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17. 11:12



토요일(11월 20일) 세 시 조금 안 되어 원장님 전화가 왔다. 어머니께 미령한 기색이 있어서 병원에 모시려 한다고. 일전부터 조금 안 좋은 기색이 있었는데, 오늘 점심 후 바람을 쏘이다가 오한을 일으키고, 방에 모셔놓은 뒤에 구토까지 하셨다고 한다.


가까이 있지 못하니 이런 때 참 난감하다. 전화 설명으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연세가 연세이신 만큼 조그만 이상도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출발 준비를 하며 형에게 전화하니 안 받는다. 만일의 경우 도움이 필요한 연식에게 전화해 전화를 끄지 말고 있도록 부탁해 놓고 병원으로 향했다.


여섯 시경 이천병원 응급실에 도착하니 태평한 모습으로 누워계신다. 마음 놓을 만큼 호전되셨다는 원장님 전화를 고속도로 위에서 받았지만 저렇게 평안한 기색이실 줄은 생각 밖이다. 17개월 만에 요양원의 익숙하고 쾌적한 환경을 떠나 응급실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놓여 있으면 몸의 불편은 없어도 마음의 불편은 있으실 것 같은데.


응급실 의사가 설명해 준다. 병원 오신 후 관찰로 별 문제 없으신 것 같고, 혈액검사 결과는 월요일에 나올 것이며 소변검사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크게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오신 김에 며칠 계시면서 혈액검사 결과와 함께 전문의 진찰을 받으시는 것이 좋겠다고 권한다.


병실에 모셔놓고 갈등에 빠졌다. 모처럼 병원 오셨는데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요즘 일이 너무 빡빡하다. 작업시간만 아쉬운 것이 아니라 두어 날 객지에서 지내다가는 건강 유지가 자신 없다. 아내는 자기가 남아 돌봐드릴 테니 나 혼자 돌아가 할 일 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두 사람 다 골병들겠다.


병실에 자리 잡으시자 아무래도 기력이 달리시는 듯 금세 잠이 드셨다. 요양원으로 가서 원장님과 의논했다. 병원에 요양원 사람을 붙여드릴 수는 없어도 이사장님 이하 여러 분이 틈틈이 찾아뵐 것이니 마음 놓고 돌아가라고 한다. 혹시 필요할 것 같으면 내일 다시 오도록 연락을 줄 것이고, 괜찮을 것 같으면 월요일 진찰 받으실 때 오라고.


아내가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은 병실 간병인들이 미덥지 못해서다. 간병인이 배치되어 있는 병실이 몇 있는데 요양병원 중환자실과 대충 비슷한 조건이다. 전에 계시던 요양병원보다 조금 못한 환경인 데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갔을 때 우두머리로 보이는 간병인의 안내가 좀 투박했다. 전에 요양병원 간병인들에게 늘 최고의 특별대우를 받으시던 데 익숙해져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데 한계가 있다”고 간병인의 책임 한계부터 강조하는 것이 좀 불안스럽게 들리기는 한다.


그런데 간병인들끼리 자기네 얘기 나누는 것이 잠깐 귀에 들어왔는데, 동료끼리 서로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어려운 쪽을 얼렁뚱땅 감추려 들지 않고 앞세워 얘기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못내 미심쩍어 하는 아내를 다독여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이 착잡하기는 했다. 건강에 큰 위험 같지는 않고, 간병인들 태도도 그만하면 마음이 놓인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너무 심심해하지나 않으실까 하는 것이다. 2년간 요양병원 계실 때 거의 매일 찾아뵌 것은 심심하지 않게 해드리기 위해서였다. 요양원 가시고는 우리가 놀아드리지 않아도 재미있게 잘 지내셨다. 그런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이틀이나 지내는 것을 너무 힘들어하지나 않으실까?


마음에 아무리 걸려도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을 거듭거듭 다졌다. 돌아오지 않으면 벌여놓은 일에 타격이 크다. 설령 어머니가 좀 힘들어하시더라도 이 일 망가지는 것에 비하면 작은 일이다. 할 일 제대로 못하는 것은 어머니께도 더욱 면목 없는 일이다.


요양원에서 이사장님 이하 여러분들이 일요일 내내 수시로 병원에 들러서 어머니 상태를 알려준 덕분에 하루 종일 책상머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이틀 치 원고를 일요일 중에 써놓고 월요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향했다.


진찰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약간의 문제가 있지만 큰 위협은 없고, 지금 연세에 적극적 치료를 시도할 필요는 없다는 것.


그런데 예상과 다른 것은 어머니의 병실생활 모습이었다. 벌써 팬들을 확보해 놓으신 것이었다. 간병인들만이 아니라 옆자리 노인들까지 어머니가 입을 떼실 때마다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지루한 병실생활에 청량제를 찾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뭐든 투덜거리다가 쌍욕 한 마디 뱉으실 때마다 여기저기서 킥킥 웃음이 터져 나왔다.


토요일 밤에 있던 우두머리 간병인이 또 근무 중이었다. 그 무뚝뚝하던 얼굴에 가득 웃음을 피우며 어머니가 이틀 동안 어떻게 지내셨다는 얘기를 시시콜콜 해준다. 필요한 일이 생기면 갔다가 얼른 돌아와 얘기를 계속한다. 그 얘기 하는 것 자체가 이분에게 즐거움이다. 쇠약한 몸으로 아는 사람 없는 병실에 누워서도 기질을 있는 그대로 발휘하신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점심 전에 요양원으로 도로 모셔왔다. 여러 노인들이 어머니 맞이하는 모습에서 어머니의 못 말리는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함께 지내던 사람이 병원으로 갔다 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을 것이다. 돌아오는 사람을 보는 그 자체가 반가운 일이겠지만, 어머니 환영은 그 정도를 넘어선다고 느끼는 것이 내 주관적인 감각만은 아닐 것이다.


그 환영 분위기 속에서 두드러진 것이 어머니의 덤덤한 태도였다.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왔는데 뭐 그렇게 호들갑이냐는 듯, 말수도 적고 목소리도 높이지 않으신다. 송나라 범중엄이 선비의 자세를 말한 글귀가 생각나는 절제 있는 태도시다. “천하의 걱정을 앞장서서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뒷전에서 누리는 것, 그것이 선비다.”


2년 전 ‘시병일기’로 시작한 ‘어머니 관찰기’를 이제 거둬야겠다고 얼마 전부터 생각하다가 지난 번(11월 12일) 다녀온 뒤 마무리 꼭지로 생각하고 썼는데, 한 차례 더 쓰게 되었다. 이번 병원 방문 소감이 그동안의 기록을 마무리하기에 너무 안성맞춤으로 느껴진다.


어머니의 생활이 극도로 위축된 상태에서 내가 어머니의 모습을 글로 적은 것은 보호자 입장에서였다. 회복 초기에는 내 글에 어머니의 모습 거의 전체가 담겼다. 그런데 어머니의 생활이 자라나면서 내가 그릴 수 있는 폭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고, 요양원 옮기신 뒤로는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어머니의 인간관계 속에서 내가 차지하는 비중도 마찬가지로 줄어들어 왔다.


그런데 이번 병원에 다녀오시는 것을 보며 어머니의 생활이 어떤 차원으로 자라난 것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 인식은 평면적 확장에 머물러 있었다. 요양병원 시절 어머니의 인간관계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던 것에 비해 요양원에 가셔서는 “야! 열 배도 더 늘어나신 것 같다!” 하는 정도의 인식이었다.


그런데 이번 이천병원에서는 곁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상황을 17개월 만에 겪으면서 생판 모르던 사람들에게 당신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새로운 관계를 또 만드신 것이었다. 이것은 관계의 평면적 확장이 아니다. 인연이 닿는 사람 누구와도 관계를 만들고 키우는 ‘인간’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이다. 열 배, 백 배로 헤아릴 수 없는 무한대 확장이다.


몸 움직임도 기억력도 ‘정상인’과 다른 심한 제약 속에서 이렇게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일견 놀랍지만, 다시 생각하면 ‘정상인’이라 해서 몸 움직임이나 기억력이 완전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너도 나도 다 나름대로의 제약 속에서 사람 노릇 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며 살아가는 것이다. 어머니가 지금 주변에 즐거움을 나눠주며 살아가시는 것은 무슨 유별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집착을 벗어나 마음이 편안하신 덕분이다.


갓난아이 때부터 어머니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르침 속에 자라났지만 그 가르침을 싫어한 때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 쇠약해진 어머니께 다시 가르침을 얻으며 예전보다 더 큰 ‘힘’을 느낀다는 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집착의 냄새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사의 마음’을 옛날에도 많이 강조하셨지만, 그때는 마음 한쪽으로 “어머니나 잘하세요.” 하는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감사의 마음이 저렇게 편안하신 것을 보고 배울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적은 일이다. 어머니가 말끝마다 “고맙다.”를 붙이시기에 “어머니 뱃속에 고마운 마음이 가득 차 있나 봐요. 건드리기만 해도 ‘고맙다.’ 소리가 나오시는 걸 보니.” 우스개라고 던졌을 때 “그래, 그게 똥만 가득 찬 것보다 낫지 않냐?” 맞받아치시는 바람에 뒤집어진 일이 있다. 바로 그런 식이다. 가르쳐야겠다는 집착도 없이, 그냥 가르쳐지시는 것이다. 고마운 마음으로 가득한 분의 편안한 모습 그 자체가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어머니에 관한 글을 다시 쓰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또 쓰게 될 거다. 그러나 지난 2년간 쓰던 것과는 다른 자세로 쓰게 될 것이다. 2년간 적은 글은 어머니의 ‘인생 강의’를 받아쓴 노트인 셈이다. 이제 노트 필기는 접어놓고, 어머니 얼굴만 기분 좋게 쳐다보며 지내겠다. 언젠가 다음 과목 노트필기를 시작하게 되겠지만, 서두르지는 않겠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서, 선생님! / 이문숙 (제자, 목사)  (0) 2010.12.28
"엄마 찾아 60년"  (4) 2010.12.26
10. 11. 12  (3) 2010.11.13
[사진] 늦은 가을, 늦은 오후  (2) 2010.11.01
[사진] 10. 10. 14 / 식탁에서  (2) 2010.10.24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