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덕 선생님을 일 년에 한 번 정도나마 뵙던 일도 대학 졸업 후 십년 여 지나면서 여의치 않게 되었다. 선생님은 주로 절에 머무시거나 지방에 계셨고 나는 직업 기독교인으로 종로 한복판을 생활무대로 분주하게 지내다 보니 접촉점이 없어졌다. 그래도 바람결엔 듯 선생님 소식을 간간히 접했다. 1995년 여름엔가 전남 광주에 볼일 있어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곡성 태안사를 들른 것도 그 즈음 누군가를 통해 선생님께서 거기 계시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이 십 년은 더 됐고 뵌 지는 십 수 년 지났을 때였다.


태초같이 깊고 적막한 숲 속 길을 걸어가다 만난 한 스님에게 이남덕 선생님에 대해 물으니 방금 대웅전에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다. 스님 말대로 선생님은 법당 안 왼편 문 쪽에 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앉아 계셨다. 기도삼매에 드신 듯 다가서서 기척을 내도 미동조차 않으셨다. 지나가는 바람도 선생님을 흔들기는커녕 그 앞에서 멎거나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기도 마치실 때까지 기다리자’ 생각하고 숲 그늘에 물러나 앉아 있었지만, 한 시간이 족히 지났는데도 선생님은 그림처럼 요지부동이셨다. 나는 다녀간다는 쪽지만 선생님 곁에 가만히 놓고 돌아왔다.


아쉬움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제자는 이렇게 스승의 뒷모습을 보는 자일 거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본 선생님 뒷모습들이 떠올랐다. 대학시절 명륜동 선생님 댁에 가면 근처 산을 함께 오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선생님 뒤에서 발뒤꿈치를 보며 걸었다. 나란히 걷지 못한 것은 선생님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산행에 이력이 나신 선생님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였다. 나는 힘이 펄펄 나야 할 20대 초반이었는데.



숨이 멎을 듯한 강렬한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에서 멀어졌던 이남덕 선생님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거동 못하는 치매노인으로. 연초 근대사와 관련된 글들을 인터넷에서 찾던 중 김기협 선생님의 글을 읽게 되었고 이러구러 이분의 블로그에까지 들어갔다가 <시병일기>속에서 이남덕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을 한동안 깡그리 잊은 듯 지냈으면서, 마치 주야장창 기다리고 그리워했던 양 반갑다 못해 가슴이 쿵쿵 뛰었다. 불현듯 선생님을 만나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져 나는 곧장 김기협 선생님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했고 며칠 후 김 선생님과 함께 이천요양원을 찾았다.



“선생님, 저 문숙이예요. 이문숙!”


“내가 기억을 못해요.”


내가 선생님을 만난 기간은 선생님의 연세 56세때부터 한 10년 여 동안이다. 통상 기억력이 급격히 쇠퇴할 시기의 일이니 선생님께서 날 기억 못하실 것은 각오했다. 그래도 한 10년 사귄 사람을 감쪽같이 망각의 주름 속에 접어두시다니, 게다가 미안한 빛도 당황하는 빛도 없으시다니. 당연히 그러실 줄 알았으면서도, 잠깐 가슴이 휑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과거가 사라져 선생님에게 초면이나 한 가지인 나를 선생님은 노랫가락으로 맞으셨다. 당신이 ‘기억을 못 한다’는 뚜렷한 현실인식이 있으시니까 상대와 소통하기 위해 조율을 하시는 건가 했는데, 그 날은 헤어질 때까지 노래로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이 제자를 깡그리 망각의 강에 흘리셨으면서도, 그 옛날 연구실과 댁 안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명쾌하고 절묘하게 대화를 이어가시고, 직설법과 에두르는 말과 유머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즐기셨다. 아드님의 글에서 병중에도 엽렵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뵈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소리쳐 여쭈고 싶을 정도였다. “선생님 치매 맞으세요?”


치매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치매노인 앞에서 무력하고 황폐해진 가족들을 종종 접해온 터라 ‘치매’하면 ‘절망’과 한 짝으로 떠오른다. 치매에 걸리셨다는 선생님을 처음 뵙고 정신없이 탄성을 지르고 웃어대며 나는 치매란 단어가 무턱대고 어둠을 가리키게 놔두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과의 새로운 만남이 어디로 인도될지 궁금하고 기대됐지만 4월 말에야 두 번째로 찾아뵈었다. 이번에는 옛날이야기를 들춰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난번엔 옛날 얘기 꺼냈다가 당신이 기억 못하시면 마음이 불편해지실까봐 삼갔는데, 돌이켜보니 어쭙잖게 선생님을 배려했던 것 같았다. 선생님은 이미 기억 여부에 연연하시지 않는데 내 쪽에서 선생님을 자유롭게 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사시 <단군탄생> 쓰신 일을 말씀드리니, “그걸 네가 알고 있었냐” 하시고, 어원연구에 힘쓰신 일을 말하니까 반색하시며, “그것만 하고 살았는데 모르겠냐”신다. 나와 관련된 일들은 전혀 기억 못하셨다. 휴학하겠다며 빌빌거릴 때 다독여 앉혀 주신 일, 댁에서 함께 지압 받던 일, 아기 낳을 때 자연분만 하라고 주치의를 바꿔 주신 일, 그 날 걸치고 간 스카프가 선생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 등등을 줄줄이 늘어놓았지만 하나도 못 건졌다. 그런데 이렇게 주섬주섬 과거사를 꺼내놓자 “너는 깍쟁이였구나!” “내가 정말 그랬단 말이야?” “우리가 가까웠는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안 찾아왔어?” 하시며 호기심과 흥미를 보이셨다. 이야기 하나마다 선생님 안의 등불이 하나씩 켜졌다.



환해지신 선생님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나 곡을 모르셔도 쿵짜자작작 추임새를 넣으시고 손으로 배를 두드리시며 좋아하시니 뽕짝에서 동요, 가곡까지 쉬지 않고 불렀다. 주로 내가 부르고 선생님은 가사를 조용히 음미하시기도 하고, 노래마다 “그건 우리 아들들이 좋아하겠다”고 품평하시는가 하면, “소름끼친다”며 전율도 하셨다. 누우신 채로이지만 한동안 얘기하고 노래하며 박자 맞추시느라 지치셨을 것 같아, 선생님 고단하시지요. 이제 좀 쉴까요 하니까 “이런 건 재미있어 힘든 줄 몰라. 하루 종일해도 좋다” 하신다. 오래 전 어느 늦가을 황혼 무렵 학교 풀밭에 앉아 <단군탄생>을 읽으시며 충만하게 달아오르시던 선생님이시다. 우리말 어원연구의 일단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명나게 들려주시던 꼭 그 선생님이시다.


그 날 푸른 색 가디간을 사 가지고 갔다. 선생님 입으시라고 가져왔다며 펴보이자, “곱기도 하다. 이걸 새로 사왔단 말이야? 뭘로 만들었길래 이렇게 곱지? 봄 여름 계속 입겠구나” 감탄하며 좋아하신다. 조금 전 선생님이 주신 스카프 이야기를 할 땐 “나는 물건을 사지도 않고 옷 하나 생기면 닳을 때까지 그것만 입는 사람이었다”고 하셨다. “이만하면 족하다”고도 하셨다. 자족은 이렇게 작은 것을 호사로 만끽하고, 타인과 소리와 빛깔에 감응하며 충만해지는 능력일 것이다.



선생님을 모시고 앉아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벅차게 느껴져, 선생님은 굉장한 생명력이 있으세요, 많이 편찮으셨다고 하던데 이렇게 피어나셨네요 하니까,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 “생명!” 하시며 받으신다. 그리고 바로 앞에 꽃 한 송이라도 있는 양 허공의 한 군데를 그윽한 눈길로 매만지신다. 선생님의 절수행이 몸과 맘의 통일, 분단된 민족의 통일, 파괴된 생태계의 회복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다. 선생님은 지금 무릇 생명의 평온을 위해 혼신을 다해 드리셨던 기도를 계속하시는 것이다.



또 다른 날 선생님을 뵈었을 때 “선생님 예전에 태안사에서는 무슨 기도를 그렇게 뜨겁게 하셨어요?” 여쭈었다. 선생님은 “기도는 무슨 개뿔을!”하고 물을 타신다. 선생님께서 날 이리저리 보살펴주신 일을 떠올려드리면서 내가 그걸 ‘사랑’이라고 하자 선생님은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인연’이라고 하셨다. 당신이 힘껏 매진하신 일과 베푸신 일에 대해 그 의미의 중력을 털어버리는 서늘함 때문에, 멀찌감치서라도 이남덕 선생님을 늘 내 마음 한 자리에 모시고 있었던 것 같다. 웬만한 내공으로 따라갈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을 알지만, 자주 뵈어 선생님 뒤꿈치라도 놓치지 않으면 조금씩 진도를 낼 수 있지 않을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