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25日SF發 合同]美·英·蘇 3국외상회담의 제1회 공동성명서가 24일 발표되었는데 그 要旨는 다음과 같다.

“蘇·英·美 3국 정부는 평화조약 준비에 관한 이하의 수속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되어 佛國 及 中華民國정부에 대하여도 右 평화준비 遵守를 요청하였다. 외상이사회가 기초하는 데 있어서는 외상이사회 설치에 관한 베를린會議 사항에 基하여 항복조건 조인국이라고 인정되는 동 이사국 또는 현재 항복조건에 조인한 이사국만의 참가를 허락한다.

단 피조인국인 외상이사국으로서 그 나라의 직접 관계있는 문제에 관한 採否를 이사회 회의에 요구할 때에는 此限에 不在한다. 즉

A) 伊太利에 관한 평화조약의 조건은 英·美·蘇·佛 4국 외상 간에서 기초된다.

B) 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와의 평화조약은 蘇·美·英 3국 외상 간에서 기초된다.

C) 핀란드와의 평화조약은 蘇·英 2국 외상 간에서 기초된다.

각국 외상 대리자는 제1차 런던 외상이사회에서 협의된 제 문제에 관한 양해를 기초로 하여 즉시 런던에서 활동을 재개한다.

此等 평화조약 기초에 관한 준비가 완료하면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及 핀란드와의 평화조약 검토의 목적으로서 국제회의를 소집한다. 이 회의는 외상이사회 참가 5개국 외에 구미 제국에 대하여 실질적인 노력으로서 전쟁을 수행한 연합각국 전부가 참가한다. 즉 美國, 蘇聯, 英國, 中國, 佛國, 濠洲, 벨기에, 白露西亞, 伯剌西爾, 그리스, 네덜란드, 印度, 캐나다, 뉴질랜드, 諾威, 폴란드, 우크라이나, 체코, 에치오피아, 유고스라비아, 南阿聯邦의 제국이다. 右 회의는 1946년 5월 1일 이전에 개최한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27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943년 말의 테헤란회담, 1945년 2월의 얄타회담, 그리고 1945년 7월의 포츠담회담 등 중요한 연합국 회담은 미-영-소 3개국 사이에 이뤄졌다.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외상회담도 그 연장선 위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미-영-소 3국 체제는 전쟁 수행을 위한 비상체제라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이제 평화체제 수립에는 더 많은 국가들이 참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해 유엔도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직접적 전쟁 처리를 위해서는 연합국 공조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었고, 모스크바 외상회담에서는 각 안건의 구체적 토론에 앞서 안건의 관할 범위를 먼저 결정했다.


안건 관할 결정 중 핀란드의 이름에 눈길이 머무른다. 30만 평방 km가 넘는 국토지만 인구 5백여만에 불과한 조그만 나라. 1809년까지 스웨덴에 속해 있다가 러시아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1917년 러시아혁명 와중에 비로소 독립을 얻은 나라.


독립 후에 바로 좌우 대립의 내전을 겪은 핀란드는 독일과 소련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는 패전국으로서 연합국의 조치를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다. 험악한 주변 정세 속에서도 민주정치를 유지한 핀란드는 침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소련에 대항했을 뿐이었다. 그러고도 어려운 형편에 빠진 것을 보며 해방 한국이 처해 있던 국제적 상황을 음미해 본다.


패전국이기는 하지만 핀란드는 추축국은 아니었다. 추축국들과 함께 반(反) 코민테른 동맹에는 참여했지만 추축동맹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헤란회담에서도 핀란드는 연합국 전체를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과 개별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1939년 8월 하순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 분할의 밀약을 맺을 때 독일은 발트 3국과 핀란드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인정했다. 소련은 네 나라에 군사기지 설치를 요구했고, 세 나라는 이 요구를 수용한 결과 1년 내에 주권을 빼앗겼다. 핀란드만이 소련의 요구를 거절했고 ‘겨울전쟁’으로 맞섰다.


100여 일에 걸친 겨울전쟁이 1940년 3월 13일 모스크바 평화조약으로 종결될 때 핀란드는 영토 등 상당한 양보를 강요당했지만, 타격은 소련 쪽이 더 컸다. 소련의 군사력에 대한 평가가 엄청나게 낮아져서 히틀러가 소련 공격 결정을 앞당기는 빌미가 된 것이다.


핀란드에 대한 소련의 야욕은 계속되었다. 겨울전쟁에서 구겨진 체면을 되살릴 필요도 있었다. 모스크바 평화조약의 이행이 소련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갈수록 어렵게 되었다. 핀란드는 영국에 무기 공급을 청했지만 영국이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과의 동맹을 파기할 계획을 가진 독일은 1940년 말부터 핀란드의 요청에 응하기 시작했다.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과 함께 핀란드도 소련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을 핀란드인들은 ‘연장전’(Continuation War)이라 불렀다. 겨울전쟁의 연장으로 본 것이었다. 그런데 연장전이 원래 전쟁보다 더 길게 끌었다. 1944년 9월에야 휴전이 이뤄졌고, 1947년 2월의 파리평화조약으로 종결되었다.


핀란드인들은 이 전쟁에서 독일과 협력하되 전쟁 목적은 공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개전 초 몇 주일 동안 겨울전쟁에서 잃었던 영토를 탈환한 후로는 적극적 작전에 나서지 않았다. 불과 몇 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레닌그라드 포위작전 참여도 거부했다.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몇 달 내에 소련을 꺾을 계획이었고, 핀란드도 그런 기대 하에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 기대가 어긋난 뒤에는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방어 전략에 치중했다. 소련 이외의 연합국과는 적대행위가 거의 없었다. 영국이 1941년 12월 핀란드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였을 뿐 핀란드를 실제로 공격하지 않았고, 테헤란회담에서는 미국과 함께 소련을 설득, 핀란드를 추축국으로 규정하지 않게 했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전투로 동부전선 전세가 역전되자 핀란드는 전쟁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소련은 강화회담에 응하지 않고 압도적 군세로 핀란드를 석권하려 들었다. 핀란드는 소련의 탱크부대를 막을 수단이 없었다. 독일은 단독 강화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대전차 무기를 제공했다. 1944년 6월에 핀란드 대통령 리스트 리티는 대통령직을 걸고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1944년 8월 1일 소련의 치열한 하계공세를 물리친 뒤 휴전 협상의 길이 열렸을 때 리티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의회는 카를 구스타프 마너하임(1867-1951)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전쟁을 끝낸 것은 ‘국부’ 마너하임의 조국에 대한 마지막 큰 봉사였다. 그의 취임사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국가의 운명이 어려움에 빠져 있는 이 시점에서 다시 국가원수 직을 맡으면서 저는 깊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의 장래를 지켜나가기 위해 우리는 거대한 난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순간 내 마음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5년째 전투에 임하고 있는 우리 군인들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 위에, 국민의 단합된 지지를 받는 의회와 정부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독립과 존재를 지킬 수 있기를 저는 희망하고, 또한 믿습니다.”


혁명 전 러시아군 장군이었던 마너하임은 독립한 핀란드에 돌아와 1918년 내전에서 적군에 대항해 백군을 지휘했다. 독일의 지원을 받은 백군이 승리하자 왕정을 실시하려 했는데, 곧이어 독일의 패전으로 이 계획이 무너졌다. 공화정을 준비하는 동안 마너하임이 섭정의 신분으로 국가원수 역할을 맡았다. 그 후 은퇴했다가 겨울전쟁이 일어나자 총사령관으로 복귀, 대통령을 대신해서 군 통수권을 맡았다. 그는 군사적 영웅일 뿐 아니라 대통령을 초월하는 정치적 권위를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존재였다.


1942년 6월 히틀러가 마너하임의 75회 생일을 축하하러 찾아왔을 때의 일화가 전해진다. 핀란드가 소련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히틀러와 독일이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때였다. 마너하임은 히틀러의 방문으로 핀란드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방문이 공식 행사 아닌 개인적 행사가 되도록 만전의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히틀러와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시가를 꺼내 물었다. 히틀러가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고, 누구도 그 앞에서 담배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너하임은 히틀러가 저자세인지 고자세인지 판별하기 위해 일부러 담배를 꺼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마너하임이 시가 피우는 것을 못 본 척했다고 한다.


마너하임의 대통령 취임 한 달 만에 소련과 휴전이 성립되었다. 엄청나게 가혹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과 마주쳤던 어느 다른 나라와도 달리 핀란드는 독립을 지켰다. 스탈린도 마너하임과의 휴전 협상을 외면할 경우 핀란드의 극한 저항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핀란드 국민도 그를 믿었기 때문에 가혹한 조건을 감수했던 것이다. 1944년 가을 시점에서 소련은 서부전선 연합국들과 진격 경쟁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핀란드를 ‘끝장’내지 못하고 휴전에 응해야 했다.


전쟁 기간 중, 특히 개전 초기 소련이 밀려나고 있을 때 핀란드에서도 ‘대(大) 핀란드’주의가 거세게 일어났다. 소련 영토를 최대한 빼앗아 북방의 대국을 이루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마너하임이 이끄는 군 지도부는 전쟁 목표를 최소한의 범위로 엄격하게 지켰다. 그래서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섰을 때도 극한적 파탄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