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조 몇 가지를 1890년대의 개화사상가들이 주목하기 시작한 이래 '실학'의 정체를 밝히는 작업이 많은 연구자들의 손으로 쌓여 왔지만, 아직도 그 정확한 범위와 의미에 대해 엇갈리는 의견들이 남아 있다. 이 글에서는 유교국가 조선의 기능이 퇴화하는 과정에서 대응책을 모색하는 노력으로서 실학의 의미를 살펴보겠다.
실학 형성의 배경으로 외래적 요인과 내재적 요인을 구분해서 이야기한다. 외래적 요인이라면 청나라의 고증학이나 중국을 통해 소개된 서학에 자극받은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내재적 요인이라면 조선 국내의 제반 변화, 특히 사회경제적 여건의 변화에 촉발된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두 측면이 모두 작용한 것이고, 실학자 개인에 따라 두 측면의 비중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일반적 요인들보다 더 구체적으로 짚을 수 있는 조건이 있다. 주류 학술이 형이상학 성향으로 경도되는 상황이다. 학술에는 현실과 조응하는 대외적 측면과 내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대내적 측면이 있다. 형이상학 성향이라 함은 대내적 측면에 관심이 제한되는 것을 말한다. A J 에이어가 <언어, 진실, 논리>(1936)에서 형이상학 명제는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고, 실질적 의미가 담기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칼 포퍼는 형이상학 명제에도 의미는 있다, 다만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두 사람 다 형이상학과 경험적 지식 사이의 절연성을 지적한 것이다.
'형이상학'이란 개념도 서양에서 온 것이므로 조선 후기 성리학의 풍조를 이에 맞춰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형이상학 성향"이라 말하는 것은 에이어와 포퍼가 지적한 바 경험적 지식과의 절연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주류 성리학은 학문 자체가 현실적 제도로서 큰 힘을 가지게 되어 외부 현실과 관계 없이 학문 내부 문제에만 몰두하게 된 것이다. 현실과의 조응이 빈 공간으로 남겨지면서 이를 채우기 위한 여러 갈래 노력이 주변부에서 나타난 것이 오늘날 '실학'이란 이름으로 고찰되고 있다.
실학의 '실(實)' 자는 당시 주류 성리학의 공허성과 대비되는 뜻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원래 유가에는 불가의 '공(空)', 도가의 '허(虛)'에 맞서 '실'을 표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송나라 때 성리학이 형이상학의 경향을 키우게 된 것은 불가, 도가와의 경쟁 과정에서 "싸우면서 배운다"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리학이 형이상학에 치중하게 되면서도 현실에 조응하는 경세학(經世學)의 면모를 아주 버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성리학의 발전은 두 측면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 진행되었다.
조선 초기에 정치 이념의 의미를 가진 성리학을 문학 차원의 사장(詞章)과 대비시켜 실학이라 칭한 것도 이 긴장관계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16세기까지는 학술이 정치에 공헌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들어 사림과 여론의 힘이 조정을 압도하는 상황이 되자 학술의 경세적 측면이 퇴화하고 내면적 완결성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현종(1659~74) 때의 두 차례 예송(禮訟)이다.
공자는 예법을 매우 중시했고, 그로 인해 유교국가에서는 예법이 법률체계의 상부구조와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공자 자신은 예법을 경직된 것이 아니라 인정에 따르는 것으로 여겼다. <예기>의 아래 기사처럼 그런 자세를 보여주는 기록들이 있다.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전에 묵었던 여관 주인의 장례에 마주쳤다. 집안에 들어가 곡을 하며 슬퍼했다. 나와서 자공에게 일러 마차 바깥쪽에 매여 있던 곁말을 부의로 주게 했다. 자공이 말했다. "문인의 장례에도 곁말을 부의로 주신 일이 없었는데 옛 여관 주인에게 이런 부의를 하신다는 것이 너무 지나치신 것은 아닐지요?" 공자가 대답했다. "내가 이제 들어가 곡을 하다 보니 슬픔이 밀려들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렸는데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없다는 것을 견딜 수 없으니 시키는 대로 하려무나."
1659년 효종이 죽었을 때, 그리고 1674년 효종비가 죽었을 때 군주의 예가 사대부의 예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한 송시열 일파의 주장은 왕의 권위를 억누르려는 의지로 해석된다. 그 주장의 옳고 그름과 별도로 주목할 것은 학문적 기준으로 현실을 재단하려 한 태도다. 이 태도는 청나라에 대한 척화(斥和) 주장에도 나타났던 것이다. 정치의 원활한 운용을 도외시하는 명분론 경도 속에 조선 후기의 주류 학술은 내면적 완결성에만 집착하는 경향으로 흘러갔다. 학문 속에 곡식도 있고 벼슬도 있으니 다른것을 쳐다볼 필요가 없었다.
효종(1649~59) 초년 김자점 일파가 숙청되고 송시열 일파의 기세가 치솟으면서 당쟁이 격화되기 시작했지만 테크노크랫 성향의 김육 일파가 아직 상당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현종 초년의 기해예송 이후로는 경세의 실무가보다 이념의 기수들이 모든 당파를 영도하게 되었다. 현실과 조응하는 경세적 학문은 현실정치를 등진 은거자들의 몫이 되었다.
초기 실학과 중기 실학의 태두로 일컬어지는 유형원(1622~73)과 이익(1681~1763)의 경력에 이런 상황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두 사람 다 갓난아이 때 아버지를 당쟁으로 잃었다. 유형원은 엘리트 관료들이 통상 관직에 들어서는 나이인 32세 때 서울을 떠나 부안 반계에 은거했고, 이익은 26세 때 부형 노릇을 해온 중형이 옥사하자 벼슬길을 포기했다.
유형원, 이익에서 후기 실학의 태두 정약용(1762~1836)에 이르는 학통은 실학 발전의 가장 두드러진 흐름이었다. 이을호는 이들의 학풍을 '수사학(洙泗學)'이라 이름붙였다. 수와 사는 공자와 맹자가 살던 곳의 강 이름이니, 송대 이후의 성리학을 뛰어넘는 원시유학의 모색이라는 뜻이다.
실학의 실용적 측면만을 살피는 통상적 관점에 포착되지 않는 의미를 그 철학적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원시유학의 모색은 유교국가의 기본 틀을 지키면서 성리학을 대체할 이념적 대안을 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도 혁명적 상황을 맞았을 때 고전시대로의 회귀를 표방한 사례가 왕망, 북주(北周), 측천무후, 그리고 근세에는 강유위의 경우에서 거듭거듭 나타났다.
유가의 시간관이 직선적인 근대 시간관과 달리 순환적인 것이어서 복고 성향이 동아시아 문명을 지배해 왔다는 담론이 정체성 이론의 일환으로 통용되어 왔다. 진보적이지 못하고 퇴행적이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사실 순환적 시간관은 유가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전근대 문명에서 널리 나타난 것이다. 불과 2~300년 동안 통용되어 온 직선적 시간관에 절대적 타당성을 부여할 근거는 없다. 시간관은 칼 포퍼의 말대로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명제다. 혁명적 변화를 신세계의 창조로 보느냐, 고대 질서의 회복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는 우주론 차원의 세계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직선적 시간관이 근대적 특성으로 나타난 사실이 오히려 별도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순환적 시간관에 따르는 복고 성향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여기는 통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는 점만 지적한다. 참고로 덧붙인다면 서학의 창시자 마테오 리치가 제기한 '보유론(補儒論)'도 복고적 개혁의 틀을 따른 것이었다. 송대 이후의 성리학을 타락한 유교라고 비판하며 원시유학의 회복에 기독교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약용이 서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데는 보유론의 학술개혁 방안이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수사학의 학풍은 정통론과 명분론에 매달린 주류 성리학의 퇴행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이데올로기의 모색 노력이었다. 현실에 조응하는 실용적 측면이 주류 성리학과 차별성을 보이는 실학의 특징이거니와, 실용적 측면을 뒷받침할 내면적 원리도 함께 탐구했던 것이다. 관직에 나가 경륜을 펼칠 기회를 가졌던 정약용은 실용적 정책의 제안만이 아니라 학문적 권위를 확보하는 데도 큰 노력을 기울였고, 실학의 풍조를 장려하고 싶었던 정조는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명제의 심판을 정약용에게 유리하게 봐준 것 같다.
유형원과 이익을 거쳐 온 실학의 한 흐름이 정약용에 이르러 현실정치에 작용할 기회를 얻은 것은 정조의 적극적 개혁정책 덕분이었다. 정조의 덕을 본 것은 이가환, 정약용 등 이익 계열 성호학파 관료들만이 아니었다.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도 정조의 지원 덕분에 활발한 활동이 가능했다.
정조의 실학 장려책에 호응한 중요한 두 집단이 성호학파와 북학파였다. 두 집단의 성격 차이는 무엇보다 그 형성 과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 같다. 성호학파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대안 모색 노력의 복류(伏流)가 정조조에 이르러 겉으로 솟아나온 것이다. 사림정치의 틀을 지키되 경세론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임금의 선택을 기다려 온 대안세력이었다. (조선 중-후기 정치의 양상을 '사림정치'로 보는 이성무의 관점을 필자는 지지한다.)
북학파는 이와 달리 정조 당대의 상황 속에서 정조의 학술 정책과 인재 양성책을 통해 일어난 움직임이었다. 성호학파가 사림정치의 틀을 고치려 했다면 북학파는 바꾸려 한 것이므로 더 과격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존 체제에 대한 위협은 성호학파 쪽이 더 강렬했다는 사실을 1801년 신유박해의 표적이 된 데서 알아볼 수 있다. 주류 성리학 입장에서 북학파는 단편적인 일탈에 불과한 것인 반면 성호학파는 체계적인 도전으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실학의 개념 기준으로 통상 '근대 지향성'을 이야기한다. 이 기준을 적용하는 데는 '근대성'의 개념에 대한 보다 엄밀한 검토가 앞설 필요가 있다. 중세체제의 퇴화라는 상황 앞에서 근대화가 필연의 과제였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진행되어 자본주의라는 형태로 퍼져 나간 변화 하나만을 근대화의 절대적 표준으로 삼는 것은 독단이다. 중세체제 극복이라는 의미에서 근대화의 많은 길 가운데 산업혁명-자본주의형 근대화는 한 갈래일 뿐이었다. 그 길을 사람들이 다른 길들보다 많이 걷게 된 것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따른 일이었다.
근대 지향성을 단순히 전통으로부터의 이탈로 보는 것은 특정한 형태의 근대성에 사로잡힌 시각이다. 오늘의 우리가 흔히 "중세사회 해체"라고 말하는 현상이 조선 후기에 진행된 것은 사실이다. 주류 성리학이 이 현상에 대한 대응을 소홀히 하고 있을 때 대응의 필요를 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대책 강구에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 실학자였다. 대책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유교국가든 사림정치든 기존 체제를 최대한 지킴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필요가 있었다. 유교국가와 사림정치가 결국 무너졌다는 결과를 기준으로 포폄을 행할 일이 아니다.
생활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는 박지원의 경우를 보면 물질적으로 상당히 여유 있는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유형원이나 이익처럼 은거지에 파묻혀 살던 사람들은 그보다 검소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연구와 저술에 그만한 노력을 쏟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한계급'의 기본조건은 충족시킨 것 같다. 그런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주변부에서나마 하나의 학풍을 일으키고 키우고 지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국가체제가 아직도 최소한의 건강을 지키고 있던 상태였다. 정약용 이후의 대표적 실학자로 김정희, 최한기 등 특수한 여건을 누린 신분의 인물들만 꼽히는 것을 보면 정조의 죽음을 계기로 국가체제의 건강이 크게 무너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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