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아흔 개의 봄》은 겉으로는 한 아들의 어머니 간병기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추적하는 내면적 오디세이이기도 하다. '아흔 개의 봄'을 맞는 이남덕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의 첫 여학생이었고, 1970년대에는 파리에서 열린 세계학술대회에 한복을 입고 나타난 국어학자였으며, 일제말기부터 1951년까지의 7년간은 역사학자 김성칠 선생에게 오로지 순종만 하는 지순한 아내, 4남매의 충실한 어머니였다.
전시에 남편과 시어른을 함께 잃은 이남덕 선생은, 무너지는 대들보를 알몸으로 막아, 4남매를 지킨 고달픈 가장이었다. 그래서 그 집에는 상식적인 의미의 '어머니'가 없었다. 거기에 형들에 대한 어머니의 편애까지 가세해서 기협 씨는 어머니에게서 '아주 먼'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큰아들을 끔찍이 존중했고, 아버지의 외모에 어머니의 정열을 물려받은 작은아들을 지독하게 편애했다. 그래서 끝의 두 아이에게는 줄 것이 많지 않았다. 그 결핍이 아이들에게는 상처로 남았다.
그런데 의식이 없어져 보호자가 필요해지자, 어머니 곁에는 '먼 아들' 기협 씨만 서 있었다. 미국에 사는 큰형은 사치품이고, 세상사에 무관심한 둘째형은 기호품인데, 자기는 필수품이라는 게 기협 씨의 견해다. 어머니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햇볕을, 바람을, 풀잎을 고마운 마음으로 누리는' 경지까지 다다르는 동안에, 필수품인 이 아들은 그 환자를 파주에서 일산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이천의 '세종너싱홈'으로 이동시키며 고생했다. 보는 이들이 경탄할 만한 한결같은 애정으로 그는 어머니를 지켜드렸다.
그 과정에서 아들은 어머니에 대한 미움을 씻어내는 작업을 하면서 어머니와 화해한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있어서도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을 털어내는 과정이었고, 아들에게 있어서도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이었다. 아들은 그 일을 통하여 세상과도 화해하는 편안한 마음자리에 이른다.
기억력이 부실해져서 며느리도 못 알아보는 어머니를, 아들은 고통스런 기억에서 해방되어 '제2의 인생'을 누리는 행복한 노인으로 받아들인다. 걷지도 못하고, 의치도 못 끼면서 이 선생님은, 요즘 모든 말을 노래로 하는 새 재주를 얻으셨다. 선생님은 목소리가 아주 고우시다. 누워 계시니 피로가 싹 가셔서 얼굴도 맑고 고운데, 종일 종달새처럼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보는 이들이 모두 즐거워한다.
이따금 간병인에게 욕설을 퍼붓는 묘기도 부리신다는데, 그것도 나쁠 것이 없다. 쌍욕을 마음 놓고 하는 것은 교수였던 분에게는 하나의 특혜라고 할 수 있다. 모르는 것이 용납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손님 앞에서 소리 내어 가스를 방산하는 노대통령에게 어느 장관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했대서 우스개가 된 일이 있었다. 나는 지금 이 선생님에게 그 말을 해드리고 싶다. "선생님! 정말 시원하시겠습니다."
대체로 어버이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부모를 미화하는 효도 콤플렉스에 걸리기 쉽다. 그런데 《아흔 개의 봄》에는 그것이 없다. "나는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결점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말대로 이 책에는 어머니의 장점도 과대 포장되는 일이 없고, 결점이 감추어지는 일도 없다. 감정이 격하면 쉽게 막말을 하는 것, 며느리마다 못살게 구는 것 등을 통하여 기협 씨는 정확한 ‘이남덕론’을 쓰고 있다. 깊은 통찰과 절제된 표현을 통하여 그는 어머니를 한 인간으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어머니를 부모처럼 돌보게 된 아들, 어머니와 같이 있는 시간을 즐기고 올 때마다 뽀뽀를 해드리는 다감한 아드님을 통하여 선생님은 김 서방(남편)에게서 미처 받지 못한 사랑을 보상받으실 것 같아 보기 좋고, 늘 어머니의 사랑에 허기져 있던 기협 씨도, 어머니를 3년간이나 독점해서 좋다.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고백을 드디어 끌어냈다니 선생님의 투병 생활은 모자분 모두에게 두루 의미가 깊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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