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6. 16:51


어렸을 때 우리 또래가 제일 많이 읽은 동화책 가운데 <소공자>, <소공녀>와 함께 <엄마 찾아 3만 리>란 제목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2년 동안 어머니를 살피며 쓴 글을 다시 훑어보며 이것이 나의 ‘엄마 찾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동화의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지만, ‘찾기’의 의미가 나랑 달랐던 것 같다. 그 동화에서 ‘엄마’는 주인공의 인식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구체적 대상이었다. 내가 찾은 ‘엄마’는 엄밀히 말해서 나와 그분과의 관계다. 그분과의 관계가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며 가질 수 있는 것인지 깨우치는 것, 그것이 이 글쓰기를 시작할 때 나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글쓰기의 목적이었다.


동화에서 주인공이 극복해야 할 문제는 물리적 단절이었다. 내 ‘엄마 찾기’의 과제는 심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수십 년 동안 그분의 훌륭한 점보다 그분의 모순과 위선을 더 많이 생각하며 살아 왔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분을 편안한 눈길로 바라보지 못하며 살아오려니 나 자신을 좋게 볼 수도 없고, 세상을 좋게 볼 수도 없었다.


내 ‘엄마 찾기’는 요컨대 ‘화해’의 과정이었다. 그분과의 화해가 세상과의 화해, 나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길을 열어주었다. 5년 전만 해도 나는 세상과의 교섭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애를 쓰며 살고 있었다. 나 자신에게 편안한 생활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를 이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하나의 ‘괴물’로 보니까, 나 자신도 그 괴물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괴물일 수밖에. 나는 무명(無明)에 빠져서 살고 있었다.


2007년 6월 어머니가 쓰러지신 후 모시는 것을 보며 주변에서는 나를 대단한 효자로 여긴다. 처음에는 몹시 어색했다. 그분 마음에 나만큼 괴로움을 많이 끼쳐드린 사람이 따로 없을 것 같은데. 자유로요양병원에 모셔놓고 매일 찾아뵈며 지내면서도 마음의 거리가 바로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자식으로서 도리 때문에 살펴드리는 것이지,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우러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2008년 봄 몹시 쇠약해지셔서 7월에 일산 시내 현대요양병원에 옮겨 모셔놓고 지내는 동안 내 마음에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 튜브피딩으로 연명하며 의식도 미약한 채로 무기력하게 누워계신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을 얽매고 있던 시비지심이 사그라진 것이다. 그러다가 11월 들어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시자 그저 기쁜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시병일기’를 쓰기 시작하게 되었다.



쓰기 시작하면서도 이 글쓰기의 의미가 어떻게 자라날지 별 생각이 없었다. 기능적인 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형에게 한 달에 한 번 정도씩 메일로 용태를 알려주고 있었는데, 회복이 시작되시니까 메일이 잦아졌다. 용태가 좋아지시니까 마음이 기쁘고, 같은 기쁨을 형에게도 일으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본성은 착한 사람이다.


형에게 메일이 잦아지다 보니 욕심이 더 났다. 형 외에도 어머니 소식을 가끔씩 전화나 메일로 전해드리던 분들이 있었다. 따로 글을 써서 여러 분께 메일에 첨부해서 보내기 시작한 것이 ‘시병일기’의 출발이었다.


어머니 회복이 상상 외로 순조로웠고, 그 반가운 소식에 내 기쁜 마음을 얹어서 보내드리니까 받는 분들이 모두 대환영이었다. 읽는 분들이 다들 좋아하시니까 더 많은 분들에게 읽히고 싶었다. 그래서 참여하고 있던 동호회 게시판에도 내 근황삼아 올리기 시작했더니 어머니를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감동을 느낀다는 분들이 있었다. 이 글이 쌓이면 책으로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때부터 들기 시작했다.


‘시병일기’를 시작하고 7개월이 지나 요양원으로 옮기실 무렵에는 이 글쓰기가 기능적 목적을 한참 넘어서서 하나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 있었다. 아니, ‘작업’이라기보다 내 ‘생활’의 핵심적 부분으로 자라나 내 ‘존재’를 뒷받침하는 요소가 되어 있었다.


‘작업’이라 함은 활동의 수단이라는 뜻이다. 그 전의 내 글쓰기는 그런 의미에서 작업이었다. 내 생각을 펴기 위해, 그리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는 일이었고, 많이 읽히지 않거나 돈이 안 된다면 그만둘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은... 어머니 관찰을 빙자하여 나 자신을 총체적으로, 그리고 심층적으로 관찰하는 일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썼다. 병원에 매일 가 뵐 때의 ‘시병일기’에 비해 열흘이나 보름마다 가 뵙는 요양원 ‘방문기’에는 어머니 모습의 묘사보다 내 생각을 더 많이 담게 되었다. 일반적 수필의 성격에 가까워진 것이다. 블로그에도 올려놓고 <월간 불광>에도 연재하면서 독자들과의 접촉면도 넓어졌다. 요양원으로 옮겨 모신 지 반년이 지나자 책으로 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어느 정도 굳어졌다.


자신감을 키우는 데 <월간 불광>의 인연이 역할이 컸다. 퇴직 후 어머니의 가장 큰 대외활동이 그 잡지의 수필 연재였다. 십여 년 연재를 묶어 수필집도 두 책 내셨다. <두메산골 앉은뱅이의 기원>과 <여든 살의 연꽃 한 송이>. 편집장 남동화 보살님이 요양원 방문기 연재를 청한 것은 어머니의 흔적을 아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모든 일에 기억이 희미하신 어머니도 이 잡지 기억만은 분명하신 듯, 내 글이 실린 것을 볼 때마다 무척 좋아하셨다.



지난 봄 책 낼 자신감이 아직 확실치 않을 때 서해문집과 마주쳤다. <프레시안>의 연재칼럼 <김기협의 페리스코프>를 책으로 묶어 낼 생각이 없었는데 서해문집에서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결과 생각지 못했던 기쁨을 얻었다.


그 책 머리말에서 어머니와의 관계 변화가 내 생활과 일에 변화를 가져온 곡절을 적었다. 그 책에 담긴 2009년의 글 중에 전과 달리 한 인간으로서 내 모습을 솔직히 드러낸 것이 꽤 있기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어머니와의 화해가 세상과의 화해, 나 자신과의 화해를 불러왔다는 생각이었다.


‘시병일기’도 자기네가 내고 싶다는 서해문집의 제안에 바로 응했다. 자신감이 아직 확실치 않은데도 응했던 것은 돈이 급하게 필요한 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회사와의 ‘좋은 인연’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다. 낼 생각도 없던 책을 만들어 바라지 않았던 기쁨을 선물한 출판사니까. 내가 자신감이 모자라도 그 좋은 인연이 때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서 8개월, 지금 책을 낼 수 있게 된 것은 서해문집 여러분 덕분이다. 내가 <망국의 역사>, <해방일기> 작업을 벅차게 벌여놓고 쩔쩔매고 있는 동안 편집을 맡은 송수남 님과 디자인을 맡은 홍XX 님이 내 대신 책의 방향을 잡아주었고, 김선정 주간과 김흥식 사장을 비롯한 다른 분들도 열렬한 응원으로 부족한 내 자신감을 메워주었다. 고맙다.



그 동안 생각만 해 온 일 하나를 일전에 결행했다.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에 “친생자관계존부확인의 소”를 제출한 것이다. 어머니가 원고고 내가 피고다.


1950년 2월 내가 태어날 때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신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전처와의 이혼 수속을 밟지 않은 상태였다. 제적등본을 보면 1950년 3월 19일에 두 분이 이혼 소속을 밟았고, 그 이튿날 어머니가 결혼신고와 함께 아버지 호적에 입적했다.


형들과 나는 아버지와 전처 사이에서 출생한 것으로 신고되어 있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동생만이 어머니 소생으로 나타나 있다. 어머니는 호적상 우리 3형제의 ‘계모’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어머니 이름으로 제출한 소는 나를 가리키며 “저 녀석이 내가 낳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시오.”하는 취지이고, 내 이름으로는 “그 말씀이 옳으니 확인해 드리세요.” 하는 취지의 ‘청구인락서’를 붙여서 제출했다. 내 ‘엄마 찾기’ 작업이 법률적 의미까지 갖추게 된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본질을 중시하라는 가르침을 어머니에게 받으며 자라났다. 호적이 사실과 다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바로잡기 위해 애쓸 필요를 느끼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생각이 달라졌다. 형식도 본질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무엇이 본질인가를 내 주관으로 판단하는 것이니, 본질에 대한 집착은 내 주관에 대한 집착이 되기 쉽다. 독선과 독단으로 나아가는 ‘근본주의자’의 길이 되기 쉽다. 본질을 중시하되, 그 때문에 형식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머니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 지는 여쭤보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하지 않으실 것을 믿기 때문에 소를 제출한 것이다. 몇 해 전 같으면 반대하셨을 것 같다. “기왕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억지로 손댈 필요가 뭐 있느냐? 우리가 서로를 어미로 인정하고 아들로 인정하는 본질만 지키면 되는 것이지.” 하고. 그러나 지금은 어떤 일인지 알아듣게 말씀드리면 “그것 참 고맙구나.” 흐뭇한 웃음을 지으실 것이다.



내가 5년 전까지는 불효자였는가? 지금은 효자가 되어 있는가? 뒤의 질문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도 앞의 질문에는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생각해 왔다. 내가 불효자가 아니라면 세상에 불효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진심으로 어머니를 미워했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이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지금 어머니를 몹시 좋아하고 아낀다. 내 능력이 모자라 효자 노릇을 충분히 못하는 점은 있을지라도, 내 ‘본심(本心)’은 효자의 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본심’이란 것이 바뀔 수 있는 것인가? 어째서 그 ‘본심’이 미움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따지다 보니 어머니에 대한 내 생각과 감정이 바로 어머니의 당신 자신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투영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도 당신 자신이 미웠던 것이다.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에만 빠져서 살아오신 것은 아니라도, 스스로를 납득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 면을 놓고 당신 자신을 벌하기 위해 자식들 중 마음이 어두운 놈을 골라 채찍을 맡기신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선택하신 형리(刑吏)였다.


괴이한 생각이다. 그러나 한 번 떠올리고 보니 다르게 볼 수가 없다. 나를 형리로 선택한 사실을 당신 스스로 의식 못 하셨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께 자책의 마음이 있었고, 내 혓바닥이 그 고통을 더욱 예리하게 하는 채찍 노릇을 한 것은 사실이다.


이 미움으로 어머니도 나도 많은 고통을 겪었다. 지금 어머니에 대한 내 사랑이 실체를 가진 것은 함께 겪은 고통이 깔려 있는 바탕 덕분이다. 그러고 보면 나 자신을 불효자로 생각하던 시절에도 내 마음은 어머니 마음과 굳게 맺어져 있었던 것이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를 버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때도 나는 효자였다. 적어도 지금보다 덜하지 않은 효자였다.


모르는 분들에게 읽어달라고 책으로 내면서 이것 하나만은 꼭 강조하고 싶다. 가까운 사람끼리는 즐거움만이 아니라 괴로움도 함께 나눈다는 사실. 운명이 주는 괴로움은 아끼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가장 예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운명에 대한 원망이 아끼는 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모습을 바꿔서 나타나기 쉬운 것이다. 어떤 고통 앞에서도 주어진 인연을 등지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서 나 자신을 지키는 길이다.



어머니가 힘든 운명 앞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오늘의 편안함에 이르도록 자식들보다도 더 큰 도움을 드린 여러분께 이 책을 바친다. 본문 중에도 나타난 친구, 제자, 친척 분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22년 전 돌아가신 큰고모님께 사무치게 고마움을 느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