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8일자 <해방일보>에 김태준의 회견기사가 실렸다. <조선가요집성>(1934), <청구영언>(1939), <고려가사>(1939) 등 뛰어난 업적을 낸 국문학자 김태준(1905~1949)은 경성제대 강사로 있다가 1941년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1944년 11월 연안으로 탈출, 항일운동에 참가했다가 이제 막 귀국한 것이었다. 후에 남로당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지리산 유격전에 연루, 체포되어 1949년 11월 총살당했다. 학술계와 문화계에서는 걸출한 소장 학자인 그를 살리기 위해 이례적인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김태준의 회견을 통해 독립동맹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비평사 펴냄) 417-418쪽)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 연안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1월에서 12월에 걸쳐 입국한 독립동맹은 중경 임정 다음으로 중요한 해외 독립운동이었지만 역사가 짧기 때문에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식민지시대의 해외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은 가장 적당한 장소였다. 가까운 이웃나라로서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할 거대한 교민사회가 존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의 침략에 함께 저항하는 입장이었다. 상당한 규모의 교민사회가 있던 러시아나 미국이 일본의 조선 침략에 무관심한 것과 대비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중국의 정치적 사정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다. 독립운동의 대표 격인 상해-중경 임시정부는 국민당 정부의 보호와 지원을 받았지만 그 대가로 좌익 방면의 발전이 어려웠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대결 상황에서는 공산주의자는커녕 웬만한 사회주의자들도 임정 참여에 어려움을 겪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국-공 합작이 명목상으로라도 이어지는 상황에서야 임정에서도 비로소 좌익의 참여가 어느 정도 이뤄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친 임정과 중국 국민당 사이의 밀착관계, 그리고 중국 국-공 간의 실질적 대결 상태로 인해 중국에서 한국인의 독립운동 역량이 임정으로 결집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임정이 수렴하지 못한 운동 역량이 모이는 제2의 초점이 중국 공산당 방면에 형성되었다. 1941년 초 북중국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로 결성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중심으로 1942년 7월 조선독립동맹이 만들어졌다. 1938년 이래 김원봉이 조직하고 키워온 조선의용대도 1942년 봄 임정 휘하의 광복군에 편입될 때 일부가 떨어져나가 독립동맹에 합류했다.


독립동맹의 간판 격 영도자였던 김두봉(1989~1961?)의 거취가 임정과 독립동맹 사이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시경의 수제자로 꼽힌 한글한자 김두봉은 임정 내부의 야당 위치를 지킨 사람이었다. 김규식, 조소앙, 김원봉 등과 보조를 함께 한 일이 많았다. 그런 그가 1942년 초 중경을 떠나 연안으로 향했다. 임정의 포용력에 한계를 지적하며 임정 밖의 활동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김두봉의 이탈을 당시의 임정은 ‘배반’으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있었을지 몰라도 공식적으로는 관용적인 태도였다. 이것은 김두봉의 사상과 인격에 대한 존중과 함께 임정 외의 독립운동에도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임정 내에 많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독립동맹의 활동 내용을 아직 세밀히 살피지 못했지만, 김두봉 같은 진중한 영도자의 존재가 극단적 노선을 삼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우선 생각된다.


임정이 활동한 남중국 지역에 비해 독립동맹이 활동한 북중국(화북) 지역에는 교민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중 일본군이 많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이어서 교민들도 일본군을 배경으로 진출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은 지하활동과 유격활동의 양상으로, 임정에 비해 현실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당시 중국의 교민 현황에 대해 임정 재정부장 조완구는 12월 9일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 있는 우리 교민이 약 400만이 있다. 그중 약 300만이 山海關 이외 즉 東三省에 있는데 間島에 있는 100만 교민은 오랫동안 있어서 거기에서 토지소유권까지 인정을 받고 있는바 아마 이것은 소수민족으로서 해결될 줄 믿는다. 그리고 그 외의 교민들은 日軍의 제1선 공작을 담당하였고 또 거기에 협력하여 왔으니 중국 정부로서는 결국 放逐하게 될 줄 압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09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이 이야기는 며칠 전 북경 지역 교민들이 중국군에게 포로로 수용되기 시작했다는 소식과 관련해 나온 것 같다.


[北平1日發國際] 第11戰區 政治部主任 周 少將은 北平地區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수용에 관하여 一日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第11戰區司令部는 北平地區에 거주하는 조선인 2만의 수용을 개시하였다. 조선인 측에서는 “우리는 중국의 우호국민이 아니냐”라는 항의를 제출하였는데 본부 조사에 의하면 조선인의 대부분은 일본점령 후 華北에서 일본인과 협력하였던 것이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03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해방 전 중국에 이주한 조선인은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식민지시대 이전부터 농토를 찾아 국경을 넘은 사람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특히 두만강 북쪽 일대에 정착했다. 식민지가 된 후 일제 통치를 피해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이 범주에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항일운동의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하는 근거가 되었다.


또 하나의 범주는 1920년대 이후 만주와 중국에 대한 일제 침략의 강화에 의지해 이주한 사람들이다. 일제 침략에 적극 협조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만주 지역에 많이 자리 잡은 영세농민들의 경우에도 중국인 주민들과 대립하는 상황이 흔히 형성되었다. 일제의 보호와 지원에 생존을 의지하는 입장 때문이었다. 만보산사건(1931) 같은 것이 전형적인 사례였다. 농민의 비중이 적은 관내의 일본 점령지역 교민사회는 일제와의 밀착이 더욱 강했을 것이다.


화북 지역은 중일전쟁 발발 후 식민지와 비슷한 일제 통치 아래 들어갔다. 일본의 위협이 적은 상해에 자리 잡고 있다가 전쟁이 나자 후방으로만 옮겨가는 임정에게 열혈 항일투사들이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의 세대 문제로도 볼 수 있는 갈등이 일어났다.


중국 관내에서의 좌우 충돌에는 세대간의 사상적 갭도 작용하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의 지도층은, 19세기 후반 또는 19세기 말경에 유년, 청년시기를 보내고 전통적인 지적 성장을 하여, 일면으로는 위정척사파적인 기질도 갖고 있는 원로들로서, 양반계급 출신이 많았으며, 근대교육을 적게 받은 편이었다. 그런데 젊은 사회주의자들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경우가 적지 않았고, 독립운동의 선배에 대해 어른 대접을 잘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측의 원로들은 김원봉 등이 나이가 젊고 충동적이며 환상에 차 있고 언행이 너무 편격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중요시하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노인들한테 싫증을 내면서, 그들을 ‘봉건영수’, ‘민족 파시스트’, ‘신비적 국수주의자’로 간주하였고, 국수주의를 배격하자고 외쳤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174-175쪽)


중국에서 독립운동의 좌우 분열에는 이념의 차이보다 이런 자연스러운 차이가 더 많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운동의 입체적 조직을 통해 충분히 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승작용을 기대할 수 있는 성격의 차이였다. 그런데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하는 중국의 상황이 독립운동의 입체적 조직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보수적 성향의 임정과 진취적 성향의 독립동맹의 병존을 현실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분업 형태로 볼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 전통을 배운 것일까? 독립동맹은 조선의용군 4개 대대와 함께 9월 3일 연안을 출발, 4천7백리 길을 걸어 11월 말 신의주에 도착,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고 입국했다. 독립동맹은 조선신민당을 거쳐 노동당 연안파를 이뤘고, 김두봉은 1949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을 맡았다. 남한 지역에서도 독립동맹의 투쟁 경력을 높이 평가하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남조선신민당이 성립되기도 했다.


독립동맹의 입국으로 해외 독립운동 주요 세력의 국내 무대 입장이 끝났다.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대한민국임시정부, 만주 유격항쟁을 대표한 김일성 집단, 그리고 중국 공산당을 배경으로 무장항쟁을 최근까지 벌여 온 독립동맹. 미국 교민사회를 이승만이 제대로 대표했는지는 이론이 분분하지만, 더 효과적인 대표를 따로 보내지는 못했다.


Posted by 문천


임정요인 제2진이 입국했다. 의정원 홍진 의장과 외무부장 조소앙, 군무부장 김원봉, 재무부장 조완구, 법무부장 최동오, 내무부장 신익희, 국무위원 조성환, 황학수, 장건상, 김붕준, 성주식, 유림, 김성숙, 조경한 등이었다. 제1진으로 입국한 요인은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과 국무위원 이시영, 문화부장 김상덕, 선전부장 엄항섭, 참모총장 유동열이었다.


두 팀으로 나눠 9일이나 사이를 두고 서울에 도착한 것이 비행기 사정이라고 하는데,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수십 명 인원 수송을 그렇게 복잡하게 할 리가 없다. 당시의 남한 점령군이 비행기 보내는 데 그렇게까지 힘들었을 수가 없다.


분리 귀국을 바라는 동기가 누구에게 있었나? 미군정 입장은 아니다. 임정을 손쉽게 다루기 위해 분리 귀국시켰다는 추측이 있지만, 당시 하지 사령관은 연합국 외상회담 전에 뭔가를 만들려고 일정에 쫓기는 입장이었다.


내가 이승만에게 너무 혐의를 많이 건다고 불평하는 독자가 계시더라도 할 수 없다. 여기에서도 그 사람 냄새밖에 안 난다. 임정을 분리 귀국시켜 자기 노선에 따르도록 설득하기 쉬운 상황을 그는 만들고 싶었다. 1진, 2진 구분 과정에서 임정 내 의심과 불만을 일으키는 것도 그는 바랐다. 그리고 하지의 ‘임시 한국 행정부’ 프로젝트를 그가 맡고 있었으므로 비행기 일정 결정에 충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다.


제2진 요인들은 기분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귀국이 늦었을 뿐 아니라 날씨를 이유로 비행기가 목포에 내렸다. 대규모 환영회는 그들이 목포에서 자동차로 북상하는 동안 열렸고, 그들은 이튿날에야 서울에 도착했다. 뒤처진 동지들의 도착을 코앞에 두고 김구가 조선생명 발코니에 이승만과 나란히 서서 군중의 환호를 받고 있을 때 그 속마음이 어떤 것이었을까?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임시정부 及 연합군환영회본부 주최의 臨時政府奉迎會는 1일 오후 1시부터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참가 단체는 경성대학을 필두로 전문, 중학, 소학 등 100여교와 기타 500여 단체에 달하였는데, 식은 尹潽善의 사회로 개막하여 먼저 吳世昌으로부터 갈망하던 임시정부 간부가 환도하였으니 이 지도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자는 개회사가 있고 李仁의 봉영문 낭독이 있은 후 權東鎭 선창으로 만세삼창을 하고 조선 초등학교 생도를 선두로 기 행렬에 옮기어 행렬은 안국정 네거리에 이르러 조선생명보험회사 2층에서 축하를 받는 金九, 李承晩 앞에서 대한임시정부 만세와 金九 만세, 李承晩 만세를 부르고 경성역 앞에 이르러 해산하였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02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환영회 이튿날에야 서울에 도착한 제2진 요인들이 기분은 안 좋았겠지만, 큰 갈등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김구 등 제1진 요인들이 그 사이에 입장 표명을 최대한 아끼며 조심스럽게 처신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9일간의 차이가 요인들의 심리나 외부와의 관계, 그리고 상호관계에 영향을 끼친 것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소앙, 김붕준, 김성숙, 최동오, 장건상, 유림, 김원봉. 12월 25일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임정 안에 만들어진 특별정치위원회의 면면이다. 모두 제2진 귀국자다. 이들을 서중석은 “좌파와 합작파 국무위원”이라 불렀는데,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80쪽) 나는 무슨 ‘파’라는 이름을 너무 서둘러 붙이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좌파’라는 것도 당시로는 매우 막연한 규정이었고, 하물며 ‘합작파’란 것을 하나의 ‘파’로 이름붙일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들이 어떤 ‘파’에 속했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그런 행동을 취한 것으로 본다는 인상을 지나치게 강하게 주는 것 같다.


11월 23일을 앞두고 제1진과 제2진을 가르는 데는 많은 고심이 있었다. 여러 가지 기준을 고려하여 결정을 내렸겠지만, 결국은 제1진의 즉시 활동을 위한 ‘기동성’과 임정의 결속력을 지키는 ‘안정성’, 두 가지 기준이 중심이었다. 제1진에 주석, 부주석과 비서진을 넣어 국내의 어떤 상황에도 최소한의 필요한 대응을 할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추면서 두 그룹 사이의 위화감을 최소화하는 안정성을 기하려 했을 것이다.


안정성을 위해서는 두 그룹을 지나치게 기존 정치성향에 따라 가르지 않도록 조심했을 것이다. 제1진 요인 6인 중 확고한 ‘김구의 사람’은 엄항섭 선전부장뿐이었다. 그런데 몇 주일 후 좌익과의 합작에 주력하는 특별정치위원회가 제2진 인물로만 구성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1월 23일에서 12월 2일까지 한 그룹이 상해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고 한 그룹이 서울에 들어와 있는 동안 두 그룹의 경험 차이가 좌익을 대하는 태도에 상당한 정도의 편향적 작용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예컨대 공산당과 인공이 상대 못할 존재라는 이야기만 해도 제2진 인사들보다 제1진 인사들이 훨씬 더 많이 들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장준하가 중경에서 임정의 분파적 양상에 분개, “임정을 폭파하고 싶다”는 극언까지 했지만(10월 1일자), 전쟁 중 중경의 제한된 조건 속에서 임정 요인들이 서로 다른 행동을 선택할 여지는 크지 않았다. 내무부장 신익희가 ‘경위대’란 이름으로 젊은이들을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려 한 획책 정도가 장준하를 격분시킨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국내에 들어와서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 속에 노선을 선택해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3-1운동에서 해방까지 26년간 민족 독립의 깃발을 지켜온 것, 그것이 해방 당시 온 국민이 임정에 기대감을 가지는 결정적 근거였다. 임정의 정치적 가치는 능동적 정책보다 흔들리지 않는 ‘지킴’의 자세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움직여야 할 상황에 왔다. 움직이면서도 ‘지킴이’로서 근본적 가치를 최대한 지켜내는 것이 귀국 후 임정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임정 귀국 두 달 만인 1946년 1월 23일 김원봉-김성숙-성주식 3인의 비상국민회의 탈퇴로 임정 결속력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한다. 그 동안 임정의 정치적 가치가 어떤 요인에 의해 어떤 식으로 훼손되어 갔는지 살펴보려 한다.

 

Posted by 문천


9월 8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그 직전에 설립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의 인공 비난 성명이었다. 이 성명은 내용의 옳고 그름에 앞서 난폭하고 저열한 표현으로 당시 군정 당국자들의 몰지각을 드러내 보여준 ‘망언’이었다.


한 달 후 <매일신보>의 정간과 제호 변경도 아놀드의 망언 게재 거부에 직접적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인공에 대한 적대감은 언론 자유까지 침해할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이 적대감을 커밍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1945년 가을 미군 정책 형성의 배경과 근거는 강력한 좌익의 존재에 있었다. 군정 아래 몇 주일이 지나도 좌익은 약화되기는커녕 더욱 번성하는 것으로 보였다. 9월 중에는 인공이 하나의 사소한 문제로 보였다. 그 보수적 반대파를 미군이 북돋워주기만 하면 쉽게 해소될 문제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군정이 지방으로 펼쳐져 나가면서 보고를 올리기 시작하자 인공 영향력의 범위가 군정 당국자들의 눈앞에 드러났다. (...) 하지는 나중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친구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임무의 하나는 함참과 국무부의 지시나 지원 없이 이 공산정부를 파괴하는 것이었소.” (B Cum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p 193-194, 번역판 254쪽)


<위키리크스>의 폭로 문건을 통해 대다수 미국 관리들이 국제관계에 얼마나 극심한 일방주의 태도로 임해 왔는지 밝혀지고 있다.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는 미국의 뿌리 깊은 전통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이것이 일방주의 외교노선으로 형태를 빚어가면서 냉전체제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식 자본주의 이외의 모든 것을 공산주의로 몰아붙이는 관점이 여기에서 나왔다.


한국에는 미군에 앞서 일방주의의 선구자가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였다. 일제는 1920년대 이후 식민지 항일운동가들에게 거의 예외 없이 ‘좌익’의 딱지를 붙였다. 많은 항일운동가들이 사회주의 이념을 포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사회주의 이념을 활용한다는 입장일 뿐, 사회주의 이념에 얽매이는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사회주의자’로 부를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일제가 이들을 ‘좌익’이라 부른 것은 민족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좌익’으로 보던 사람들은 미군에게도 대개 ‘좌익’으로 보였다. 식민통치의 협력자 집단이 미군정에도 협력자가 된 것과 짝을 이루는 현상이었다. 너무 넓은 범위를 ‘공산주의자’로 부르던 당시 상황을 커밍스는 이렇게 언급했다.


이런 꼬리표에는 진짜 문제가 있다. 공산주의자를 자칭한 이강국이나 현준혁 같은 사람들도 (넓은 의미의) 좌파 내지 (공산주의) 동조자 정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지 않았다. 대다수 인공 지도자들이 마찬가지다. 1945년 9월 인공에 대한 극단적 공산주의 비평에도 설익은 수준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해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차라리 김규식 같은 박식한 인물이 그와 맞서고 있던 ‘공산주의자’들보다 유물론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위 책 p 85, 번역판 127쪽)


이강국은 나중에 또 등장하겠지만, 9월에 암살당한 현준혁(1906~1945)에 대해 한 마디. 해방 후 조선공산당 평안남도 지방위원회를 이끌던 현준혁을 찰스 암스트롱은 오기섭과 함께 “가장 뛰어난 이북출신 국내파 공산주의자 두 명”으로 꼽았다. (<북조선 탄생> 147쪽) 그러나 실제 그의 경력을 보면 대구사범 재직 중 독서회 사건으로 1930년대 초 6년간 복역했고, 그 후에는 협동조합 운동에 종사한 것으로 보아 사상적으로 투철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격 배후에 관해 백의사-김일성 세력의 이설이 있을 뿐 아니라 저격시점까지도 <네이버백과>와 <위키백과> 사이에 차이가 있다.)


식민지시대의 항일운동가 중 일부 투철한 종교인 외에는 거의 모두가 사회주의 이념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민주주의’ 깃발이 있었다면 포섭될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계급혁명을 신봉하는 투철한 ‘공산주의자’는 몇 되지 않았다. 이것을 일제는 모두 ‘좌익’이라 불렀고, 미군정은 그 뒤를 따랐다.


서울에는 미군이 ‘보수적 민주주의자’로 보는, 일제 ‘협력자 집단’과 대략 겹치는 사람들이 지방에 비해 많이 모여 있었다. 교육과 재산 수준이 높은 계층이 서울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지시대의 ‘특권층’이 지방에는 극히 적었고, 따라서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를 결합한 당시 한국인의 ‘민심’이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지방의 인민위원회 활동은 이 민심의 표출이었고, 그것을 중앙에서 수렴할 수 있는 것이 인공이었다.


아놀드 망언 이후 군정 당국자들이 인공을 점점 더 조심스럽게 대하게 된 것은 이런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파괴하려 들기보다 ‘공화국’이라는 호칭을 거두고 국가나 정부 아닌 정당의 형태를 취할 것을 권유했다. 인공 당국자들은 자기네가 임의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라며 11월 20-22일의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 미뤘다. 그래서 군정청은 대표자대회에 헌병을 동원해 우익 청년단체의 습격을 막아주고 아놀드 군정장관이 참석하기까지 했다.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는 인공 명칭 변경 또는 해체 문제에 관한 결의서를 11월 30일 발표했다.


조선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는 중앙인민위원회가 보고하여 토의에 부친 朝鮮人民共和國 국호 변경 又는 해체의 문제 及 군정과의 관계에 관하여 左와 如히 결의한다.

1) 조선인민공화국은 조선 전 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성립되었고 지지되고 있다. 그것은 조선인민공화국은 조선 인민과 함께 존재할 정당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변경이나 해체는 조선 인민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확언한다.

2) 조선인민공화국은 조선의 남북을 통일한 단체이므로 남북에 진주한 미소 양국이 공동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믿는다. 그렇거늘 소련으로부터 여하한 통지도 없음에 불구하고 38도 이남에만 권력을 가진 미국군정이 단독으로 해체를 요구할 때 이것을 그대로 수락하는 것은 조선 인민 스스로가 조선을 남북으로 분열시키고 대립시키는 중대한 과오이며 치명적 자기모독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수락할 수 없다.

3) 대회에 모인 대표들은 각지 인민으로부터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 육성하기 위한 建案과 토의의 임무만을 받았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별개 문제인 본 문제는 언급할 하등의 권한이 없으며 그것은 오로지 전국인민대회의 민주주의적 투표에 의하여서만 결정될 성질인 것이다.

4) 미국 군정은 조선민족의 완전 독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조선에 존재한다고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 전국인민위원회는 조선 민족의 완전 독립을 그 시종일관한 사명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는 본격적으로 일치하며 사실에 있어 각 인민위원회는 처음부터 미국 군정에 협력하는 것을 자기의 업무로 알고 이에 협력 실행하여 왔다. 또 우리를 잘 이해하는 미군 장관들이 우리와 완전히 일치하여 원만하게 모든 문제를 진척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이에 대한 滿腔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5) 그러나 일부 모략분자의 농간으로 인하여 우리를 이해할 총명을 잃어버린 미군 장관이 우리의 적극적 협력을 거부한 사실(全北 慶北의 일부 지방)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실로 국호 변경 又는 해체 문제로 우리는 군정에 대립한다고 모략한 반역자의 이간에 인한다는 것을 재삼 지적하며 군정당국의 현명한 재인식을 切望한다.

6)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까지 미군정의 가장 친한 벗이라는 것을 공언하고 모든 모략을 배제하고서 조선 인민에 이익되는 정책의 실시를 위하여 군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군정으로 하여금 유종의 미를 맺게 할 것을 대회의 이름으로써 다시금 확약하는 바이다.

중앙신문 1945년 12월 01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4~6항에서 인공의 입장을 밝힌 것은 그렇다 치고, 인공 해체 또는 명칭 변경 거부의 이유를 밝힌 1~3항 내용은 억지스럽고 치사스럽게 느껴진다.


1) 9월 6일에 몇 명이 어떤 식으로 모여서 인공 설립을 결정했기에 “조선 전 인민의 총의에 의해” 성립된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인공의 “변경이나 해체가 조선 인민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확언”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정권에 대한 도발을 온 국민에 대한 도발처럼 뒤집어씌우는 후세 정권의 행태보다도 더하다.


2) “미소 양국이 공동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믿는” 까닭이 무엇인가? 모든 연합국(실제로는 미-영-소 3국)이 함께 의논한다면 몰라도, 두 점령국이 별개의 협의체를 구성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각각의 점령군은 자기 구역을 관할할 뿐이다. 미군의 관할 방법에 불만이 있으면 미군에게 항의하든 투쟁하든 할 일이지, 소련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었다.


3) 해체나 명칭 변경이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됐지, 왜 이것을 ‘전국인민대회’에 미루나? 수십 명이 부랴부랴 모여서 만든 조직의 해체나 명칭 변경을 7백여 명이 체계적으로 모여서도 결정할 수 없다면, 국민투표라도 해야 된단 말인가? 인공 당국자들은 대표자대회에 미루고, 대표자대회는 존재하지도 않는 ‘전국인민대회’에 미루다니, 군정 당국자들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나도 그들이 뒤통수 까였다고 열받은 데는 충분히 공감이 간다.


‘인민공화국’ 명칭에 대한 집착은 대립의 격화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공 설립 당시에 여운형 측은 ‘조선민주공화국’, 또는 ‘조선공화국’이란 이름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회의장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이란 말을 넣도록 몰고 갔다. 원래는 정치적 편향성이 없는 말이기 때문에 여운형 측도 극단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지만, 공산혁명과 관련해 널리 쓰이고 있던 이 말을 넣은 것은 용의자로 보려는 미군에게 나 범인이라고 우기고 나선 꼴이다. ‘인민’이란 이름이 인공에 대한 미군의 적대감을 키워주었기 때문에 중도파의 입지가 줄어들고 극좌파가 인공과 좌익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1월 20~22일 대표자대회 시점에서 인공은 ‘공화국’의 이름을 접어놓더라도 민심을 수렴하는 기능에 별 지장이 없었다고 나는 본다. 지난 100일 동안 민심을 기반으로 형성된 지방 자치조직을 뒷받침해 온 역할을 계속 성실하게 수행한다면 ‘공화국’ 간판이 없다 해서 ‘인민’들이 민심을 수렴해 달라고 군정청에 매달리겠는가?


극좌파가 ‘공화국’ 간판의 유지를 필요로 한 것은 임정과의 대결을 위해서였다. 중도파는 임정과의 협력을 원했다. 임정이 귀국을 앞두고 발표한 정강정책에는 중도파가 원하는 만큼 사회주의 원리가 반영되어 있었고, 임정의 인적 구성도 극우로 쏠린 것이 아니었다. 김구의 반공 성향을 문제삼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만, 이승만에 비하면 극우파로 의심 받을 여지가 훨씬 적었다.


임정의 지명도가 높고 국민의 여망이 컸기 때문에 임정이 국내에 있었다면 민심 수렴의 주체가 되었을 것이다. 임정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동안 그 역할을 인공이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임정이 환국한 이제 임정과 인공이 힘을 합쳐 그 역할을 더 잘해 나가기를 많은 사람들이 원했다. 그러나 인공을 장악한 극좌파는 임정과의 합작을 가로막기 위해 임정에 대항하는 ‘공화국’ 간판에 집착했다.


극좌파의 이런 의도는 9월 14일 인공 부서 결정에서부터 드러나 있던 것이었다.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교부장 김규식, 군사부장 김원봉... 임정 최고지도자들을 허헌 국무총리 밑에 부장(장관)급으로 배치한 것은 무례한 정도를 넘어 노골적인 모욕이었다. 중도파의 반대를 묵살한 이 결정에 대한 항의로 여운형은 일시 직무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건준을 함께 하던 안재홍에 비해 여운형은 임정에 대한 기대가 적었지만, 임정을 경쟁의 상대로 여겼지, 타도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다. 임정과 건준-인공의 협력-합작을 바란다는 점에서 여운형은 안재홍과 같은 중도파였다. 그런데 극좌파가 장악한 인공은 독선적 노선에 빠져 극우파 결집의 빌미를 만들어주며 ‘적대적 공생관계’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