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2일 공산당 박헌영이 민족통일전선, 즉 정치적 통합 문제와 임시정부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중 임시정부에 관한 담화 내용은 이렇다.


그들은 망명정객으로서 국내에 들어 와서 벌써 여러 날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할 일은 안하고 쓸데없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것은 즉 망명정부가 일종의 임시정부인 것처럼 신문지 기타 선전운동에 전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은 통일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도리어 분열을 조장하는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분들이 애국지사인 것이 틀림없다면 마땅히 국제관계와 국내 제 세력을 옳게 파악하고 결코 망명정치단을 가지고 임시정부의 행사를 하지 말 것이오 개인자격으로 들어와 본분을 지켜야 국제 신의가 서게 될 것이고 또한 통일정부수립을 제안하고 있는 국내의 진보적 세력과 접근하기에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완고만을 주창함은 심히 통일을 위하여 유감스러운 것이다. 그 분들은 좀 왕가적, 전제적, 군주적 생활의 분위기에서 해탈하고 나와서 조선의 인민 특히 근로대중과 친히 접촉하여 조선인의 새로운 공기를 호흡할 필요가 있다. 과거 수십 년간 망명생활 중에 조선과 분리한 생활을 계속하던 분들이 또 다시 국내에 와서도 그러한 비 민중적 생활의 노예가 되며 장래 조선의 지배자를 꿈꾸고 있는 현상은 차마 못 볼 기현상이다. 그 분들은 반일투사임은 분명하니 곧 나와서 조선민중과 접촉하되 평민의 관직을 잠시 맡겨 두고서 움직임이 어떠할는지.

<서울신문> 1945년 12월 13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내용의 옳고 그름에 앞서 표현의 극단성이 눈에 걸린다. 해방 이후 많은 흑색선전이 전단 형태로 난무하고 있었지만, 중요한 정치세력의 공식적 발표는 품격과 절제를 어느 정도 지키고 있었다. 이 상식을 뚜렷하게 벗어난 것이 9월 8일의 발기인 성명서에서 시작한 한민당의 건준-인공 공격, 그리고 10월 10일의 아놀드 망언 등 군정 당국자들의 일부 발언이었다. 박헌영의 이 담화문은 공산당도 그 대열에 따라가기 시작한 사실을 보여준다.


정치적 담론이 극단으로 흐르는 것은 대외적 효과보다 내부적 효과를 중시하는 결과다. 다른 세력과의 정치적 절충을 바라지 않고 내부 결속에 집중하는 것이다. 한민당이 비이성적 수준의 좌익 공격을 통해 친일파와 준 친일파를 결집시킨 것은 쉽게 이해되는 일이다. 그런데 대중적 기반을 중시하는 공산당에서 비슷한 행태가 나타난 것은 웬 일일까?


식민지시대 공산주의 운동이 남긴 유산으로 보인다. 극단적 탄압 아래 극단적 선명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일어났고, 대중운동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헤게모니 쟁탈의 제로섬 게임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해방 직후 박헌영이 서울에 오자마자 소련영사관부터 찾아간 것도 헤게모니 획득을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서울주재 소련영사관 직원 샤브시나 여사의 증언>

소련영사관이 박헌영을 처음 만난 것은 해방 2~3일 후인 어느날 오후였습니다. 박헌영이 영사관에 나타나 샤브신을 찾았습니다. (...) 박헌영은 샤브신에게 당 재건문제는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요청했고 샤브신은 그의 세 차례 10여 년 동안의 감옥생활 등 화려한 투쟁경력과 뛰어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들을 높이 평가해 적극 지원하기로 약속했지요.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211-212쪽에서 재인용)


공산당 재건 과정에서 박헌영은 ‘8월테제’로 이론적 헤게모니를 쥐게 되는데 그 내용은 6차 코민테른 12월 테제(1928)의 번안 수준이라고 서중석은 본다. (<한국현대민족운동사연구> 235-238쪽) 1935년 7차 코민테른에서 파시즘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타 세력과 연대하는 ‘인민전선’을 제창한 정책은 박헌영이 소화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인민전선 정책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사실은 같은 사람의 증언에 나타난다.


재건위원회에서 정치노선을 작성할 때 박헌영은 우리 영사관 도서관에 자료 특히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관련된 자료를 여러 번 의뢰하곤 하였다. (<이정 박헌영 연대기> 214-215쪽에서 재인용)


1928년 코민테른의 비타협적 정책이 박헌영이 대표하는 공산당의 이론적 기조였다. 반면 해외에서 돌아온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민전선 정책을 체화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쥐는 이북 지역에서 그 차이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북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은 박헌영과 비슷한 교조주의적이고 독선적인 성향을 보인 반면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소련에서 몇 해 지낸 다음 돌아온 ‘빨치산파’는 유연하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신의주사건 처리 과정에서 김일성은 공산당의 책임을 인정하면서 “가짜 공산주의자”들이 당내에 들어와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많은 조직 이름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을 빼게 했다. (찰스 암스트롱 <북조선 탄생> 110쪽) 교조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11~12월에 귀국한 독립동맹의 ‘연안파’도 중국 공산당의 ‘반파쇼 연대’ 전술에 익숙했다. 해방 직전 조선의용군을 포함한 1천여 독립동맹원 중 중국공산당원은 60여 명, 준 당원이라 할 수 있는 동정소조원(同情小組員)까지 약 백 명이었다. 간부층인 그들은 “조선인민은 수십 차례의 실책이라는 경험을 통해 정확한 노선을 찾아냈으며, 그것은 바로 중국공산당의 노선”, “모택동 동지의 영명한 지도태도는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지표” 등 중국공산당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한다. (한홍구 “무정과 화북조선독립동맹” <역사비평> 14호)


독립동맹 주석 김두봉이 해방 때까지 비당원으로 남아있던 데서 중국공산당과 독립동맹의 포용적 분위기를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김두봉은 해방 후 귀국을 앞두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같은 ‘공산당’이라도 박헌영이 일사불란하게 이끌던 이남 지역의 공산당과 김일성이 지도력을 점진적으로 키워가던 이북 지역의 공산당은 체질이 전혀 다른 조직이 되어 갔다. 이북의 공산당은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독립동맹 출신의 신민당, 그리고 천도교에 기반을 둔 청우당과 협조적인 관계를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반면 이남의 공산당은 우익과의 극단적 대립은 물론, 가장 우호적 세력인 여운형의 인민당까지 배척하는 ‘좌경모험주의’의 길을 걸었다.


박헌영과 김일성 등 지도층의 성향으로 이 노선의 차이를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어진 환경이 어떤 성향의 지도층이 주도권을 쥐게 되는지를 결정한 측면도 있다.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점령군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방침 덕분에 민심의 표현에 별 장애가 없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정치인들은 민심의 효과적 수렴에 노력을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중도파가 나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반면 이남의 미군은 자기네 정치 원리의 도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군정 정책이 민심과 유리되거나 대치되는 상황이 좌익세력 성장의 온상이 되었다는 얘기를 흔히 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투쟁적 좌익세력의 득세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준 것이다. 군정에 대한 반발 때문에 좌익 지지기반이 저절로 늘어나기 때문에 좌익 내에서 건전한 정책 발전의 노력보다 헤게모니 쟁탈의 양상이 더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적대적 공생관계’의 전형적 증세다.


독립동맹원 중에는 이남 지역 출신도 많았다. 그러나 거의 고향에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머물렀다. 공산주의자로서도 민족주의자로서도 미군정 하의 남한에서는 활동할 풍토가 좋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북 지역의 친일파들은 대거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고, 이듬해 3월 토지개혁이 시행되면서 지주층의 이주 물결이 커졌다. 점령군의 정책 차이가 38선 남북의 인적 구성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