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7. 13:00
 

작은형이 어머니를 뵈러 왔다. 11시쯤 집으로 왔다. 병원 옮기신 지 네 달이 되는데, 아직 어딘지도 몰라 데려다 달라고 내게 오다니, 저런 인간이 내 아들 아닌 게 천만다행이다. (하긴, 내 아들놈도 할머니 병원 옮기신 후 아직 와 뵙지 않고 있다. 으, 기맥혀~ 그러나 그놈은 강의와 박사과정을 금년에 함께 시작해서 똥오줌 못 가리는 형편을 아니까.)

다음 주 나올 책 최종 교정 검토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게 하려다가 생각 밖으로 일이 많기에 11시 반쯤 길을 가르쳐주어 먼저 보낸 다음 한 시간 뒤에 따라갔다. 가 보니 모자 간에 다정스럽게 누워 있고 앉아 있다.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 형 모습은 아침저녁으로 오는 사람 같다.

요 전날 형을 '날건달' 같다고 했지만, 좋게 얘기하면 신선 같은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는 신선이란 것이 바로 날건달 같은 거니까.) 우리 3형제의 기질이 서로 다른 것을 동양사상의 세 갈래에 그럴싸하게 맞춰보곤 하기도 했다. 큰형은 유가 선비다. 어떤 충격 앞에서도 과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큰 성취를 드러나게 추구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쌓아나간다. 내가 작은형을 딱해 하는 것은 큰형과 대비되는 탓도 크다.

나로 말하자면 불교 성향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내 머리 내가 깎는 짓을 길게 할 건 아니고, 작은형은 도가 성향으로 본다. 세상의 울타리 밖에서 살기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불성실하게 살려고 일부러 애쓰는 사람 같다.

작은형과 나는 한 학기 상관으로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형은 자기가 먼저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불법추월 했다고 불평했지만, 그만둔 이유에는 차이가 많다. 나는 공부 좀 제대로 하고 싶어서 그만둔 것인데, 형은 공부가 싫어서 그만둔 것이었다. 그런데 묘한 일은, 공부 계속하는 나는 여태 학교를 멀리하고 지내고 있는데, 형은 몇 해 안 있어 다른 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공부 안 해도 된다는 조건으로.

어머니가 노곤해 하시는 것을 보고 물러나와 아내가 일하는 식당으로 가서 늦은 점심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근 반 년만에 와서 수숙간에 얼굴도 못 보고 지나칠 판이다. 이 신선 같은 시아주버님을 아내가 그래도 좋은 낯으로 대해주고 밥값도 내주어 고맙다. 급하게 나올 때 옷 갈아입으면서 돈을 안 가지고 나왔었다.

밥 먹으면서 지내는 얘기를 서로 나누는데, 형의 학교 생활 얘기는 딱 듣기도 싫다. 그 학교 학장, 이사장한테 내가 괜히 미안하다. 우리 형을 '나쁜 놈'으로 여겨서가 아니다. 그 사람은 조직활동에 맞지 않는 사람이다. 맞지 않는 짓을 하려니 좋은 점이 발휘되기보다 모자란 점만 드러나는 것이다.

큰형과 나는 모습을 외탁하면서 성질은 아버지를 닮은 반면, 작은형은 아버지 모습을 닮고 성질은 어머니를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다. 어머니와 작은형의 가장 큰 공통분모는 '정열'이다. 모자간에 대판 싸우는 것을 나이 서른 넘을 때까지 보았는데, 시정잡배도 따라오기 힘든 수준이었다.

몇 주일 전 대구 가서 우리가 숙부님처럼 대해 온 고종 형님을 뵐 때도 얘기 끝에 모자간의 싸움 관전한 기억을 그분이 되살려 이야기를 하셨다. 큰형이나 나라면 어머니 아니라 누구랑도 보일 수 없는 험한 꼴인데, 둘째는 어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지으셨다. 그런데 나는 작은형 혼자 성질만으로 그런 싸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손벽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않는가? 어머니께서는 이런저런 책임감 때문에 본성을 드러내고 살기 힘드셨지만, 그런 식의 싸움을 즐기는 성질을 가지신 것이 아닌가, 형과의 격렬한 충돌 속에서 카타르시스도 느끼고 존재감도 느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착하고 성실하고 효성스러운 큰형이나 내가 해드리지 못하는 몫을 작은형이 해드리는 것이 있다고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와 뵈면 뭐가 덧나나? 그리고 그 신선인지 날건달인지, 어울리지도 않는 교수질 빨리 그만뒀으면 좋겠다. 바로 그런 식으로 학교 생활 하는 놈들 꼴보기 싫어서 내가 학교를 떠난 건데...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08. 12. 10  (0) 2009.12.07
08. 12. 8  (0) 2009.12.07
08. 12. 3  (0) 2009.12.07
08. 12. 1  (0) 2009.12.07
08. 11. 30  (0) 2009.12.07
Posted by 문천
2009. 12. 7. 12:58
 

어머니와 간병인들 사이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너무 가까워 보인다. 내가 말씀을 걸면 무슨 바람이 지나가나? 하는 식으로 천천히 눈길이 옮겨오시는데, 어느 여사님이든 말씀을 걸면 즉각 눈길이 꽂히신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아들으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하시다. 내가 드리는 말씀은 알아들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기색이신데.

어찌 생각하면 그럴 만한 일이기도 하다. 그분들과는 하루 24시간 함께 지내시는 것이 벌써 네 달을 채워가고 있다. 모든 수발을 그분들이 다 해드린다. 나야 명색이 아들이지, 기저귀 한 번 갈아드리는 일이 있는가? 그분들에게 정도 들고 의지도 되시는 것이 이상한 일일 수가 없다.

간병인 복은 참 좋으시다. 작년 7월 파주 탄현면의 자유로요양병원에 들어가실 때부터 능력이나 품성이나 믿음이 가는 여사님을 만났다. 심양 출신의 장 여사, 그 작은 체수에 선한 눈매가 지금도 생각난다. 며칠 안 있어 새로 만든 병실로 옮기면서 장 여사 손길에서 떨어지셨지만, 장 여사는 틈틈이 들여다보며 어머니를 아껴드렸다.

그 뒤로 몇 번 간병인이 바뀌었고, 바뀔 때마다 "이렇게 믿음직한 분을 잃으면 어쩌나?" 걱정에 휩싸였지만, 이상하게도 바뀔 때마다 더 믿음직한 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 병원에서 맨 끝에 돌봐드린 조 여사는 화룡에서 온 분으로 나랑 동갑인데, 그분에게는 정말 깊은 경의까지 느꼈다. 사람이 똑똑한 데다 정도 깊고, 게다가 행실까지 아주 반듯한 분이다. 내가 없을 때 찾아온 분이 용돈 얼마라도 드리고 가면 내게 꼭 금액까지 밝혀서 알려주곤 했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쯤 문안 전화를 드리면 무척 반가워한다. 그렇게 반가워할 거면서도 이쪽으로 전화는 안한다. 객지에 나와 약한 입장인 사람이 연락을 취하면 뭔가 바라서 그러는 것처럼 보일 것을 꺼리는 그 마음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정말 조 여사 손길에서 어머니를 떼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 용태가 안 좋으시니 그 병원에 계속 계셔도 중환자실로 옮기셔야 할 형편이 되어 병원을 바꿀 결단을 내렸다. 애초에 그 병원을 고른 첫째 이유가 한탄강 바라보는 한적한 위치라서 도시생활을 싫어하시는 어머니 입맛에 맞는다는 점이었는데, 거동도 못하시게 되니 그 이유가 사라졌다. 시설을 비롯해 기능적 조건이 나은 시내의 병원으로 옮겨 모실 생각을 하고 일산 시내 병원들을 둘러본 결과 탄현역 앞의 현대재활요양병원을 골랐다.

자유로병원에서 13개월 계시는 동안 그만하면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셨다. 정말 거기서는 대접도 VIP 대접을 받으셨다. 그곳 직원들은 어머니 경력에 외경심을 품기도 했고, 외진 곳의 병원에 우리가 워낙 부지런히 다니니 안면이 받혀서도 각별히 대해드리게 되었다. 게다가 간병인들까지 모두 남 같지 않게들 살펴드린 것은 아내 덕분이다. 수십 명 간병인 중에 한 사람 빼고는 모두 조선족이었는데, 같은 조선족인 내 아내의 시어머님이 어찌 남 같겠는가. 나랑도 많이들 친하게 되어 휴가 나갈 때면 내가 대화역까지 태워드리면서 "선생님은 우리 간병인들 전속 쓰지(기사)예요." 하는 말을 듣곤 했다. 식당에서 밥 먹다가 미묘한 얘기는 중국어로 바꿔서들 얘기할 때가 있다. 한 번은 그러다가 옆 자리의 나를 쳐다보며 하는 말이 "어머, 저 양반은 다 알아들을 텐데, 부끄러워서 어떡해?" 하는 것 같다.(중국에서 몇 해 지냈어도, 그런 말 귓전으로 알아들을 만큼 익히지는 못했다.) 눈치로 때려잡고 "워 팅부동, 니 팡신바.(못 알아들어요. 마음 놓으세요.)" 했더니 모두 정신없이 웃는다.

직원 중에도 고마운 분들이 많지만, 그중에도 살림꾼 노 실장은 다음 주 책 나오는 대로 한 권 갖다주러 가봐야겠다. 1년 넘게 그곳에 계실 수 있었던 데는 그 분의 도움이 컸다. 그 분 아버님도 그곳에 입원해 계셔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나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버님이 얼마 전 돌아가셨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해 마음이 미안하다. 병원을 옮길 때, 우리가 떠나는 것이 서운하면서도 지금 상태에서는 옮기시는 편이 좋다고 격려해 주고, 옮길 병원의 살림꾼 안 실장에게도 각별한 배려를 부탁해줬다.

자유로병원까지 집에서 차로 30분 걸렸다. 5분도 안 걸리는 지금 병원을 다니면서 생각하면 그 먼 데를 어떻게 매일 다녔을까 싶다. 그러나 그 때는 멀다는 생각 하나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다녔다. 정말로 즐거웠다. 나 자신에게 못된 구석이 보통사람들보다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보호를 필요로 하시는 어머니 보호해 드리는 자세에는 못된 점 다 치워놓고 괜찮은 면만 나타난다. 원장님에서 간병인, 그리고 낯이 익은 환자분들까지 내 얼굴만 보면 괜히 좋아들 하는 분위기로 여러 달 지내다 보니 진짜로 내 품성까지 많이 순화된 것 같다. 고맙습니다, 어머님.

지금 병원의 여사님들 얘기를 하다가 전 병원 얘기로 넘어간 것이 너무 길어졌다. 오늘은 이 정도로 접어놓고 우리 김 여사, 박 여사, 주 여사 이야기는 다음날로 미룬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08. 12. 8  (0) 2009.12.07
08. 12. 6  (0) 2009.12.07
08. 12. 1  (0) 2009.12.07
08. 11. 30  (0) 2009.12.07
08. 11. 28  (0) 2009.12.07
Posted by 문천
2009. 12. 7. 12:56
 

회복을 크게 바랄 계제는 아니라도 용태가 좋아지니 지내기도 편해 보이고 생각도 임의로우신 것 같아서 마음에 좋다. 팔도 거의 굳어지시는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이제 꽤 잘 움직이신다. 너무 잘 움직이셔서 코에 꽂은 피딩 튜브를 두 번이나 잡아 빼시는 바람에, 일 저지른 오른 팔 손목이 얼굴까지 가지 못하고 아래쪽에서만 놀도록 묶어놓고, 누가 살펴드릴 수 있을 때만 풀어 드리는 것이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이다.

워낙 자유를 좋아하고 억압을 싫어하는 분이시라 이렇게 행동이 제약된 상태를 견뎌내시는 것이 처음에는 신기로웠다. 그런데 몇 달째 몸도 못 일으키고 누워만 계시는 데 답답증을 보이지 않으시는 것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거동 못하게 되신 지는 반 년 가량 되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iv 주사를 꽂아놓으면 성가셔 하셔서 무의식중에라도 잡아 뽑으시기 때문에 발이나 다리에만 놓도록 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오랫만에 정신이 많이 드시면서는 갑갑한 기색을 거의 안 보이신다. 지금 상황을 하나의 단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다.

오늘은 미국의 큰형에게서 온 전화를 꽤 자상하게 받으시더라고 김 여사가 신이 나서 설명해 준다. 세 분 간병인 가운데 성격이 씩씩하면서도 침착한 김 여사가 팀장 격이다. 형이 김 여사 핸드폰으로 전화를 치면 어머니께 쫓아가 바꿔 드린다. 전에는 쥐고 귀에 대어 드려야 했지만, 요새는 어머니가 손에 쥐고 받으시는데도 곁에 붙어 서서 대답 잘 하시라고 응원도 해 드리고, 내가 나중에 가면 녹화 중계도 해준다. 김 여사 형편이 안 될 때는 박 여사 번호를 치도록 알려놓았다. 체수가 작은 박 여사는 성품이 자상하고 장난기가 좀 있어 보인다. 막내인 작은 김 여사는 무슨 일이 있다던가 1주일째 보이지 않는데, 대신하고 있는 거구의 여사님도 벌써 어머니를 많이 아껴드리는 기색이다. 나이는 모두 50 전후 같은데, 중국 동포들은 요즘 한국인에 비해 나이 들어 보이는 경우가 많으니 조금 적을 수도 있겠다.

김 여사가 형의 전화 얘기 끝에 "작은 아드님한테도 얘기 좀 하세요." 하니까 "내가 얘기를..." 하고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여러 마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 뒤론 내가 있는 동안 다시 말씀이 없으셨다. 대신 많이 웃으셨다. 반응이 꽤 활달하신 것을 보고 내가 이런저런 예전 일 생각나는 대로 말씀드리니 대목대목에서 웃음을 지으시는 것이 거의 다 알아듣는 기색이시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 걱정해 주시는 몇 분께 전화를 드렸다. 사람도 잘 못 알아보시는데 찾아와 봐야 마음만 아플 것을, 부담감을 드리기만 할 것 같아 용태를 알리는 전화도 하기가 힘들었었다. 지금 상태 같으시면 찾아오는 분들도 편하게 뵐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작은형에게 전화했다. 네 달 전 병원 옮겨드릴 때 전화로 의논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끝내 잡히지 않았고, 녹음을 몇 번씩 해놓아도 여태 연락 한 번 없었다. 그 후로는 나도 다시 전화하려 애쓰지 않고 지냈다. 마음이 삐지기도 하고, 본인이 무슨 사정이 있다면 괜히 덧드릴 필요 없겠다는 생각도 해서였다. 그런데 저만큼 정신 돌리신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고 보니, 진짜 이 사람 웬 일인가 걱정도 들어 오랫만에 전화를 돌리게 되었다.

전화벨이 몇 번 울리고 또 꽝인가 생각하는데 전화를 받는다. 목소리도 멀쩡하다. 근황을 알리니 며칠 후에 와 뵙겠다고 한다. 목요일 어떻겠냐 하기에 그 날은 내가 다른 데 일이 있어서 그 날 오면 어머니가 "닭 대신 꿩" 왔다고 좋아하시겠다고 했더니 "닭 대신 꿩?" 하고 한 차례 천진스럽게 웃고는 꿩이랑 닭이랑 함께 보시도록 금요일에 오겠다고 한다.

형제간에 흉보는 얘기를 이런 자리에서 하는 것이 온당치 않겠지만, 나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라면 무엇이든지 기탄 없이 할 생각이다. 다만 오늘은 시간도 늦고 글도 길어졌으니, 닭인지 꿩인지 흉보는 얘기는 금요일 얼굴 본 뒤에 하겠다. 근데 나는 우리 어머니가 나 같은 착실한 효자보다 날건달 같은 둘째 아들을 그렇게 고와 하시는 까닭을 영 모르겠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08. 12. 6  (0) 2009.12.07
08. 12. 3  (0) 2009.12.07
08. 11. 30  (0) 2009.12.07
08. 11. 28  (0) 2009.12.07
08. 11. 26  (0) 2009.12.07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