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7. 13:03
큰형에게 일기를 계속 메일로 보내주고 있다. 그것을 보며 형도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는 모양이다. 오늘 받은 메일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
"어머니가 어느 시점에서 그때까지처럼 점잖은 시늉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하신 일은 내가 모르는 일이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어떤 마음이셨는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나는 그런 식의 선언을 할 것 같지 않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지, 누구에게(특히 자식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할 것 같지 않다.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그리고 자기 결점을 인정하셨지만, 어머니는 향상을 위한 노력을 그만두신 일이 없었다. 사실에 있어서 만년에는 생활 전체를 그 목적에 바치셨다. 그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차치하고, 그 치열하신 노력 자체가 나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둘째도 못 따라가지. 너는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어머니는 화가 많이 나실 때 다른 이들보다 당신 약점을 쉽게 드러내시는 편이다. 타고나신(또는 습관이나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성품은 약하신 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런 약점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더할 수 없이 강하신 분으로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의 일생은 하나의 성공이라고 나는 본다.
그 시점에서 어머니가 유럽에 가신 이유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학술적인 필요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막내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할 때 왜 서둘러 귀국하지 않으셨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가 다른 시각을 내놓는 것을 보니 더 잘 설명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D 박사와의 재혼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신 일이 있다. 가정이 있는 분이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였던가,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나는 반대한다는 말씀을 드렸고, 그것으로 얘기는 끝났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다. 기존의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반대했던 것일까? 정확하게 어떤 이유였는지조차 지금 내 기억에는 흐릿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분명히 생각되는 것은 내가 그분의 행동만이 아니라 생각에까지도 가혹한 제약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았다. 도덕적이건, 아니건.
어머니의 선언이란 것이 내게 대한 구속감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전적으로 내 책임이란 말이 아니다. 그건 과대망상이겠지. 그 당시에 내가 어머니께 좀 더 도움이 되는 인간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누워계신 분을 놓고 아들들은 이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다. 그것도 주변에선 효자로 꼽아주는 아들놈들이. 그리고 그 중 한 놈은 그분이 들으면 난처해 하실 수도 있는 얘기를 이렇게 기록으로 정리까지 하고 있다. 무서운 세상이다.
큰형과 나는 생각을 함께 하는 것이 여러 가지 있다. 인간은 무엇보다 노력에 의해 평가된다는 점. 약점을 감추기보다 끌어안음으로써 사랑이 이뤄진다는 생각. 우리는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결함이 없으신 분이라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랑스러운 것이니, 다른 이들의 어버이 자랑과 비교해서 더하고 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서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는 자랑도 아니다.
이런 생각에서 내가 형보다 더 과격한 면도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아버지의 직접 기억을 형은 꽤 가졌고 나는 전혀 가지지 못한 데서 오는 차이일 것도 같다. 추상화된 존재로만 아버지를 느끼며 자라나 내 인생의 고민을 가지게 된 후에야 그분의 실제 모습을 마음속에 키우게 된 곡절 속에서 '현실 속의 인간'에 대한 강한 집착을 키우게 된 것이 아닐지.
간호사나 간병인들은 내가 어떤 착잡한 마음을 뱃속에 담고 어머니를 바라보는지 알 길이 없다. 매일 찾아와 편안하시기 비는 나를 깨끗한 마음의 효자로만 본다. 효자라니. 지난 십여 년간 나 자신의 행적을 되돌아볼 때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그러나 3년 전 귀국해 약해지신 그분 모습을 보고 출국을 포기한 이래의 내 자세를 돌아보면 차츰 어색한 느낌이 줄어든다. 전통적 의미의 선량한 효자는 아니지만 너무나 복잡해진 현대 세계가 만들어낸 '신종' 효자일지 모르겠다.
오늘은 무거운 생각에 많이 잠겨 있었다. 작년 가을 기력이 아직 괜찮으실 때 어머니의 유머감각을 보여준 일 하나를 기분전환 삼아 떠올려 본다. 식사를 도와드리려고 곁에 서 있는 내 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물으신다.
"너도 식사 했냐?"
"아직 안 했습니다, 어머님."
"그런데 왜 그렇게 배가 부르냐?"
양옆의 환자분들이 킥킥 웃는다. 면구스럽기도 해서 능청을 떨었다.
"어머니, 이 배가 효자배란 거예요. 어머니께서 잘 드시면 제가 안 먹어도 저절로 불러진답니다."
알았다는 듯이 식사로 주의를 되돌리시던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한 마디 툭 던지신다.
"효자배? 내 보기엔 꼭 똥배 같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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