방 근무가 꽤 길었던 것 같은데, 가능한 한 길게 붙여놓는 배려를 원장님이 베푼 것일지도 모르겠다.

직접 모시는 간병인 외에 직원 중 어머니 생활에 가장 많이 관여하는 이가 원장님일 텐데 원장님을 대하시는 태도를 봐도, 정말 모자라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는다는 느낌이다. 몇 분을 살펴드리는 간병인과 요양원 전체를 돌보는 원장의 입장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시는 듯, 원장님과 마주칠 때는 다정하면서도 정중한 선을 지키시는 것 같다. 젊은 간호사들에게는 동네 아이들 대하는 것처럼 가볍고 편안한 느낌.

더러 다른 할머니들과의 접촉에서는 더 다양한 태도가 나타나신다. 여기 대해서는 더 관찰한 뒤에 한 번 세밀한 묘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 조금 복잡하기 때문에 섣불리 그리려다가는 그림이 잘 안 될 것 같다. 아무튼 다양한 특성을 가진 할머니들 대하시는 방법을 보면 정말 머리가 좋으시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력에 제한이 있는 만큼 사고력이 더 원활하실 수 있는 것인지?

일요일 오후에는 이모님과 편안한 한 때를 가지셨다. 이모님은 전번 방문 때까지도 "울 언니 진짜 살아나신 거야?" 하는 눈치로 뒷전에서 관찰하는 편이었는데, 그 날은 그냥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모님이 전보다 더 편안하게 느끼실 만한 점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표현 폭이 더 넓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 기준으로만 봐서는 포착하기 힘든 변화를 다른 분의 반응에 비춰보면 더 잘 파악되는 면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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