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9. 13:57

의식이 많이 또렷해지셨지만, '착란' 현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랑 편안하게 말씀하시다가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한 차례 돌리실 때, 불쑥 정중한 경어체가 나오곤 하신다. '내 아들'이 순간적으로 '누군가'로 바뀌는 것이다. 기억의 집합이 여러 개 덩어리로 쪼개져 있으신 것 같다. 한 덩어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동안에는 보통사람과 별 차이 없는 사고력을 유지하시다가 다른 덩어리로 넘어가실 때는 인식과 사고가 모두 단층을 일으키는...

오늘은 점심 식사 나오기에 앞서 시간 여유가 많이 있었는데, 그 동안 금강경을 아주 즐겁게 들으셨다. 어떤 날은 펼쳐 드리면 입안으로 읽으시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시기도 하고, 엊그제는 "금강경 읽어 드릴까요?" 하는데 "책을 꼭 읽어야 하니?" 하고 딱하다는 듯이 말씀하기도 하셨다. 그런데 오늘은 펼쳐 드리고 "손수 읽으시겠어요?" 했더니 "네가 읽어 다고." 하신다.

나는 절에 꽤 다녔지만, 금강경을 일삼아 읽은 것은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놓은 뒤의 일이다. 1년 가량 꾸준히 읽으니 내용이 많이 익숙해져서 현토 한문 읽는 식으로 소리내어 읽는 것이 내 기분에 썩 괜찮다. 절에서 독경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식이다.

오늘은 내가 읽는 동안 펼쳐 드린 경문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시면서 고개를 끄덕이시는 등 만족한 기색을 보이며 기분좋게 들으신다. 더러 나지막하게 "잘 읽는군." 평도 하신다. 잘 들어주시는 바람에 신이 나서 꽤 여러 장을 읽고 더 계속할까 어쩔까 잠깐 쉬며 눈치를 살피는데 어머니께서 머리를 크게 끄덕이며 탄복했다는 듯이 말씀하신다. "젊은 사람이 썩 잘 읽는군." 그리고 "요새 참..." 하고 말을 흐리신다. 요새 젊은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수준과 다르다는 말씀인 듯.

내가 "어머니, 제 나이가 몇인지 아세요?" 했더니 별 걸 다 묻는다는 듯이 "니 나이? 서른 좀 넘었잖니?" 그래서 "어머니, 제가 서른만 넘은 게 아니라 마흔도 넘었어요." 했더니 눈이 둥그래져서 "그래?" 하신다. 내가 이어 "마흔만 넘은 게 아니라 쉰도 넘었어요." 하니까 고개까지 쳐드시며 "뭐? 그럴 리가!" 하신다. "어머니, 제 나이가 이제 육십이예요, 육십." 소리를 듣고는 완전히 어안이 벙벙해서 말씀도 나오지 않으시는 형색이시다. 이건 장난으로 그러시는 게 아니다. 진짜 놀라신 거다.

일전부터 병실을 떠나기 전에 "어머니, 이마에다가 뽀뽀 좀 해드려도 될까요?" 여쭈면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는데, 뽀뽀해 드리고 나오면서 돌아보면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며 손을 살래살래 흔들어 빠이빠이를 하시기도 한다. 서운한 마음이 잘 안 드시는 것 같고, 내 기분도 낫다. 원래 그런 징그러운 짓은 큰형 전공인데, 의식이 혼미하실 무렵에 나도 버릇을 들였다. 의식이 또렷해지신 두어 주일 전부턴 하지 않게 되었었는데, 며칠 전부터 다시 시작하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기에 좋은 것 같다. 아들 노릇 잘할 길이 참 많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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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9. 13:53

어제 점심 때는 장난기가 대단하셨다.

식전에 갈아놓은 배를 드리는데, 무척 맛있어 하시는 것을 두 숟갈만 드리고 치워놓았다. 식후에 드리는 것이 더 좋겠다는 장 여사 훈수에 따른 것이었다. 좀 삐지셨는지, 내 얼굴도 안 쳐다보시고 내 말씀도 못 들은 척하신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척, 사진첩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면서 반대쪽 면을 어머니에게 보이게 하니, 눈길이 사진에 꽂히신다.

몇 장 보여드리다가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다섯 식구가 함께 찍은 사진을 어머니 앞에 펼쳐놓고 있는데, 주 여사가 곁에 와 아버지를 짚으면서 이 분이 누구시냐고 묻자 "나 아는 사람이야~" 하신다. 애매할 때 많이 하시는 수작이시라 그런가보다 하고 있는데, 덧붙이신다. "대단히 잘 아는 사람이야~" 삐딱하게 대답할 수 있는 일을 왜 똑바로 대답하나, 먹물 티 내시는 거다. 흥이 나서 또 덧붙이신다. "아주 가까운 관계의 사람이지." 나를 가리키며 "저 사람 하고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야~" 0촌과 1촌의 차이까지도 명확하게 인식하시는 것이다.

흥에 너무나 겨우신지, 이제 나까지 집적거리신다. "이 사람 너하고는 어떤 관계냐? 너도 잘 아는 사람 아니냐?" "그러믄요, 어머니. 어머니랑 가까운 관계라면 당연히 저랑도 가까운 관계죠." 그러고 한두 차례 오간 뒤에 (그 내용은 벌써 잊어버렸다. 아깝다.) 내가 엄살을 떨었다. "어머니,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거 아니세요?" 그러자 대뜸 나오시는 대답이 "그래, 내가 너를 좀 놀렸다. 좀 놀리면 안 되냐?" 그리고는 기가 막혀 하는 내게 덧붙이신다. "내가 너를 놀리지 않으면 네가 너무 심심하지 않겠니?"

한 달 전까지 "아침," "점심" 외마디소리 겨우 따라 하시던 분 맞나? 요새 식사 후에는 식곤증을 느끼시는지 노곤한 기색을 보이시는데, 어제는 그런 상태에서 말문이 터져 퇴직 전 학교 시절 이야기를 길게 하셨다. 노곤한 상태에서 생각 닿는 대로 말씀이 오락가락하니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하나의 갈피를 따라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적당히 대꾸를 넣어 가며 부추겨 드리니 사설이 5분 가량 계속되셨다. 끝에 "학생들 편에 서겠나, 학교 편에 서겠나, 참 어정쩡한 입장이었지." 하는 말씀에 내 추임새가 좀 오버했나보다. "네, 어머니. 인간이란 게 원래 어정쩡한 존재잖아요." 그랬더니 재미난 얘기 들었다는 듯이 "어? 그게 무슨 뜻이냐?" 하고 따라 나오시는 바람에 회상으로부터 빠져나오시고 말았다.

어머니의 반응이 활발하지 않으실 때는 그 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내 멋대로 떠올릴 수 있었는데, 지금처럼 재미있게 노실 때는 그 노시는 모습을 그려내기 바빠 딴 생각 할 겨를이 없다. 할 수 없지, 모처럼 보여주시는 활기찬 모습이 어느 정도 안정된 단계에 이르러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또 딴 생각도 할 수 있게 되겠지. 그런데 요새처럼 회복이 좋으셔서는 불원간 "너 요새 쓰고 있는 게 뭐냐? 가져와 봐라." 하고 검열에 나서시지나 않을까 걱정까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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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9. 13:50

식사를 시작하신 후 1주일 남짓 비상근무 체제를 유지했다. 점심과 저녁 두 끼는 병원에 가서 떠먹여 드리고 가능한 한 관찰을 면밀하게 한 것이다. 내가 무슨 사정이 있을 때는 아내가 당번을 서 주었다.

입맛을 비롯해 변화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필 필요도 있었고, 또 마침 간병인 두 분이 바뀐 사정도 있었다. 그분들이 아직 익숙치 못해 행여 소홀한 점이 있을까 하는 염려도 있고, 또 보호자의 정성을 과시할 필요도 있다. 아무리 월급 타며 하는 일이라도 보호자가 열심인 것을 보면 일에 대한 느낌이 조금은 다를 수 있지 않겠는가.

새로 온 두 분 다 하루하루 더더욱 믿음직하게 보인다. 사람의 습관이란 게 참 무섭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것이다. 막 바뀌었을 때는 어떻게 해도 떠난 두 분만큼 미덥게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며칠 지나는 동안 그 분들이 익숙해지고 자신감이 늘어난 면도 있겠지만, 앞서의 분들과는 다르면서도 그에 못지 않은 신뢰감이 자라난다. 너무 가볍지 않나 보이던 심양 출신 장 여사는 그 부드러운 면이 갈수록 돋보이고, 좀 어둡지 않나 보이던 흑룡강 출신 강 여사는 그 침착성에 탄복하게 된다. 아니 정말, 처음엔 주 여사 하나밖에 믿을 사람 없는 것 같았는데, 이제 두 분이 주 여사보다 하나도 덜 미덥지 않다.

어머니는 기력과 의식을 계속 회복하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기분이 자주 바뀌시는 것 같다. 어떤 날은 침울한 생각에 빠진 것처럼 표정 변화도, 말씀도 별로 없으실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장난기가 철철 넘치신다. 여사님들이 드리는 자극에 대한 반응도 그런 기분 차이에 따라 틀의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응 패턴이 거의 일정하시던 것과 크게 다른 모습이다.

오늘 점심 때는 각별히 안정감 있는 모습이셨다. 기분이 좋으시면서도 들뜨지는 않은 모습. 내가 얼굴을 보여드리니 깜짝 놀라신 표정으로 "어, 너 여태 여기 있었니?" 하신다. 어제 저녁 보셨을 때와 시간 간격을 뚜렷이 느끼지 못하시는 것 같다.

내가 아양을 떨었다. "어머니, 집에 다녀왔어요. 제가 일 때문에 몸은 여기 늘 있지 못해도 마음은 여기 있어요~" 했더니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시다가 "네가 참 효자로구나." 하신다. 또렷한 말씀을 저만치서 들은 주 여사가 쳐다보며 "와~ 오늘은 인정받으셨네요. 축하드려요~" 하고 응원해 준다.

배를 갈아 새로 가져온 것을 식전에 몇 숟갈 권해드렸다. 첫 숟갈 입에 무시고는 예의 오묘한 표정을 짓고 계시다가 천천히 삼키고는 탄성을 올리신다. "햐~ 기가 맥히는구나~" 한 숟갈 더 넣어 드리면서 "어머니, 기가 또 맥히십니까?" 했더니 얼결에 따라서 "햐~ 기가 또 맥힌다." 웃으며 또 한 숟갈 넣어드리고 "어머니, 기가 자꾸자꾸 맥히십니까?" 했더니 이번에는 "햐~ 기가..." 하다가 뭔가 이상한지 얼버무리신다.

일전부터 주 여사가 미음을 죽으로 바꿔 드려도 괜찮을 것 같다고 의견을 주었지만, 웬만하면 미음으로 길게 하시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미음으로 영양 공급은 충분한 것 같다. 식당에서 반찬을 믹서로 갈아 내보내 주는데, 보통 세 가지 중 두 가지는 미음에 섞어 드릴 만하다. 그리고 집에서 고기 삶아서 간 것을 가져가 냉장고에 넣어두고 상황에 따라 한두 숟갈씩 보태서 먹여 드린다. 과일은 연시 큼직한 것 두 개를 사흘 동안에 먹어치우신 후, 배 간 것으로 바꿨다. 더러 두유나 율무차도 권해 드릴 수 있다. 얼마동안 이런 식으로 해서 기력을 바짝 회복시켜 드린 후에 틀니 넣어드릴지는 천천히 결정하려 한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부터 회복 조짐을 보이시는 데 힘입은 일이었거니와, 그 동안 꾸준하신 회복이 생각할수록 놀랍다. 나 자신 이렇게 적으면서 살펴드리는 시각을 더 잘 정리할 수 있고, 또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어머니 사정을 소상히 이해하며 더 효과적으로 염력을 일으켜주시는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회복이 뚜렷한 고비를 훌쩍 넘으신 것을 뵈며 모니터링해주는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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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