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사령관이 주요 정당 지도자들을 군정청으로 청해 모스크바 외상회담 결정 내용을 공식 통보했다.


조선민족에 대한 일대 치욕 신탁통치제를 위요하고 3천만 동포가 同制 폐지의 반대 봉화를 높이 들고 있는 29일 조선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정오 군정청으로 人民黨, 共産黨, 韓國民主黨, 國民黨, 新韓民族黨 등의 각 정당 영수를 초청하고 신탁통치에 관한 公電을 피력하는 동시에 탁치제는 주권의 침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방금 미국으로부터 公電이 도착되었다. 미 소 양 군정 대표는 2주간 내에 모여 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회는 조선 각 정당 사회단체를 모아 임시정부를 조직한 후 그것을 4개국 공동위원회에 제안하여 조선의 임시정부가 조선의 독립을 원조하는 4국 신탁관리가 필요하냐 아니하냐의 결의에 의하여 4국위원회는 존폐를 결정한다. 신탁관리는 일본제국의 통치와 같이 압박과 착취를 목적함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위하여 원조하는 기관이다. 주권은 임시정부에 있고 4개국 관리위원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국무장관 번즈 씨는 모스크바 출발에 앞서 나에게 내 뜻대로 해줄 것을 약속하였다. 결코 조선에 해로운 제도가 아니니 오해 말라.”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인용문 끝에 번즈 국무장관이 자신에게 “내 뜻대로 해줄 것을 약속”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이승만은 26일 방송 연설에서 “트루먼 대통령, 번즈 국무장관, 연합국사령관 맥아더 대장, 하지 중장은 다 조선 독립을 찬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7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거짓말과 통하는 이야기다.


정용욱은 여러 가지 정황증거를 발판으로 군정청이 <동아일보> 허위 기사에 연루되었을 개연성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는데,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54-66쪽) 위 기사에서 말한 ‘번즈 국무장관의 약속’이란 것도 소련을 모략하려는 <동아일보> 허위 기사를 뒷받침하는 말이었던 것 같다.


이 신탁통치 결정과 관련해서는 하지가 유별나게 고집을 많이 세우고 빤한 거짓말도 많이 했다. 거의 정신병자로 보일 지경이다. 1월 24일 타스통신의 회담과정 폭로로 신탁통치안 제출 책임을 소련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거짓말이 들통나자, 국무성에서 회담 전에 방침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우겼다. 국무성 측에서 그 주장이 거짓말임을 밝히는 자료를 들이대자 군정 사령관직을 사퇴하겠다고 뻗댔다.


하지의 행태가 너무나 황당무계해서 맥아더가 하지를 속인 것 아닌가 의심까지 든다. 그러나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본국의 연락이 모두 맥아더 사령부를 거쳤을 리는 없다. 위 기사의 인용에서도 번즈가 자기에게 직접 약속을 했다고 하지가 말한 것으로 나와 있지 않은가. 검열권이 하지에게 있었으니 인용이 잘못된 것으로 볼 수도 없다.


신탁통치 결정이 명확하게 전해졌다. 하지 사령관은 반탁 운동에 동정하는 뜻을 표했다. 임정 중심의 비상대책회의는 극한투쟁을 결정했다. 반탁 결의가 각계각층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반탁 대열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 흐름이 얼마나 거센지 좀 우스운 모습도 개중에 보인다.


28일 밤 신탁통치의 비보를 접한 서울의 환락가는 일제히 문을 닫았다. 초만원을 이루었던 각 극장에는 극장지배인이 전하는 이 소식에 관객들은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일제히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 버렸고 29일에는 극장마다 신탁통치 반대 휴관이라는 패가 나붙었다. 三越과 丁字屋 4층에 호화스러움을 자랑하는 댄스홀도 28일 밤 지나가는 군중들의 압력으로 문을 닫았고 29일에는 스스로 휴업한다는 간판을 내걸었으며 기타 수없이 생겨난 카페와 빠도 전부 휴업을 하여 한때 환락도시로 변한 느낌이었던 지저분한 서울거리도 숙연한 모양으로 변하였다. 환락정에서 객고를 풀던 연합군병사들도 없어졌거니와 스스로 긴장하여 서울 환락가의 풍모도 하룻밤 사이에 변해 버렸다.


◊ 한성극장협회 이사장 洪燦 談

신탁관리란 우리 민족에게 독약을 주는 거나 다름이 없다. 국가 최고문화의 기구는 예술이다. 국치적인 신탁통치를 배격하고 완전독립이 오기 전까지는 시내 각 극장의 문을 열 수는 없다. 민중과 함께 보조를 함께 하겠다. 완전독립이 지연한 곳에 오락이 있을 수 없다.


◊ 국일관사장 金女伯 談

신탁통치란 청천의 벼락이다. 해방이란 허수아비의 미명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러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전까지는 우리 요리업자들도 직업을 떠나 통치 배격의 일원으로 민중과 더불어 끝까지 항쟁하겠다.


◊ 요리업조합 결의

조선요리업조합에서도 29일 종업원총회를 개최하고 신탁통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였다.

삼십여 년간 일본제국주의 하에 압제를 받다 영광스런 자주독립에 분투 중 돌연 5개년간 신탁통치란 청천벼락이 내리었다. 연한부의 신탁통치란 열강침략의 상투수단이다. 3천만 동포 궐기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우리 朝鮮料理業組合 소속 종업원 2,000여명은 3천만 동포의 1분자로써 파업을 단행한다.


◊ 각 극장도 합류

서울극장협회에서는 우리나라에 대한 치욕적 결함인 신탁통치거부투쟁을 위하여 28일 긴급이사회를 개최하고 서울안 16극장은 일제히 문을 닫고 이어서 전국 흥행업자를 격려하여 水原, 仁川, 大田, 釜山, 光州 각 극장도 폐문하였다 한다.


◊ 댄스홀 폐쇄를 백화점 측서 요구

조국에 해방이 왔다고 향락가와 모리배들은 여기저기 댄스홀을 만들어 놓았던 바 신탁통치 결정의 비보를 듣는 일순에 가장 출입객이 많던 정자옥과 동화백화점의 댄스홀 문은 굳게 닫혀져 있는 바 양 백화점 대표와 댄스홀 경영자 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李東新 談(정자옥 지배인)

국민으로 누구나 통분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백화점에서는 휴업을 하였습니다. 저의 백화점에 있는 댄스홀 말입니까 경영주는 다른 사람입니다 마는 집을 빌려준 사람은 우리이니까 저희들도 지금 댄스홀 경영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곧 폐지해 달라 부탁할 작정입니다.

첫째로는 풍기도 좋지 못하며 지금과 같은 국가비상지추에 댄스가 다 무엇입니까?


◊ 池熙轍 談(동화 총무부장)

내 지금도 막 이야기 하였습니다. 전에 대표로 계시던 분이 댄스홀로 쓰는 것을 허락한 모양입니다. 저는 4·5일 전에 군정관 딬 중위에게 우리 백화점 내에 이러한 풍기문란한 것을 두지 않게 하여 달라 부탁하였더니 동 중위는 조금 기다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시국이 이렇게 되니 더구나 그냥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일층 더 강경히 군정장관에게 교섭하겠습니다.


◊ 林炯哲 談(국제댄스홀)

어저께 오후 6시 경관이 와서 충고하므로 바로 휴업하였습니다. 앞으로 당분간 휴업할 예정이며 딴 데서 영업을 개시하면 나도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3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맨 끝의 댄스홀 업주처럼 “딴 데서 영업을 개시하면 나도 바로 시작”할 사람들도 감히 혼자 문을 열지는 못할 만큼 거센 분위기였던 모양이다. 경찰서장들까지 나서는 판이니 유흥업자들에게 분위기가 거세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었겠다.


4개국 공동관리의 신탁통치 결정에 대하여 29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경찰서에서는 시내 각 경찰서장이 신탁통치 배격 긴급회의를 열고 각 서장의 공동담화를 동대문서장 金正濟가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신탁통치란 우리가 배격할 일이다. 우리는 치안을 확보하는 경찰진에 있는 몸이라 우리로서 중구난방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 없는 곳에 경찰이 있을 리 없고 민중을 떠나 치안은 허깨비의 파수병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같이 모여 결의를 했다. 경찰관의 직을 떠나 자주국가로서 완전독립이 올 때까지는 민중과 더불어 치안대원으로서 결사의 사명을 다하겠다. 마음과 마음 피와 피가 순결히 결합될 때는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오후 4시부터 도에서 과서장회의가 있는데 우리의 뜻을 피력하겠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3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당시 경찰은 미군정 방침으로 식민지시대의 경찰관들이 승진해서 자리를 지키고 조병옥의 주도로 노골적인 친일파까지 등용되어 민심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경찰 간부라면 원래 정치적 태도 표명을 절제해야 할 위치인데, 더구나 친일 색채가 강한 이 집단이 이렇게 앞장서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다. 군정청 직원들이 바로 조직적 움직임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눈에 띄는 일이다.


29일 아침 총파업을 단호히 결행한 군정청 조선인 직원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내었다.

◊ 성명서

昨日의 보도에 의하면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에서 조선에 신탁통치위원회를 설치하고 5년 후에 독립을 준다고 결정했다는 설이 전해지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민족이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편견에서 나온 것이요 또 자유독립을 약속한 국제신의에 배반되는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들 군정청 조선인 직원은 이 군정청이 조선의 독립을 준비하고 촉진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이에 협력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군정청이 조선의 독립을 촉진하는 기관이 아니요 신탁통치를 위한 기관으로 전환하게 된 오늘날 우리들은 이 이상 더 이에 협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총사직으로서 신탁통치에 대한 절대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앞으로 전개될 3천만 총의에 의한 독립운동에 합류하여 끝까지 싸움하기를 성명한다.

12월 29일

군정청 조선인직원 일동

군정청의 3천여 직원은 29일 정오 각과 계장 이하 직원이 시내 新橋町 맹아학교 뒷뜰에 모이어 신탁통치 절대반대를 결의하고 전원이 시내를 향하여 보무당당한 시위행진을 하여 군정청 앞까지 오자 MP의 제지로 일시 해산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동 직원들로 조직된 신탁통치반대위원회에서는 이어 모처에서 긴급대책위원회를 열고 대책을 강구하여 군정청 관계 전 직원에 반대의 격을 보내고 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3천여 전 직원이 시위행진에 나섰단다. 작문 능력이 각별히 뛰어난 <동아일보>가 아니라도, 일부 직원의 행진을 조금 과장해서 보도하는 것은 선의로 이해되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아무튼 일부 직원이라도 군정청 직원들이 이런 행동에 나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성명서에서는 “이 군정청이 조선의 독립을 준비하고 촉진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그곳에서 일한다고 했지만, 그 믿음 하나만으로 일한 사람이 몇이나 됐겠는가. 월급이 좋고 신분이 보장되는 직장에 있는 사람들이 민족 대의를 아주 외면한다면 서운한 일이겠지만, 이렇게 앞장서서 분위기를 띄워주는 것은 좀 어색한 일이다.


군정청 직원과 경찰 간부는 한민당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집단이었다. 다른 정당과 조직들이 갑자기 닥친 소식에 놀라 원론적이고 수동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점에서 이 집단이 강경하고 확고한 행동과 의지를 보여준 것은 자연발생적 반응이 아니라 준비된 전략에 입각한 조직적 대응으로 보인다. 보수성이 가장 강한 이 집단이 보여준 뜻밖의 적극적 태도 때문에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이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인공 측 인사의 29일 중 반응 하나를 어제 소개했는데, 공산당 대변인 정태식의 반응도 그와 별 차이 없이 원론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29일자 신문에 실린 것이지만 초두의 문맥으로 보아 28일의 발언으로 보인다.


조선신탁통치설에 대하여 조선공산당에서는 아직 공식발표는 없으나 동당의 鄭泰植은 개인의 자격으로 다음과 같이 절대반대의 의견을 표명하였다.

“공산당으로서는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없고 또 오늘 저녁에 워싱턴, 런던, 모스크바에서 3국 외상회의의 결과에 대해서 공식으로 발표한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모든 자료를 가진 후에 정식으로 태도를 표명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의 공산주의자로서의 개인의견을 말한다면 이러하다.

우리 공산당은 과거 6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조선통치에 반대하여 가장 용감하게 민족해방을 위하여 우리 동지와 대중의 존귀한 희생을 내어 가면서 싸워 왔다. 우리 당은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히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확실한 자료를 가지지 못해서 지금 경솔히 이 문제에 관하여 말할 수 없으나 만일에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절대 반대한다.

조선 3천만 민족은 옳은 노선 밑에서 하루바삐 민족통일전선을 완성하여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하여 우리 3천만 조선동포는 8월 15일 우리가 가졌던 그 감격을 다시 가지고 한 마음 한 뜻 한 힘으로 돌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박헌영은 공식 입장 표명이 없었지만 소련영사관 직원 샤브시나의 증언을 보면 역시 원론적 수준의 반탁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샤브신이 그(박헌영)를 불러 물어보니, 그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조선의 정세와 민족문제 들을 바로보지 못한 것”이라며 반대했습니다. 소련영사관측이 “소련의 지시니 찬탁에 앞장 서 달라”고 요구하자, 겉으로는 따르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반탁을 고수했습니다. 이같은 그의 동향이 평양사령부에 알려졌고, 치스차코프 대장과 레베데프 소장 등은 1946년 1월 초순 그를 평양으로 불러 “소련의 정책이니 찬탁을 따르라”며 명령식 설득을 했지요.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258쪽에서 재인용)


대다수 정치인들이 당황해서 원론적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 “이미 준비한 방책”을 자신 있게 꺼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승만이 모든 동포에게 “일시에 일어나 예정한 대로 준행하기를” 청할 때 그 예정된 것이 무엇인지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었겠지. “영, 미, 중, 각국은 절대 동정할 줄” 믿는다고 할 때 소련이 빠진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었겠지. 한민당, 군정청, 경찰에 있는 사람들이었을까?


“이 신탁통치에 대하여 미 국무성 원동사무부장인 빈센트 씨가 누차 私翰과 공식선언으로 표시한 바가 有하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과 될 줄 예측하고 이미 준비한 방책이 있어 그 방책대로 집행할 결심이니 모든 동포는 5개년 단축시기라는 감언에 見誘치 말고 일시에 일어나서 예정한 대로 遵行하기를 바라며 따라서 우리 전국이 결심을 표명할 時에는 英, 美, 中 각국은 절대 동정할 줄 믿는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Posted by 문천


[워싱턴 28日發 合同]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문이 28일 3국 수도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극동자문위원회를 폐지하고 11개국의 극동위원회를 설치하여 4개국 일본 관리 이사회를 설치한다.

2) 美, 英, 蘇 3국은 美, 英 양국 군대가 그 임무와 책임이 완료하는 대로 가급적 속히 중국으로부터 철퇴할 것이다.

3) 3국 외상은 중국이 통일된 민주주의적 국가로 되어 국내 항쟁을 정지한다는 필요성에 관하여 동의되었다.

4) 原子 에네르기는 평화산업 이외에 이용되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목적으로 원자력관리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다. 美, 英 양국이 루마니아, 불가리아 양국을 승인하는 평화조약 체결조건이 발표되었고 원자력관리위원회의 설립에 관해서는 1월의 국제연합총회에서 안전보장이사회의 각 성원국가와 이 이사회를 加한 관리위원회를 창립할 결의가 제의되었다.

5) 극동위원회는 蘇·英·美·華·和蘭·캐나다·濠洲·뉴질랜드·印度·필리핀의 11개국으로 구성된다. 동 위원회 성원국가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는 맥아더 대장이 발한 지령을 검토한다. 또 위원회의 결정사항을 맥아더 대장에게 전달하는 것은 미국정부의 책임으로 되었다. 또 긴급을 요하는 경우는 미국은 잠정적 지령을 발할 수 있다.

6) 조선에 주재한 미소 양국군사령관은 2주간 이내에 회담을 개최, 양국의 공동위원회를 설치 조선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원조한다. 또 美, 英, 蘇, 華 4국에 의한 신탁통치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임시정부를 수립케 하여 조선의 장래 독립에 備할 터인바 신탁통치 기간은 최고 5년으로 한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와 조선 각종 민주적 단체와 협력하여 동국의 정치적 경제적 발달을 촉진하고 독립에 기여하는 수단을 강구한다. 이 신탁통치제에 관한 외상이사회의 제안을 검토키 위하여 美, 蘇, 英, 華 각국정부에 회부된다.

7) 美, 蘇, 英 3국은 伊太利,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핀란드로 더불어 1946년 5월 1일까지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를 준비한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모스크바 외상회담에서 한국 신탁통치안이 결정된다는 사실 자체는 12월 28일의 공식 발표에 앞서 군정청과 한국 사회 일각에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내용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12월 29일의 일이었다.


탁치 반대 운동은 28일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27일 저녁때 엄항섭이 대신한 김구의 방송 연설에는 신탁통치를 의식한 내용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연설문이 방송 시간보다 얼마간 미리 준비된 것이기는 했겠지만, 27일 중에 신탁통치 문제를 예민하게 의식할 만한 상황이 발생했다면 방송 내용을 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26일 밤 이승만의 “신탁통치 반대” 방송 연설에 호응하는 움직임은 27일 중에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래 기사를 보면 지방에서 28일 아침에 “국제적 보도”에 접하고 바로 반탁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대구 사람들이 접한 “국제적 보도”가 어떤 것이었을까? 27일자 <동아일보>에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란 바이라인을 달고 게재된 허위 기사였을 것 같다.


신탁통치라는 국제적 보도가 대구에 전하여진 것은 28일 아침이었다. 가로를 왕래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결단코 배척한다는 굳은 결의가 떠돌고 있다. 소란 중 경북인민위원회와 경북독립촉진회에서는 28일 긴급회의를 열고 연합국 측의 이 배신적 행위는 묵인할 수 없다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우리 민족의 자유획득을 위하여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31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실린 신문 기사 중에는 위 기사처럼 뜻밖의 소식에 놀라 자연스러운 반응이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주요 정당들은 모스크바 회담 결정 내용이 금명간 확정적으로 전해질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인 단체도 있었다.


28일 오후 6시 기독교청년회관 강당에서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연맹이 주최가 된 약 42 단체 대표자 130여 명이 참석하여 신탁통치반대대회가 열리었다. 먼저 좌장으로 徐廷禧를 선출하여 곧 별항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一. 연합국에 임시정부 즉시 승인을 요함

一. 신탁통치 절대반대

一. 전국 군정청 관공리는 총 사직하라

一. 특히 38선 이북에서는 행정 사법 담당자 총 이탈하라

一. 전 국민 총파업. 단 신탄 미곡만 제외함(필요한 기간)

一. 극동 약소민족 해방운동 전개

一. 신탁통치 배격 국민대회 개최

一. 언론기관에서 우리의 운동에 협력치 않는 자는 우리 손으로 정간케 함

一. 신탁 배격 운동에 참가치 않는 자는 민족반역자로 규정함

一. 군정청에 운동방침을 통고함

一. 라디오 유흥방송 폐지의 건

단 우리 운동보고는 라디오를 통하여 방송을 요구함

◊ 하지중장에 드리는 성명서

각하와 및 각하와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의 조선독립을 위하여 바치신 성의와 열에 대하여서는 우리들은 충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조선의 전 민족이 희구하여 마지않는 그리고 각하 역시 바라고 애쓰신 크신 노력도 이제 수포로 돌아가려는 위기에 직면하였으니 우리는 愛敬하는 각하에게 피눈물을 뿌려 애통하는 바이다. 세계 약소민족 해방도 강국의 자의에 의하여 이처럼 농락되는 것임을 묵과할 것인가. 우리는 이제 각하가 조선 즉시 독립을 1월 이내에 실시하지 않으면 본직을 사퇴한다는 본국에의 通電을 알고 민족적인 감사를 올리며 동시에 우리가 생명과 피를 뿌려 가면서 신탁통치 배격의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결의를 피력하오니 각하도 최후의 노력을 다하여 대한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보다 더 정열을 不惜하시기를 삼가 바라는 바이다.

大韓民國 27년 12월 28일

大韓獨立促成全國靑年總聯盟 外 全國 各 團體 代表者 一同

<서울신문> 1945년 12월 3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결의 사항 중 ‘협력치 않는 자’와 ‘참가치 않는 자’에 대한 적개심에서 극우 냄새가 난다. 그리고 성명서에서는 하지에게 “각하 역시 바라고 애쓰신 크신 노력” 이야기를 한다. 미 국무성의 신탁통치안을 격퇴하기 위해 이승만에게 독촉을 빨리 만들라고 독촉하던 군정청의 획책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조선 즉시 독립을 1월 이내에 실시하지 않으면 본직을 사퇴한다는 본국에의 通電”까지 알고 있다. 실제로 하지는 이듬해 1월 28일 사의를 표명했다. 1월 24일 타스통신이 모스크바 회담의 실제 진행 과정을 밝혀 12월 27일의 <동아일보> 기사의 거짓을 밝힌 상황에 당황한 결과로 이해되는 일이지만, (커밍스는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의 이 대목을 다룬 절에 “하지의 굴욕”(Hodge in a Cocked Hat)이란 제목을 붙였다.) 12월 28일 이전에 사퇴 의지를 표명한 적이 있다는 얘기는 이 기사에서 처음 봤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중에 실제로 사의를 표명한 데 비추어 보아 사실이었다고 생각된다.) 모스크바 회담을 대하는 하지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일이다.


아무튼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을 앞세운 이 움직임은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성명서에 담긴 정보 수준으로 보거나, 결의 사항에 담긴 폭력성과(협조하지 않는 언론기관은 자기네 손으로 정간시키겠다고 했다.) 정략성으로(동조하지 않는 자는 민족반역자로 규정한다고 했다.) 보거나, 남들보다 앞서서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던 이승만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임정은 28일 오후 4시에 긴급 국무회의를 열었다. 누군가가 모스크바 회담의 확실한 결정 내용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긴급회의를 열었을 텐데, 회의의 결의 내용은 대개 원론적인 수준으로, 임정 자체의 적극적 대응 방침은 들어 있지 않다.


임시정부에서는 지난 28일 오후에 경교동 숙사에서 긴급히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金九 주석, 金奎植 부주석 이하 전원이 참집하여 신탁제에 대하여 우리 민족이 대처하는 태도와 방침을 토의하였는데 긴급 안건으로써 안건 4항을 결의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본 정부는 각층 각파 급 교회 전 국민으로 하여금 신탁제에 대하여 철저히 반대하고 불합작 운동을 단행할 것

2) 즉시로 재경 각 정치단체를 소집하여 본정부의 태도를 표명하고 前途 政策에 대하여 절실히 동의 합작을 요하며 각 신문기자도 열석케 할 것

3) 신탁제도에 대하여 中, 美, 蘇, 英 4국에 대하여 반대하는 전문을 급전으로 발송할 것

4) 즉시로 미소 군정당국에 향하여 질문하고 우리의 태도를 표명할 것

大韓民國 27년 12월 28일

大韓民國臨時政府國務委員會 主席 金九 外務部長 趙素昻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그런데 위 결의 내용 중 (2)항이 즉각 시행되어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반탁운동의 큰 틀이 결정되었다. “각 정당(2인), 각 종교단체(2인), 각 언론기관 대표자를 초청하여 비상대책회의를 동일 하오 8시 반부터 개최, 深更에 이르기까지 백척간두에 서있는 국운을 구출하고자 白熱的 논의를 거듭한 결과” 극한투쟁 노선을 결정한 것이다. ‘비상대책회의’의 결정 내용은 이렇게 보도되었다.


◊ 聲明書

우리는 피로써 건립한 독립국과 정부가 이미 존재하였음을 다시 선언한다.

5천년의 주권과 3천만의 자유를 전취하기 위하여는 자기의 정치활동을 옹호하고 외래의 탁치세력을 배격함에 있다. 우리의 혁혁한 혁명을 완성하자면 민족이 일치로써 최후까지 분투할 뿐이다.

일어나자 동포여!

◊ 결의문

1) 신탁통치를 반대하기 위하여 기구를 창립하되 명칭은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라 칭함

2)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는 각 정당 각 종교 각 사회단체 기타 유지인사로 조직함

3)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기관은 中央 郡面에 從으로 分設할 것

4)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는 국무위원회의 지도를 受할 것

5)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에는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지도하는 위원 7인을 선출하여 해외에 대한 지도위원회를 설치함

6) 재정은 지원자의 희망과 정부의 보조로써 충용할 것

7) 탁치반대총동원위원회의 章程委員 9인을 金九, 趙素昻, 金若山, 趙擎韓, 柳林, 金奎植, 申翼熙, 金朋濬, 嚴恒燮, 崔東旿 제씨로 선출하여 기초를 제출케 할 것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김구를 중심으로 한 반탁운동이 군정청에 대항한 측면이 많이 부각되어 왔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며 실제로는 인공에 대항한 측면이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반탁운동을 명분으로 만들어지는 총동원위원회가 지역 차원에서 인민위원회를 대치하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맨 위에 인용한 대구 지역 기사처럼 인민의 탁치 반대 의사는 인민위원회를 통해 표출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반탁이 정녕 최고의 목적이라면 28일 밤 임정 중심의 비상대책회의에서 인공과 협력해 인민위원회를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없었을까? 그 동안 임정과 인공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있기는 했지만, 민족운동 고양이라는 거대한 과제가 관계 재정립의 기회를 던져주고 있었다. 임정이 군정청과 맞설 요량이라면 인공과의 협력이 전략적으로도 절대 바람직한 길이었다.


인공 쪽에서는 모스크바 회담 결정에 대한 반응이 29일에 처음으로 나왔다. 역시 원론적이고 수동적인 범위에 머물러 있는 반응이다. 임정이 손을 내밀었다면 적극 호응했으리라는 인상을 받는다.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탁치 배격 담화 발표

“조선 신탁통치가 3국외상회의에서 결정되었다는 보도를 이제 막 읽고 너무나 의외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의 진위는 아직 공식 발표를 기다려 보아야 할 것이고 또 공식 발표가 있은 후에 우리 위원회로도 긴급대책을 세울 터이다. 그러므로 나는 개인적 입장에서 말하겠다. 조선의 완전자주독립이라는 것은 우리 인민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이다. 따라서 어떠한 의미에서라도 조선의 자주독립이 침해를 받는다면 우리는 과거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하던 이상으로 단호히 싸워야 할 것이다. 또 우리 조선은 어떠한 이유로도 신탁통치를 실시할 근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한 노선에서 더욱 시급히 민족의 총력을 결집하여 진보적 민주주의의 자주국가 달성에 단호 매진할 뿐이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임정이 민족의 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라면 인공은 민족의 육체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두 존재의 원만한 협력과 결합이 민족의 장래를 가장 잘 풀어가는 길이었다. 1945년 12월 28일, 해방 후 처음으로 민족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할 기회가 왔을 때 임정은 인공과 인민위원회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반탁운동의 에너지를 이용해 지역 차원에서 인민위원회를 대치할 조직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어찌 이런 일이!


Posted by 문천
2010. 12. 26. 16:51


어렸을 때 우리 또래가 제일 많이 읽은 동화책 가운데 <소공자>, <소공녀>와 함께 <엄마 찾아 3만 리>란 제목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2년 동안 어머니를 살피며 쓴 글을 다시 훑어보며 이것이 나의 ‘엄마 찾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동화의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지만, ‘찾기’의 의미가 나랑 달랐던 것 같다. 그 동화에서 ‘엄마’는 주인공의 인식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구체적 대상이었다. 내가 찾은 ‘엄마’는 엄밀히 말해서 나와 그분과의 관계다. 그분과의 관계가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며 가질 수 있는 것인지 깨우치는 것, 그것이 이 글쓰기를 시작할 때 나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글쓰기의 목적이었다.


동화에서 주인공이 극복해야 할 문제는 물리적 단절이었다. 내 ‘엄마 찾기’의 과제는 심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수십 년 동안 그분의 훌륭한 점보다 그분의 모순과 위선을 더 많이 생각하며 살아 왔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분을 편안한 눈길로 바라보지 못하며 살아오려니 나 자신을 좋게 볼 수도 없고, 세상을 좋게 볼 수도 없었다.


내 ‘엄마 찾기’는 요컨대 ‘화해’의 과정이었다. 그분과의 화해가 세상과의 화해, 나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길을 열어주었다. 5년 전만 해도 나는 세상과의 교섭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애를 쓰며 살고 있었다. 나 자신에게 편안한 생활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를 이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하나의 ‘괴물’로 보니까, 나 자신도 그 괴물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괴물일 수밖에. 나는 무명(無明)에 빠져서 살고 있었다.


2007년 6월 어머니가 쓰러지신 후 모시는 것을 보며 주변에서는 나를 대단한 효자로 여긴다. 처음에는 몹시 어색했다. 그분 마음에 나만큼 괴로움을 많이 끼쳐드린 사람이 따로 없을 것 같은데. 자유로요양병원에 모셔놓고 매일 찾아뵈며 지내면서도 마음의 거리가 바로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자식으로서 도리 때문에 살펴드리는 것이지,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우러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2008년 봄 몹시 쇠약해지셔서 7월에 일산 시내 현대요양병원에 옮겨 모셔놓고 지내는 동안 내 마음에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 튜브피딩으로 연명하며 의식도 미약한 채로 무기력하게 누워계신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을 얽매고 있던 시비지심이 사그라진 것이다. 그러다가 11월 들어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시자 그저 기쁜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시병일기’를 쓰기 시작하게 되었다.



쓰기 시작하면서도 이 글쓰기의 의미가 어떻게 자라날지 별 생각이 없었다. 기능적인 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형에게 한 달에 한 번 정도씩 메일로 용태를 알려주고 있었는데, 회복이 시작되시니까 메일이 잦아졌다. 용태가 좋아지시니까 마음이 기쁘고, 같은 기쁨을 형에게도 일으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본성은 착한 사람이다.


형에게 메일이 잦아지다 보니 욕심이 더 났다. 형 외에도 어머니 소식을 가끔씩 전화나 메일로 전해드리던 분들이 있었다. 따로 글을 써서 여러 분께 메일에 첨부해서 보내기 시작한 것이 ‘시병일기’의 출발이었다.


어머니 회복이 상상 외로 순조로웠고, 그 반가운 소식에 내 기쁜 마음을 얹어서 보내드리니까 받는 분들이 모두 대환영이었다. 읽는 분들이 다들 좋아하시니까 더 많은 분들에게 읽히고 싶었다. 그래서 참여하고 있던 동호회 게시판에도 내 근황삼아 올리기 시작했더니 어머니를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감동을 느낀다는 분들이 있었다. 이 글이 쌓이면 책으로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때부터 들기 시작했다.


‘시병일기’를 시작하고 7개월이 지나 요양원으로 옮기실 무렵에는 이 글쓰기가 기능적 목적을 한참 넘어서서 하나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 있었다. 아니, ‘작업’이라기보다 내 ‘생활’의 핵심적 부분으로 자라나 내 ‘존재’를 뒷받침하는 요소가 되어 있었다.


‘작업’이라 함은 활동의 수단이라는 뜻이다. 그 전의 내 글쓰기는 그런 의미에서 작업이었다. 내 생각을 펴기 위해, 그리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는 일이었고, 많이 읽히지 않거나 돈이 안 된다면 그만둘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은... 어머니 관찰을 빙자하여 나 자신을 총체적으로, 그리고 심층적으로 관찰하는 일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썼다. 병원에 매일 가 뵐 때의 ‘시병일기’에 비해 열흘이나 보름마다 가 뵙는 요양원 ‘방문기’에는 어머니 모습의 묘사보다 내 생각을 더 많이 담게 되었다. 일반적 수필의 성격에 가까워진 것이다. 블로그에도 올려놓고 <월간 불광>에도 연재하면서 독자들과의 접촉면도 넓어졌다. 요양원으로 옮겨 모신 지 반년이 지나자 책으로 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어느 정도 굳어졌다.


자신감을 키우는 데 <월간 불광>의 인연이 역할이 컸다. 퇴직 후 어머니의 가장 큰 대외활동이 그 잡지의 수필 연재였다. 십여 년 연재를 묶어 수필집도 두 책 내셨다. <두메산골 앉은뱅이의 기원>과 <여든 살의 연꽃 한 송이>. 편집장 남동화 보살님이 요양원 방문기 연재를 청한 것은 어머니의 흔적을 아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모든 일에 기억이 희미하신 어머니도 이 잡지 기억만은 분명하신 듯, 내 글이 실린 것을 볼 때마다 무척 좋아하셨다.



지난 봄 책 낼 자신감이 아직 확실치 않을 때 서해문집과 마주쳤다. <프레시안>의 연재칼럼 <김기협의 페리스코프>를 책으로 묶어 낼 생각이 없었는데 서해문집에서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결과 생각지 못했던 기쁨을 얻었다.


그 책 머리말에서 어머니와의 관계 변화가 내 생활과 일에 변화를 가져온 곡절을 적었다. 그 책에 담긴 2009년의 글 중에 전과 달리 한 인간으로서 내 모습을 솔직히 드러낸 것이 꽤 있기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어머니와의 화해가 세상과의 화해, 나 자신과의 화해를 불러왔다는 생각이었다.


‘시병일기’도 자기네가 내고 싶다는 서해문집의 제안에 바로 응했다. 자신감이 아직 확실치 않은데도 응했던 것은 돈이 급하게 필요한 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회사와의 ‘좋은 인연’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다. 낼 생각도 없던 책을 만들어 바라지 않았던 기쁨을 선물한 출판사니까. 내가 자신감이 모자라도 그 좋은 인연이 때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서 8개월, 지금 책을 낼 수 있게 된 것은 서해문집 여러분 덕분이다. 내가 <망국의 역사>, <해방일기> 작업을 벅차게 벌여놓고 쩔쩔매고 있는 동안 편집을 맡은 송수남 님과 디자인을 맡은 홍XX 님이 내 대신 책의 방향을 잡아주었고, 김선정 주간과 김흥식 사장을 비롯한 다른 분들도 열렬한 응원으로 부족한 내 자신감을 메워주었다. 고맙다.



그 동안 생각만 해 온 일 하나를 일전에 결행했다.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에 “친생자관계존부확인의 소”를 제출한 것이다. 어머니가 원고고 내가 피고다.


1950년 2월 내가 태어날 때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신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전처와의 이혼 수속을 밟지 않은 상태였다. 제적등본을 보면 1950년 3월 19일에 두 분이 이혼 소속을 밟았고, 그 이튿날 어머니가 결혼신고와 함께 아버지 호적에 입적했다.


형들과 나는 아버지와 전처 사이에서 출생한 것으로 신고되어 있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동생만이 어머니 소생으로 나타나 있다. 어머니는 호적상 우리 3형제의 ‘계모’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어머니 이름으로 제출한 소는 나를 가리키며 “저 녀석이 내가 낳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시오.”하는 취지이고, 내 이름으로는 “그 말씀이 옳으니 확인해 드리세요.” 하는 취지의 ‘청구인락서’를 붙여서 제출했다. 내 ‘엄마 찾기’ 작업이 법률적 의미까지 갖추게 된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본질을 중시하라는 가르침을 어머니에게 받으며 자라났다. 호적이 사실과 다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바로잡기 위해 애쓸 필요를 느끼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생각이 달라졌다. 형식도 본질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무엇이 본질인가를 내 주관으로 판단하는 것이니, 본질에 대한 집착은 내 주관에 대한 집착이 되기 쉽다. 독선과 독단으로 나아가는 ‘근본주의자’의 길이 되기 쉽다. 본질을 중시하되, 그 때문에 형식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머니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 지는 여쭤보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하지 않으실 것을 믿기 때문에 소를 제출한 것이다. 몇 해 전 같으면 반대하셨을 것 같다. “기왕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억지로 손댈 필요가 뭐 있느냐? 우리가 서로를 어미로 인정하고 아들로 인정하는 본질만 지키면 되는 것이지.” 하고. 그러나 지금은 어떤 일인지 알아듣게 말씀드리면 “그것 참 고맙구나.” 흐뭇한 웃음을 지으실 것이다.



내가 5년 전까지는 불효자였는가? 지금은 효자가 되어 있는가? 뒤의 질문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도 앞의 질문에는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생각해 왔다. 내가 불효자가 아니라면 세상에 불효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진심으로 어머니를 미워했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이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지금 어머니를 몹시 좋아하고 아낀다. 내 능력이 모자라 효자 노릇을 충분히 못하는 점은 있을지라도, 내 ‘본심(本心)’은 효자의 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본심’이란 것이 바뀔 수 있는 것인가? 어째서 그 ‘본심’이 미움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따지다 보니 어머니에 대한 내 생각과 감정이 바로 어머니의 당신 자신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투영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도 당신 자신이 미웠던 것이다.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에만 빠져서 살아오신 것은 아니라도, 스스로를 납득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 면을 놓고 당신 자신을 벌하기 위해 자식들 중 마음이 어두운 놈을 골라 채찍을 맡기신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선택하신 형리(刑吏)였다.


괴이한 생각이다. 그러나 한 번 떠올리고 보니 다르게 볼 수가 없다. 나를 형리로 선택한 사실을 당신 스스로 의식 못 하셨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께 자책의 마음이 있었고, 내 혓바닥이 그 고통을 더욱 예리하게 하는 채찍 노릇을 한 것은 사실이다.


이 미움으로 어머니도 나도 많은 고통을 겪었다. 지금 어머니에 대한 내 사랑이 실체를 가진 것은 함께 겪은 고통이 깔려 있는 바탕 덕분이다. 그러고 보면 나 자신을 불효자로 생각하던 시절에도 내 마음은 어머니 마음과 굳게 맺어져 있었던 것이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를 버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때도 나는 효자였다. 적어도 지금보다 덜하지 않은 효자였다.


모르는 분들에게 읽어달라고 책으로 내면서 이것 하나만은 꼭 강조하고 싶다. 가까운 사람끼리는 즐거움만이 아니라 괴로움도 함께 나눈다는 사실. 운명이 주는 괴로움은 아끼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가장 예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운명에 대한 원망이 아끼는 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모습을 바꿔서 나타나기 쉬운 것이다. 어떤 고통 앞에서도 주어진 인연을 등지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서 나 자신을 지키는 길이다.



어머니가 힘든 운명 앞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오늘의 편안함에 이르도록 자식들보다도 더 큰 도움을 드린 여러분께 이 책을 바친다. 본문 중에도 나타난 친구, 제자, 친척 분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22년 전 돌아가신 큰고모님께 사무치게 고마움을 느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