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40> 중국에서 바라보는 한국 (3)

기사입력 2004-08-16 오후 3:40:34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말한 것은 공산권의 붕괴로 이념의 갈등이 끝났으니 갈등으로 엮어지는 역사가 더 이상 엮어질 여지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미국의 일방주의를 뒷받침하기도 한 이 단정의 근거가 박약하다는 것은 그 후 드러난 ‘문명의 충돌’로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쿠야마의 단정에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념의 갈등은 세계사의 한 시대를 지배한 명제였다. 이 갈등의 종말이 비록 ‘역사의 종말’은 아니더라도 ‘근대사의 종말’로 의미를 가질 수는 있다. 그리고 이것을 ‘역사학의 종말’로 음미해 볼 여지도 있다.
  
  역사서술은 인류문명의 초창기부터 있어 온 지적 활동이다.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에도 역사서술은 주술사의 푸닥거리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부족이 공유하는 과거의 기억은 푸닥거리를 통해 부족의 정체성을 제공했으며, 주술사는 그 구연을 통해 영도력을 발휘했다.
  
  문자 발생 후 역사서술은 지배계층의 교양이 되었다. 문자 덕분에 정보의 거의 무제한 축적이 가능하게 된 상황에서 이전의 구연 단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사회가 역사의 공유를 통해 정체성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서술은 영토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문자를 향유하던 지배계층은 그 위상과 소명을 확인하는 데 역사의 거울을 애용했다.
  
  근대역사학의 발생은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은 것이었다. 정보의 축적만이 아니라 유통까지 대형화함에 따라 피지배층까지 문자를 향유하게 된 상황에서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국민교육이 개발되었고, 역사교육은 그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역사교육의 내용을 확보하고 담당자를 양성하기 위해 직업적 역사학자들이 대학에 자리잡음으로써 역사학은 종래 교양으로서의 역사와는 다른, 분과학문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죠지 이거스는 “20세기 사학사”에서 ‘이야기 역사’와 ‘역사과학’을 대비시킨다. 교양으로서의 역사는 선사시대 이래 이야기 역사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자기 사회의 역사를 그 사회 안에서만 서술하고 열람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술적 고증이 있을 뿐, 이념적 해석의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국가들의 경쟁이 치열해진 근대의 상황 속에서는 서로 다른 국가들이 자기네 역사서술이 옳다고 다투는 ‘역사의 경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수단으로 역사의 ‘과학화’가 촉발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세계화의 물결 속에 국가의 기능은 약화되고 있다. 그리고 컴퓨터를 이용한 정보혁명으로 인해 과거의 일을 되살피는 작업이 인류의 지적 활동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역사학의 수요는 사회에서도 대학에서도 줄어들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를 가장 첨예하게 겪고 있는 것이 바로 역사학 분야인 것이다.
  
  한국인이 단군을 숭상하고 광개토왕을 그리워하는 것은 이야기 역사의 흐름 속에서다. 중국인이 3황5제를 숭상하고 자기네 성현들을 그리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학적으로 따진다 해도 따질 기록 자체가 이야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단군의 실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했다고 나서는 북한 당국의 주장에 실소를 금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유전자 감식을 할 수 없는 대상인 바에야 우리의 이야기 역사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 분들이 우리 조상임을 입증할 다른 방법이 없다.
  
  고구려사 관계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동북공정의 방향은 “중국변강통사총서(中國邊疆通史叢書)”의 일환으로 작년에 나온 “동북통사(東北通史)”(李治亨 주편)에서 알아볼 수 있다. 일부 참여자들의 주장에는 참으로 한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집에서 제사도 지내 오고 벌초도 해 온 우리 조상을 놓고 어느 날 옆집에서 “이 분은 우리 외가 조상이니 이제 우리가 제사를 모시겠다”고 나서는 형국이다.
  
  중국의 이런 일부 학자들에게는 분노가 아니라 연민을 느낀다. 오랫동안 그곳 역사학을 묶어 놓고 있던 유물사관이 힘을 잃자 서방에서는 한 물 가다 못해 타기받고 있는 국가주의 사관에 좋다고 매달리는 꼴이다. 우리만 잘나고 이웃은 못났다는 주장에 목청을 높이는 것 외에는 학자로서 사회에 공헌할 길을 찾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딱한가.
  
  동북공정의 일부 독선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정치학 등 사회과학 분야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중국 내에서도 들리기 시작하고 있다. ‘통일다민족국가’의 의미를 현상의 규정에 그치지 않고 통시적인 개념으로 확립하려 든다면 자가당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원래 동북공정은 변강사지(邊疆史地) 연구의 일환으로서 역사 연구는 그 일부에 불과한 것인데, 앞으로는 역사 연구의 비중이 줄어들고 독선적인 성향도 억제될 것이 예상된다.
  
  철 지난 국가주의 성향은 한국의 반응에서도 적지않게 느껴진다. 동북공정의 연구비가 5년간 총 1500만 위엔(한화 약 21억원)이라는 것은 진작부터 밝혀져 있다. 이 사실이 국내에도 충분히 알려져 있다는 것은 “창작과비평” 지난 여름호에 실린 이영호 씨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중국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논설에 “3조원”의 신화가 생생하게 살아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일인가.
  
  중국 일부 학자들의 미숙하고 무책임한 자세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을 놓고 중국 주류의 추세를 억측하는 것은 조심할 일이다. 프레시안만 하더라도 일전 “동북공정은 후진타오가 지시한 사업”이라고 호들갑을 떨었거니와, 비준한다는 뜻의 “批示”를 “지시”로 곡해한 것이다. 중국의 행정과 지방자치 관행을 감안한다면 지방 또는 민간의 사업에 대한 중앙의 비준이나 승인이라는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둘 수 없다. 한 조선족 학자는 한국 언론의 과열된 반응을 지적하며 “왜 그들은 미국과 일본만 좋아할 짓을 하는가?” 하고 묻는다.
  
  이거스는 “20세기 사학사”의 말미에서 과학적 역사가 퇴조하고 이야기 역사로 돌아갈 추세를 전망했다. 역사가 투쟁의 무기에서 교양의 수단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근대역사학의 경력이 일천한 한국, 그보다도 더욱 경험이 빈약한 중국에는 아직도 역사를 투쟁의 무기로 휘두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역사가 교양의 도구로서 인접국 사이의 갈등보다 신뢰에 공헌하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역사전쟁’의 와중 “일사양용(一史兩用)”의 목소리가 자라나고 있는 중국에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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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