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한 열흘 계속해서 12시간 근무를 하는 중에 하루 겨우 쉬는 날인데, 나는 오늘 아니면 또 여러 날 어머니 가 뵙기 힘들다. 혼자 다녀오려는데, 자기는 두 달 가까이 뵙지 못했다고 따라 나서 준다. 좀 쉬어야 하지 않냐 했더니 자기한테 운전만 시키지 않으면 된다고.
마침 볕이 좋고 포근하기에 현관 앞 테라스에 모시고 나와 한 시간 가량 앉아 있었다. 직접 닿는 햇볕과 바람을 정말 좋아하신다. 순간순간을 즐기시는 기색이 역력하다. 말씀도 많이 안 하신다. 햇볕과 바람의 미묘한 변화에 따라 표정의 섬세한 변화를 일으키다가 한 마디씩 불쑥 꺼내거나 드리는 말씀에 대꾸하실 때는 말한다는 행위 자체도 즐거움으로 누리시는 듯하다.
잠깐 구름 끝자락이 해를 가렸을 때, “햇볕이 들어갔네요. 선선하지 않으세요? 이제 들어가실까요?” 했더니 “괜찮다. 이건 이것대로 좋구나.” 하며 편안한 웃음이 얼굴에 넘치신다. 해가 좀 기울고 나서 모시고 홀에 들어오니 텔레비전에 국악 공연이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편안하게 구경하신다. “저게 어디냐?” 한 차례 물으시기에 “비원 같네요.”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관람을 즐기신다.
잠시 후 아내가 좀 쉬라고 권하기에 어머니 침대에 잠깐 눕는다고 누웠는데, 아내가 깨워 일어나 보니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되었다. 식탁에 앉아 계신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나왔다. 오늘은 모시고 앉은 시간이 너무 짧아서인지 조금 서운한 기색을 보이셨지만, 나도 좀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눈 딱 감고 서둘러 떠났다. 아내도 나도 휴식이 필요하다.
너무 큰일을 벌여 놨다. <<프레시안>>에 <해방일기> 연재를 시작한 지 4개월째인데, 어떤 식으로 써 나갈지 아직도 생각할 점이 많다. 앞으로도 두 달 정도는 전력을 집중해야 좀 편안하게 일을 해나갈 틀이 잡힐 것 같다.
이곳에 모셔놓고 16개월간 찾아뵐 때마다 방문기를 적던 습관이 한 달 전에 끊어졌다. 10월 14일과 11월 3일 방문기를 쓰지 못했다. 책으로 묶어 낼 방침을 세운 것 때문에 생각이 복잡한 것도 한 이유지만, 더 큰 이유는 기력이 달리는 것이다. 만족스럽게 글을 풀어낼 만한 시간이 하루에 몇 시간 안 된다. 기운이 모자라면 문장 하나하나가 꼬여버린다.
정말로 제일 큰 이유는 방문기를 적을 동기가 이제 전처럼 절실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닐까? 2년 전 병원 계실 때 ‘시병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예상외의 회복 기미를 보이시는 데 고무되어 미국의 형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에게 어머니 모습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였다. 그 후 어머니께서 보여주시는 놀라운 회복에 찬탄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 왔다. 출판 방침을 세우고 글을 모아보니 원고지 1,300매 분량이나 된다.
‘일기’는 우리 집 전통이 되었다. 아버지 전쟁일기가 <역사앞에서>로 출간되어 널리 알려졌지만, 어머니 ‘육아일기’도 오래 전에 조금 본 기억으로 가치가 큰 기록 같은데 쓰러지신 후 소지품 정리하면서 찾지 못했다. 내 ‘시병일기’가 그 전통을 잇는 셈인데, 게다가 역사평론 작업까지 <해방일기>란 이름으로 하고 있다.
‘일기’란 것이 원래 제 일기 자기가 쓰는 것인데, 육아일기는 아이들 일기를 어머니가 써주는 셈이고, 시병일기는 어버이 일기를 자식이 써드리는 셈이다. 독립된 삶을 살지 못하는 상대를 보살펴주면서 적는 기록이다. 아버지 전쟁일기도 그분 개인의 일기가 아니라 이 사회를 위한 기록이었는데, 전란에 휩쓸려 사회의 올바른 기록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나서서 적으신 것이었다.
학교 들어가 자기 친구들과 어울려 자기 인생 사는 아이의 육아일기를 어머니가 써준다는 것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다. 시병일기도 어머니가 독립적인 생활을 못하시는 상황에서 적던 것이다. 요양원 가셔서도 생활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시병일기 쓰던 습관을 이어서 방문기를 계속 써 왔는데, 요즘 들어서는 좀 실없는 짓이란 느낌이 든다.
요즘도 어머니 모시고 있는 시간이 즐겁고 재미있다. 삶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많이 확인받을 수 있고, 더러 새로운 깨우침도 얻는다. 그러면 됐지, 그걸 적어서 뭘 하나. 그분은 이제 내가 대변해 드리지 않아도 당신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며 지내신다. 어머니 상황이 궁금하면 내 글 읽을 필요 없이 찾아가 뵈면 되고, 잘 아는 분들 같으면 전화만 드려도 된다.
2008년 11월 24일 시병일기를 시작하던 첫 대목을 다시 들여다본다.
“며칠 전부터 정신이 많이 맑아지신 것 같다. 영양상태, 혈액순환 등 건강의 기본조건이 안정되신 덕분인 것 같다. 그러나 큰 회복을 바랄 일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두 달 되었나? MRI 뇌 촬영을 한 후 한 선생도 ‘뇌가 쪼그라드신다’는 표현으로, 뇌 세포의 신진대사가 거의 막힌 본격적 노쇠현상이니 이제 더 다른 검사를 해 드릴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 체념을 권했었다.
그래도 좋아지신 상태가 1주일 가까이 유지되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서너 달 동안 사람 못 알아보시는 것은 물론, 주변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는 상태를 반시간도 유지하지 못하시던 분이 눈알을 또록또록 움직이시고, 주변의 배려를 느낄 때는 입술을 오므려 웃음도 띠신다.”
그 시점에서 나는 어머니가 당신 인생을 다시 누리게 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떠나실 날을 앞두고 괴로움이 덜하신 것, 조금이나마 마음을 표현하실 수 있는 것이 고맙고 반가울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침대와 휠체어를 떠나지 못하면서도 주변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베풀어주며 지내고 계시다. 세종너싱홈 직원들의 억지 공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든 어머니 얼굴을 몇 초만 바라보면 알 수 있다.
생각하면, 떠날 날을 앞두지 않고 있는 인생이 어디 있겠나. 물이 절반 담긴 그릇을 보며 “절반 밖에 없군!” 할 수도 있고 “절반이나 있네!” 할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떠날 날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 못할 때 “언제고 만회할 길이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곤 했었다. 수십 년 동안 불효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떠나실 날 앞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됐다.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게 되면서 다른 일도 생활도 정성껏 하게 되었다. 어머니만이 아니라 나 자신도 떠날 날 앞두고 있음을 깨우친 것이다. 청개구리 중에도 이 미련한 청개구리 깨우쳐주느라고,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머니.
늘 좋아하시는 이 노래 오늘 불러드릴 때는 아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송아지, 송아지, 멍청송아지
엄마소도 멍청소, 엄마 닮았네.
강아지, 강아지, 신통강아지
엄마개도 신통개, 엄마 닮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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