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미 국무성 내 친일파, 조선공산주의 지원자 제거 전문 타전”

李承晩은 19일 UP통신사를 통하여 미국 국무성에 대한 장문의 권고문을 타전하였는데 미묘한 국내정국에 비추어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아서 귀추가 주목된다. 조선에 있어서 공산주의자의 활동만 보더라도 자유를 사랑하는 아메리카국민의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미국 국무성은 일찍이 일본인과 친일파의 영사, 대사, 선교사의 왜곡된 보고에 의하여 극동정책을 썼기 때문에 진주만의 불상사를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들 친일파 외교관을 외무성에 남기어 둠은 부당한 일이다. 동시에 미국 국무성 중에 조선의 공산주의자를 지원하는 자가 있음도 국무성 내에 그러한 보도기관과 아울러 殘置한 까닭이다. 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중앙신문> 1945년 12월 25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 주 휠링의 한 여성 공화당원 모임에서 연설 중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여기에 205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공산당 당원이라는 사실을 국무장관이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국무성 안에서 일하며 정책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매카시 광풍(狂風)의 출발점이었다.


“공산당원 국무성 관리 205명!” 충격적인 발언이었기 때문에 얼마 전 의회 출입기자단에서 ‘최악의 현역 상원의원’으로 뽑혔던 매카시가 ‘가장 영향력이 큰 미국인’의 하나로 뜰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충격적 발언은 ‘뻥’이었다.


205명 명단 내용을 매카시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 숫자의 유래만이 밝혀졌다. 1946년에 번즈 당시 국무장관이 새버스 하원의원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국무성의 내부감사 결과 “채용에 적절치 않다”고 판명된 사람이 284명이며 그중 79명이 해임되었다고 밝힌 일이 있었다. 그래서 205명이 해임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4년 후 매카시가 명단을 들먹인 시점에서는 그중 65명만이 엄격한 추가 조사를 거친 후 남아 있었다. 205명 중 140명은 이미 국무성을 떠나 있었고, 65명은 의심할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매카시는 거짓말 잘하는 사람으로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던 사람이었다. 문제는 이런 ‘뻥’이 먹혀들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 대중은 마녀사냥을 원하고 있었고, 매카시는 대중이 원하는 일을 앞장서서 한 것뿐이었다.


왜 미국 대중은 마녀사냥을 원하고 있었던가? 공산주의의 위협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많이 통용된다. 동유럽의 공산블록 형성, 중국의 공산화, 그리고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이 구체적 요인으로 거론된다.


나는 1949년 8월 29일 폭발 실험에 성공한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1945년 7월 17일 폭발 실험 성공으로 이룩한 미국의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 위상이 무너진 것이다. 그 4년간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는 절정에 올라 있었다. 미국이 정의와 권력의 절대적 중심지라는 믿음 아래 전 세계를 깔보며 냉전체제를 출범시켰다.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이 반세기에 걸친 냉전시대를 몰고 오리라고 생각한 미국인은 없었다. 몇 년이면 공산국가들을 모두 굴복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로 ‘지존’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 것이었다. 미국 예외주의는 집단적 특권의식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는 것처럼 특권에 대한 위협은 ‘반동’적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미국 사회가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에 집체적으로 반동적 반응을 일으킨 것이 매카시즘이었다. “우리의 특권이 위험에 처했다! 누구 책임인가? 그놈들을 처단해서 더 이상의 위험을 막아야겠다!” 여기에는 논리고 나발이고 없다. 증거고 나발이고 없다.


이승만은 매카시보다 4년 이상 앞서서 미 국무성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이미 1945년부터 매카시의 선구자들이 국무성을 공격의 과녁으로 삼고 있었고, 이승만은 그 대열 속에 있었던 것이다. 왜 국무성이 당시 반공-반소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어 있었을까?


제임스 번즈(1882-1972) 장관의 존재 때문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협력자 번즈는 1944년 선거에서 루즈벨트의 당연한 러닝메이트로 여겨졌지만 강한 정치적 입장 때문에 반대파가 많아서 무난한 인물로 트루먼이 선택되었다. 트루먼은 상원의원 때 번즈의 추종자였고, 대통령이 된 직후에도 번즈에게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보이며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대통령이 될 때까지 맨해튼 프로젝트(원자폭탄 개발사업)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트루먼에게 그 사업의 존재를 알려준 것도 번즈였다.


1947년 3월 12일 의회 연설에서 천명된 ‘트루먼 독트린’은 국제 협력을 중시하는 루즈벨트의 다변주의 노선을 2년간에 걸쳐 꾸준히 뒤집어놓은 결과였다. 그 동안 다변주의 노선 수호파의 구심점이 번즈 국무장관이었고, 트루먼과 번즈 사이의 관계는 꾸준히 악화되었다. 트루먼이 번즈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 1945년 12월 모스크바 외상회의 때였고, 번즈는 트루먼 독트린 발표를 앞둔 1947년 1월에 사임했다.


그렇다고 번즈가 루즈벨트 수준의 친소 노선을 고집한 것도 아니었다. 1946년 내내 진행된 이란 사태와 관련해 번즈는 소련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유럽에 대한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1946년 9월 슈투트가르트에서 ‘희망의 연설’로 마셜 플랜의 방향을 예고하기도 했다.


다만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 정권을 지원하던 영국이 재정 한계로 미국에게 역할 인계를 요청했을 때 적극적 태도를 보이지 않은 것이 트루먼의 불만이었다. 트루먼 독트린은 그리스와 터키 개입 정책으로 출범한 것이었다.


그리스와 터키 개입 정책의 논거가 ‘도미노 이론’이었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연쇄적으로 무너진다”는 이 이론은 위기를 과장하는 수법으로 극단파에게 애용되는 것이다. 드러난 도발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응하되 국제 협력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과응 대응을 자제한다는 다변주의 노선이 이로써 폐기된 것이었다.


일방주의 노선의 트루먼 독트린은 극도의 오만에 이른 미국 예외주의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경제적 번영과 함께 이 오만을 뒷받침한 것이 군사적 절대 우위를 보장하는 핵무기 독점이었다. 이란, 그리스, 터키에서 소련이 미국의 강경한 입장에 굴복한 것도 원자폭탄 덕분이라고 미국인들은 믿었다. 1949년 8월 그 독점이 깨어진 데 대한 히스테리 반응이 매카시즘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매카시의 휠링 연설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상원에서 바로 외교위원회 소위원회에서 청문회를 열었다. 청문회를 이끈 밀러드 타이딩스를 비롯해 다수당인 민주당 의원들은 매카시에게 강한 반감과 경멸감을 품고 있었다. 타이딩스 청문회가 끝난 후 그 보고서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었다. “이 주장에 담긴 허위와 악의는 미국 사회를 혼란과 분열에 몰아넣고 (...) 공산주의자들 자신도 이 정도의 해악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당 의원들의 주장일 뿐이었고, 공화당에서는 이런 주장까지 나왔다. “(타이딩스 위원회는) 반역 음모에 대한 우리 역사상 가장 뻔뻔스러운 은폐 작업이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매카시를 사이에 놓고 조금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면 민심은? 압도적으로 매카시의 편이었다. 1950년 말의 상원의원 선거에서 매카시는 타이딩스를 비롯해 민주당 주요 후보들과 맞서는 몇몇 공화당 후보들을 지원했고, 전원 승리했다. 공화당이 상원의 다수당이 되었고 매카시는 공화당의 영웅이 되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미국 예외주의에 입각한 트루먼 독트린으로 냉전체제에 돌입했지만, 매카시를 앞세운 공화당은 이에 만족하지 않는 미국 대중의 민심을 등에 업고 정부를 공격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매카시는 ‘선거의 제왕’ 위세를 뽐내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매카시에 대한 혐오감을 별로 감추지 않았지만 매카시와 정면충돌을 삼갔기 때문에 매카시를 겁내는 것 아니냐는 핀잔도 많이 받았다. 사석에서 그런 핀잔에 이런 말로 응수했다고 한다. “그런 놈이랑 같은 시궁창에서 뒹굴 만큼 타락하고 싶지는 않아.” “대통령이 손수 비난하고 나서면 자기 격이 높아진다고 그놈이 너무 좋아하지 않을까?”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의 군사적 모험주의 억제 노력은 많은 평론가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마이클 셰리는 <전쟁의 그림자 속에(In the Shadow of War)>에서 원자폭탄의 한국전쟁 사용 제안에 “그 끔찍한 물건을? 자네들 제 정신인가!” 펄쩍 뛴 아이젠하워를 피그 만 사건을 일으킨 케네디와 대비하며 직업군인이 민간인보다 전쟁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군 미필자들이 대북 강경책에 목청높이는 한국 상황에도 참고가 되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존 케네디는 민주당 의원으로는 이례적으로 매카시와 좋은 사이였다. 그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매카시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매카시는 1957년 5월 2일 48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상원의원 직에 있었지만, 그 정치적 영향력은 1954년 12월 2일 상원의 징계 결의를 계기로 소멸했다. 67 대 22의 징계 결의에서 민주당은 전원 찬성했고 공화당은 반반이었다. 그 후 그가 발언할 때는 다른 의원들이 퇴장하거나 듣지 않는 시늉을 하는 것이 상원의 풍속이 되었다. 아이젠하워도 속이 시원했던지, ‘매카시즘(McCarthyism)’이란 말을 대신할 ‘매카시워즘(McCarthywasm)’이란 말까지 만들어냈다고 한다.


매카시의 몰락은 1954년 봄부터 시작되었다. 결정적 악재는 자기 보좌관의 한 사병 친구를 특별대우 하도록 육군에 부당한 압력을 가한 혐의였다. 이 의혹을 조사하는 청문회는 몇 주일 동안 텔레비전 생중계되었고, 그 동안 그의 지지율은 50%에서 34%로 떨어졌다.


매카시 몰락의 더 중요한 원인은 그 시점까지 한국전쟁을 통해 군사적 모험주의의 문제점이 드러남으로써 미국 대중의 환상이 깨어졌다는 데 있다. 1954년 3월 9일 <See It Now>라는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방영을 매카시 몰락의 출발점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매카시의 선동적 연설 중 혐오스럽고 억지스러운 부분을 모아 방영한 다음 진행자 에드워드 머로우가 이런 논평을 붙였다고 한다.


“그가 한 가장 큰일은 대중의 마음을 혼란시킨 것이다. 공산주의의 외부로부터의 위협과 내부로부터의 위협 사이의 혼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비판과 반역을 헷갈려서는 안 된다. 비난이 곧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판결은 증거와 정당한 법적 절차 위에 이뤄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로서로를 두려워하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신조를 깊이 파헤쳐보고 우리가 겁쟁이 조상들의 자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두려움에 몰려 이성 상실의 시대에 빠져들 수는 없을 것이다. (...)

우리는 세계 모든 곳에서 자유의 수호자를 자임하며,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를 밖에서 지키기 위해 안에서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위스콘신 출신 상원의원의 행동은 해외의 우리 동맹자들에게는 경각심과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고 우리 적들에게는 안도감을 심어주었다. 그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그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공포심의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공포심의 상황을 이용한 것일 뿐이다. 상당히 잘 이용해 먹은 것이기는 하지만.”


1952년 말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주한미군을 방문한 아이젠하워는 한국 대통령을 만나지 않고 돌아갔다. 그가 같은 시궁창에서 뒹굴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이 매카시 외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한국 대통령이 7년 전 미 국무성에 어떤 전문을 보낸 사람인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