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일전(12월 10일) 회견에서 “통일운동에서 민족반역자 제외의 선후문제는?” 하는 물음에 선생님은 “나는 그런 분자는 먼저 제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셨지요. 그런데 김구 선생은 귀국 이튿날 회견에서 “爲先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임으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현실정치의 가장 큰 문제인 친일파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는 정치노선의 중대한 차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차이를 놓고도 김구 선생의 노선에 신뢰를 지킬 수 있습니까?


안재홍: 이 자리에서 하는 말이 지금 사람들에게 들리는 것이라면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일전의 회견에서도 임시정부의 인민공화국 해체 요구에 대한 의견을 묻기에 “말할 수 없다”고 대답했어요. 의견이 있지만 오해를 불러올 것을 꺼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65년 후의 사람들에게라면 솔직히 대답하겠습니다.


백범 선생께서 정녕 불량분자 배제를 후일로 돌린다면 그분 노선을 따를 수 없습니다.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수 없습니다.


산수에서는 A+B와 B+A가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일은 이와 다릅니다. 친일파 배제를 A, 건국을 B라 할 때, A를 해놓은 뒤의 B와 A를 하지 않은 채로의 B는 서로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B를 해놓은 뒤의 A와 B를 하지 않은 채로의 A도 서로 다릅니다. 어느 쪽을 먼저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풀어서 얘기하죠. 친일파를 배제하지 않은 채로 건국하면 세워진 나라의 칼자루를 친일파가 쥐게 되기 쉽습니다. 친일파 속에 권력과 재력을 가진 경찰, 부자 등이 많으니까요. 그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데 친일파 처리가 제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한편 소위 친일파도 옥석구분(玉石俱焚)을 피하고 그중의 건실한 요소를 살려내려면 나라를 먼저 제대로 세워놓아야 합니다. 친일파가 배제된 국가가 세워지면 도덕적 약점이 없는 당국자들이 악질 친일파를 철저히 숙청하면서 비교적 양심적인 인재들에게는 반성의 길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반면 새 국가의 당국자들 자신이 도덕적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친일파 처리 문제에 유연한 자세로 임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백범 선생께 기회 있는 대로 이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미군정과 한민당의 협조 문제가 있어서 분명히 말씀하기 어려우시겠지만, 머잖아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시기 바라고 있습니다.


김기협: 친일파 중의 “건실한 요소”와 “비교적 양심적인 인재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애국자와 친일파의 흑백론적 구분에는 물론 형식적-논리적 문제가 있지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은 친일파에 대한 보다 분석적 시각이 현실정치 측면에서도 필요하다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석적 시각이 바람직할지 선생님 생각을 말씀해 주시지요.


안재홍: 며칠 동안 장마비가 내렸다고 합시다. 35년 일제 지배를 받고 나서 친일을 했냐 안 했냐 하는 문제는 빗방울 맞은 일이 있냐 없냐 따지는 것과 비슷해요. 비 맞고 싶어서 발가벗고 뛰쳐나간 사람들은 얼마 안 되고, 대개는 부득이 우산 쓰고 나갔다가 튀는 빗방울 묻은 정도예요. 방 안에 꼼짝 않고 틀어박혀 비를 철저히 피한 사람은 몇 안 돼요.


나 같은 사람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인정받지만, 나도 바지자락에 빗물이 튄 사람이에요. 감옥 몇 번 드나들었다고 해도 감옥에서 고생한 시간보다 언론사 간부로 호의호식하며 행세한 시간이 더 길지요. 식민지 35년간 내 존재와 활동이 민족과 사회를 위한 것이 되도록 노력하기는 했지만, 현실 속에서는 명쾌할 수 없는 측면들이 있었죠. 예를 들어 현실 속의 최선으로 여긴 물산장려운동에는 분명 타협적 성격이 있었습니다.


물산장려운동 함께 하던 이들이 한민당에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전쟁 말기에 길이 갈라져 손가락질을 나보다 많이 받게 된 분들이죠. 나는 그분들이 막바지 몇 해 동안의 행적을 반성하고 나와 같이 건국사업을 뒷전에서 돕는 위치로 돌아오기 바랍니다. 학식과 경영능력을 가진 그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이 새 나라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포용이 이뤄지려면 포용하는 측과 포용받는 측의 뜻이 어울려야 합니다. 포용하는 측에서는 “당신들은 흠이 있으니 앞에 나서지 마시오.” 제재하고 포용받는 측에서는 “우리는 과거의 행적을 반성하며 뒷전에서 봉사하는 자세를 지키겠소.” 자숙해야 포용이 이뤄집니다. 그래서 나부터 뒷전에서 봉사하는 자세를 지키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김기협: 해방 후 지금까지 4개월간의 사태 진행을 보면 포용하는 측보다 포용받는 측의 태도에 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민당 사람들 말입니다. 건준이 민족주의 기준에서는 더 떳떳한 입장인데, 한민당에서는 오히려 건준이 총독부 돈 받아먹었다고 친일파로 몰아붙이다니, 정말 적반하장입니다. 그런데 여 선생이 총독부 돈 받았다는 것은 사실입니까?


안재홍: 총독부 돈에 관해 나는 받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듣지도 않은 사람이니 뭐라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몽양 선생이 내게 돈 이야기 않아준 데 감사할 따름입니다.


굳이 생각을 말한다면, 건준이 총독부에게 돈을 받았어야 마땅합니다. 총독부는 우리 백성에게 세금이란 명목으로 돈을 짜내 쓰고 싶은 데 썼고, 자기네 식의 ‘질서 유지’ 비용도 그 돈으로 썼습니다. 건준이 질서 유지 사업을 저네들에게 넘겨받으려면 그 비용을 새로 백성들에게 걷어야 합니까? 당연히 저네들이 틀어쥐고 있던 백성의 세금을 넘겨받아야지요.


김기협: 한민당의 조병옥이 미군정으로부터 경찰 지휘권을 받은 후 식민지시대의 악질 경찰을 대거 중용하고 있습니다. 한민당 지도부는 다소 친일 혐의가 있다 해도 반성하는 데 따라 재활용이 가능한 집단이라고 선생님은 보시는데, 이제 그들이 재활용이 도저히 불가능한 집단과 손을 잡기 시작하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이승만 박사도 친일 행적이 뚜렷한 사업가들을 불러 모아 ‘경제보국회’란 걸 만든다죠. 그들을 끌어 모으는 미끼가 군정청의 도움으로 은행에서 대규모 융자를 얻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융자금의 절반은 이 박사의 정치자금으로 주머니에 넣고 절반은 사업가들이 나눠가진다는데, 상환할 생각은 전혀 없이 그냥 은행돈 갈라먹기인 모양입니다.


경찰에서나 경제계에서나 친일은 고사하고 전범재판에 회부될 만한 사람들이 오히려 활개를 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조병옥과 이승만이 관계된 일을 보면 미군정이 이 변화에 큰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미군정의 역할을 선생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안재홍: 미군정은 우리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해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방시킨 자의 개입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군정 조치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 해서 군정을 마음대로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련군은 군정을 시행하지 않고 있고, 그쪽이 건국 준비에 더 유리한 조건으로 보입니다. 미국이 왜 군정을 필요로 하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소련인들보다 이곳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군정 담당자들이 지금까지 취해 온 잘못된 조치도 사정을 잘 몰라서 오해를 한 결과로 나는 봅니다.


담당자들의 오해나 실수가 아니라 우리 독립이 미국의 국익에 어긋나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라면 지금 당장 일본 대신 미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펼쳐야 하겠지요. 내가 아는 미국 역사로 보아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군정 당국자들의 태도도 몇 달 사이에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금 군정장관 교체도 그런 증거 아닙니까? 아놀드 소장 몇 번 만나봤는데 인간적으로 참 괜찮아요. 그런데 성격이 너무 고지식해서 불만 보면 기름 붓는 짓을 안 하고 못 배기는 사람입니다. 새로 오는 러치 소장은 법률과 정치를 잘 아는 사람이라니 기대가 갑니다.


그래도 떨치기 힘든 한 가지 걱정은 미군과 한민당 일각의 맹목적인 ‘반공(反共)’ 분위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좌익’은 공산주의가 아니죠.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민족주의자들에게 ‘좌익’ 딱지를 붙인 것입니다. 나만 해도 물산장려운동 같은 것 안 했으면 ‘좌익’ 딱지 붙였겠죠. 실정 모르는 미군을 깨우쳐줘야 할 텐데, 조병옥 씨 같은 이들은 오히려 미군의 오해를 더 부추기고 있으니... 요즘 이승만 박사마저 ‘반공’ 분위기에 휩쓸리기 시작한 것 같아서 더욱 걱정입니다.


김기협: 그것 참, 물산장려운동이 좌우 구분의 기준이 되다니 착잡한 일입니다. 경제를 살리자는 것이 물산장려운동 아닙니까. 백성을 빈곤으로부터 건져낸다는 것이 기본 목적인 것을, 거기에 식민지체제를 고착시키는 효과가 있다 해서 ‘개량주의’라 부르고 마치 일종의 반민족 행위처럼 보는 후세의 시각을 저는 의아하게 봅니다.


선생님은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지만 그 후 일제에 대한 협력 행위가 없었기 때문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명예를 지킬 수 있었지요.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그 후 전쟁기에 다소간의 협력에 나섰기 때문에 물산장려운동 자체도 친일 의혹의 대상이 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물산장려운동 자체에 민족주의 입장에서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안재홍: 사람의 일이란 칼로 벤 듯 선명한 것이 아닙니다. 후세에는 어떻게 보게 되든, 지금은 물산장려운동을 친일 행위로 보는 사람이 없어요. 극좌파 일부의 선동 외에는.


그런데 자치운동은 다릅니다. 나 자신도 자치운동에는 친일의 의미가 곁들이기 쉽다고 봐서 조금 관여하다가 곧 그만뒀지요. 문제는, 두 운동이 본질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백성의 생활을 이쪽은 경제적으로 향상시킨다는 것이고 저쪽은 정치적으로 향상시킨다는 것입니다. 현실적 향상을 위해서는 통치권을 가진 일제와 어떤 범위에서든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자치운동의 협력적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정치에 직접 관계되는 영역이기 때문일 뿐, 물산장려운동도 본질적으로 덜 협력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립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명예롭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같은 상황에 다시 놓인다면 ‘협력’을 꺼리기보다는 민생을 돕기 위해 같은 일을 할 것이니까요. 지금 미군정에 대해서도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타협적’이고 ‘협력적’인 태도를 취하고자 애를 씁니다.


민생을 돕기 위해 권력과 타협하는 것은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의 의무입니다. 그것 때문에 욕을 먹는다면 그것도 자기 몫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만 “빈 방에 혼자 앉아서도 큰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가다듬는다”는 성현의 가르침처럼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살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물산장려운동을 후세 사람들이 ‘개량주의’나 ‘협력’으로 보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 운동을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가 민족의식이 차츰 흐려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를 ‘반민족 행위’의 뜻을 가진 ‘친일’로 볼 것은 아닙니다.

Posted by 문천


12월 12일 공산당 박헌영이 민족통일전선, 즉 정치적 통합 문제와 임시정부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중 임시정부에 관한 담화 내용은 이렇다.


그들은 망명정객으로서 국내에 들어 와서 벌써 여러 날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할 일은 안하고 쓸데없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것은 즉 망명정부가 일종의 임시정부인 것처럼 신문지 기타 선전운동에 전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은 통일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도리어 분열을 조장하는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분들이 애국지사인 것이 틀림없다면 마땅히 국제관계와 국내 제 세력을 옳게 파악하고 결코 망명정치단을 가지고 임시정부의 행사를 하지 말 것이오 개인자격으로 들어와 본분을 지켜야 국제 신의가 서게 될 것이고 또한 통일정부수립을 제안하고 있는 국내의 진보적 세력과 접근하기에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완고만을 주창함은 심히 통일을 위하여 유감스러운 것이다. 그 분들은 좀 왕가적, 전제적, 군주적 생활의 분위기에서 해탈하고 나와서 조선의 인민 특히 근로대중과 친히 접촉하여 조선인의 새로운 공기를 호흡할 필요가 있다. 과거 수십 년간 망명생활 중에 조선과 분리한 생활을 계속하던 분들이 또 다시 국내에 와서도 그러한 비 민중적 생활의 노예가 되며 장래 조선의 지배자를 꿈꾸고 있는 현상은 차마 못 볼 기현상이다. 그 분들은 반일투사임은 분명하니 곧 나와서 조선민중과 접촉하되 평민의 관직을 잠시 맡겨 두고서 움직임이 어떠할는지.

<서울신문> 1945년 12월 13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내용의 옳고 그름에 앞서 표현의 극단성이 눈에 걸린다. 해방 이후 많은 흑색선전이 전단 형태로 난무하고 있었지만, 중요한 정치세력의 공식적 발표는 품격과 절제를 어느 정도 지키고 있었다. 이 상식을 뚜렷하게 벗어난 것이 9월 8일의 발기인 성명서에서 시작한 한민당의 건준-인공 공격, 그리고 10월 10일의 아놀드 망언 등 군정 당국자들의 일부 발언이었다. 박헌영의 이 담화문은 공산당도 그 대열에 따라가기 시작한 사실을 보여준다.


정치적 담론이 극단으로 흐르는 것은 대외적 효과보다 내부적 효과를 중시하는 결과다. 다른 세력과의 정치적 절충을 바라지 않고 내부 결속에 집중하는 것이다. 한민당이 비이성적 수준의 좌익 공격을 통해 친일파와 준 친일파를 결집시킨 것은 쉽게 이해되는 일이다. 그런데 대중적 기반을 중시하는 공산당에서 비슷한 행태가 나타난 것은 웬 일일까?


식민지시대 공산주의 운동이 남긴 유산으로 보인다. 극단적 탄압 아래 극단적 선명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일어났고, 대중운동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헤게모니 쟁탈의 제로섬 게임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해방 직후 박헌영이 서울에 오자마자 소련영사관부터 찾아간 것도 헤게모니 획득을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서울주재 소련영사관 직원 샤브시나 여사의 증언>

소련영사관이 박헌영을 처음 만난 것은 해방 2~3일 후인 어느날 오후였습니다. 박헌영이 영사관에 나타나 샤브신을 찾았습니다. (...) 박헌영은 샤브신에게 당 재건문제는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요청했고 샤브신은 그의 세 차례 10여 년 동안의 감옥생활 등 화려한 투쟁경력과 뛰어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들을 높이 평가해 적극 지원하기로 약속했지요.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211-212쪽에서 재인용)


공산당 재건 과정에서 박헌영은 ‘8월테제’로 이론적 헤게모니를 쥐게 되는데 그 내용은 6차 코민테른 12월 테제(1928)의 번안 수준이라고 서중석은 본다. (<한국현대민족운동사연구> 235-238쪽) 1935년 7차 코민테른에서 파시즘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타 세력과 연대하는 ‘인민전선’을 제창한 정책은 박헌영이 소화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인민전선 정책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사실은 같은 사람의 증언에 나타난다.


재건위원회에서 정치노선을 작성할 때 박헌영은 우리 영사관 도서관에 자료 특히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관련된 자료를 여러 번 의뢰하곤 하였다. (<이정 박헌영 연대기> 214-215쪽에서 재인용)


1928년 코민테른의 비타협적 정책이 박헌영이 대표하는 공산당의 이론적 기조였다. 반면 해외에서 돌아온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민전선 정책을 체화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쥐는 이북 지역에서 그 차이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북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은 박헌영과 비슷한 교조주의적이고 독선적인 성향을 보인 반면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소련에서 몇 해 지낸 다음 돌아온 ‘빨치산파’는 유연하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신의주사건 처리 과정에서 김일성은 공산당의 책임을 인정하면서 “가짜 공산주의자”들이 당내에 들어와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많은 조직 이름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을 빼게 했다. (찰스 암스트롱 <북조선 탄생> 110쪽) 교조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11~12월에 귀국한 독립동맹의 ‘연안파’도 중국 공산당의 ‘반파쇼 연대’ 전술에 익숙했다. 해방 직전 조선의용군을 포함한 1천여 독립동맹원 중 중국공산당원은 60여 명, 준 당원이라 할 수 있는 동정소조원(同情小組員)까지 약 백 명이었다. 간부층인 그들은 “조선인민은 수십 차례의 실책이라는 경험을 통해 정확한 노선을 찾아냈으며, 그것은 바로 중국공산당의 노선”, “모택동 동지의 영명한 지도태도는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지표” 등 중국공산당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한다. (한홍구 “무정과 화북조선독립동맹” <역사비평> 14호)


독립동맹 주석 김두봉이 해방 때까지 비당원으로 남아있던 데서 중국공산당과 독립동맹의 포용적 분위기를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김두봉은 해방 후 귀국을 앞두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같은 ‘공산당’이라도 박헌영이 일사불란하게 이끌던 이남 지역의 공산당과 김일성이 지도력을 점진적으로 키워가던 이북 지역의 공산당은 체질이 전혀 다른 조직이 되어 갔다. 이북의 공산당은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독립동맹 출신의 신민당, 그리고 천도교에 기반을 둔 청우당과 협조적인 관계를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반면 이남의 공산당은 우익과의 극단적 대립은 물론, 가장 우호적 세력인 여운형의 인민당까지 배척하는 ‘좌경모험주의’의 길을 걸었다.


박헌영과 김일성 등 지도층의 성향으로 이 노선의 차이를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어진 환경이 어떤 성향의 지도층이 주도권을 쥐게 되는지를 결정한 측면도 있다.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점령군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방침 덕분에 민심의 표현에 별 장애가 없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정치인들은 민심의 효과적 수렴에 노력을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중도파가 나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반면 이남의 미군은 자기네 정치 원리의 도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군정 정책이 민심과 유리되거나 대치되는 상황이 좌익세력 성장의 온상이 되었다는 얘기를 흔히 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투쟁적 좌익세력의 득세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준 것이다. 군정에 대한 반발 때문에 좌익 지지기반이 저절로 늘어나기 때문에 좌익 내에서 건전한 정책 발전의 노력보다 헤게모니 쟁탈의 양상이 더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적대적 공생관계’의 전형적 증세다.


독립동맹원 중에는 이남 지역 출신도 많았다. 그러나 거의 고향에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머물렀다. 공산주의자로서도 민족주의자로서도 미군정 하의 남한에서는 활동할 풍토가 좋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북 지역의 친일파들은 대거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고, 이듬해 3월 토지개혁이 시행되면서 지주층의 이주 물결이 커졌다. 점령군의 정책 차이가 38선 남북의 인적 구성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Posted by 문천


(1) “방금 미국은 전 세계를 영도하고 있다. 소련은 미국의 요청에 응하여 이미 코민테른의 해체조차 단행하였다. 소련은 미국에 잘 협력할 것이다. 한편 중경의 임시정부는 이미 연합 열강의 정식 승인을 얻었고, 그 배하 10만의 독립군을 옹유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10억 불의 차관이 성립되어 이미 1억 불의 전도금을 받고 있는 터인즉, 일제가 붕괴되는 때에 10만 군을 거느리고 10억 불의 거금을 들고 조선에 돌아와 친일거두 몇 무리만 처단하고, 그로써 행호시령(行號施令)하기만 하면 조선인은 원래 출입우세(出入于世)를 잘 하니까 만사는 큰 문제없이 해결될 것이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261쪽)


(2) “여보 해공(신익희),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 거요? 인공이 했을 것 같애? 해외에서 헛고생들 했군. 더구나 일반 국민에게 모두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3-1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 관계지, 노형들 위해서인 줄 알고 있나? 여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것 아니야. 가만히 있기나 해.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해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김학준 <고하 송진우 평전> 336쪽,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 131쪽에서 재인용)


같은 송진우가 했다는 말이다. (1)은 1944년 가을 안재홍이 찾아가 독립 준비를 위한 활동을 함께 하자고 권했을 때 한 말이고, 그저께도 인용했던 (2)는 1945년 12월 중순 임정과 한민당 사람들이 함께 한 술자리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송진우가 일제 말기에도 국내에서 가장 정보력이 뛰어난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1)에서 임정의 위세를 부풀려 말한 것이 이상하게 들린다. 더구나 (2)에서 임정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는 것과 전혀 맞지 않는다. (1)의 이야기는 활동 권유를 사절하기 위해 당시 흘러 다니던 불확실한 정보의 일부를 과장해서 말한 것 같다.


어쨌든 해방 후 송진우와 한민당의 임정 ‘절대 지지’ 입장에 부합하는 것은 (1)이다. (2)에서처럼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따지는 것은 ‘절대 지지’와 잘 맞지 않는다.


(2)가 정말 송진우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 그대로일까? 술자리에서 나왔다는 말이 들은 사람의 입을 통해 <고하 송진우 평전>에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만들어진 이야기는 아니라도 전달 과정에 부풀리기가 꽤 있었을 것 같다. 임정 ‘절대 지지’를 표방하는 입장에서 막 귀국한 임정을 ‘꼬시기’에 바쁠 때지, ‘길들이기’에 나설 때가 아니었다. 설령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몇몇 사람에게 속닥하게 할 얘기지, 김구 이하 만좌의 청중을 상대로 큰소리칠 내용이 아니었다.


발언의 진위 여부보다 이런 내용이 ‘평전’에 실리게 되기까지의 상황이 더 흥미롭다. 책을 만든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송진우의 생각을 잘 드러낼 뿐 아니라 자랑스러운 면모라 생각해서 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느 자리에서나 할 말 당당히 하는 사람으로 송진우를 그리고 싶어 한 ‘평전’ 관계자들의 바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임정과의 대립적 측면을 부각시킨다는 점이다. 이 술자리가 있은 보름 후 송진우가 암살당했고, 그 배후로 임정 측이 구설에 올랐다. 그리고 몇 달 후에는 한민당이 이승만과의 밀착관계를 강화하면서 김구 측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2)의 일화는 나중에 벌어진 상황에 맞춰 조작 내지 과장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의 내용은 임정이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는 무력한 존재고,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먹고 살았는지도 빤한 부도덕한 존재라고 송진우가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의 생각 그대로였을지는 확실치 않아도, ‘평전’ 관계자들에게 이르기까지 그 후계자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은 분명하다. 나는 일단 그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가정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송진우의 후계자들이 그의 발언을 자기네 생각대로 조작해 그를 팔아먹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임정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비판이 (2)에 담겨 있다. (가) 임정은 국내에 발붙일 곳 없는 무력한 존재다. (나) 임정 요인들은 중국에서 아무거나 해먹고 살아온 부도덕한 존재다. 송진우의 꾸짖음에 반박도 못할 만큼 임정이 꿀리는 입장이었을까?


요즘 저질 언론의 ‘아님 말고’ 행태가 떠오른다. 송진우의 비판만 드러나 있고 임정 측 반론은 소개되어 있지 않다. 후세의 우리는 (가)의 비판이 사실과 다른 주장임을 알고 있다. 임정은 국민의 큰 여망을 모으고 있었다. 그래서 한민당도 임정의 권위에 빌붙으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떨고 있었다. 점령군 외에 의지할 데가 없던 것은 한민당 사정이었다.


그러면 (나)는? 관심이 많은 사람들 중에 중국에서 임정 요인들의 생활이 그렇게 순결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더러 떠돈다. 어떤 여자랑 같이 살았다는둥, 아편 밀매에 종사했다는둥, 누구에게 떳떳치 못한 도움을 받았다는둥. 임정을 이용하고자 하는 한민당 사람들이 그런 흑색선전 자료를 모으는 데 부심했으리라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고, 지금까지 떠도는 말들도 그런 자료에서 퍼져 나온 것이 많지 않을까 짐작된다.


그런 말들 중에는 사실인 것도 꽤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임정 요인들이 모두 성인군자라야만 민족주의 지도자로서 자격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 검찰이 한명숙 전 총리에게 흠집을 내려고 목을 매고 달려드는 꼴 그대로다. ‘스폰서 검사’, ‘그랜저 검사’로 인구에 회자되는 자들의 물귀신 작전. 임정 요인들의 소소한 스캔들에 목매달던 한민당 사람들의 꼴이 그대로 겹쳐진다.


12월 6일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임정 지지 국민운동’을 결의했다. 결의 내용 중 “임시정부에 대한 건의”로 “독립완성을 방해하는 참칭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하여 즉시 해산명령을 발할 것”이 들어 있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07일자) 송진우는 그 이튿날 김구를 방문해 그 뜻을 직접 전하기까지 했다.


한민당의 임정 ‘절대 지지’가 어떤 속셈을 품은 것인지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인공은 그 중앙부가 극좌파에게 장악되어 독선적이고 편협한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 하부조직은 국민의 독립 의지를 가장 널리 수렴하고 있는 조직이었다. 대다수 국민은 임정과 인공을 동시에 지지하고 있었다. 인공과 임정이 국내와 국외에서 각자 제약된 여건 속에서 자라온 사실을 생각하면 두 기관이 힘을 합치는 것이 독립의 의지와 역량을 최대화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한민당은 두 기관을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사이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12월 9일 송진우의 기자회견에 한민당의 이 속셈이 여실히 드러나 보인다.


韓國民主黨 수석총무 宋鎭禹와의 문답내용은 다음과 같다.

(問) 어떻게 통일되어야 할까요.

(答) 우리가 늘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함으로써 통일이 된다. 유일이요 또 최고인 임시정부를 전민중이 지지 협력하면 된다.

(問) 임시정부가 유일 최고한 정부가 되고 안 되는 것은 민중 전부가 결정지을 문제이다. 최고의 심판자는 민중이 아닐까요.

(答) 그러나 8·15 이전에 민중은 임시정부 하나만을 믿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정부로서 활약하는 것은 임시정부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인민공화국이 생기어 임시정부에 대한 역선전을 하였기 때문에 민중은 혼란에 빠졌다. 앞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이 깊어 감에 따라 전국민이 따라 올 것이다.

(問)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세력이 객관적으로 존재함으로 통일을 위하여 이와 협력 협조하여야 될 줄 아는데.

(答) 한 사람에 두 머리가 있을 수 없듯이 한 나라에 두 정부가 있을 수 없다. 27년 동안이나 피를 흘리며 싸운 우리의 정부가 엄존하는데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정부를 만드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이 과오를 청산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면 협력할 수 있다. 인민공화국은 일본세력 밑에서 그의 후원으로 생긴 것이므로 정부가 될 수 없다.

(問) 인민공화국이 日本 軍力이 남아 있는 동안에 생겼다 하더라도 그 본질적 성격은 반 일본적이었고 조선사람의 독립의욕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하는데.

(答) 인민공화국이 혁명세력으로써 日本軍力을 擧破하고 세워진 것이라면 그대로 승인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問) 洪震 (임정 의정원 의장) 말은 인민공화국의 발생 이유를 인정한다고 하는데.

(答) 여러 요인들 가운데는 혹 그런 의견을 가진 분이 있을지 모른다.

(問) 인민공화국의 객관적 실제적 세력이 있는데 그를 무시하고 통일이 될 수 있을까.

(答) 그 힘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이다. 임시정부가 환국하였으므로 앞으로 민중은 이를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따라 올 것이다.

(問) 인민공화국의 시정방침은 어떻게 생각하나

(答) 정책은 별문제다. 문제는 인민공화국의 구성체이다. 적색정권을 가지고는 우리는 독립할 수 없다. 객관적 정세를 보면 이 이유를 알 것이다. 우리는 먼저 민족국가를 만들어야겠다. 자주독립을 먼저 해놓고 볼 일이다. 그런데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민주주의적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09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연전에 뉴라이트 측에서 ‘광복절’보다 ‘건국절’의 의미를 더 크게 봐야 한다고 요란을 떨며 ‘민족’보다 ‘국가’를 앞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편 일이 있다. 민족에는 민족의 의미가 있고 국가에는 국가의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 하나를 내세워 다른 하나를 내치자는 억지는 해방 직후 임정을 내세워 인공을 내치려 한 한민당과 닮은꼴이다. 극우파의 ‘이간질 수법’을 나는 이렇게 봤다.


뉴라이트는 민족을 부정하며 국가를 내세우지만, 사실 그들은 민족만이 아니라 국가에도 소속감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다. 자본계급, 투기 세력에만 소속감을 가진 자들이다. ‘건국절’ 주장을 비롯한 그들의 대한민국 찬양은 민족과 국가 사이의 이간질일 뿐이다. 사람들의 민족 사랑과 국가 사랑을 헷갈리게 해놓고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온 나라를 투기판으로 만들 기회를 얻으려는 교란작전일 뿐이다. (<뉴라이트 비판> 35쪽)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