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이후 전국적으로 각 지방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어 올라온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 8일 서울시내 천도교대강당에서 오전 11시 35분부터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대회장에는 북위 38도 이남북을 통하여 전선 13도로부터 모여온 농민조합 대표자 670명과 경향에서 달려온 방청인 약 500여명 그리고 내빈으로서 임시정부의 趙素昻, 金元鳳, 張建相 세 선생과 延安에서 돌아온 혁명선배 金泰俊을 비롯하여 洪南杓, 安在鴻, 李鉉相, 李冑相, 李康國, 河弼源, 李源朝, 許成澤 등 제씨가 임석한 가운데 金麒鎔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李龜壎의 뜻깊은 개회사가 있었다. 이어서 대의원심사로 들어가 전국 217군과 21시의 756명에게 대의원증을 발송했는데 결국 190군의 670명이 이날 참석하였다는 것이 보고되었다. (...) 이에 앞서 대의원으로부터 긴급동의가 있은 다음 세 가지 사항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1) 스탈린, 朴憲永을 본대회의 명예회장으로 추거한다.

2) 연합국에 감사의 메시지를 보낸다.

3) 인민공화국중앙인민위원회에 감사의 메시지를 보낸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09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스탈린과 박헌영을 추거한다고 했지만 농민조합 운동이 공산당의 기획 작품은 아니었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조선의 농업구조를 심하게 기형화하고 대다수 농민을 곤경에 몰아넣었기 때문에 식민지시대부터 일제에 대한 항거에서 농민운동의 비중이 컸다.


식민지시대에도 사회주의자들이 농민운동에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적색노조’가 농민운동의 전형적 양태로 자리 잡기는 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적 활동은 많지 않았다. 해방 후에도 공산당의 지도 역량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발적인 농민운동이 펼쳐진 농민조합총연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창립대회에 참석한 면면에서 알 수 있듯, 당시 농민의 일반적 요구에 부응하는 사회주의 원리 도입에 대해서는 ‘좌익’을 넘어서는 넓은 공감대가 있었다. 그러나 농민운동의 향후 발전을 위한 체계적-조직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상대는 역시 누구보다 공산당이었다.


1946년 3월 이북 지역에서 이뤄진 토지개혁은 민심에 부응한 정치적 대성공이었다. 이를 주도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순조롭게 자리 잡아 갈 수 있었던 것은 이 성공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다. 좌우를 따지기에 앞서 해방된 민족의 정치적 염원을 실현한다는 과제가 1946년까지 이남보다 이북에서 훨씬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토지개혁이었다.


<해방일기> 작업에 착수하면서 이북 지역에 대한 서술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접할 수 있는 자료와 연구의 분량 차이에 얽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연구 중에도 반공 프로퍼갠더 성격을 띤 것이 많아 적절한 이해를 더 어렵게 하는 면도 있다. 이북 사정에 관해서는 가능한 한 차분하게 정리한 개관을 이따금 끼워 넣는 정도로 진행해야겠다.


이남에서 미군정이 일으킨 문제들을 몇 가지 살펴보았는데, 이북에서 소련군은 어땠을까? 소련군의 행패 이야기를 반공 홍보용으로 많이 들으며 자라났는데, 이제 생각하면 모두 개인적 범죄 이야기다. 어느 점령군이라도 총 가진 점령군이 총 없는 주민들에게 저지를 수 있는 범죄다. 이 범죄를 잘 막느냐 여부에 따라 점령군의 능력과 도덕성이 평가되겠지만, 미군정이 의도적으로 정치구조에 작용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소련군은 미군처럼 군정을 실시하지 않고, ‘점령’의 임무를 최소한으로 했다. 단적인 예가 군경무사령부(komendaturas) 운영방식이다. 진주 직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113개 군경무사령부를 만들었으나 9월 말까지 그 수가 54개로 줄어들었다. 무장해제가 완료되어 필요 없게 되면 바로 해체한 것이다. (찰스 암스트롱 <북조선 탄생> 92쪽)


소련군은 정치 관계 업무를 담당할 기구로 10월 3일에 민정부를 만들었다. 일본군 무장해제가 대략 끝난 시점에서 만들어진 민정부는 이남의 군정청 같은 권력의 주체가 아니라 한국인의 정치조직 형성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각 지방의 인민위원회가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10월 8~10일)와 북조선 5도행정국(10월 28일)을 거쳐 이듬해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소련군 민정부가 뒷받침해 주었다.


인민위원회의 자연발생적 성격을 김남식은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로,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며 노동자-농민-민족자본가까지를 포함하는 광범한 계층을 대변하는 정권형태였다. 일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민족적인 과제와 일제 통치체제를 청산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극소수의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계급-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권으로서 인민위원회가 탄생한 것이다. (...)

둘째로,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의 조직이 공산당이라는 전위당이 창건되기 이전에, 또한 남한과 같이 건국준비위원회 단계를 거치지 않고 대부분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었다는 점이다. 본래 혁명과정을 본다면 공산당이 먼저 조직되고 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활동에 의해서 인민위원회와 같은 정권형태가 구성되기 마련인데 해방 후 북한에서는 당이 조직되기 전에 정권기관이 먼저 출현하였다. (“해방 전후 북한현대사의 재인식” <해방전후사의 인식 5> 21-22쪽)


소련군이 인민위원회에서 좌익의 입장을 지원하기는 했다. 예컨대 8월 하순 평안남도 인민위원회에 행정권을 넘겨주고 나서 조만식 진영이 지배적이던 인민위원회 구성을 바꿔 우익과 좌익을 같은 숫자로 한 것과 같은 일이 여러 곳에서 있었다. 그러나 그 ‘좌익’은 넓은 의미의 좌익이며, 인민위원회를 공산주의자의 손에 넘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1990년대 이전의 연구자 상당 범위가 요즘은 “냉전시대의 서방 학자”로 지칭되는데, 그들은 소련이 위성국가 건설의 야욕을 가지고 북한 점령에 임했다는 주장을 열심히 내놓았다. 그런 주장을 내놓는 것이 미국에서 연구비 따먹기에 좋았던 모양이다. 해방 시점에서 소련이 한반도에 큰 야심이 없었다는 사실이 냉전 종결 이후 밝혀지고 있다. 당시 소련이 동구권 경영에 집중하며 이란, 그리스, 터키 등지에서 소극적 입장을 보였던 사정을 보더라도 소련의 야욕이 너무 과장되었다는 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북의 소련군은 맥아더 휘하의 미군과 같은 정치적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무리한 점령정책을 펼 필요가 없었다. 이 무렵 소련군 점령의 폭압성을 부각시키는 반공선전 소재로 ‘신의주 의거’가 있었는데, 한 청년단체가 그 사건을 선전하고 나섰다.


최근 항간에는 서북지방의 학생사건의 참상이 유포되어 각 방면의 주목을 끌고 있는데 大韓民國獨立促成中央靑年總聯盟에서는 이 사건에 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다. “11월 23일의 신의주학생사건이라 함은 신의주 7개 중학생 2,600여명이 道 인민위원회 공산당 본부로 가서 과격분자가 인민을 살해하는 사건이 빈발하니 이것을 방지하라고 건의하려 하였던 바 경비원과 충돌을 일으켰으며 또 학도대가 비행장 제방을 시위하며 통과하자 모국 전투기가 기총소사를 하였다고 하는데 2일 동안에 사망자 8명을 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1월 7일의 함흥 학생사건은 러시아혁명 기념 가두행진 때 인민위원회에서 부르자는 창가와 학교 측에서 부르자는 창가와 상위되는 점이 있어서 학교 당국과 인민위원회 간의 충돌이 있었다. 학교 교원과 상급생이 감금된 사실이라고 한다.”

<중앙신문> 1945년 12월 08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암스트롱은 사건 자체보다 사건 처리 과정을 중시한다. (<북조선 탄생> 105-108쪽) 김일성이 즉각 현지로 달려가 학생대표들과 만나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공산당(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개혁에 나섰다.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흔히 가진 교조주의적 경향을 극복하고 공산당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의주사건 규모의 갈등은 남한에서도 남원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점령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북한에서는 이런 갈등이 ‘대구 폭동’, 여순 사태, 제주 4-3항쟁 같은 규모로 자라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암스트롱이 사건 처리 과정을 중시하는 데 공감이 간다.


12월 8~10일의 농민조합총연맹 창립대회에는 38선 통제로 인해 이북 지역 대표들이 많이 참석하지 못했지만 농민조합 운동은 이북 지역이 더 활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쌀의 비중이 적은 이북 지역에서 소작 비율이 낮고 지주 세력이 약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로 생각된다. 북한의 농민운동은 농민조합총연맹 이북지부를 발판으로 하여 이듬해 1월 31일 북조선농민동맹을 창설, 토지개혁의 주체로 활동하기 시작하게 된다.


Posted by 문천


최후로 한가지 얘기하랴는 것은 일을 하랴면 돈이 있어야 돼요. 돈 있는 부자들께 돈을 많이 내도록 합시다. 그러타고 빼앗지는 마시오, 우리들이 불한당이 될테니깐,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경제적으로도 큰돈을 모와놓으면 저네들도 우리의 실력있다는 것을 알 것이요, 그리고 자주독립할 실력이 있구하면 모든 일이 다 일우워질 것이 아니오.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 제1차 제2차 경과보고”,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581쪽에서 재인용)


11월 1일의 독촉 회의에서 이승만이 한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청년 시절 이후 미국에서 살아오면서 공리주의 사고방식에 길든 그이기에 돈 얘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으리라는 점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가 ‘실력’을 숭상하는 자세는 그를 민족주의 지도자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일으켰을 것 같다.


‘우리’가 큰돈을 모아놓으면 저네들(미국과 군정청)이 우리 실력을 알아본다는 얘기, 뒤집어보면 부자들의 실력을 우리도 존중해야 한다는 얘기 아닌가. 35년 식민지시대를 거친 그 시점에서 부자라면 어떤 식으로든 식민지배에 협력하면서 실력을 키워온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에게 이제 식민지배 대신 ‘우리’에게 협력할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이승만이 여기서 말한 ‘우리’는 민족주의 진영이 아니라 실력자 집단을 말하는 것이었다. 21세기의 뉴라이트 논객들에게 숭상받는,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실력자 집단을 말하는 것이었다. (김기협 <뉴라이트 비판> 55-57쪽) 그들 중 친일 경력이 너무 두드러져 한민당에조차 드러내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이승만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고개를 처든 집단의 하나가 대한경제보국회였다.


서울시를 중심으로 거액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조선사람 재벌의 움직임이 자못 주목되던 차에 서울시내 거주 재벌들이 李承晩의 주선과 알선으로 大韓經濟輔國會를 조직하고 현재 물가고로 말미암아 도시의 회출이 전연 없고 또 모리배의 관계로 천정 모르고 오르는 쌀값을 적극적으로 저락시키고자 군정청에서 보관중인 일본인 군수품을 공정가격으로 불하받아 바터제로 생활필수품을 농민에게 주고 쌀을 사들여 도시 근로대중에게 헐가로 판매할 계획이며 기타 보국기금도 모집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알선역을 한 李博士는 비서 李淨을 통하여 동회의 목적을 일반에게 발표하였는데 동회 역원은 다음과 같다.

委員長: 金鴻亮 副委員長: 閔奎植

委員: 崔昌濟 康益夏 金用淳 金瑞東 趙俊鎬 朴基孝 許澤 金星權 孔濯 朴寧根 金泰熙 張震燮 金熙俊 監事: 李賢在 金淳興 金聖駿 相談役: 李淨 李民 片德烈 金永煥

<중앙신문> 1945년 12월 15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이 조직이 공식 발족한 것은 12월 12일이었지만, 실제 출범은 이승만의 초청으로 12월 3일 돈암장에서 열린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서 보국기금실행위원회 설립을 결정하고 이승만의 알선으로 군정청을 통해 조선은행에서 거액을 대부받을 방침을 의논했다.(계획된 대출액은 2억 원으로 당시 알려졌다.) 그러다가 비판적인 논설이 일어나자 당시 민생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쌀 공급 문제에 공헌하겠다는 명분으로 나선 것이었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580-584쪽)


이 무렵 이승만이 군정청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해 돈을 엮어보려는 시도는 여러 각도에서 펼쳐진 것으로 보인다.


산업인의 대동단결과 산업경제의 통일발전, 산업의 과학적 개혁, 대중적 산업기구의 신편성을 강령으로 국내 산업을 진흥코자 하는 建國産業聯盟本部는 韓鐸烈을 위원장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그 제1착수로 李承晩의 알선으로 군정청과 양해가 성립되어 38도 이남에 있는 日本軍官私團體가 소유하고 있던 가격 약 17억 원의 물자를 讓受하여 양심적인 40 지정 배급점을 통해서 소비자에게 배급 판매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필수물자가 민중에게 균점되며 고물가를 억압하게 될 것이라고 하며 또 현재 일본에 있는 현금 약 10억, 기계설비 자료 약 3억, 고정시설 약 9억, 도합 28억의 자본과 1만 7,000인의 기술인을 국내에 이전해 올 계획을 진행 중이어서 앞으로 활동이 기대되는 바 있다 한다.

또한 동 연맹에서는 기관지 ≪産業新聞≫을 준비 중이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09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건국산업연맹, 경제보국회, 참 좋은 이름들이다. 식민지체제에서는 2-3류 자본가였던 국내 ‘거부’들에게 이승만이 구세주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일본인의 조선 내 재산의 몰수를 당연하게 여길 때였다. 아무리 사유재산이라 하더라도 식민지배 권력을 배경으로 형성된 것이므로 재산권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를 조금만 연장하면 금광왕이건, 백화점왕이건, 대지주건, 몰수의 위협을 피할 수 없었다. 3-8선 이북에서는 널리 현실로 나타나고 있던 사태였다.


그런데 재산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인 재산에까지 손을 뻗쳐 1류 자본가로 도약할 기회를 이승만이 열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유일한 위험인 ‘친일파’ 처단으로부터의 면죄부와 함께. 한민당의 득세에 생존의 유일한 희망을 걸고 있던 그들에게 이승만은 오히려 날개를 달아주겠다는 것이었다.


김학준의 <고하 송진우 평전>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한다. 12월 중순 어느 날 한민당 간부들이 임정 요인들을 국일관으로 초대한 자리에서 신익희가 친일파의 엄격한 숙청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함에 장덕수가 “그러면 나는 숙청이 되겠군.” 하는 것을 신익희가 “설산(장덕수)뿐이겠는가.” 맞받을 때 곁에 있던 송진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 해공(신익희),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 거요? 인공이 했을 것 같애? 해외에서 헛고생들 했군. 더구나 일반 국민에게 모두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3-1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 관계지, 노형들 위해서인 줄 알고 있나? 여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것 아니야. 가만히 있기나 해.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해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 130-131쪽에서 재인용)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이 늘어앉은 앞에서 정말 이런 말이 나왔다고는 믿고 싶지 않지만, 그럴싸하기에 이 얘기가 전해져 <고하 송진우 평전>에 자랑스럽게 자리 잡고 있을 것 아니겠는가. 최창학 저택을 비롯해 임정의 경비와 요인들의 용돈까지 이승만-한민당-재산가 사이에 이미 형성된 극우 카르텔이 제공하고 있었을 수 있다. 상해에 보낸 비행기까지 극우 카르텔은 자기네 호의로 생색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해서 임정을 “국내에 발붙일 데 없이” 된 존재로까지 당당히 몰아붙일 수 있었을까?


이 국일관 연회에 앞서 임정에 대한 자금 제공을 놓고 한 차례 풍파가 있었다고 한다. 10월 20일 결성된 환국지사영접위원회(‘還國’을 ‘韓國’으로 표기한 자료도 있음)에서 환국지사후원회로 이름을 바꾼 단체가 임정에 9백만 원을 제공했는데, 김구는 이 돈의 배경이 석연치 않다 하여 돌려보냈다. 그 과정에서 후원회의 장덕수가 임정의 누군가에게 따귀를 얻어맞는 소동까지 벌어졌는데, 송진우가 김구를 찾아가 “임시정부도 정부요, 정부가 받는 세금 가운데는 양민의 돈도 들어있고, 죄인의 돈도 들어있는 법이오.” 운운 하여 사태를 무마했다고 한다. (강준만 위 책 129-130쪽, 김재명 <한국현대사의 비극> 201-203쪽)


12월 8일자 <자유신문>에 실린 물가 조사에 따르면 백미 소두 한 말에 70원이었다. 9백만 원이면 쌀값을 기준으로 지금 돈 약 30억의 가치다. 임금 수준이 낮던 당시에 그 실질적 가치는 그보다도 엄청나게 더 컸을 것이다. 정병준은 이승만이 1945~1947년간 거둬들인 정치자금이 최소한 2천7백만 원을 넘을 것으로 파악했다. (<우남 이승만 연구>606-609쪽)


장준하가 함께 돌아온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광복군 국내 지대의 환영회를 받은 일을 적은 것이 있다. 장소는 최고급 요정인 명월관이었고, 산해진미는 물론, 손님 수에 못지않은 기녀들이 시중드는 자리였다. 귀환한 날부터 경교장을 경비했다는 것이 이 지대였을 텐데, 이런 잔치 벌일 능력을 가진 부대가 과연 임정의 지휘를 받는 ‘광복군 지대’였는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비서진의 장준하까지 이런 잔치에 불려 다닐 정도였다면 임정 요인들에 대한 환대가 어떤 수준이었을까? 재산가들에게는 임정 요인들이 친일파의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통로로, 정치인들에게는 정치적 권위를 얻을 수 있는 합작의 대상으로 가치가 있었다. 알아주는 사람 없이 중경에 틀어박혀 있던 임정 요인들이 갑자기 온갖 유혹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2월 6일 국무회의가 성과 없이 끝난 것을 장준하가 탄식한 것은 기대가 지나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귀국 후의 첫 정식 국무회의에서 제2진으로 입국한 각료 한 사람이 “오늘은 보고를 듣는 것만으로 하고 우리도 국내 정정에 직접 접할 기회를 가진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제안하여 안건을 다루지 않은 채 산회했다고 한다. 장준하는 이렇게 탄식했다.


김구 주석의 말처럼 과연 ‘여러 파, 여러 층을 한 보따리에 싸서 그것일랑 어디에든 내던져 버리고들’ 들어온 것인가? 그대로 끼고 들어온 파벌 보따리들을 한층 더 크게 부풀리고자 하는 것뿐이다. 좁은 사회에서 적은 수의 지지 배경밖에는 가지지 못했던 파벌들이 국내에 들어와 좋은 여건을 맞게 되자 이제야 세상을 만났다는 듯이 각기의 세력을 좀 더 확보-강화하려는 내심들이 없었다면 온 국민의 여망이 모아진 이날의 회의를 그처럼 무위로 끝내버릴 수가 있었던 것인가. (박경수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 220-221쪽)


국내에서 맞닥뜨린 온갖 유혹에 대한 우려는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9월 6일 시점에서 그로 인한 문제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치게 민감한 것 같다. 중경에서의 ‘폭탄’ 발언과 겹쳐 생각할 때 장준하의 결벽증이 지나치거나 김구 중심의 임정 단결에 대한 집착이 너무 컸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환국 직후의 임정이 “국내 정정에 직접 접할 기회”를 충분히 가질 때까지 적극적 결정을 보류한 것은 타당한 방침으로 볼 수 있다. 회의를 ‘무위(無爲)’로 끝내는 편이 나은 때도 있는 것이다.


Posted by 문천


李承晩을 중심으로 민족통일전선을 목표로 하고 결성된 獨立促成中央協議會는 月餘를 두고 자체의 조직 확대와 기능 강화를 위하여 예의 노력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정돈 상태에 있는 듯하더니 임시정부 영수들의 환국을 계기로 하여 다시금 활발한 동향이 전개되었다. 李承晩은 동회 중앙위원 선거의 제일 전제로서 전형위원 선정을 전 대회에서 위촉받은 후 신중히 인선 중이던 바 마침내 呂運亨(人民黨), 安在鴻(國民黨), 許政, 金東元, 白南薰, 元世勳, 宋鎭禹(이상 5씨 韓國民主黨)등 7명을 선정하고 11월 18일에 제1회 전형위원회를 소집하였으나 동위원의 인적구성은 1당1파에 편중되었다는 것이 주요원인이 되어 동회가 성립되지 못하였으므로 李承晩은 재차 신중한 인선에 착수하여 제2차로 金志雄, 金錫璜, 安在鴻, 金縔洙, 孫在基, 白南薰, 鄭魯湜 등을 선정한 후 5·6 양일중에 걸쳐 시내 敦岩莊에서 극비리에 李承晩을 중심으로 무엇인지 신중히 토의 중이며 특히 6일에는 오전부터 회의를 진행 중 李承晩은 급히 하지, 아놀드 양 장군과 회담한 후 다시 회의에 임하여 오후 늦도록 회의는 계속되었다.

물론 토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아마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중앙집행부 구성과 금후 민족통일에 대한 구체적 대상이 중심 의제가 아닌가 하여 극히 주목되며 특히 종래 민족통일전선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차지하는 비중과 그 독특한 위치에 비추어 그 동향은 현 단계의 정국에 중대한 관련성을 갖지 않는가 하여 극히 주시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07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0월 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두 명씩 200여 명이 조선호텔에 모인 자리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를 만들 것을 결정하면서 회의 소집권을 회장 이승만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승만은 이틀 후 한민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십여 명을 모아 독촉의 조직과 성격을 의논한 다음 주요 세력의 참여를 청하기 위해 10월 31일 박헌영을 만나고 11월 1일 여운형을 만났다. 그리하여 11월 2일 72개 정당-단체 대표 수백 명이 참석한 회의를 천도교 강당에서 열었다.


11월 2일 회의의 중요한 결정은 두 가지였다. 독촉 명의로 연합국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그 하나인데, 이승만이 기초한 결의문 내용에 일부의 불만이 있어서 몇 사람의 수정위원을 위촉, 수정을 가한 뒤 보내기로 했다. 또 하나의 결정은 조직 구성을 회장 이승만에게 일임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위 기사에 보이는 것처럼 한 달 넘게 지난 이제까지 전형위원회조차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과 박헌영은 11월 2일 회의에 큰 불만을 나타내고 있었다. 한민당 사람들을 엉터리 단체들을 내세워 대거 참석시키면서 좌익 대표들의 참석을 극도로 제한해 놓고 다수결로 결정했으니 우익의 주장만을 대표한 회의라는 것이었다. 결의문 수정위원을 위촉한 것은 중도적 인사들도 이 비판에 많이 공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1월 28일 소집된(기사 중의 “18일”은 착오인 듯) 전형위원회는 한민당 인사들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게 하면서 여운형과 안재홍을 들러리세운 것이었다. 여와 안은 10월 27일 만나 “국내 통일전선 통일은 이 박사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최고조인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합의하고 이승만에 대한 전폭적 지지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469쪽) 한민당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승만과 결탁한 것과 달리 두 사람은 대국적 입장에서 이승만과 독촉 지지에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들러리 역할이 너무 분명한 한민당 5인에 국민당과 인민당 각 1인의 전형위원회 구성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안재홍은 불참했고 여운형은 참석했다가 항의하고 퇴장했다.


11월 2일 회의에서 이승만에게 조직 구성을 “일임”한다고 했지만, 엿장수 마음대로 하라는 이야기일 수는 없었다. 웬만큼 원칙과 상식에 따라 처리했다면 다소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따라갔을 텐데, 이승만의 편의주의적 태도가 너무 심하니까 불신이 계속 쌓이게 되었다.


12월 5-6일의 전형위원회는 이승만과 독촉의 위축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승만은 임정과 공산당을 독촉에 끌어들이기 위해 공을 들였지만, 양쪽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대국적 입장에서 독촉을 지지하던 여운형은 돌아섰고, 안재홍은 참여하면서도 기대가 줄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안재홍은 1948년 7월 민정장관을 사임하면서 쓴 “기로에 선 조선민족”에서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30수년 만에 서울에 귀착하신 이승만 박사의 정계에 등장은 최대한 기대와 경의로써 전 민중적 熱狂리에 환영되었다. 나는 그분의 거대한 정치영향력에 말미암아 다시 결합독립의 길이 열릴 것을 기원하였다. ‘건준’ 이래 일단 分袂하였던 여운형 씨를 그의 양주 鄕第에 방문하여 함께 서울에 귀래한 후 ‘인공’의 正-副 主席인 이 박사와 여몽양 간의 공작으로 ‘인공’ 문제가 해결되고 民-共은 다시 협동될까 하였다. 그러나 ‘인공’ 문제는 左方의 집요한 고집 있어 심상치 않았다.

10월 23일 조선호텔 회합에서, 각 정당의 해체 및 합동을 단념하는 대신 현존한 그대로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였고, 11월 2일 천도교당 회합에서 각 당파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여 7인 전형위원을 회장 대신 이 박사가 선임하여 左右適正한 협의기관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左와의 절충 익지도 않았고, 전형위원은 한민당의 송진우, 김동원, 백남훈, 원세훈, 허정 등 5씨와 여운형 및 나 兩人을 지명하게 되었는데, 나는 이 박사의 통지하심에 의하여 돈암장에 총총 갔었으나, 沮害하는 자 있어 事態 不明한 중에 退歸하였더니, 추후 비로소 그 始末 알았으나 追及할 수 없었고, 이로써 협동의 기운 더욱 희박하여졌다.

이 일 때문에 당시 한민당의 간부인 정노식, 장덕수 양씨의 협력도 있어 나는 共黨과의 談議 빈번할 새, 박헌영 外 數氏 국민당 본부를 내방하기 3,4次요, 내가 共黨 본부인 近澤빌딩에 박헌영 씨를 찾기가 兩次이었고, 추후 박 씨의 대신 ‘서울 콤그룹’파가 아닌, 김철수 씨를 이끌어내어 돈암장 회합이 자못 빈번하였으나, 5대5의 比率 문제로 모두 성립되지 않았다. 이 5대5 比率案은 끝끝내 협동의 암초로 되었다. 김 씨는 자못 양보적이었으나 그의 說, 通치 못한 것이다. (<민세 안세홍 선집 2>(지식산업사 펴냄) 263-264쪽)


6일 전형위원회 회의 중에 이승만이 하지와 아놀드를 만나러 나갔다가 돌아와 밤늦게까지 회의를 계속했다고 한다. 독촉의 구성이 군정 당국자들의 요구에 따른 것임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군정 당국자들은 독촉이 모스크바 외상회담 개막 전에 구성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형위원회는 5-6일 회의에 이어 13-14일에 다시 회의를 열어 중앙집행위원 39인을(이승만 빼고) 선정했고, 12월 15일에 중앙집행위원회 첫 회의를 열었으나 이승만 포함 16명만이 참석했다.


독촉을 정당 통합 대신의 정치 통합으로 생각해서 지지하고 추진한 것이 안재홍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정 당국자, 이승만과 한민당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독촉 중앙집행위원회를 ‘정무위원회’로 만들려 한 것이다. 11월 20일 주한 정치 고문 랭던이 국무장관에게 전문으로 보낸 ‘랭던 제안’에서 말한 ‘Governing Council’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인의 정치적 요구를 효과적으로 충족시킬 조직이 만들어졌으니 신탁통치가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했다. 좌익의 호응을 전혀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4일 전형위원회에서 선정된 39인 중 좌익 인사는 인민당 4인, 공산당 4인 등 15인이었지만 전원 참여를 거부했다. 소수파로 끌어들여 놓고 다수결로 묵살해 버리는 이승만의 ‘들러리 수법’이 이제 들통나 버린 것이었다. 좌익의 참여가 전혀 없는 조직을 놓고 “한국인의 정치적 요구를 효과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다고 우길 수는 없었다.


10월 13-14일 맥아더-하지-애치슨과의 ‘도쿄 회담’ 이래 군정청에서 극도의 존대를 받던 이승만의 위신은 이 실패로 크게 추락했다. 이 무렵 군정장관이 러치로 교체된 것도 남한 군정에서 ‘맥아더 노선’의 좌절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법학을 전공하고 헌병 병과에서 근무해 온 러치로의 교체는 야전군 출신에게만 남한 군정을 맡겨놓을 수 없다는 워싱턴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