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대의 역사서술은 지배층 위주로 이뤄졌다. 굳이 민중사관을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도 현대인의 눈에는 이 좁은 시야에 아쉬운 점이 많다. 그러나 이것을 "이긴 자의 역사"라고 매도만 할 일은 아니다. 그 시대에 그런 사관이 통용되었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감안하여 받아들일 일이다.
대부분의 전통시대 역사서술이 왕조의 역사였던 것은 그 시대의 질서구조에서 왕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역사학과 역사서술의 주된 목적은 정치에 참고하는 데 있었고, 당시의 정치는 왕조체제의 틀 속에서 이뤄졌다. 그 틀을 벗어나는 역사관이 더러 제기되기도 했지만 정사(正史)의 흐름에 들지 못하고 외사(外史) 류로 주변부에 머물렀다.
이것을 현대인이 불만스러워 하는 것은 현대의 질서구조가 훨씬 더 복잡한 것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세계의 상황은 정부에서 일어나는 일만 파악함으로써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인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과거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도 전통시대의 정사에서 다뤄지지 않은 많은 영역을 중요시하게 된다.
그러나 과거의 질서구조가 현대와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는 사실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문맹율이 제로에 가깝고 개인주의가 보편화된, 그래서 유동성이 큰 현대세계에 비하면 전통시대의 상황을 결정하는 데는 피지배층보다 압도적인 무력과 재력, 그리고 정보력을 점유한 지배층의 작용이 컸다. 따라서 왕조를 중심으로 한 지배층의 움직임이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데 현대인이 습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사실이다.
전통시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을 살펴보는 이번 작업에서 고찰의 방향과 순서를 정하는 데도 이 사실을 기준으로 삼아야겠다. 이 과정에는 전통적 질서구조의 붕괴라는 측면과 근대적 질서구조의 형성이라는 측면이 있다. 두 측면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 목적이다.
국권이 쇠미하거나 상실된 상태에서 한국의 근대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두 측면 사이의 연관성이 약하다는 인식이 널리 깔려 있다. 이에 대항해 내재적 발전론이 제기되어 왔으나, 그 고찰이 사회경제 분야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아쉽다. 자본주의를 위시한 근대적 현상의 타당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 때문인 것 같다. 근대적 담론의 틀에 매이지 않고 질서구조 전체를 다시 바라봄으로써 도덕과 문화 등 다른 분야의 고찰 가능성을 검토하려 한다.
조선의 망국에는 (1) 왕조의 철폐, (2) 이민족 지배, (3) 문명의 전환이라는 세 가지 의미가 겹쳐져 있음을 시작 부분에서 밝힌 바 있다. 1910년 여름 어느 날 몇 사람이 모여 도장 찍은 것은 일차적으로 왕조의 철폐였다. 그리고 그 5년 전부터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던 이민족 지배를 분명히 한 것이었다. 또한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문명 전환의 흐름에 하나의 중요한 획기였다.
가장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문명 전환의 흐름이 이 작업의 고찰 대상이다. 그 흐름을 첫 번째로 비춰 보여주는 것이 질서구조다. 조선이 왕조국가라는 사실에 가려진 더 중요한 특성은 유교국가라는 점이다. 유교국가의 퇴화는 동아시아 문명의 한계와 위기를 비춰 보여주는 것이다.
유교국가 질서구조의 핵심 요소인 왕도(王道)는 세종 때 가장 완성된 모습을 보였다. 권력구조만이 아닌 넓은 의미의 질서구조가 왕의 권위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세조의 찬탈은 권위보다 권력을 중시한 선택으로서 조선의 왕도에 흠집을 냈고, 왕의 권위가 줄어든 빈틈을 채우는 사림의 권위가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사림의 권위가 자라나면서도 왕의 권위를 보좌하는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왜란을 겪는 동안 왕의 권위가 급격히 하락한 결과 광해군 때는 왕이 사림의 권위에 의존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임금이 임금 노릇 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하는(君君臣臣)"의 원리를 벗어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왕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지고 그 결과 왕의 권력까지 무너져 왕이 신하들 손으로 축출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신하가 임금을 고르는(擇君) 것은 임금과 신하 모두 자기 노릇을 못하는 극단적 상황이다. 충간(忠奸)의 기준이 확고할 수 없는, "성공하면 공신,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상황이다. 왕도가 사라진 상황이며, 유교국가의 기본 원리가 무너진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연산군 축출(1506) 때도 있었지만, 그때는 연산군의 일탈이 이례적인 현상이었고 왕권 자체가 크게 약화되지 않았던 반면, 광해군 축출(1623) 때는 왕권의 약화로 '명분 없는 반정(反正)'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써 조선 왕조가 바로 멸망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이후의 상황 변화에 유교국가로서 대응할 자세가 크게 흐트러져 망국의 길이 시작된 분명한 계기였다.
그러나 유교국가를 지탱해 나갈 사회적 문화적 자원이 이 시점에서 모두 소진되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인조에서 효종까지(1623~74) 광해군 축출과 명-청 교체의 여파로 왕권이 극도로 억눌린 상황을 겪은 다음 숙종에서 정조까지(1674~1800)는 왕권과 유교국가 원리의 회복을 위한 노력이 두드러지는 상황이 펼쳐졌다. 18세기가 조선의 진로를 다시 한 번 결정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숙종이 왕권 강화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광해군을 축출한 서인 집단의 결속력이 약화된 덕분이었다. 공서(功西)와 청서(淸西), 한당(漢黨)과 산당(山黨) 등의 분열은 권력을 신하 집단이 장악했을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분화 현상이었다. 유교국가의 왕권은 권력 경쟁을 억제하는 구심점인데, 왕권이 쇠미하게 되면 이해관계의 대립을 조정할 길이 사라진다.
숙종의 왕권 강화가 가진 근본적 문제는 그가 추구한 '왕권'이 왕의 권위가 아니라 권력일 뿐이었다는 데 있었다. 그가 몇 차례 환국(換局)을 통해 당파들을 대립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는 평이 있는데, 올바른 왕도라 할 수 없다. 모든 위복(威福)이 임금에게서 말미암는 왕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상벌을 아껴서 써야 한다. 그런데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최대한 강한 상벌을 휘둘렀다. 환국과 출척 때마다 중요한 인재들이 떼거리로 죽어 나갔고, 유교 질서의 가장 큰 상징인 문묘 종사(文廟 從祀)가 뒤집혔다.
숙종이 키운 왕권은 권위 아닌 권력일 뿐이었고, 그 권력도 왕권의 기반을 키우는 건설적 노력이 아니라 신하 집단들의 이간질이라는 파괴적 노력으로 얻은 부실한 것이었다. 지나치게 강한 상벌은 신하들의 반응을 극단으로만 몰고 가고 극약 처방처럼 내성(耐性)을 키워주기만 했다. 그 뒤를 이은 경종은 가장 미약한 왕권을 물려받은 임금의 하나였다. 숙종 말년에서 영조 초년에 걸친 최악의 당쟁 양상은 다른 누구보다 숙종이 정치를 서바이벌 게임으로 만든 탓이었다.
박세채가 제창한 탕평책은 숙종조(1674~1720) 동안 당쟁의 드러난 양상에 대응하는 대증치료 수준으로만 고려되었다. 탕평책의 더 깊은 의미는 영조(1724~76)에 의해 모색되었다. 영조는 경종에 이어 최악의 당쟁 양상을 물려받았다. 소론의 경종 지지와 노론의 영조 지지가 워낙 치열했기 때문에 영조 자신의 경종 독살설까지 떠돌아 내란이 터져나오는 지경이었다. (1728, 이인좌의 난)
당쟁의 악화를 막기 위해 극도로 조심스럽게 조정을 운영하던 영조는 재위 17년을 지나고야 당쟁의 핵심 무기였던 통청권(通淸權)을 혁파하는 등 능동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762년에 이르러 세자를 자기 손으로 죽이는 희대의 비극을 겪은 것은 즉위 때부터 짊어지고 있던 당쟁의 혈채(血債)를 40년이 지나도록 충분히 해소시키지 못한 결과였다. 사도세자를 둘러싼 시비 관계를 나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세자의 죽음에 신하가 연루될 경우 혈채가 더 커질 것을 걱정해 손수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영조의 고충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탕평이라 함은 <서경> "홍범구주"의 "기울지 않고 패짓지 않으면 왕도가 탕탕하며 패짓지 않고 기울지 않으면 왕도가 평평하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는 귀절에서 따 온 말이다. 임금은 기울지 않아야 하는 것이고 신하들은 패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숙종이 이쪽으로 기울었다가 얼마 후에는 저쪽으로 기울고, 또 얼마 후에는 다시 이쪽으로 기우는 것은 철학 없이 전술에만 몰두하는 꼴이었다. 박세채가 '탕평'을 거론한 데는 왕이 기울지 말 것을 강조하는 뜻이 있었을 것 같다.
숙종조의 여러 차례 환국을 거치면서 당파는 생사로 맺어진 혈맹(血盟)이 되었다. 영조가 즉위할 때는 왕 자신이 기울지 않더라도 신하들의 패짓기가 저절로 풀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영조는 숙종의 성급한 판갈이(換局) 대신 시간을 두고 물갈이를 시도했다. 물갈이가 충분히 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자기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서까지 신하들 사이에 원한이 더 쌓이는 일을 피했다.
그 결과 정조가 즉위할 때는 보다 능동적인 탕평책 구사가 가능한 기반이 조성되어 있었다. 장용영 설치와 화성 축조 등 정조의 적극적 정책을 '국가 재조(再造)' 사업으로 해석한 연구자들이 있거니와, 정조 자신이 학문과 인격 도야를 통해 군주의 권위를 높이려 애쓴 것부터 왕도의 회복을 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왕도를 질서구조의 중심축으로 세우는 유교국가의 부흥에 정조는 매진했던 것이다.
그러나 350년 전 세종이 왕도를 세우던 시절에 비할 수 없이 열악한 여건에 정조는 처해 있었다. 작년에 공개된 놀라운 자료, 정조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들은 즉위 후 20년이 지난 뒤에 쓰여진 것이지만, 정조가 처해 있던 정치적 환경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4년간에 걸쳐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297건의 편지는 형식도 내용도 극히 놀라운 것이다. 해당 기간이나 정조 연간만이 아니라 전통시대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전혀 새롭고 매우 풍성한 시각을 이 편지들이 제공해 준다. 1799년 3월 6일 저녁무렵 심환지가 받은 편지 하나를 예로 들겠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정조 어찰첩> 324, 545~547쪽)
인사는 생략한다. 이번 일은 매우 난처하다. 실은 [화완옹주를] 도성에 들여놓은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으니, 조정이 알았건 몰랐건 성실함이 매우 부족하다. 예전 효종조에도 이와 비슷한 처분이 있었는데, 노인들이 전하기를, "상궐[경희궁]의 비변사에 머물게 하였다." 한다. 그때에는 이 일로 상소하거나 차자를 올린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조정 신료들이 [나를] 꼭 성실하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전의 처분에 대해서는 알아들을 만큼 이야기하였고, 의리가 지극히 엄중하다. 경의 경우에는 몽합(夢閤)[김종수]이 죽은 뒤로는 경이 주인의 자리를 양보해서는 안 된다. 일이 <명의록>의 의리와 관련되니, 차라리 지나칠지언정 미치지 못해서는 안 된다. 내일 신하들을 소견할 것인데, 반열에서 나와서 강력히 아뢰고 즉시 뜰로 내려가 관을 벗고 견책을 청하라. 그러면 일의 형세를 보아 정승의 직임을 면해 주든지 견책하여 파직하든지 처분할 것이다. 그 뒤에 다시 임명하는 방법도 생각해 놓은 것이 있으니, 이렇게 마음먹고 있으라.
드라마 <이산>에서 한 몫을 보인 화완옹주를 풀어주는 '작전' 장면이다. 정조는 고모인 옹주에게 명분에 구애되지 않고 은혜를 베풀려 하는데, 예상되는 신하들의 반대를 심환지를 앞세워 돌파하려는 것이다. 심환지가 벽파의 영수답게 강경한 태도로 나오면 그 한 사람만을 견책하면서 정조는 의지를 관철한다. 짜고 치는 두 사람 외의 다른 신하들이 이 사태에 연루되는 것을 막으면서 심환지의 위신을 더욱 높여주는 것이다.
정조의 재위 중 노론, 소론, 남인 등 기존 당파가 모두 시파와 벽파로 갈라지는 추세를 보여 기왕의 당색은 흐려지고 여당(시파)와 야당(벽파)의 대립 양상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야당 당수 격인 심환지가 받은 정조의 편지를 보면 군신간에 이런 지기(知己)가 따로 없을 정도로 알뜰한 내용이 진솔한 형태로 담겨 있다. 심환지에 앞선 벽파 영수 김종수와도 비슷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의 탕평책은 반대파까지도 건전한 야당의 길로 순치시켜 왕권을 등지는 길이 저절로 막히게 하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편지 내용을 보면 이 시기 동안에도 정조는 시파와 벽파 여러 사람을 상대로 심환지에게 한 것과 비슷한 '어찰정치'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입장이 서로 다른 여러 사람에게 이런 수준의 대화를 진행해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과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런 초인적 능력과 노력이 필요할 만큼 정조가 처한 상황에는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세종의 능력과 노력도 놀라운 수준이었지만, 정조의 노력은 세종과도 차원이 달랐던 것 같다.
당파의 득실이 대규모 살육을 몰고 오던 영조 초년까지의 악성 당쟁이 70여 년 후 정조의 편지들을 보면 드디어 극복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조가 죽은 바로 이듬해 신유박해로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를 몰아붙인 것을 보면 영조와 정조의 70년 공부가 나무아미타불이 되어버린 감이 든다. 정조가 더 오래 살았다면? 새로 공개된 어찰 연구자들이 독살설에 부정적인 의견을 발표했거니와, 내가 봐도 독살보다는 과로사 같다. 초인적 능력과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조선의 왕도는 쇠퇴해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망국 100년(밖에서 본 한국사 / 뉴라이트 비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조의 權道정치 (4) | 2010.04.05 |
---|---|
실학의 좌절 (7) | 2010.04.02 |
師表만 알고 君命은 모르다니... (14) | 2010.03.18 |
山黨과 漢黨의 갈림길 (54) | 2010.03.12 |
권위에서 권력으로 옮겨간 士林 (11) | 2010.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