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 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 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 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 (<동아일보> 1945. 12. 27일자.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54-55쪽에서 재인용)


<동아일보>가 아직도 살아있는 신문이라면 해마다 12월 27일에는 1945년 12월 27일에 내보낸 이 기사에 대한 사과문과 반성문을 실어야 한다. 언론이 사회에 해악을 끼친 사례로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극악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용욱의 조사에 의하면 이 기사는 조작된 것이었다. (위 책 53-68쪽) 모스크바 회담 결정 내용이 공식 발표된 것은 한국 시간으로 28일 오후 6시였고, 정확한 결정문은 그 이튿날 군정청에 도착했다. 그보다 이틀 앞서 나온 이 기사에는 신탁통치에 관한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뒤집어져 있다. 카이로선언 이래 모스크바 회담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한국에 대해 긴 기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해 왔고, 소련은 가급적 신탁통치 기간을 짧게 하고 방법에 있어서도 한국인의 자결권을 최대한 보장할 것을 주장해 왔다.


기사를 조작한 목적은 분명하다. 독립을 간절히 원하는 한국 인민은 신탁통치라는 말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905~1910년의 보호조약 체제를 신탁통치의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루스벨트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신탁통치의 모범적 사례로 여겼던 사실도 어떤 식으로든 알려졌다면 신탁통치에 대한 한국인의 반감을 더 강화했을 것이다. 신탁통치를 소련이 주장했다는 거짓말은 신탁통치에 대한 반감을 소련에 대한 반감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기사를 조작한 자는 누구였나? “워싱턴 25일발 합동”이라는 바일라인 내용이 사실이라면 합동통신사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봐야 할 텐데, 워싱턴의 어느 매체에 누가 쓴 글인지도 밝혀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한민당 대표 송진우가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의 조작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가 주범이란 것은 증거가 분명한 사실인데, 범죄의 성격으로 보아 단독범행은 아니다. 공범 내지 공모자를 밝히는 것은 명확한 증거가 없으므로 쉽지 않은 일이다. 정용욱은 <태평양성조기>지 12월 27일자에 같은 기사가 실린 것으로 보아 맥아더 사령부 개입의 개연성을 밝혔고, 이 허위 기사의 유포가 방치된 사실로 보아 군정청의 작용을 시사했다. 완벽한 실증적 증거가 없는 한도 내에서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개연성으로 보인다.


국제관리 형태의 신탁통치를 추구하는 미 국무성 정책을 뒤집기 위해 맥아더 사령부, 군정청, 이승만, 한민당의 제 세력이 협력해 온 사실을 정병준의 연구를 중심으로 (<우남 이승만 연구> 427-508쪽) 소개해 왔다. 정용욱의 조사를 통해 이 허위 기사에도 같은 맥락에서 맥아더 사령부와 군정청, 그리고 한민당 세력이 작용한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승만 역시 이 음모에 빠지지 않은 사실이 그 전날 밤의 방송 내용에 나타난다.


26일夜 李承晩의 방송 요지는 다음과 같다. “워싱턴에서 오는 통신에 의하면 아직도 조선의 신탁통치안을 주창하는 사람이 있다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우리 조선은 이 안을 거부하고 완전독립 이외에는 아무것도 용인할 수 없음을 알리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당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트루먼 대통령, 번즈 국무장관, 연합국사령관 맥아더 대장, 하지 중장은 다 조선 독립을 찬동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결심을 무시하고 신탁관리를 강요하는 정부가 있다면 우리 3천만민족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을지언정 이를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적의 교묘한 선전으로 우리 한민족은 외국세력이 강요하는 것에는 무엇이나 복종하는 민족이라는 선입관념을 타민족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선입관으로 말미암아 워싱턴과 모스크바에서는 민족으로서의 우리의 명예를 대단히 손상하는 정책을 시행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합니다. (...)”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이 방송에서 소련에게 뒤집어씌우기는 아직 하지 않고 있지만, 트루먼 대통령과 번즈 장관이 “조선 독립을 찬동”한다는 것은 이튿날 <동아일보> 허위 기사에서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을 지어낸 것과 같은 맥락이다. 27일자 기사의 허구성은 몇 주일 후 타스통신의 해명 보도로 밝혀지게 되는데, 결국 밝혀지지 않을 수 없는 거짓말은 얼굴 없는 허위 기사에서나 할 수 있지, 이승만이 이름 밝히고 하는 방송에서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 편이고 소련은 우리의 적”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는 상통하는 것이다.


이승만의 거짓말 솜씨의 일단이 이 방송에 나타난다. 트루먼과 번즈가 “조선 독립을 찬동”한다는 것은 이 방송의 맥락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는 뜻이고, 명백한 거짓말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빠져나갈 길을 마련해 놓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누가 따질 경우 “그분들이 ‘궁극적으로는’ 조선 독립을 찬동하는 것 아닙니까?” 잡아뗄 수 있는 것이다.


이 허위 기사로 촉발된 극한적 반탁운동이 올바른 독립, 민족국가 수립의 길을 망친 가장 결정적 계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독자들도 많으리라 생각되는데,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최대한 신중하게 검토해 나가도록 노력하겠다. 검토 과정을 통해 지금의 내 의견을 바꾸게 될 수도 있다는 자세로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니 독자들도 허심탄회하게 이 문제를 함께 살펴보도록 청한다.


검토할 중요한 사항의 하나가 반탁운동에서 김구의 역할이다. 김구가 반탁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맡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반탁운동을 반공-반소 운동으로 전환시키려는 음모에서는 김구의 역할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위 기사가 나간 그 날 저녁 김구는 엄항섭 임정 선전부장을 통해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방송 연설을 내보냈다. 귀국 후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시국에 임하는 자세를 모처럼 명확히 밝힌 것이다.


나의 친애하는 3천만 父老姉妹兄弟여러분 내가 입국한지 벌써 1朔이 넘었습니다. 나는 서울에 있어서는 직접 간접으로 나의 의사를 표시한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방에 계신 여러분에게 말씀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녁 방송은 전혀 지방에 계신 여러분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

1) 완전히 독립자주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합시다. 우리는 완전히 독립자주하는 또는 남북이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自利的 입장을 버리고 오직 국가지상 민족지상 독립제일의 길로 매진합시다. 네 黨 내 黨도 국가가 있은 뒤에야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존재할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2)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합시다. 국민 각개의 균등한 생활을 확보하지 못하면 신민주국을 건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그 다음에는 不少한 협잡정객과 또 친일분자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여야겠습니다. 그것은 대의명분상으로만 그럴 것이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그들이 통일을 방해하고 있는 사실이 다대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도라도 죄악이 만만하여 용서할 수 없는 불량분자만은 엄징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3) 세계적 대 가정을 건립합시다.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고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려면 단결한 세계의 대 가정을 조속히 건립해야 합니다. (...) 우리는 우리나라에 대한 우방의 투자를 환영합니다. 각 방면에 있어서 기술적으로 원조하여 주는 것을 간망합니다. 또 우리 조국의 신 건설을 위하여 우리에게 차관하여 주기를 고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로 우방 단독적이나 공동적으로 우리를 통치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한인은 마땅히 한인의 정부가 통치하여야 할 것입니다.

4) 강고한 국방군을 건립합시다. 우리는 강고한 국방군을 요합니다. 우리 국가의 질서와 세계의 평화를 지지하기 위하여 강고한 국방군을 요합니다. 이것은 과거의 망국사와 또는 세계 제2차 대전에서 우리에게 주는 바 큰 교훈이니 多言을 贅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연설 끝에 붙인 4개항 제안에서 눈에 띄는 점이 몇 가지 있다. (1)항에서 건국을 우선 이룰 때까지 당파적 입장을 유보하자는 것은 중도파의 일반적 논점이다. 그리고 (2)항에서는 3균주의 수준의 사회주의 원리 적용을 제안했다. 이 두 가지 제안은 3균주의의 창시자 조소앙도 참여한 특별정치회의 주장의 핵심인데, 임정 ‘비주류’가 주도한 특별정치회의를 적어도 원론적 차원에서는 김구가 지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2)항 뒷부분의 ‘협잡정객-친일분자-민족반역자’ 숙청 제안이다. 이 시점에서 김구는 “실제에 있어서 통일을 방해하는” 자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일파의 실제적 위협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반공-반소’에 극단적으로 매달릴 수 없는 조건이다.


이 연설에서 김구는 중도적 입장의 꾸준한 노력을 내다보고 있었다. 바로 며칠 후 ‘반탁’을 명분으로 임정의 통치권을 주장하고 나설 만한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반공-반소를 주장하고 나설 기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같은 날 <동아일보>의 허위 기사를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라 그 기사에 속은 사람이었다.


Posted by 문천


[모스크바25日SF發 合同]美·英·蘇 3국외상회담의 제1회 공동성명서가 24일 발표되었는데 그 要旨는 다음과 같다.

“蘇·英·美 3국 정부는 평화조약 준비에 관한 이하의 수속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되어 佛國 及 中華民國정부에 대하여도 右 평화준비 遵守를 요청하였다. 외상이사회가 기초하는 데 있어서는 외상이사회 설치에 관한 베를린會議 사항에 基하여 항복조건 조인국이라고 인정되는 동 이사국 또는 현재 항복조건에 조인한 이사국만의 참가를 허락한다.

단 피조인국인 외상이사국으로서 그 나라의 직접 관계있는 문제에 관한 採否를 이사회 회의에 요구할 때에는 此限에 不在한다. 즉

A) 伊太利에 관한 평화조약의 조건은 英·美·蘇·佛 4국 외상 간에서 기초된다.

B) 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와의 평화조약은 蘇·美·英 3국 외상 간에서 기초된다.

C) 핀란드와의 평화조약은 蘇·英 2국 외상 간에서 기초된다.

각국 외상 대리자는 제1차 런던 외상이사회에서 협의된 제 문제에 관한 양해를 기초로 하여 즉시 런던에서 활동을 재개한다.

此等 평화조약 기초에 관한 준비가 완료하면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及 핀란드와의 평화조약 검토의 목적으로서 국제회의를 소집한다. 이 회의는 외상이사회 참가 5개국 외에 구미 제국에 대하여 실질적인 노력으로서 전쟁을 수행한 연합각국 전부가 참가한다. 즉 美國, 蘇聯, 英國, 中國, 佛國, 濠洲, 벨기에, 白露西亞, 伯剌西爾, 그리스, 네덜란드, 印度, 캐나다, 뉴질랜드, 諾威, 폴란드, 우크라이나, 체코, 에치오피아, 유고스라비아, 南阿聯邦의 제국이다. 右 회의는 1946년 5월 1일 이전에 개최한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27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943년 말의 테헤란회담, 1945년 2월의 얄타회담, 그리고 1945년 7월의 포츠담회담 등 중요한 연합국 회담은 미-영-소 3개국 사이에 이뤄졌다.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외상회담도 그 연장선 위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미-영-소 3국 체제는 전쟁 수행을 위한 비상체제라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이제 평화체제 수립에는 더 많은 국가들이 참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해 유엔도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직접적 전쟁 처리를 위해서는 연합국 공조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었고, 모스크바 외상회담에서는 각 안건의 구체적 토론에 앞서 안건의 관할 범위를 먼저 결정했다.


안건 관할 결정 중 핀란드의 이름에 눈길이 머무른다. 30만 평방 km가 넘는 국토지만 인구 5백여만에 불과한 조그만 나라. 1809년까지 스웨덴에 속해 있다가 러시아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1917년 러시아혁명 와중에 비로소 독립을 얻은 나라.


독립 후에 바로 좌우 대립의 내전을 겪은 핀란드는 독일과 소련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는 패전국으로서 연합국의 조치를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다. 험악한 주변 정세 속에서도 민주정치를 유지한 핀란드는 침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소련에 대항했을 뿐이었다. 그러고도 어려운 형편에 빠진 것을 보며 해방 한국이 처해 있던 국제적 상황을 음미해 본다.


패전국이기는 하지만 핀란드는 추축국은 아니었다. 추축국들과 함께 반(反) 코민테른 동맹에는 참여했지만 추축동맹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헤란회담에서도 핀란드는 연합국 전체를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과 개별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1939년 8월 하순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 분할의 밀약을 맺을 때 독일은 발트 3국과 핀란드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인정했다. 소련은 네 나라에 군사기지 설치를 요구했고, 세 나라는 이 요구를 수용한 결과 1년 내에 주권을 빼앗겼다. 핀란드만이 소련의 요구를 거절했고 ‘겨울전쟁’으로 맞섰다.


100여 일에 걸친 겨울전쟁이 1940년 3월 13일 모스크바 평화조약으로 종결될 때 핀란드는 영토 등 상당한 양보를 강요당했지만, 타격은 소련 쪽이 더 컸다. 소련의 군사력에 대한 평가가 엄청나게 낮아져서 히틀러가 소련 공격 결정을 앞당기는 빌미가 된 것이다.


핀란드에 대한 소련의 야욕은 계속되었다. 겨울전쟁에서 구겨진 체면을 되살릴 필요도 있었다. 모스크바 평화조약의 이행이 소련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갈수록 어렵게 되었다. 핀란드는 영국에 무기 공급을 청했지만 영국이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과의 동맹을 파기할 계획을 가진 독일은 1940년 말부터 핀란드의 요청에 응하기 시작했다.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과 함께 핀란드도 소련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을 핀란드인들은 ‘연장전’(Continuation War)이라 불렀다. 겨울전쟁의 연장으로 본 것이었다. 그런데 연장전이 원래 전쟁보다 더 길게 끌었다. 1944년 9월에야 휴전이 이뤄졌고, 1947년 2월의 파리평화조약으로 종결되었다.


핀란드인들은 이 전쟁에서 독일과 협력하되 전쟁 목적은 공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개전 초 몇 주일 동안 겨울전쟁에서 잃었던 영토를 탈환한 후로는 적극적 작전에 나서지 않았다. 불과 몇 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레닌그라드 포위작전 참여도 거부했다.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몇 달 내에 소련을 꺾을 계획이었고, 핀란드도 그런 기대 하에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 기대가 어긋난 뒤에는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방어 전략에 치중했다. 소련 이외의 연합국과는 적대행위가 거의 없었다. 영국이 1941년 12월 핀란드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였을 뿐 핀란드를 실제로 공격하지 않았고, 테헤란회담에서는 미국과 함께 소련을 설득, 핀란드를 추축국으로 규정하지 않게 했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전투로 동부전선 전세가 역전되자 핀란드는 전쟁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소련은 강화회담에 응하지 않고 압도적 군세로 핀란드를 석권하려 들었다. 핀란드는 소련의 탱크부대를 막을 수단이 없었다. 독일은 단독 강화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대전차 무기를 제공했다. 1944년 6월에 핀란드 대통령 리스트 리티는 대통령직을 걸고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1944년 8월 1일 소련의 치열한 하계공세를 물리친 뒤 휴전 협상의 길이 열렸을 때 리티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의회는 카를 구스타프 마너하임(1867-1951)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전쟁을 끝낸 것은 ‘국부’ 마너하임의 조국에 대한 마지막 큰 봉사였다. 그의 취임사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국가의 운명이 어려움에 빠져 있는 이 시점에서 다시 국가원수 직을 맡으면서 저는 깊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의 장래를 지켜나가기 위해 우리는 거대한 난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순간 내 마음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5년째 전투에 임하고 있는 우리 군인들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 위에, 국민의 단합된 지지를 받는 의회와 정부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독립과 존재를 지킬 수 있기를 저는 희망하고, 또한 믿습니다.”


혁명 전 러시아군 장군이었던 마너하임은 독립한 핀란드에 돌아와 1918년 내전에서 적군에 대항해 백군을 지휘했다. 독일의 지원을 받은 백군이 승리하자 왕정을 실시하려 했는데, 곧이어 독일의 패전으로 이 계획이 무너졌다. 공화정을 준비하는 동안 마너하임이 섭정의 신분으로 국가원수 역할을 맡았다. 그 후 은퇴했다가 겨울전쟁이 일어나자 총사령관으로 복귀, 대통령을 대신해서 군 통수권을 맡았다. 그는 군사적 영웅일 뿐 아니라 대통령을 초월하는 정치적 권위를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존재였다.


1942년 6월 히틀러가 마너하임의 75회 생일을 축하하러 찾아왔을 때의 일화가 전해진다. 핀란드가 소련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히틀러와 독일이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때였다. 마너하임은 히틀러의 방문으로 핀란드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방문이 공식 행사 아닌 개인적 행사가 되도록 만전의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히틀러와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시가를 꺼내 물었다. 히틀러가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고, 누구도 그 앞에서 담배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너하임은 히틀러가 저자세인지 고자세인지 판별하기 위해 일부러 담배를 꺼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마너하임이 시가 피우는 것을 못 본 척했다고 한다.


마너하임의 대통령 취임 한 달 만에 소련과 휴전이 성립되었다. 엄청나게 가혹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과 마주쳤던 어느 다른 나라와도 달리 핀란드는 독립을 지켰다. 스탈린도 마너하임과의 휴전 협상을 외면할 경우 핀란드의 극한 저항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핀란드 국민도 그를 믿었기 때문에 가혹한 조건을 감수했던 것이다. 1944년 가을 시점에서 소련은 서부전선 연합국들과 진격 경쟁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핀란드를 ‘끝장’내지 못하고 휴전에 응해야 했다.


전쟁 기간 중, 특히 개전 초기 소련이 밀려나고 있을 때 핀란드에서도 ‘대(大) 핀란드’주의가 거세게 일어났다. 소련 영토를 최대한 빼앗아 북방의 대국을 이루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마너하임이 이끄는 군 지도부는 전쟁 목표를 최소한의 범위로 엄격하게 지켰다. 그래서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섰을 때도 극한적 파탄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 1948년 7월 <신천지>지에 기고하신 “기로에 선 조선민족” 중 1945년 말경의 심경을 되짚은 대목이 있습니다.

“(임정 귀국 이후) 1주일이 지나 벌써 민중은 불안을 품었고, 1개월이 되어서는 초조하였었다. ‘남북통일-좌우합작’이 구호처럼 들렸고, 임정 내부 좌우 세력이 포섭되어 있으니만치 좌우협상이 상당히 되려니 하였으나, ‘인공’은 스스로 양보치 않고, 임정은 민족주의 진영 총지지의 기세도 있어 법통으로 굳게 지키어 스스로 걸어 내려와 타협할 수 없으매, 인공 측의 주장하는 양자 동시해체, 평지재건 식의 논법과는 조화될 길 없었다.”(<민세 안재홍 선집 2> 265쪽)

‘해방의 해’ 1945년이 끝나 가는 시점에서 독립 노선의 확고한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데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시 무엇에 불안을 품었고 무엇에 초조함을 느꼈는지 더 풀어서 말씀해 주시지요.


안재홍: 며칠 되지 않아 불안을 느낀 것은 친일파 문제에 대한 백범 선생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착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爲先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임으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라 말씀했죠. 표현을 신중하게 하는 것은 좋지만, 이것은 지나쳤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어떤 것은 신중하게 하더라도 친일파 문제에 대해서는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홀연히 닥친 해방 앞에서 민족의 진로에는 크나큰 혼란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강압이 갑자기 사라진 상황에서 각 개인과 집단이 서로 다른 소신과 취향, 처지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요. 나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중심으로 온 민족이 최대한 뭉침으로써 혼란의 위험을 극복하기 바랐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민족적-반민주적 요소를 배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지요.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것이 임정이었습니다. 임정이 국내 사정을 잘 모른다 해서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하더라도 친일파 문제 하나에 대해서만은 확고한 태도를 보여줘야 했습니다. 혼란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후 몇 주일이 지나도록 임정이 정국 통일을 향한 지도력을 보여주지 않는 데 초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단적인 문제가 인공과의 관계였죠. 임정이 민족주의의 대표라면 인공은 민주주의의 대표였습니다. 인공 운영방법에 미흡한 문제, 무리한 문제가 여러 가지 있기는 해도, 민중 속에서 자라나는 민주주의 풀뿌리를 수렴하고 있던 것이 인공입니다. 인공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임정이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인공을 극좌 모험주의자들의 손아귀에서 풀어낼 수 있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몽양은 임정과 인공의 동반해체를 제의하면서도 인공 내에서는 조직과 부서를 먼저 없앨 것을 주장했습니다. 임정의 우선적 권위를 존중하자는 것이었지요. 임정 측이 인공의 가치를 원천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몽양의 주장이 힘을 얻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인공 주석 취임을 거부한 상황에서 인공의 명목상 수반인 몽양의 부서 해체 주장은 인공 내에서도 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김기협: 선생님께서는 ‘민족통일전선’을 계속 중시해 왔습니다. 9월초부터 이끌어온 국민당이 4대 정당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데도 민족통일전선을 위해서는 해체 용의가 있다는 것을 선생님 개인 의견 차원을 넘어 국민당의 공식 방침으로 밝혀 왔죠. 정당이란 특정 범위의 정치적 목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그 목적을 함께 추구하는 활동인데, 통일전선을 위해 해체한다는 것이 정당의 존재 의미와 모순되는 것 아닌가요?

통일전선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 자체부터 문제가 없을까요? 정치란 인민의 다양한 요구를 절충하는 과정인데, 그 과정을 ‘통일’한다는 것이 요구의 다양성을 부정함으로써 ‘인민의 정치’나 ‘인민을 위한 정치’ 의미를 제한하는 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안재홍: 이 나라에는 ‘정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다가 이제 생겨나고 있는 단계입니다. 정치가 궤도에 올라 있는 나라의 정당이 인민의 다양한 요구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것이 부러운 일입니다만, 지금 우리에게는 더 시급하고 절박한 과제가 있습니다. ‘정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정치라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나는 답답합니다. 각자 서로 다른 것을,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절충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치가 제대로 이뤄지는 나라들을 보면 오랜 기간에 걸쳐서 기술도 발전시키고 전통도 세워놓은 나라들입니다.

일본인의 압제가 없어졌다 해서 우리끼리의 정치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의 틀부터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요구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각자가 꼭 필요한 최소한만을 요구한다면 모든 사람의 요구가 충족될 수 있습니다. 겸양과 절제 없이 각자 최대한을 요구하면 정치의 틀 자체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정치의 틀이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각자의 요구를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를 더 중시하는 사람들과 평등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각자 소신을 관철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노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틀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 원리에만 노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친일파를 배격하자는 민족주의 원리에도, 모든 사람이 고르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민주주의 원리에도 인민의 95% 이상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당은 바로 그런 원리들이 확실히 세워지기 바라는 동지들의 모임입니다. 더 이상의 욕심이 없습니다. 그 원리들을 세우기에 더 좋은 길이 있다면 당을 해체할 수 있다는 것도 그 까닭입니다.


김기협: 선생님이 특별정치위원회에 대한 기대감을 표명한 12월 23일자 담화문을 <자유신문>이 보도하면서 선생님의 견해를 “中協의 기획은 그 방법의 졸렬로 실패하였을지 몰라도 中協이 기도하는 바 민족통일전선 결성은 特別政治委員會의 출발로 더욱 발전하였다는 견해”라고 소개했습니다. “방법의 졸렬”이란 표현이 선생님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강한 비판이고, 담화문 내용에는 그런 표현이 없었죠. 그래도 기자가 선생님 생각을 제멋대로 만들어낸 것 같지는 않은데, 사실 독촉중협에 대해서는 좀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셨죠?


안재홍: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크다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이 박사가 귀국 직후 초당파적 정치 통합의 뜻을 표명할 때부터 나는 이것을 민족통일전선 결성의 지름길로 보고 극력 지지했습니다. “독립촉성”이란 이름도 내가 제안한 것이죠. 그때까지 지지부진하던 정당 통합 운동이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할 기회라고 보았습니다.

수화불상용(水火不相容)의 관계이던 한민당과 공산당 양쪽이 모두 적극적 참여 의사를 보인 것이 이 박사의 탁월한 영도력 덕분이었습니다. 한민당 측은 군정 당국자들의 극존대를 받는 이 박사를 거스를 수 없었고, 공산당 측은 인공 주석으로 추대할 만큼 민족지도자로서 이 박사의 명망을 흠모하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두 당의 참여를 민족통일전선 결성의 가장 어려운 과제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독촉에 큰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역시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공산당의 참여 의지에 진정성이 없었다는 지적들을 많이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꿍심이 있기는 공산당이나 한민당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꿍심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 주면서 대동단결의 큰 틀을 거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 박사에게 내가 바란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박사는 한민당의 꿍심에는 맞춰주면서 공산당의 꿍심은 그냥 묵살해 버렸습니다.

독촉 추진 과정에서 이 박사는 한민당 대표 노릇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곱 명 전형위원 임명에 한민당 다섯 명이 말이 됩니까? 애초에 내켜하지 않던 몽양을 내가 양주 집에까지 찾아가 설득해서 참여시켰는데, 몽양 앞에서 내 낯이 화끈거리더군요.

공산당 쪽에서는 이 박사 자신에게 꿍심이 있어서 일을 그렇게 끌고 왔다고 비난하는데, 나는 그렇게까지는 보지 않습니다. 군정청에서 원하는 일정에 맞추려고 무리하게 서두르다 보니 방법상에 졸렬한 점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런 중대한 민족 사업을 놓고 군정청의 요구를 너무 앞세웠다는 점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박사가 앞으로도 할 일이 많은 분인데, 너무 나쁜 쪽으로만 해석해서는 득보다 실이 많을 것입니다.


김기협: 선생님이 이 박사나 임정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역할에 기대를 크게 거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독립운동 세력인 독립동맹의 환영준비회에서 국민당이 이탈하는 성명을 12월 24일 발표합니다. 국민당이 우익 정당으로서 좌익 세력인 독립동맹과 거리를 두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안재홍: 참 난처한 일입니다. 그런 오해를 피할 수 없지요. 국민당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존경할 만한 대상을 깍듯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독립동맹의 투쟁 경력과 노선에 대해 국민당 동지들과 저는 큰 경의를 품고 있습니다. 김두봉 씨 등 독립동맹 인사들의 향후 활동에도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이탈 성명에서 우리는 “환영회의 주최역인 조선공산당은 동환영회에 정치의도를 가미하는 것 같다. 독립동맹의 혁명투사 환영이 민족적 자연의 순정인 범주를 벗어나 정략적 취미를 가하게 됨에는 我黨으로서는 차라리 그로부터 이탈하여 그 처지를 해명”한다고 했습니다. 12월 8일자 <해방일보>에 보도된 김태준 씨의 회견에서 임정과 광복군을 깎아내린 것이 민족운동가의 금도를 벗어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12월 19일 박헌영 씨 담화에서(<해방일보> 12월 21일자) 이를 답습해 독립동맹을 임정 공격에 이용하는 것을 보고는 우리가 도저히 보조를 맞출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해외 독립운동에는 중시해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힘든 일을 해왔다는 도덕적 가치도 중요한 것이지만, 보다 실제적인 가치들도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외교관계에 필요한 발판을 해외 독립운동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에는 임정이,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에는 독립동맹이, 미국과의 관계에는 이 박사 등 재미 활동가들이, 그리고 소련과의 관계에는 김일성 씨 같은 분들이 좋은 역할을 맡아주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양한 정치 환경의 경험입니다. 국내에 있던 우리는 식민지체제만을 겪어왔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정치 환경을 빚어 나갈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양한 정치체제를 다양한 위치에서 겪어온 분들의 경험이 잘 활용되어야 합니다.


김기협: 임정 귀국 한 달이 지나도록 좋은 실마리를 보여주지 않아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도 임정에서 꾸리는 ‘특별정치위원회’에는 큰 기대감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건준에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을 겪었고, 이어 독촉에 기대를 걸었다가 다시 실망을 겪었습니다. 이번 특별정치위원회로 인해 또 실망을 겪게 될 걱정은 없는가요?


안재홍: 실망은 괴로운 것이지만 그것이 두려워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나는 변변찮은 사람이지만, 내가 희망을 걸고 기대를 거는 것이 상대방이 좋은 일을 하도록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확실한 반증이 없는 한 나는 상대방을 믿고 기대를 걸려 합니다.

특별정치위원회에 특별한 기대감을 가지는 것은 꼭대기에서 만들어내는 하향식 기획이 아니라 바닥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김원봉, 조소앙, 김붕준, 김성숙, 최동오, 장건상, 유림 등 앞장서는 분들이 임정에서 ‘비주류’로 통하는 이들이죠. 그들이 앞장서고 백범 선생과 우사(김규식) 선생 등 지도부가 뒷받침해 준다면 임정 전체의 힘찬 움직임이 될 것이고 임정의 지도력이 극대화될 것을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경중(조소앙)에게 특별한 믿음이 있습니다. 임정에 존경하는 분들이 많지만, 경중 그 사람에게는 한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30년 전 도쿄 유학 시절 마음을 허락한 그 친구와 함께 상해로 갈 의논을 하곤 했지요. 내가 먼저 갔다가 할 일을 못 찾고 돌아왔는데, 나중에 간 그 친구는 할 일을 찾았어요. 이번에 돌아온 것을 보니 20여 년 전 보던 그대로, 사람이 전혀 변하지 않았더군요. 그 친구와 함께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자체로 큰 기쁨입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