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일본인의 횡령과 독직에 관한 몇 가지 기사가 보였다. 12월 7일자의 기사 (3)에서 말한 30여 건 사건 중 비교적 굵직한 것들이 보도된 것이겠지만, 간부급이 연루된 규모로 보아 평상시의 산발적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 붕괴에 따른 모럴 해저드 현상의 확산 같기도 하지만, 구 지배체제 핵심부에 의한 전면적 조직범죄로 볼 것인지도 모른다.


(1) 매일신보 1945년 10월 08일

종로 보안서에서는 6일 전 경기도 지사 生田淸三郞을 비롯하여 경기도청 내의 일본인 부장과 각 과장 20명을 검속하고 취조 중인데 사건의 진상은 아직 모르나 업무횡령과 독직사건이라고 한다.


(2) 매일신보 1945년 10월 16일

전 경기도경찰부장 岡久雄 이하 일인 경찰관과 일부 반역자들이 결탁하여 영등포 鍾紡창고에서 막대한 수량의 광목을 빼앗아 내어 혼란기에 있는 경제 상태를 더욱 혼란시키고 사사로이 배를 불렸다는 사건은 기보한 바이다. 종로 보안서에서는 그 동안 이들을 엄중 취조하던 중 여죄 일절도 판명되었으므로 16일 공갈 수뢰의 죄명으로 원 경기도 경제과 小野寺完爾, 谷本義國, 猪狩利喜三, 西村復雄을 구속하여 송국하였다. 그리고 平林幸一, 川面均은 기소유예, 李英介는 불기소로 되었고 자취를 감추고 있는 원 경기도 경제과장 淸水는 뒤이어 그 행방을 수색 중이다.


(3) 중앙신문 1945년 12월 07일

군정청 법무국장 매트 테일러 소좌의 5일 발표에 의하면 전 일본인 관리가 공금을 부당하게 사용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법무국내에 특별범죄수사위원회가 새로 설치되었다 한다. (...)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는 전 일본인관리의 공금횡령사건이 30여건이나 되어 동위원회 보고에 의하여 서울지방법원에서 판결되리라고 한다.


(4) 서울신문 1945년 12월 16일

전 총독부 체신국장 伊藤泰吉과 전 경무국위생과장 阿部泉 이하 다섯 명의 업무횡령사건의 공판은 작 15일 오전 10시 서울대법원 대법정에서 李仁 대법관 주심 아래 개정되었다.

이날 법정 방청석에서는 왜놈 관리들의 최후까지 착취를 꾀하여 사복을 채우려는 단말마의 발악의 죄를 우리들의 손으로 처단하는 광경을 보고자 아침부터 밀려든 방청객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는데 더욱이 培材中學校 학생 50여 명이 특별방청하여 종시 이 통쾌한 광경을 보고 있음이 눈에 띠었다. 먼저 위생과장 阿部의 죄상을 심리하고 阿部의 증인으로서 鍋田 외 1명에 대한 심문이 있은 후 대법관으로부터 심리는 끝났으나 무슨 할 말이 있거던 말하라는 말에 阿部는 눈물을 흘려가며 관대한 처분을 내려 달라고 애원하자 방청석에서는 이 가긍하고도 통쾌한 것에 웃음소리가 나오곤 하였다. 이어서 전 체신국장 이등이와 체신부 회계과장 이하 4명에 대한 업무행정의 범죄를 추상같고 준열한 대법관의 질문 앞에 심리가 오후까지 계속되어 일단 심리를 마치었는데 언도는 머지않아 하리라 한다.


(5) 동아일보 1945년 12월 19일

40년 동안 우리 3천만동포를 쥐어 짜 먹기에만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총독부 일인 고급관리들은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단말마적인 발악을 하다가 속속 우리 검찰의 손에 검거되어 방금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는데 또한 전 총독부 회계과장 上野武雄과 동 출납계장 上山敏雄은 6,400만원을 횡령한 사실이 발각되어 17일 特別犯罪審査委員會에 검거 구속되었다. 이제 영어의 몸이 된 上野는 上山과 결탁하여 가지고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공금 6,400만원을 38도 이북에 있는 일인관리에게 지불할 특별위로금이라 하고 9월초에 安田銀行을 통하여 일본에 송금한 후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경성에 체류하고 있으면서 기회를 보아 일본으로 비밀히 탈출하려는 직전에 이 사실이 탄로되어 체포되고 만 것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일본의 한국 지배는 1945년 8월 15일 정오 천황의 항복 방송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었다. 38선 이북에서도 소련군 민정부가 설치되는 9월 하순까지 일본인의 역할이 계속되었고, 이남에서는 11월 중순까지 미군과 일본인의 공동지배라 할 만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식민지배의 유산 중에는 8월 15일 이후에 만들어진 것도 적지 않았다.


식민지배가 끝나는 시점에서 일본인의 무책임한 파괴와 범죄 행위를 “나쁜 놈들이니까 끝까지 나쁜 짓을 했군.” 정도로 막연히 넘어가기 쉽다. 그러나 혼란을 틈탄 범죄 행위에 미군과 한국인의 몫도 있었다는 사실이 가려져서는 안 되겠다.


예컨대 경제 혼란의 대표적 현상인 식량난을 놓고 일본으로의 미곡 밀수출을 문제 삼는 자들이 있었다. 일본에서의 쌀값이 국내의 열 배 이상 되기 때문에 모리배들이 쌀을 빼돌려 국내에 식량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면 그것이 어찌 모리배들만의 잘못이겠는가. 농민들에게 쌀값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 국내 시장 운영에 먼저 문제가 있는 거지.


李承晩은 주례 방송으로 5일 서울중앙방송국 마이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방송을 하였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물가는 올라가 백성은 기아와 추위에 떨게 될 것이니 이것을 장차 어떻게 하느냐 군정장관 아놀드 장군도 깊이 걱정하고 있다. 금일 제일 급한 것은 기아에 빠져있는 백성을 구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첫째 비싼 쌀값이다.

그 원인은 농민이 쌀을 감추고 팔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농민이 먹을 것을 남기고 나머지는 시장에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른 물가는 모두 비싼데 곡가만을 싸게 방매하라는 것은 아니나 자기의 이익만을 채우려 하지 말고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서 방매하여 세금을 바치고 대중생활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애국가의 도의라고 할 것이다. 군정의 관측으로서는 적어도 백미 2만석을 시장에 내지 않으면 금년 겨울에 백성을 구할 수 없다고 한다.

둘째는 해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쌀 한 섬을 800원에 사서 일본국에 가지고 가면 2만원에 팔 수 있다고 매일같이 수천 석씩을 밀수출하는 사실이 있다. 이것은 단연 용서치 못 할 일이다. 지주와 일반농민은 곡물을 빨리 방매하여 군정당국과 협력해 주기 바란다. 국가와 동포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자기 혼자만 좋으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新국가의 건설은 될 수 없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07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식량난을 몰고 온 직접 원인은 10월 5일의 군정청 일반고시 제1호였다.


일반고시 제1호 미곡의 자유시장

1) 본 고시 제2항에 의하여 모든 법률과 左記 법률적 효력을 有한 제 규칙은 조선에 미곡의 자유시장을 실시하기 위하여 玆에 此를 전부 폐지함

(가) 조선 내에서 미곡의 私賣 及 자유판매를 금하는 제 규정

(나) 농민, 소작인 又는 기타로부터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 及 其局課나 대행기관 또는 조선총독부, 일본정부 及 其局課와 대행기관을 위한 자에게 미곡판매를 요하는 제 규정

(다) 미곡의 매입과 판매에 대하여 其 가격을 정하며 혹은 가격의 자유를 제한하는 제 규정

2) 일본국적을 가지고 개인소유의 미곡 혹은 일본국적을 가진 개인 又는 직접간접으로 일본정부의 지배하에 있던 회사, 연합회, 단체, 신탁회사 기타단체의 소유 미곡 혹은 이들의 전부 又는 其 一部와 이해관계를 보유하는 미곡은 조선생활필수품회사에 其 所定價格으로 소정기간에 매도할 事

(가) 그러한 미곡의 매도를 조선생활필수품회사가 요구할 때까지 其 所有者나 대행자는 동회사가 지정한 창고에 인도할 事. 其所有者를 위하여 손실이나 창고료 없이 보관할 事. 其 米穀의 인도는 동회사가 지정한 기간과 장소에서 행할 事.

(나) 전항에 설명한 미곡은 조선생활필수품회사가 지정한 창고에 인도하기 전에 포대에 넣을 事. 해 포대에는 其 背面에 대략 12인치 대소의 黑色 星標를 印할 事

3) 타 명령이나 고시를 규정할 때까지는 조선군정부는 어떠한 소유자에게서든지 正租 54킬로그램 一俵에 대하여 조선은행권이나 기타 法貨로 32원 가격으로 매입할 준비가 有함

4) 타 명령을 발포할 때까지는 該 協定 締結 후 1주일 후에 미곡을 인도하거나 其 引渡를 수취하는 계약은 불법이며 또 勵行치 못할 것이니 如欺한 계약이나 취인을 성취코자 하는 기도는 玆에 此를 금지함

5) 본 고시의 규정을 범하는 자는 군율재판에서 유죄판결을 受하는 동시에 其 소정의 형벌에 처함

6) 本令은 1945年 10月 5日 夜半 11時부터 유효함

1945年 10月 5日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A. B. 아놀드

일반고시 제1호 1945년 10월 05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조선의 식량정책은 1939년 말부터 전시체제에 들어가고 1943년 8월 ‘조선식량관리령’ 발포 이후로는 엄격한 배급체제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 10월 들어 군정청은 이남 지역의 작황을 낙관하면서 미곡의 자유시장화를 선언했다. 이것이 미곡시장의 투기화를 불러와 엄청난 혼란을 일으킨 다음 이듬해 1월에 ‘미곡수집령’을 발포해야 했다.


점령한 지 한 달이 안 된 시점에서 미곡시장 자유화처럼 민생에 영향이 큰 사안에 섣불리 손댄 까닭이 무엇일까? 이로부터 큰 이익을 얻을 한민당계 지주-자본가 집단의 로비 가능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미국식 자유시장의 우월성을 확인한다는 명분이 따랐을 것이다.


자금력이 대규모 폭력을 정치에 끌어들인 문제를 어제 지적했는데, 폭력이란 인간사회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이 다른 인간관계를 압도할 만큼 대규모로 조직되는 데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 해방 직후의 한국에 엄청난 규모의 유휴자금이 존재했다는 것이 그런 조건의 하나다. 아무리 자산가 계층이라 하더라도 이 시기 한민당 측에서 보여준 현금동원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12월 16일 경성방직은 임정에 700만원을 헌납했다고 한다.) 일본인에 대한 채권이 동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사업이 정체되어 있던 이 시점에서.


해방을 전후한 통화량의 급증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략 50억원대에 머물러 있던 조선 통화량이 몇 달 사이에 30여억원 늘어났다고 한다. 강준만은 이것을 “패전한 일본인들이 미군 진주가 지연된 기간을 이용하여 재한 일본인들의 귀국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마구 찍어낸 탓에 빚어진 일”로 보았다. (<한국현대사산책 1> 184쪽)


9월 30일자 일기에서 정병욱의 논문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 - 식민지배의 연속과 단절”(<역사비평> 64호, 2003 가을)과 “8-15 이후 ‘融資命令’의 실시와 무책임의 체계”(<한국민족사연구> 33호, 2002. 12)를 참고하여 이 돈의 출구를 살펴보았지만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 너무나 컸다. 그런데 맨 위의 인용 기사 중 (5)번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정병욱의 연구는 ‘합법적’ 출구를 찾는 데 제한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와 다른 차원의 ‘불법적’ 출구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총독부 회계과장과 출납계장 둘이 공모해서 6천4백만원을 빼돌렸다고 한다. 전국 통화량의 1%에 육박하는 이 금액을 “38도 이북에 있는 일인관리에게 지불할 특별위로금이라 하고 9월초에 야스다은행을 통하여 일본에 송금”했다고 한다. 특별위로금으로 지출했으면 괜찮을 것을 착복하려고 빼돌려서 죄가 되었다는 말인가?


회계과장과 출납계장의 개인적 착복인지, 아니면 윗사람들 시키는 대로 했다가 총대를 멘 것인지도 이 기사만으로는 판별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평소에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규모의 돈이 황당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개인적 착복이더라도 자금의 불법 유출이 횡행하는 상황에 편승한 것이었으리라 보인다.


이 시점에서 돈의 움직임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의 일본인 고위 관리의 입장에 내가 있었다면 어떤 짓을 할 수 있었을까? 패전의 불가피성을 확인하고 나서 ‘그 날’을 기다리는 시간은 고위급일수록 더 많았다. 몇몇 나치 거물처럼 거금을 챙겨 남아메리카로 도망갈 길도 없었다. 싸 들고 고향에 돌아갈 길도 없었다.


나 같으면 내가 아는 조선인들 중 능력은 우수하되 품성이 저열한 인간들에게 돈벼락을 때려줬겠다. 그래야 우리가 떠난 뒤 조선 정치가 개판이 되고, 조선 백성들은 구관이 명관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정병욱의 논문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에 따르면 초기 미군정의 재정 정책은 일본인의 조언에 따라 이뤄졌다고 한다. 군표 대신 조선은행권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미군정의 은행권 남발로 이전의 통화 증발을 물타기한 것이다. 덕분에 고위 책임자들이 모두 아무 처벌 없이 귀국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군정청 재무국 촉탁으로 통역을 담당하느라 잔류했던 한 조선식산은행원 출신자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은 재무국장 고든과 두 명의 보좌관 로빈슨, 스미스로 구성된 미국측과 미즈타(총독부 재무국장), 호시노(조선은행 부은행장), 야마구치(조선식산은행 이사)로 구성된 일본측의 통역에 전념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 이 6명 사이에서 한국 재정과 금융에 관한 지배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호시노는 미군정의 군표발행 계획을 혼란만 줄 뿐이라며 반대하고 필요하다면 조선은행권을 찍으라고 권유했다. 이후 은행권 남발을 통한 미군정의 재정자금 확보가 일상화되었다. (136쪽)

 

Posted by 문천


임시정부 군무부장 金若山은 18일 義烈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근 조선의열단이니 의열청년회니 의열동지회니 하는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는 옛 朝鮮義烈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조선의열단은 1915년 해외에 있는 대한독립단, 조선혁명단, 신한독립단 등 여러 단체가 조직한 것으로 그후 조선민족혁명단이 되었다가 다시 1945년에 발전적으로 해소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새의 것은 그 때의 것과 성질도 다르며 그 당시의 관계자들은 이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2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식민지시대의 항일투쟁 중 가장 적극적인 방법을 취한 것이 의열단의 테러전술이었다. 1919년 11월 김원봉(약산)을 단장으로 결성된 의열단은 단순한 행동대에 그치지 않고 사상적 측면에서도 항일투쟁의 한 첨단 역할을 맡은 중요한 조직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이 효과적 질서 수립에 실패하자 조직폭력이 대두하기 시작했는데, 의열단의 명성에 의탁하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의열단의 원조 김원봉이 해명에 나선 것이다.


11월 20-22일의 전국 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둘러싸고 조직폭력의 양상이 기사화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전국 인민위원이 모인 회장인 서울시 경운정 천도교 대강당에는 대회 첫날인 20일에 돌연히 수상한 청년 일당이 손에 장작가지를 들고 습격하였지만 미연에 경비대원에게 발견되어 미군 헌병의 제지로 그들을 놓쳐버린 사실이 있어서 이 대회의 진행을 방해하려는 단체의 폭력행위가 폭로되었었다. 그런데 대회 제2일인 21일에도 또한 폭련단의 습격이 있었는데 그 중 폭한 11명이 경비원과 미군헌병대의 손에 체포되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남과 동시에 그들을 배후에서 조정하고 있는 정당의 정체도 마침내 드러나게 되었다.

이 날 오전 10시반경 대회가 개최되어 진행되려 하는 때에 회장 남쪽 담을 뛰어넘어 회장에 침입하려는 괴한이 있는 것을 경비대원이 발견 체포하였는데 그자는 강원도 洪川에 원적을 둔 安東洙(23)라는 자인 것이 판명되어 곧 미 헌병에게 인도하고 취조한 결과 그자의 자백에 의하여 그 배후의 일당을 알게 되었다. 안동수는 17일에 일당 열 명과 함께 元山서 상경한 것인데 그들 열 명은 원산에서 해산물상을 하는 韓承基(28)에게 인솔되어 상경하여 서울시 觀水町에 있는 전 일인 경영의 和光敎團 안에 있는 觀水部隊라고 하는 청년대에 소속하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19일에 이르러서 전기 韓承基의 명령으로 서울시 수송정 太古寺에 가서 그곳에서 朝鮮建國靑年會本部 위원장 崔泓銖, 부위원장 吳炳喆에게 인사를 하게 되고 비로소 20일에 개최되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파괴하여 그 회를 진행치 못하게 하여야 될 것이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약 300명이 일단이 되어 일인당 50원씩의 돈의 배당을 받은 후 전기와 같이 20일 오후 1시 대회의 첫날이 개최되는 시간을 기해서 폭력행동을 할려고 하였는데 회장의 경비가 엄중하여 성공이 되지 않겠으므로 길가에 쌓여 있던 장작더미에서 장작을 집어들고 난입하려고 하다가 제지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제2일인 21일에 재거할 것을 약속하고서 당일에는 보다 더 계획적으로 하기 위하여 흰 마스크와 흰 장갑으로 대원임을 표하고 미리 준비하였던 흉기를 가지고서 300명이 5,6명씩 떼를 지어 각각 방향을 나누어서 회장을 포위 습격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같이 안동수는 자백하였는데 역시 이 날 체포된 폭력단 중에서 일본유학생으로 중앙대학 법과생이라는 崔瑞得(23) 韓炯采 양인의 자백으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 양인은 지난 8월 2일에 귀국 상경하여 전기 위원장 부위원장 외에 組織部長 朴世東, 調査部長 金敏洙, 外事部長 李營斗, 書記長 金熙公인데 동회의 전체를 책임운영하기는 부위원장 오병철이며 서기장 김희공은 과거 일본제국 아래 만주국에서 토벌대에 가담하여 일본육군대위로 있었다 한다.

그리고 동회의 산하에 유학생회가 가입하였었으므로 최서득, 한형채의 양인도 가입하게 된 것이며 서울시내에는 마포부대, 관수부대라 하여 지역적으로 나누어서 지부가 설치되었다 한다. 그리고 이번에 대표자대회를 깨트리자는 데에는 조선건국청년회를 통해서 전기 원산 출신의 韓承基와 모 정당과의 사이에 밀의가 되어서 이번 운동자금으로 40만원을 모 정당에서 제공하기로 되었는데 그 중 4만원을 전기 부위원장 吳炳喆을 경유하여 韓承基에게 지불하였다 한다.

체포된 11명은 보안서에 유치중이며 그 배후조사를 진행하게 될 터인데 이 같은 반동의 폭력은 일반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자유신문> 1945. 11. 22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7백 명이 모이는 집회를 분쇄하기 위해 흉기를 준비한 3백 명을 동원하고 현금 50원씩을 나눠줬다고 한다. “모 정당”의 이름을 밝혀놓지 않았지만, 사실 밝혀놓을 필요도 없다. 대표자대회를 깨뜨리는 비용으로 40만원을 내놓을 세력이 따로 누가 있겠는가. 인공 측의 개최 비용은 그 몇 분의 일도 안 되었을 것이다. 압도적인 자금력을 가진 세력이 폭력을 정치판에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민당 측의 파괴 공작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군정청이 예상 외로 대회를 철저하게 보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군정 당국자들은 이 대표자대회에서 ‘인민공화국’ 호칭 등 몇 가지 문제가 처리된 후 좌익도 모스크바 외상회담 전에 독촉에 참여하기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대표자대회를 극력 보호한 것이었다.


11월 25일에 인용한 바 20여 개 단체 연명으로 뿌린 “악덕 기자에게 경고함” 삐라는 대표자대회 파괴 공작이 실패하고 공작의 배후가 밝혀지는 데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 ‘백색테러’치고는 아직 조직 수준이 낮아 보인다. 행동대 몇 명이 잡혀 들어갔다 해서 위 기사에 나타난 것처럼 돈 문제까지 낱낱이 드러나서야 ‘공작’이란 이름이 부끄럽다.


그러나 폭력의 수요는 늘어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폭력조직의 수준도 발전하게 되어 있었다. 12월 21일 결성된 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은 몇 달 후 대한민주청년동맹(민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우익 폭력의 주요 공급원이 되었다.


우익 폭력에 어떤 사람들이 동원되었는가? 1930년생으로 평양에서 자라고 1946년 8월 단신 월남한 채병률의 회고에서 그 전형적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서울에 와서도 돈이 없으니까 막막하잖아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찹쌀떡, 메밀묵, 아이스케키 장사, 그리고 서울역과 염천교 앞에서 담배꽁초 주워 까서 팔고, 공책장사, 연필장사, 양초장사 등 안 해본 게 없습니다. (...)

지금 장충동 부근에 그 당시 이북에서 넘어온 학생들이 많이 모이니까 이북학련 천막을 쳐줬어요. 그때부터 반공투쟁이 시작된 거예요. 이북에서 넘어온 어른들은 서북청년회, 학생들은 이북학련회. 우리의 활동은 좌익세력을 쳐부수는 행동부대로서의 역할이었어요. 예를 들어, 그 당시에는 남로당이니 뭐니 다 합법정당이었기 때문에 경찰관들이 우리에게 지도를 갖다 주고는 어디어디 있는 놈들이 악질 빨갱이들이니까 가서 혼 좀 내주라고 했어요. 그러면 밤에 가서 숨었다가 그들을 흠씬 두들겨 패는 거예요. 패다가 우리도 힘이 달리면 뒤지게 맞고요. (<8-15의 기억> 351-352쪽)


Posted by 문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한국의 독립 방침을 연합국이 정한 것은 1943년 11월 하순의 카이로선언이었다. 미국, 중국, 영국의 3개국이 여기에 참여했다. 대 일본 전쟁 방침을 의논하는 카이로회담에는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이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며칠 사이를 두고 대 독일 전쟁 방침을 의논하는 테헤란회담을 열었다.


카이로에서 한국 독립 방침을 정한 것은 장개석이 주장한 덕분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이에 동의한 것은 그 전략적 의미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유럽국들의 동남아 식민지를 침략하면서 ‘해방’을 내세우는 데 대한 맞불작전으로 생각한 것이다. 카이로선언에 한국인의 작용은 장개석을 포섭한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장개석의 중국도 연합국 진영에서 발언권이 크지 않았다.


일본 항복 후 “적절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선언의 방침은 종전을 목전에 둔 1945년 7월의 포츠담회담 때까지도 더 이상 구체화되지 않았다. 포츠담회담에서는 미-영-소 3국 외상회담을 열어 미진한 사안들을 더 다루도록 경정해 놓았다. 이에 따라 12월 16일에 모스크바에서 3국 외상회담이 열렸다.


“적절한 과정”이란 신탁통치를 뜻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신탁통치를 무척 좋아했다. 후발 강대국인 미국이 대외 영향력을 늘려가기에 종래의 식민지체제보다 다변주의(국제주의) 방식의 신탁통치 체제가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는 한국에 대해 필리핀 통치와 비슷한 수준의 긴 기간 신탁통치를 구상했고, 스탈린은 더 짧은 기간을 생각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회담에서도 미국과 소련의 이 입장 차이는 계속되었다. 미국은 멀리 떨어진 이 지역에 안정된 영향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 것이었다.


모스크바에 모인 3국 외상은 한국의 신탁통치 방침 자체에 아무 의문이 없었다. 기간과 방법만이 토론 의제였다.


그런데 전쟁 막바지의 원자폭탄 개발로 미국이 전략적 이점을 가지게 되면서 다변주의보다 일방주의(국가주의)를 추구하는 풍조가 미국 군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미국의 힘이 충분하니 이제 국제적 협력이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이 풍조의 한 중심지였던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한국의 신탁통치 방침을 뒤엎고 미국의 직접 영향력을 키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11월 20일 주한 정치고문 랭던이 국무장관에게 보낸 이른바 ‘랭던 제안’이 바로 신탁통치의 대안으로 남한 군정청이 만든 것이었다. ‘정무위원회(Governing Council)’를 만들어 한국의 국가 건설을 준비시킨다는 것이다. 4개 항으로 구성된 이 제안의 성격을 본문보다 더 확연하게 보여주는 ‘주’가 붙어 있다.


“위 계획에 앞서 소련 측에 통보해야만 하며, 회의는 정무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지명한 소련 지역 내 인사들이 서울에 오게 해 정무위원회를 강화할 수 있도록 소련 측을 초청해야 한다. 그러나 소련 측의 참여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계획은 38도 이남의 한국에서만 실행되어야 한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481쪽에서 재인용)


소련 측에 ‘통보’하여 협조를 얻으면 좋고, 아니면 미국 혼자 하겠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군정 관계자들이 분단 건국을 확고한 목표로 세워놓지는 않고 있었더라도 분단 건국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이북보다 이남이 인구가 많고 중심도시 서울이 들어있다는 점을 이용해 이남 점령군의 구상을 이북 점령군에게까지 수용시킬 희망도 약간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주’ 내용은 이남에서 미국의 독자노선을 제창한 것이다.


랭던 제안의 ‘정무위원회’ 역할을 맡겠다고 나선 것이 이승만의 독촉이었다. 군정청은 모스크바 회담 전에 독촉을 출범시켜 “이런 정무위원회를 만들었으니 한국에는 신탁통치가 필요 없다”는 주장으로 국무성의 신탁통치 방침 철회를 요구할 참이었다. 이 ‘정무위원회’를 그럴싸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임정 인사들을 참여시키고 좌익도 포용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좌익과의 절충에도 실패하고 임정 인사들의 신뢰도 얻지 못했다. 12월 14일까지 전형위원회를 열어 중앙집행위원 39인을 선정했지만 12월 15일과 16일의 제1차 및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 모임에는 각 15인만이 참석했다. 임정 인사들은 선정 자체를 거부했고 일방적으로 선정된 좌익 인사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독촉은 이승만이 10월 13-14일 도쿄에서 맥아더와 하지를 만나고 귀국한 이래 가장 공들인 작품이었다. 그는 교묘한 책략을 시도했다. 군정청에 대한 영향력을 미끼로 임정 등 민족주의자들을 독촉으로 끌어들이고, 다시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군정청에 대한 정치적 권위를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임정이 귀국하자 군정 하에서는 임정 그대로 활동할 수 없으니 독촉으로 들어오라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임정 수뇌부만 포섭하면 충분한 권위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좌익 포용에 대해서는 진지한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12월 15일 중집위 첫 회의에서 이승만이 구사한 ‘2중화법(double-speaking)’을 정용욱이 지적한 데서도 그의 책략 스타일을 알아볼 수 있다. 아놀드 군정장관이 “이 고문 제도를 군정의 부속물로 하려 하였지만 자신이 반대하여 군정부와 연락하는 국정회의로 하였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46-47쪽) 군정청에 대한 자기 영향력을 과시한 것이다.


중집위 회의록을 검토한 정병준은 15일 첫 회의에서 “이승만은 매우 격앙된 태도를 보였다”고 평했다. 회의록이 인용된 부분을 보면 그런 인상을 피할 수 없다. 미군 측에 장담했던 성과를 이루지 못한 초조함 때문에 평정심을 잃고 속내를 마구 드러낸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운이 조석에 달려 있습니다. (...) 독촉중협은 원래 민의 대표기관을 만들려 한 것이 목적이다. 지금 모스크바회의 같은 데 대해서 우리의 민의를 부르지지자면 이러한 합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 우리는 임정의 승인을 목표로 싸워 나갈까, 독촉중협을 육성하여 나아갈까 어름어름 하는 사이에 신탁 단체 같은 것이 음생(陰生)되면 참으로 야단이다. (...) 외교 관계 신탁 문제 등에 대한 것은 나의 독단적인 의사만이 아니다. 군정 당국에서도 극력으로 자기 나라의 국무성과 싸워가면서 우리를 조력해주고 있다. (<우남 이승만 연구> 493쪽에서 재인용)


그래서 눈가림으로라도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독촉중협을 결성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고 한다. 임정과의 관계에 대해 “김구와 말한 바가 있어 양해가 어렵지 않으나, 김구가 임정 요인들의 속박을 많이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몇몇 참석자들이 캐묻자 “이 말은 더 이상 묻지 마시오. 임정 각료회의 진행에 적지 않게 난색이 있는 모양”이라고 덮어버렸다. (<우남 이승만 연구> 500-501쪽) 군정청과의 관계도 깨놓고 얘기했다.


져 군정부 하지 장군은 우리를 위하야 신이냐 넉시야 하면서 2주 내로 이 결성을 속히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 오날이 미국인 군정 측이 내용으로 이 결속의 결과를 보고해 달랜 최후의 한정일이오. 적어도 1주일 전찜 이 합동을 보여쥬엇드면 미국인이 우리에게 말하여 줄 것이 있엇슬 것인데 참으로 유감이오. (<우남 이승만 연구> 489쪽에서 재인용)


12월 15일과 16일 서둘러 중집위 1, 2차 회의를 열었으나 독촉은 모스크바 회담에 영향을 끼칠 규모도 되지 못했고 시간도 놓쳤다. 그 다음 회의는 1월 15일에야 열리게 된다. 묘수 일발을 놓친 이승만은 무척 아쉬웠던 모양이다. 12월 16일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의 일이 늦어져서 군정청 하지 장군은 골이 나 있다. 공산당이 불참한 것을 들으면 또 불만스럽게 여길 것이다. 이 긴박한 시국을 볼 때 2주일 3주일이라는 기막히는 귀한 시간을 허비한 것은 참으로 애닯은 마음이다. (<우남 이승만 연구> 503-504쪽에서 재인용)


랭던은 12월 11일과 14일에 국무부로 전문을 보내 (1) 정무위원회 방안과 (2) 남북한에 최장 5년간 미소의 배타적 신탁통치 후 양군 완전 철수 방안, 두 가지 중 선택을 요청했다. 독촉의 부진으로 정무위원회 방안에 대한 대안을 제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그 대안을 보면 남한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분단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다시 느껴진다. (<우남 이승만 연구> 508쪽)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