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당시 이승만은 미국 국무성에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그의 귀국에도 국무성은 비협조적인 태도였지만, 맥아더 등 군부 인사들의 호의로 쉽게 귀국할 수 있었다. 중국을 거쳐서 올지, 마닐라나 도쿄를 거쳐서 올지, 이승만 본인이 원하는 대로 골라서 들어올 만큼 편한 입장이었다.


이승만의 미국인 지지자가 공화당과 군부의 극우파에 분포해 있었던 것은 1945년 4~6월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둘러싸고 이승만이 반공-반소주의 입장을 선명히 내세운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에서 미국이 한국을 소련의 세력권에 양도했다고 하는 ‘얄타 밀약설’을 주장하며, 그 증거까지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Los Angeles Examiner>지 1945년 5월 21일자에 보도되었다.


워싱턴 구미위원부는 현재 상항에 머물러 있는 이승만 씨의 훈령에 의하여 아래와 같은 각서를 발표하였다.

1. 영국과 북미합중국은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뒤까지 조선을 러시아의 세력범위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을 러시아와 동의하였다.

2. 더 나아가서 일본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미합중국과 영국은 조선에 어떠한 서약이든지 하지 않을 것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되었다.

여기 대하여 이승만의 말은 만주나 내몽고에 대하여 얄타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하되 이 조선 문제에 대한 것만은 정확한 사실인 것을 확신한다. 이 비밀의 출처는 어떠한 비밀정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262-263쪽에서 재인용)


이승만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증거’는 5월 8일자 <Chicago Tribune>지 기사였고, 그 기사는 자신이 5월 7일에 발표한 ‘얄타 밀약설’을 보도한 것이었다. 전형적인 언론조작이었다. 국무성이 그를 위험시하고 극우파가 그를 옹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승만이 ‘반공’이나 ‘반소’의 신념을 애초부터 갖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소련의 지원을 얻기 위해 1933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일도 있었고, 1945년 3월 28일까지도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과거 한-러 우호관계를 들먹이며 한국 독립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 주일 후 ‘얄타 밀약설’을 들고 나온 것은 정략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OSS 부사령관으로 있던 프레스턴 굿펠로우가 이런 책략을 권했으리라고 짐작된다. 파시즘과의 전쟁이 끝나 가는 상황에서 신생 정보조직인 OSS가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추구하고 있던 상황에 입각한 짐작이다. 이승만이 ‘비밀정탐’이라 말한 것도 굿펠로우를 믿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9월 14일 건준과 인공을 장악한 박헌영 일파가 이승만을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할 때, 아마 그들은 이승만이 몇 달 전 반공-반소 전선의 소총수로 나선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을 그저 정치적 주견 없는 기회주의자로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경 임정에 대항하는 자리에 올려주기만 하면 신이 나서 자기네 박자에 맞춰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책략에 있어서 자기네보다 한참 고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10월 16일 이승만의 귀국으로부터 12월 17일 공산당 비난 방송연설까지 두 달 동안 공산당과 이승만 사이의 관계는 한 판의 게임처럼 보인다. 인공 주석 추대라는 한 수를 받아 놓은 상태에서 귀국한 이승만의 첫 수는 10월 21일의 방송 연설이었다.


李承晩은 21日 오후 7時 20分부터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방송을 하였다.

“오늘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을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함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 과거 한인 공산당에 대하여 공산주의를 둘로 나누어 말하고 싶다. 공산주의가 경제방향에서 노동대중에 복리를 주자는 것과 둘째는 공산주의를 수립하기 위하여 무책임하게 각 방면으로 격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한인만이 아니라 중국과 구라파의 각 해방된 나라에도 있는 일이다.

각 지방에 당파를 확장하여 민간의 재산을 강탈하는 輩가 있다. 이러한 급격한 분자가 선두에 나서서 농민이 추수를 못하게 하고 공장에서 동맹파업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 이것은 방임하면 앞으로 국제적으로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치협력하여 화평과 안녕의 길을 함께 나아 갈 것을 희망하며 원컨대 이때는 우리들이 사정이나 사욕을 버리고 국체를 회복하여 국토를 찾자는 일점에 대동단결치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26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좋은 공산당’과 ‘나쁜 공산당’을 구분해 놓고, 자기 말 잘 들으면 좋은 공산당으로 인정해서 같이 놀아주겠다는 것이다. “농민이 추수를 못하게 하고 공장에서 동맹파업을 일으키는” 것은 한민당의 공산당 비방을 미군정이 받아들이고 있던 기준이었다. 미군정에 대한 영향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던 이승만이 이를 지렛대로 좌익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볼 수는 없을지 탐색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을 인공 주석으로 추대하려던 박헌영 일파의 시도가 번지수를 전혀 잘못 짚은 것으로 흔히 보는데, 내게는 아주 엉뚱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시도에는 상당한 합리적 근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승만이 ‘봉사’는 모르고 ‘군림’만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초년의 행적에서부터 드러나 온 것이다.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71세에 귀국한 그가 남을 앞세워놓고 그를 도와 착실히 일하는 역할을 맡을 생각이 전혀 없으리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박헌영은 그를 거래가 가능한 상대로 보았을 것이다.


이승만은 명성만 있을 뿐, ‘지도력 없는 지도자’였다. 미국에서 그가 확보한 추종자들은 이해관계가 깊이 얽매인 사람들뿐이었다. 국내에도 기독교인과 미국 유학자 등 역시 ‘패거리’가 통하는 사람들만이 그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광범위한 정치적 지도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이승만이 손쉽게 정치적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길은 특정 정치세력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명성과 교섭 능력을 높이 사서 그를 추대한다는 것은 현실정치의 책략을 중시하는 정치세력이라야 가능한 것이었다. 중도파는 그런 책략을 중시할 수 없다. 이승만이 손을 잡을 만한 상대는 어차피 극좌파 아니면 극우파였다.


이승만이 결국 극우파와 손잡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가장 뚜렷한 원인은 이미 만들어놓은 미국 극우파와의 유대관계였다. 그러나 그만큼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또 하나 중요한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국내의 극좌파가 극우파만큼 그에게 절박하게 매달릴 입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박헌영 일파는 인공과 공산당을 발판으로 인민위원회, 전평, 전농 등 자생적 진보운동을 수렴할 수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승만과 결탁하더라도 그에게 큰 권력을 양보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친일파 처단의 위협에 직면해 있던 극우파는 그에게 모든 것을 내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어줬고, 이승만은 그것을 받아먹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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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자주독립을 촉성하기 위하여 하지중장은 過般 在美洲韓國民族聯合會委員 田耕武, 金乎외 4인을 초청하여 조선의 국내사정을 조사케 하였는데 6위원은 귀국이래 각 방면과 절충 혹은 실지조사를 거듭하여 오던 바 드디어 成案을 얻었으므로 이지음 하지중장에게 구체안을 건의, 군정청에 제출하는 동시에 조선독립촉성에 기여하기로 되었다.

이 건의안은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각 방면에 亘하여 과도기에 처한 조선의 실정을 상세히 조사 보고하는 동시에 금후의 향로에 대하여 솔직 공정한 의견을 첨가 제출할 것으로 금후에 있어서의 군정시책과 조선독립촉성방향에 다대한 공헌을 할 것으로 그 성과가 주목된다. 건의안의 요지는 如左하다. (하략)

<자유신문> 1945년 12월 21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903년 초부터 1905년 7월 사이에 한국인 7,226명이 65척의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로써 인접국이 아닌 나라로는 미국이 가장 큰 교민집단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재미 교민집단은 그 후 해방 때까지도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 213쪽에 인용된 <MIS 비망록>(1943. 3. 19)에 따르면 1940년 미국에는 하와이의 6,851명을 포함해 모두 8,562명의 한국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2백만에 이르던 중국(만주 포함) 교민, 수십만에 이르던 러시아 교민에 비하면 아주 작은 교민집단이었지만,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여건 때문에 민족운동의 에너지가 쉽게 발산될 수 있었다. 1908년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계기로 국민회(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된 이래 미국 교민사회는 해외 민족운동의 한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미국 교민사회의 임시정부 지지는 임정의 권위에 큰 뒷받침이 되었을 뿐 아니라 중요한 재정적 기반이 된 시기도 있었다.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자 재미 교민집단은 미국 한국 사이에서 가교의 역할을 맡을 잠재적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1941년 4월 재미 교민의 통일 기관으로 설립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대표 6인이 하지 사령관의 초청으로 11월에 국내에 들어와 제반 사정을 살펴본 끝에 시정 방침 건의안을 군정청에 제출한 것이었다.


건의안 내용은 상식적인 것이어서 인용에서 생략했는데, 대표단 활동에 관한 다른 기사 중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다.


在美 韓族聯合委員會 대표단 金秉煥은 明年 1월 10일 국민대회와 임시정부 계획인 特別政治委員會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우리 대표단이 귀국후 약 2개월간에 국내정세와 민간여론 파악에 노력하여 왔던 것이다. 우리는 一黨 一派의 주의주장에는 추종할 수 없다. 따라서 明年 1월 10일 개최될 국민대회에도 우리 태도는 분명하다. 즉 韓國民主黨 측에서 개최한다는데 우리는 이 대회에 참석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特別政治委員會는 臨時政府에서 국내 국외 인사들과 국가독립촉성을 목표로 협의한다고 하니 우리는 미약한 힘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참석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27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한민당과 이승만이 기획하고 있던 국민대회에 불참하면서 임정 중심의 사업에는 협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재미 교민사회를 발판으로 30여 년간 활동해 온 결과 해방 후 국내에서 한 개인으로서는 최대의 정치적 권위를 가진 위치에 올라가 있었지만, 교민사회를 대표하는 입장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대표성의 한계 정도가 아니었다. 미국의 한국인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로 규탄하는 극단적 반대자들까지 있었다. 이승만이 임정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자격으로 미국인 업자에게 이권을 팔아넘겼다는 ‘광산 스캔들’을 1946년 초에 터뜨려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낙마시킨 한길수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승만 자신의 처신과 행적에 반대를 불러일으킨 면이 크다. 그는 도덕적 실천으로 지도력을 키우기보다 책략을 통한 영향력 확보에 몰두해 왔고, 그 책략은 혼란과 분열의 수단을 흔히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년의 행적은 차치하고, 그의 활동이 저조했던 1930년대를 지나 외교활동을 재개하는 1938년 이후의 일을 살펴보겠다.


재미 교민사회의 민족운동은 1920년대를 지나는 동안 열기가 식었다. 지나친 분열상에서 이유를 찾기도 하지만, 더 기본적인 조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대공황에 이르는 경기 침체로 교민사회의 여력이 줄어든 것이고, 또 하나는 교민집단의 고령화였다. 재미 교민집단에는 신규 이주자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초기 이주자들은 활동력이 줄어드는 반면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청소년층은 민족의식이 높지 않았다.


중일전쟁 개전 이후 일본의 침략전선이 확장됨에 따라 재미 한국인의 민족운동이 새로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일본의 패전 가능성이 구체화되었고, 또 미국 사회에 반일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1939년 3월 하와이를 떠나 워싱턴으로 옮겨가고, 이어 임정에 구미위원부의 부활을 요청했다. 구미위원부는 1919년 4월 이래 이승만의 활동 근거였다가 1925년 봄 이승만 탄핵-면직과 함께 폐지된 기관이었다. 임정은 이 요청을 거부했다. 재미 민족운동이 다시 활성화되어 1941년 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연합회)가 출범하면서 이승만을 대미외교위원으로 선정하자 임정은 비로소 주미외교위원부를 승인했다.


주미외교위원부를 둘러싼 파란은 이승만이 위원부를 개인 조직처럼 활용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미-일간 개전으로 한국인의 민족운동이 활기를 더함에 따라 위원부의 할 일도 많아졌는데 이승만은 자기 계열 이외 사람의 위원부 참여를 거부했다. 1943년 1월 국민회가 항의를 제기했으나 이승만이 독단적 태도를 고치지 않아 결국 1943년 10월 연합회에서 임시정부에 이승만의 소환을 정식으로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외교위원부가 형식적으로는 임시정부 산하기관이지만 실제로는 연합회의 지원으로 성립-유지되는 조직이었다. 그런데 중경 임정은 1년 이상 계속된 이 분규에서 모든 원칙을 어겨 가며 이승만을 지지했고, 이로 인해 연합회가 분열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정병준은 이 상황을 이렇게 썼다.


“재미 한인 사회 전체의 의견일지라도 이승만을 배제한 조직을 인정할 수 없다는 김구의 태도는 이승만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후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해방 후 이승만-김구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남 이승만 연구> 231쪽)


해방 후 김구의 민족지도자로서의 역할이 이승만과의 관계로 인해 제약을 겪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말이다. 나 역시 그런 인상을 갖고 있는데, 앞으로의 작업을 통해 밝히려고 애쓸 중요한 포인트의 하나다.


그러나 김구가 이승만에 대해 이 시점에서 “전폭적인 신뢰”를 갖고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신뢰가 없더라도 김구가 이승만 편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미국에는 집중화된 정보기관이 없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 필요성을 느끼고 윌리엄 도노반 대령에게 설치 계획을 맡겼다. 도노반은 1941년 7월 우선 COI(Co-ordinator of Information)를 만들었고, 이것이 1942년 6월 OSS로 확대되었다. 다시 CIG를 거쳐 CIA에 이른 것은 1946년의 일이었다.


이승만은 COI 시절부터 도노반의 2인자인 프레스턴 굿펠로우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한국인 요원 몇을 OSS 대원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1943년 들어 OSS가 특수부대 훈련 등 중국 전역에서 활동을 늘리자 이승만은 자기가 추천한 OSS 대원들과 통신시설을 이용해 중경 임정과 긴밀한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임정은 유명무실한 광복군을 만들어놓고도 그 지휘권을 중국군에 맡겨놓은 상황에서 광복군 확충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OSS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이승만을 김구는 긴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들어 장준하와 김준엽 등이 참여하는 광복군 국내 투입 작전도 OSS에 의지해 진행시킨 것이었다.


이승만은 김구와 임정의 절대 지지를 발판으로 외교위원부를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있으면서 또한 임정의 뒤통수를 치는 공작을 진행하기까지 했다. 외교위원부 안에 ‘협찬부’라는 이름으로 내무, 경제, 교육, 정치 등 여러 부서를 설치하려 한 것이다. 1944년 5월 24일 그는 이들 부서에 임명한 측근 인사들에게 친비(親秘) 서신과 함께 사업계획서를 보냈는데, 계획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새로 수립한 정치 기관의 각 위원부는 완전히 외교위원부의 지명하는 권력 범위 아래 제한되었으며 (...) 새 정치조직체는 한국의 내무와 경제와 교육과 정치와 전쟁 노력을 현시 전쟁 기간과 전쟁 후에 공히 지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우남 이승만 연구> 234쪽에서 재인용)


제2의 임시정부를 만들려 한 것이었다. 요즘 한국 정치계에서 ‘양파’론이 유행하는데, 이승만의 음모와 책략이야말로 까도까도 끝이 없는 ‘원조 양파’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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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미 국무성 내 친일파, 조선공산주의 지원자 제거 전문 타전”

李承晩은 19일 UP통신사를 통하여 미국 국무성에 대한 장문의 권고문을 타전하였는데 미묘한 국내정국에 비추어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아서 귀추가 주목된다. 조선에 있어서 공산주의자의 활동만 보더라도 자유를 사랑하는 아메리카국민의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미국 국무성은 일찍이 일본인과 친일파의 영사, 대사, 선교사의 왜곡된 보고에 의하여 극동정책을 썼기 때문에 진주만의 불상사를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들 친일파 외교관을 외무성에 남기어 둠은 부당한 일이다. 동시에 미국 국무성 중에 조선의 공산주의자를 지원하는 자가 있음도 국무성 내에 그러한 보도기관과 아울러 殘置한 까닭이다. 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중앙신문> 1945년 12월 25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 주 휠링의 한 여성 공화당원 모임에서 연설 중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여기에 205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공산당 당원이라는 사실을 국무장관이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국무성 안에서 일하며 정책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매카시 광풍(狂風)의 출발점이었다.


“공산당원 국무성 관리 205명!” 충격적인 발언이었기 때문에 얼마 전 의회 출입기자단에서 ‘최악의 현역 상원의원’으로 뽑혔던 매카시가 ‘가장 영향력이 큰 미국인’의 하나로 뜰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충격적 발언은 ‘뻥’이었다.


205명 명단 내용을 매카시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 숫자의 유래만이 밝혀졌다. 1946년에 번즈 당시 국무장관이 새버스 하원의원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국무성의 내부감사 결과 “채용에 적절치 않다”고 판명된 사람이 284명이며 그중 79명이 해임되었다고 밝힌 일이 있었다. 그래서 205명이 해임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4년 후 매카시가 명단을 들먹인 시점에서는 그중 65명만이 엄격한 추가 조사를 거친 후 남아 있었다. 205명 중 140명은 이미 국무성을 떠나 있었고, 65명은 의심할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매카시는 거짓말 잘하는 사람으로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던 사람이었다. 문제는 이런 ‘뻥’이 먹혀들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 대중은 마녀사냥을 원하고 있었고, 매카시는 대중이 원하는 일을 앞장서서 한 것뿐이었다.


왜 미국 대중은 마녀사냥을 원하고 있었던가? 공산주의의 위협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많이 통용된다. 동유럽의 공산블록 형성, 중국의 공산화, 그리고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이 구체적 요인으로 거론된다.


나는 1949년 8월 29일 폭발 실험에 성공한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1945년 7월 17일 폭발 실험 성공으로 이룩한 미국의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 위상이 무너진 것이다. 그 4년간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는 절정에 올라 있었다. 미국이 정의와 권력의 절대적 중심지라는 믿음 아래 전 세계를 깔보며 냉전체제를 출범시켰다.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이 반세기에 걸친 냉전시대를 몰고 오리라고 생각한 미국인은 없었다. 몇 년이면 공산국가들을 모두 굴복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로 ‘지존’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 것이었다. 미국 예외주의는 집단적 특권의식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는 것처럼 특권에 대한 위협은 ‘반동’적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미국 사회가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에 집체적으로 반동적 반응을 일으킨 것이 매카시즘이었다. “우리의 특권이 위험에 처했다! 누구 책임인가? 그놈들을 처단해서 더 이상의 위험을 막아야겠다!” 여기에는 논리고 나발이고 없다. 증거고 나발이고 없다.


이승만은 매카시보다 4년 이상 앞서서 미 국무성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이미 1945년부터 매카시의 선구자들이 국무성을 공격의 과녁으로 삼고 있었고, 이승만은 그 대열 속에 있었던 것이다. 왜 국무성이 당시 반공-반소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어 있었을까?


제임스 번즈(1882-1972) 장관의 존재 때문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협력자 번즈는 1944년 선거에서 루즈벨트의 당연한 러닝메이트로 여겨졌지만 강한 정치적 입장 때문에 반대파가 많아서 무난한 인물로 트루먼이 선택되었다. 트루먼은 상원의원 때 번즈의 추종자였고, 대통령이 된 직후에도 번즈에게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보이며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대통령이 될 때까지 맨해튼 프로젝트(원자폭탄 개발사업)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트루먼에게 그 사업의 존재를 알려준 것도 번즈였다.


1947년 3월 12일 의회 연설에서 천명된 ‘트루먼 독트린’은 국제 협력을 중시하는 루즈벨트의 다변주의 노선을 2년간에 걸쳐 꾸준히 뒤집어놓은 결과였다. 그 동안 다변주의 노선 수호파의 구심점이 번즈 국무장관이었고, 트루먼과 번즈 사이의 관계는 꾸준히 악화되었다. 트루먼이 번즈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 1945년 12월 모스크바 외상회의 때였고, 번즈는 트루먼 독트린 발표를 앞둔 1947년 1월에 사임했다.


그렇다고 번즈가 루즈벨트 수준의 친소 노선을 고집한 것도 아니었다. 1946년 내내 진행된 이란 사태와 관련해 번즈는 소련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유럽에 대한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1946년 9월 슈투트가르트에서 ‘희망의 연설’로 마셜 플랜의 방향을 예고하기도 했다.


다만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 정권을 지원하던 영국이 재정 한계로 미국에게 역할 인계를 요청했을 때 적극적 태도를 보이지 않은 것이 트루먼의 불만이었다. 트루먼 독트린은 그리스와 터키 개입 정책으로 출범한 것이었다.


그리스와 터키 개입 정책의 논거가 ‘도미노 이론’이었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연쇄적으로 무너진다”는 이 이론은 위기를 과장하는 수법으로 극단파에게 애용되는 것이다. 드러난 도발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응하되 국제 협력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과응 대응을 자제한다는 다변주의 노선이 이로써 폐기된 것이었다.


일방주의 노선의 트루먼 독트린은 극도의 오만에 이른 미국 예외주의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경제적 번영과 함께 이 오만을 뒷받침한 것이 군사적 절대 우위를 보장하는 핵무기 독점이었다. 이란, 그리스, 터키에서 소련이 미국의 강경한 입장에 굴복한 것도 원자폭탄 덕분이라고 미국인들은 믿었다. 1949년 8월 그 독점이 깨어진 데 대한 히스테리 반응이 매카시즘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매카시의 휠링 연설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상원에서 바로 외교위원회 소위원회에서 청문회를 열었다. 청문회를 이끈 밀러드 타이딩스를 비롯해 다수당인 민주당 의원들은 매카시에게 강한 반감과 경멸감을 품고 있었다. 타이딩스 청문회가 끝난 후 그 보고서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었다. “이 주장에 담긴 허위와 악의는 미국 사회를 혼란과 분열에 몰아넣고 (...) 공산주의자들 자신도 이 정도의 해악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당 의원들의 주장일 뿐이었고, 공화당에서는 이런 주장까지 나왔다. “(타이딩스 위원회는) 반역 음모에 대한 우리 역사상 가장 뻔뻔스러운 은폐 작업이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매카시를 사이에 놓고 조금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면 민심은? 압도적으로 매카시의 편이었다. 1950년 말의 상원의원 선거에서 매카시는 타이딩스를 비롯해 민주당 주요 후보들과 맞서는 몇몇 공화당 후보들을 지원했고, 전원 승리했다. 공화당이 상원의 다수당이 되었고 매카시는 공화당의 영웅이 되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미국 예외주의에 입각한 트루먼 독트린으로 냉전체제에 돌입했지만, 매카시를 앞세운 공화당은 이에 만족하지 않는 미국 대중의 민심을 등에 업고 정부를 공격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매카시는 ‘선거의 제왕’ 위세를 뽐내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매카시에 대한 혐오감을 별로 감추지 않았지만 매카시와 정면충돌을 삼갔기 때문에 매카시를 겁내는 것 아니냐는 핀잔도 많이 받았다. 사석에서 그런 핀잔에 이런 말로 응수했다고 한다. “그런 놈이랑 같은 시궁창에서 뒹굴 만큼 타락하고 싶지는 않아.” “대통령이 손수 비난하고 나서면 자기 격이 높아진다고 그놈이 너무 좋아하지 않을까?”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의 군사적 모험주의 억제 노력은 많은 평론가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마이클 셰리는 <전쟁의 그림자 속에(In the Shadow of War)>에서 원자폭탄의 한국전쟁 사용 제안에 “그 끔찍한 물건을? 자네들 제 정신인가!” 펄쩍 뛴 아이젠하워를 피그 만 사건을 일으킨 케네디와 대비하며 직업군인이 민간인보다 전쟁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군 미필자들이 대북 강경책에 목청높이는 한국 상황에도 참고가 되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존 케네디는 민주당 의원으로는 이례적으로 매카시와 좋은 사이였다. 그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매카시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매카시는 1957년 5월 2일 48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상원의원 직에 있었지만, 그 정치적 영향력은 1954년 12월 2일 상원의 징계 결의를 계기로 소멸했다. 67 대 22의 징계 결의에서 민주당은 전원 찬성했고 공화당은 반반이었다. 그 후 그가 발언할 때는 다른 의원들이 퇴장하거나 듣지 않는 시늉을 하는 것이 상원의 풍속이 되었다. 아이젠하워도 속이 시원했던지, ‘매카시즘(McCarthyism)’이란 말을 대신할 ‘매카시워즘(McCarthywasm)’이란 말까지 만들어냈다고 한다.


매카시의 몰락은 1954년 봄부터 시작되었다. 결정적 악재는 자기 보좌관의 한 사병 친구를 특별대우 하도록 육군에 부당한 압력을 가한 혐의였다. 이 의혹을 조사하는 청문회는 몇 주일 동안 텔레비전 생중계되었고, 그 동안 그의 지지율은 50%에서 34%로 떨어졌다.


매카시 몰락의 더 중요한 원인은 그 시점까지 한국전쟁을 통해 군사적 모험주의의 문제점이 드러남으로써 미국 대중의 환상이 깨어졌다는 데 있다. 1954년 3월 9일 <See It Now>라는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방영을 매카시 몰락의 출발점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매카시의 선동적 연설 중 혐오스럽고 억지스러운 부분을 모아 방영한 다음 진행자 에드워드 머로우가 이런 논평을 붙였다고 한다.


“그가 한 가장 큰일은 대중의 마음을 혼란시킨 것이다. 공산주의의 외부로부터의 위협과 내부로부터의 위협 사이의 혼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비판과 반역을 헷갈려서는 안 된다. 비난이 곧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판결은 증거와 정당한 법적 절차 위에 이뤄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로서로를 두려워하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신조를 깊이 파헤쳐보고 우리가 겁쟁이 조상들의 자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두려움에 몰려 이성 상실의 시대에 빠져들 수는 없을 것이다. (...)

우리는 세계 모든 곳에서 자유의 수호자를 자임하며,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를 밖에서 지키기 위해 안에서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위스콘신 출신 상원의원의 행동은 해외의 우리 동맹자들에게는 경각심과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고 우리 적들에게는 안도감을 심어주었다. 그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그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공포심의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공포심의 상황을 이용한 것일 뿐이다. 상당히 잘 이용해 먹은 것이기는 하지만.”


1952년 말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주한미군을 방문한 아이젠하워는 한국 대통령을 만나지 않고 돌아갔다. 그가 같은 시궁창에서 뒹굴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이 매카시 외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한국 대통령이 7년 전 미 국무성에 어떤 전문을 보낸 사람인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