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7. 13:09
 


다섯시 반쯤 병실에 들어서니 눈을 꼭 감고 계신다. 주무시면서 저절로 감긴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꼭 감고 계신 것 같다. 소리 내지 않고 곁에 서 있자니, 2-3분간 가만히 계시다가 김 여사가 다가와 내게 인사하는 소리를 듣고 눈을 뜨신다. 역시 잠에서 천천히 깨어나시는 기색이 아니고 눈을 뜨시자 마자 또렷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신다.

김 여사의 자랑스러운 보고가 꽤 길었다. 형의 전화를 받으시자 마자 "어~ 기봉이냐?"로 시작하셔서, 여러 번 "그래."를 하시다가, "그래, 그러마."로 끝내시더라는 얘기. 다른 건 그만두고, 전화로 이름 불러대시는 건 정말 오랫만의 발전이다. 그리고 낮에 튜브피딩을 위해 윗몸을 일으켜세워 놓았을 때 고개를 이쪽 저쪽으로 돌려 방 안팎을 둘러보시는 것도 여기 와서 처음이셨다고 김 여사가 좋아한다.

김 여사가 어머니께 "큰 아드님 전화에는 이름도 부르셨는데, 지금 작은 아드님 온 것 보시고는 뭐라 그러셨어요?" 하니 못 들은 척 무표정하시다. 내가 "말씀하셨어요. '잘 왔다.' 하고." 그랬더니 무심결에 빙긋 웃음이 떠오르신다. 에라~ 내친 김에, 하고 "'너 참 잘 왔다.' 그러셨던가요?" 하니까 눈길을 내게 돌리며 웃음이 커지신다.

의식이 계속 더 맑아지시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들어올 때 눈을 감고 계신 것도 그냥 떠오르는 생각에 의식을 맡기는 것을 넘어 뭔가 생각을 집중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걱정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의식이 더 분명해지시면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지금 상황을 괴롭게 느끼시지나 않을지.

그리고 나에 대해 혹 불편한 생각을 떠올리시는 것이나 아닐까 불안한 마음도 든다. 간병인들 상대로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태를 스스럼없이 내시던 분이 내 앞에서는 표정도 말씀도 모두 아끼신다. 기술적인 이유려니, 생각하려 해도 자꾸 마음이 걸리는 것은 내 자격지심일까?

큰형을 너무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존중해 준 것이 미안하다는 말씀을 어머니께서 하신 일이 있다. 가장 역할로 부담을 주셨다는 것이다. 큰형이 어려서부터 신중하고 온건한 성격을 키운 데는 그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비판할 만한 일이 있어도 "내게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하며, 험한 말 할 일을 극구 피하는 자세가 일찍부터 몸에 밴 것 같다.

나는 가치관에 있어서 큰형과 많이 겹치지만, 그런 조심스러운 자세가 없다. 집 안에서건 집 밖에서건 입으로 죄를 짓는 데 거리낌이 없다. 한편 작은형은 워낙 신선 같은 분인지라 자기 자신도 비판할 줄 모르는데, 누구를 비판하겠는가? 귀찮아서도 못한다. 형제 중에 '비판' 실적은 내 독차지다. 어머니께 싫은 말씀 드린 것 형 둘이 합쳐도 내가 한 것의 10분의 1을 못 따라올 것이다.

이모님이 같이 앉았을 때 어머니께서 농담에 뼈를 넣어 말씀하신 일도 있다. "저 놈은 아무래도 김 서방(아버지를 가리킴) 귀신이 씌인 놈 같애. 너무 잘난 양반 만나 그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더니, 이 늘그막에 와서는 저 놈에게 꾸중 들어가며 살게 되었어."

그 말씀을 들으며 움찔, 했다. 21년 전 그분의 일기를 넘겨받은 후 내 머릿속에는 그분 생각이 늘 머물러 있다. 일에서건 생활에서건 조금만 긴장할 일이 닥치면 그분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께 대하는 태도에도 그분의 존재가 작용했다면 정말 귀신 씌었다는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다.

꼼짝 못하고 누우신 분께서 내 얼굴을 보며 57년 전에 혼자 먼저 떠나신 분을 떠올리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다. 큰형이 보는 것처럼 어머니는 두 개의 뚜렷이 다른 측면을 가진 분이다. 통상적인 말로 감성적 측면과 이성적 측면이라 할까? 내가 어머니 인생에서 이성적 측면을 대표하는 위치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08. 12. 31  (0) 2009.12.09
08. 12. 22  (0) 2009.12.09
08. 12. 15  (0) 2009.12.07
08. 12. 12  (0) 2009.12.07
08. 12. 10  (0) 2009.12.07
Posted by 문천
2009. 12. 7. 13:07
 

 요즘 어머니 표정은 크게 나눠 세 갈래다. 제일 많이 보이시는 것은 눈을 뜨고 계셔도 정신이 몽롱하신 듯 멍한 표정. 이따금 뭔가 불편하신 듯 찌푸린 표정, 조금 더하실 때는 완전히 울상으로 찡그려지고 눈물까지 흘리신다. 그리고 입꼬리가 귓가에 걸릴 듯이 쭈욱 올라가는 웃음. 최근에 정신이 좋아지고 편안해지시면서 찌푸린 표정보다 웃음이 훨씬 많아지고 종류도 늘어난다. 늘어난 종류 중에는 피식 하는 실소도 있다.

오늘 모시고 앉아 있는 동안 새 환자가 한 분 들어오셨다. 새 환자의 보호자인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지나가는 길에 내게 말을 걸고, 몇 마디 말 끝에 "참 효자시네요~" 인사치레 말씀을 했다. 좀 겸연쩍어서 어머니를 보고 "이분께서 저를 효자라시네요, 어머니. 어떻게 생각하세요?" 했더니 대뜸 피식! 웃으시는 것이 아닌가!

어제는 미열이 있으시다고 들었지만 용태에 별로 힘든 기색이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은 어제보다도 훨씬 기색이 좋으시다. 들어설 때 보니 독경집을 펼쳐 침대 난간에 기대 놓았다. 그 시점에서는 들여다 보지 않고 계셨지만, 아마 어느 여사님이 읽어드릴 때 관심을 강하게 보이시니까 펼쳐놓아 드린 모양이다. 김 여사의 보고도 재미있다. 여사님들이 피딩 준비해 드릴 때마다 아침인가 점심인가 저녁인가 말씀하시게 하는데, 아까 점심 때 또 채근하니까, "'점심' 말하기 싫어." 하시더라고. 그 말을 듣고 어머니께 "잘 하셨어요, 어머니. 고분고분 시키는 말씀만 하지 말고 호통도 치고 그러세요." 했더니 순간에 입끝이 귓가로 달려가신다. 이야기 알아들으시는 수준이 며칠 전과도 비교할 수 없게 회복되셨다. 유머감각도 되살아나시는 것 같다. 조금 더 나아지시면 내 '똥배'를 다시 들먹이실 수도 있겠다 싶다.

여사님들이 드리는 자극에 예민하신 것에 비하면 내가 드리는 말씀에는 주의도 빨리 모이지 않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시는 편인데, 오늘은 내 말씀도 잘 알아들으시고 반응도 활발하시다. 내 말씀에 대한 대답 말씀은 그 동안 어쩌다 나와도 한 단어로 늘 끝났는데, 오늘은 세 단어 문장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말씀이었는지 지금 생각이 안 난다. 지금 알고 있는 것도 이렇게 적어놓지 않으면 얼마나 남길 수 있을지. 설마 전염성 치매는 아니시겠지?

새로 나온 책을 우선 어머니 가까운 분들께 먼저 발송하는데, 이화여전 동기 동창이 두 분이셨다. 이혜숙 선생님과 이윤재 선생님. 어머니 쓰러지시기 한두 달 전 우리 집에 다니러 오셨을 때 두 분을 점심에 청해 오랫만에 깔깔대며 즐거운 시간들을 가지셨는데, 그런 자리를 다시 바랄 수도 없게 되었다. 이윤재 선생님께 보내는 책에는 사인 위에 "동녕 형을 부러워하며"라고 써넣었다. 그 아드님, 우리 큰형보다 한 살 밑인 김동녕 선배는 큰형 못지 않게 모범생에 효자로 내가 보는 이다. 이 선생님께 전화드릴 때 정정하신 것을 치하드리느라고 "저는 동녕 형이 부러워요~" 하곤 하는데, 사실 어머니가 요새만큼 몸과 마음이 편안하시기만 하다면 동녕 형도 별로 부럽지 않다.

3년 전 어머니를 두고 갈 수 없어 한국에 주저앉은 뒤 대개 철 하나 지날 때마다 우리 집에 다니러 오셨고, 그럴 때는 친척이나 친구분들 보실 기회를 만들어드리려고 내 딴에 애를 썼다. 기억력 감퇴만이 아니라 기력도 많이 쇠하셔서, 한나절 어디 다녀오시면 이튿날 꼼짝도 못 하시는 지경이기 때문에 나들이를 효과적으로 조직해야 했다. 쓰러지시기 전에 모시고 가 만날 기회를 드린 분으로 이정희 선생님과 윤정옥 선생님 생각이 얼른 난다.

어머니보다 서너 살 아래인 이정희 선생님은 늦게(아마 환갑들 지나신 뒤에?) 서로 만나고도 허물없이 가깝게 되신 분이다. 어머니가 소녀기를 지내신 함경도 출신이시라서, 그리고 거침없는 성격이시라서 쉽게 가까워지신 것 같다. 신군부 초기에 어디 잡혀 들어가셨을 때의 일화가 그분의 거침없는 성격을 보여준다. 심문을 앞두고 담당자에게 이런 모두발언을 하셨다고. "미리 말해두는데, 날 빨갱이라고 뒤집어씌울 생각은 하들 말어. 난 공산당이 싫어서 고향 두고 온 사람이야. 그리고 조직활동 뒤집어쒸울 생각도 하지 마. 난 단 두 사람 조직도 못해서 평생 혼자 산 사람이야." 요즘도 어머니 건강 관리에 도움말씀 주시기 위해 거침없는 전화를 제일 자주 주시는 분이다.

영문과 윤정옥 선생님과 사회학과 이효재 선생님은 어머니와 마음이 통하는 동료로 다년간 3자매처럼 지낸 분들이다. 어머니가 대저, 이 선생님이 중저, 윤 선생님이 소저로 통했다. 다정다감하신 윤 선생님은 어머니가 이정희 선생님 댁에 다니러 가신다는 말씀을 듣고 그리 달려오셨다. 이효재 선생님은 진해에 은거하고 거동도 불편하셔서 전화로 인사 올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쉽지만, 그 근엄하신 분께서 요새 내가 낸 책과 글을 무척 반가워하고 전화로 격려해주시는 것이 큰 힘이 된다.

사람이 마흔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어울리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어머니 친구분들이 어머니 아껴드리는 것을 보며, 나도 어머니 못지 않게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애쓸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08. 12. 22  (0) 2009.12.09
08. 12. 19  (0) 2009.12.07
08. 12. 12  (0) 2009.12.07
08. 12. 10  (0) 2009.12.07
08. 12. 8  (0) 2009.12.07
Posted by 문천
2009. 12. 7. 13:06
 

그저께 사진첩을 어머니 곁에 갖다두었다. 큰형이 지난 봄 뵈러 올 때 만들어 온 것이다. 형네 가족 사진 절반쯤, 그리고 나머지가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찍은 가족사진부터 시작해 자식들과 찍은 사진, 어머니 독사진 등으로 모두 20여 장을 보시기 좋도록 확대해서 묶은 것이다. 병원 옮기실 때 사진 살펴보실 정신도 없을 정도로 의식이 혼미하셨기 때문에 집에 갖다두었었는데, 간병인들이 사진이라도 보시면 좋겠다고 일깨워주어서 갖다놓은 것이다.

그 날은 사진첩을 갖다놓고 금방 일어서야 할 형편이었다. 그리고 어제저녁에 가니 여사님들이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어머니께서 온 날 사진만 들여다보고 계세요." 한다. 보니, 침대 꼭대기쪽 벽에 붙여놓았던 사물함을 얼굴 곁에까지 당겨내어 놓고 그 위에 사진첩을 세워놓았는데, 어머니는 고개를 옆으로 하고 누워 하염없이 2년 전 가족사진을 들여다보고 계시다. 내가 사진첩 위로 얼굴을 보이며 인사드리자 힐끗 눈길을 돌려 쳐다보시고는 1초도 안되어 사진으로 눈길을 되돌리신다.

사진첩 뒤에 앉아서 이것 저것 사진을 바꿔서 보여드리니 열심히 쳐다보시다가 손을 내미신다. 사진첩을 들어 손에 쥐시도록 잡아드렸더니 사진을 넘기려고 손을 움직이려 애를 쓰신다. 사진 하나하나에 따라 생각이 옮겨 다니시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한참 사진을 보시다가 노근하신지 눈을 뜬 채로 잠이 드셨다.

오늘 아침 큰형 메일에서 읽은 옛날 얘기에서 사진 들여다보시던 어머니 모습을 다시 떠올린다.

 "내가 경기중학 입학시험을 친 1957년, 전쟁 후의 혼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시점에서 어느 정도면 그 학교에 합격할 만한 수준인지도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너 정도 실력이면 아마 될 거야.' 해주신 말씀 외에는 자신감을 가질 근거가 아무것도 없었다. 발표날, 학교 담에 붙이는 방을 보러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설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붙어도 기쁠 것이고, 떨어져도 기쁠 것이다. 네가 붙으면 우리 가족에게 당연히 기쁜 일이 될 것이고, 떨어진다면 너보다 실력 있는 학생이 네 또래에 5백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너만 해도 충분히 똑똑하고 실력 있는 학생인데, 더 훌륭한 학생이 5백 명이나 있다면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느냐?' 당시의 각박한 상황에서 그런 관점을 떠올릴 수 있었던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었겠니? 그 때 어머니에게 품은 존경심을 그 이후 잃어버린 일이 없었다."

 경기중학.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어머니께 큰 위로와 격려를 드린 존재였다. 청상으로 혼자 되신 분께 아들들 저고리에 붙은 그 마름모 명찰이 얼마나 큰 마법의 힘을 드렸을까? 그 명찰이 나온 사진도 하나 사진첩에 끼워 드려야겠다.

정말 대단한 집착이셨다. 그러나 큰형의 회고에 보이는 것처럼 그 집착을 뛰어넘어 관조하는 자세를 가지시려는 극기의 노력이 그 집착과 짝을 이뤘다. 작은형은 경기중학에 떨어졌는데, 그 때 연줄을 통해 학교로 찾아가 답안지까지 확인한 뒤에야 불합격에 승복하신 극성에서 그 집착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내 중학 진학 때는 극기의 측면을 뚜렷하게 보이셨다.

1962년에는 초등학교에서 어느 정도 하면 어느 학교에 갈 만할지 웬만큼 예측이 가능할 때였는데, 근근히 경기중학을 바라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내게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군사정부에서 체력시험을 큰 비중으로 넣게 한 조치였다. 나는 체력시험에 영 젬병이었다. 게다가 학과시험도 공동출제로 해 변별력이 떨어질 전망이었으므로 엄청난 타격이었다.

체력시험을 포함하면 예상 커틀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바라볼 상황에서 어머니는 빨리 결단을 내리셨다. 모험을 하기보다 집 가까운 보성중학에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큰형의 회고와 일맥상통하는 일이었다. 아들을 경기 보냈으면 하는 강한 바램을 가지고 계시면서, 그 바램이 아들에게 좌절의 경험을 너무 일찍 가져다줄 위험 앞에서는 아예 접어버리려는 것이었다.

욕망을 극복하려는 강박을 보며 어머니가 성악설을 신봉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식들이 자기 능력만이 아니라 품성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가지도록 꾸준히 북돋워 주신 것을 생각하면 꼭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시절에 너무나 극심한 사회 혼란을 겪고 개인적으로도 큰 불행을 당하신 시대적 조건이 어머니의 의식을 짓누른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원래의 낙천적 성선설이 거듭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억눌리셨지만, 자식들만은 성선설의 밝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중학교 진학을 놓고 그처럼 극심한 희비가 엇갈린 사실 자체가 그 시대의 참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당장 우리 어머니부터, 아버지를 잃은 불행이 아니었다면 자식들의 진학에 그토록 절박하게 매달리지 않으셨을 것이 분명하다. 전국 학동들을 한 줄에 세우던 그 시절에 비하면 우리 사회에 여유가 많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대학 입시에 참혹한 경쟁의 양상이 여전한 것이 안타깝다.

내친 김에 진학 얘기를 마무리하자면, 나는 경기중학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지원 직전에 입시 요강이 바뀌어 체력시험에 약간의 기본점수를 주도록 하는 호재를 보고 용기를 낸 결과였다. 나중에는 내가 형편없는 불효자 노릇을 많이 하게 되지만, 당시에는 이 합격 때문에 내가 효자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중년의 방황을 넘어 효자 착각으로 돌아온 이제, 어머니의 의식을 짓누르던 괴물들을 이 사회에서 몰아내도록 힘쓰는 것이 어머니 위해드리는 일이리라 생각해 본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08. 12. 19  (0) 2009.12.07
08. 12. 15  (0) 2009.12.07
08. 12. 10  (0) 2009.12.07
08. 12. 8  (0) 2009.12.07
08. 12. 6  (0) 2009.12.07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