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히틀러의 웃음

기사입력 오전 7:25:31

히틀러의 웃음

칼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하수인이었다. SS 간부로서 1938년 비엔나에서, 그리고 이듬해에는 프라하에서 유태인 청소를 지휘했고, 1942년 이후에는 수용소의 집단 학살을 기획하고 관리했다. 그가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요원들에게 체포돼 예루살렘에 압송되었을 때 이 '살인마'의 재판은 세계의 이목을 모았다. 1961년 12월 이스라엘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62년 5월 교수형이 집행됐다.

아이히만의 재판과 처형에 대해서는 많은 글이 나왔거니와, 가장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이다. 독일 유태인 출신으로 나치 박해를 피해 41년 미국에 이주한 아렌트는 전체주의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가진 학자였다.

아렌트가 많은 유태인들을 격분시킨 논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박해 당시 유태인 사회 지도층이 나치의 통제에 협조했다는 것이다. 이런 협조 없이 몇 년 안 되는 기간 동안 500만 이상을 처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아렌트는 지적했다. 본의가 아니었더라도 '결과적으로' 협조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또 이 지적에 일반 유태인들이 발끈하는 것도 쉽게 이해가 가는 일이다.

또 하나의 논점은 보다 미묘한 것이었다. 아렌트는 히틀러와 아이히만을 '악마'가 아닌 비속한 인물들로 그렸다. 20세기는 과거와 달리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특이성이 없는 비속한 인물들이 술수만으로 권력을 쥐고 엄청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비속성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관점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을 가장 두드러진 예로 그는 꼽았다.

유태인들이 이 논점에 분노한 것은 대학살이 유태인 정체성(正體性)의 근거가 돼 있기 때문이었다. 악마적 범죄에 희생당했다는 비극성은 이스라엘의 호전적 대 아랍 정책까지도 정당화시켜 주는 시오니즘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 희생을 비속한 인간들의 비속한 범죄로 격하시키는 것을 시오니즘에 대한 모욕으로 유태인들은 받아들였다.

히틀러의 웃는 얼굴을 만들어 담은 껌 광고에 독일 대사관이 항의한 배경에도 비슷한 상징성이 작용한 것 같다. 히틀러를 완벽한 악마로 규정해야만 나치즘의 죄악을 일반 독일인들로부터 절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이 광고를 봤다면 뭐라 했을까.

▲ 히틀러의 웃음.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최고 전범으로 '악마' 취급을 받았지만 한나 아렌트는 그가 천박한 욕망에 휘몰린 일개 선동 기술자에 불과하다고 논했다. 건전한 인간관을 가지지 못한 지도자가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보여준 극단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히틀러의 세기적 범죄를 증오 아닌 경멸의 대상으로 직시한 아렌트의 지성에 경의를 표한다. ⓒ프레시안

  한나 아렌트의 'banality of evil'이란 말을 인용할 때 나는 '악의 비속성'이라고 써 왔다. 그런데 아렌트의 책 우리말 번역서에는 이것이 '악의 평범성'이라고 흔히 옮겨져 왔음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사전적인 뜻으로는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하다. 그런데 아렌트가 이 말을 통해 내세운 논점을 놓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평범성'엔 아쉬운 느낌이 든다. 전통적인 '악(evil)'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아렌트가 보는 20세기의 악은 경멸의 대상이다. 천재성도 용기도 보여주지 않고 그저 천박한 탐욕에 몰려 저질러지는 악, 그에 대한 아렌트의 경멸감이 '평범성'에는 제대로 담기지 않는다.

아렌트가 말하는 비속성은 근대문명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조업 현장에서는 명장(名匠)이 사라졌다. 싸움터에서는 용사(勇士)가 없어졌다. 천재(天才)조차도 20세기의 천재는 기능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20세기 예술계의 거장(巨匠)들은 복사바다 속에 빠져버렸다.

비속화 현상은 전쟁에서 제일 두드러진다. 전사와 전사 사이의 육박전은 비중이 떨어지다 못해 20세기 말의 전쟁에서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전쟁의 주류는 눈먼 대량 살상 무기의 몫이 되었다. 공격당할 위험이 없는 곳에서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상대방을 인간으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다. 옛날의 전사들이 자기 뜻에 목숨을 걸던 고귀한 활동이던 전쟁이 한낱 물량적 경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쟁만이 아니라 일반 경쟁이나 투쟁에서도 20세기 세계에서는 비속화의 추세를 널리 읽을 수 있다. 돈벌이에서도 개인의 능력과 노력보다 자본의 힘이 압도적인 작용을 하게 되었고, 학생들의 공부도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어느 분야에서나 '기득권'을 쌓고 활용하는 것이 '도전'보다 유리한 전략으로 채택되는 환경이 굳어지고 있다.

비속화 추세가 가장 두드러진 분야의 하나가 정치다. 유행하고 있는 '정치공학'이란 말은 아마도 '정치철학'과 대비되는 뜻일 것이다. 정치가 무엇인가. 한 사회의 진로를 결정해 나가는 과정이다. 진로 결정을 위해서는 철학으로서 가치관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정치에서는 가치관도 철학도 가지지 않은 테크니션들이 선거 승리를 위한 기술만을 가지고 폴리티션들의 설 땅을 빼앗는 그레셤의 법칙이 판을 친다.

지난 가을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 작업을 하면서 뉴라이트가 '성공'의 의미를 외면하며 '승리'에만 집착하는 행태를 지적한 바 있다. 정치철학 실종의 극단적 사례라 할 것이다. 정권 운용을 위한 승리만을 추구할 뿐, 국가 운영의 성공은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이다.

정치의 비속화 추세는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2차 대전 후의 미국을 보더라도 나름의 정치철학을 가졌다고 할 만한 대통령이 몇 안 된다. 아이젠하워야 워낙 인기 높은 전쟁 영웅이라 대통령이 된 것이고, 카터와 오바마 정도 철학을 가진 대통령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에 앞서 닉슨과 부시가 워낙 국민을 지겹게 만들어 놓은 상황 덕분이었다.

정치공학의 달인으로 자타가 공인한 닉슨의 전략 노선을 설명하는 '미치광이 이론(Mad Man's Theory)'이란 것이 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 미국이 어떤 극한적 대응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상대방에게 심어주는 것이 미국의 국익을 증진시켜 준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의 대 베트남 전략 중에는 이 이론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것이 많았다.

당시에는 이 전략이 얼마만큼의 전술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미국의 국가정체성은 그로 인해 크게 훼손되었고 미국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다. 국가 사회의 큰 '성공'을 생각지 않고 목전의 '승리'만을 추구한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행태를 보며 미치광이 이론을 떠올릴 때가 많다. <PD수첩> 탄압에서 언론법 '입법 전쟁'까지, "상식? 상식이 더 센지 우리 힘이 더 센지 한번 붙어보자!"는 식으로 계속 밀어붙이기만 한다. 지금의 승리만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장래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네가 힘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이 힘으로만 결정되는 형세를 만들려 든다.

아렌트가 히틀러와 스탈린을 지목해 말한 '비속한 악'이 바로 이런 것이다. '사회의 성공'이란 거대한 욕심이 아니라 남에게 이기고 남보다 많이 갖기 위한 천박한 욕심만이 춤춘다. 힘 있는 사람들이 사회 전체의 성공을 외면하는 이런 사회는 망하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사회가 망했던 것처럼.

이 미치광이 행태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요즘 공격에서 절정에 달한 감이 있다. 부인과 아들을 '참고인'으로 소환했으면 '피의자'는 노 전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 박연차의 진술을 인용한 '검찰 관계자'들의 폭로는 갈 데까지 갔다. "무는 호랑이는 짖지 않는다"던데 왜 이렇게들 짖어댈까? 정말로 우리의 전임 국가 원수에게 문제가 있다면 조용히 살펴봐서 피할 수 없는 문제가 확인될 때 어쩔 수 없이 발표하는 것이 '상식'이고 '예의' 아닌가? 왜 이렇게 속 보이도록 떠들어대는 걸까?

노 전 대통령은 부인이 박연차의 돈을 받은 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다. 액수는 3억 원 더하기 100만 달러인 모양이다. 이것만으로도 많은 국민이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은 그가 워낙 청렴과 도덕성을 간판으로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권력형 비리' 축에 낄 수도 없음은 물론, 지금으로서는 '비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사안이다.

그런데도, '무죄 추정의 원칙'과 '피의 사실 공표 금지 원칙' 때문에 ○○일보사 ○사장 이름이 신문 지상에 오르지도 못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검찰 관계자'는 전임 국가 원수의 피의 사실에 대한 자칭 뇌물 공여자의 진술 내용을 중계 방송하기 바쁘다. 당장 언론이 잘 받아먹어 주니까 목전의 승리에 도취된 꼴이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이 요 며칠간 발표한 글에 거짓이 없다는 데 10만원 걸 용의가 있다. 그가 거짓말을 일체 않는 성인군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해서 안 될 자리를 살필 줄은 아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다른 나라 대통령의 정책 공약을 놓고 "선거 때 무슨 소리는 못 하냐?"는 사람과는 전연 다른 사람이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刀筆吏의 시대

기사입력 오후 3:31:38

刀筆吏의 시대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가운데 정치 사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은 유가(儒家)와 법가(法家)였다. 전체적으로는 유가가 더 널리 퍼져 있었지만 진(秦)나라는 법가를 채택해 부국강병을 이룸으로써 천하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법가는 진나라가 오래 가지 못하고 망하게 된 원흉으로도 꼽힌다. 시황제가 죽은 뒤 환관 조고(趙高)가 권력을 장악해 유능한 인재를 멋대로 죽이고 나라를 망친 것은 법가에 의거한 맹목적 통치체제 덕분이었다고 지적된다. 그리고 형식적 법률체계에 매달려 백성을 편하게 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민심이 반란군 쪽으로 휩쓸리게 되었다고 한다.

진나라의 뒤를 이은 한(漢)나라가 법가를 기피한 것은 이런 나쁜 평판 때문이었다. 그러나 효율적 통치 방법으로 법가의 매력을 황제들은 버릴 수가 없었다. 특히 한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고 평가되는 무제는 법가 전통을 이어받은 혹리(酷吏)들을 많이 등용했다.

<사기> '혹리열전'의 가장 대표적 인물은 장탕(張湯)이다. 장탕이 미천한 출신으로부터 3공의 하나인 어사대부(御史大夫)의 신분에 오른 것은 법체제의 정비와 집행을 엄혹하게 한 공로 덕분이었다. 너그러운 정치를 주장하던 순리(循吏)의 대표적 인물 급암(汲黯)은 혹리들의 득세가 민심을 각박하게 만든다고 탄식하여 "도필리(刀筆吏: 기능직 관리)에게 정치를 맡기면 안 된다는 말이 맞음을 장탕을 보면 알 수 있다. 천하 사람들이 외발로 서 있는 듯 불안하고 서로를 곁눈질로 쳐다보게 되었다"고 했다.

장탕이 후에 모함에 걸려들어 엄혹한 법집행의 대상이 되었을 때 결백함을 밝히려고 발버둥을 치자 오랜 동료 조우(趙禹)가 타일렀다. "자네의 고발로 신세를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가? 자네가 쓰던 법망에 이제 자네가 걸려들었는데 이 법망을 어떻게 무너뜨리겠단 말인가?" 이에 장탕은 체념하고 자살하였으며 덕분에 그의 명예와 자손은 보전되었다고 한다.

사마천(司馬遷)은 '혹리열전' 서문에서 정(政)과 형(刑)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이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므로 덕(德)과 예(禮)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물리적 규제보다 심리적 감화가 질서의 중요한 원천임을 지적하며 법치의 한계를 말한 것이다.

요즘 정치권에서 걸핏하면 '법적 대응'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정치'의 실종을 걱정하게 된다. '법적 대응'은 의혹을 푸는 유일한 길도 완전한 길도 아니며 정치의 사회 지도 기능을 없애는 길일 뿐이다. 무제 때 혹리들은 법치의 명분으로 공포 정치를 도입, 황제의 통치를 쉽게 만들어줬지만 정치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자기들 신세도 망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계할 일이다.

▲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깨뜨렸다고 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품위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퇴임 후 1년 동안 털어서 찾아낸 '떡'이 왕년의 '떡고물'보다 초라한 것으로 드러나면 이 국론 분열이 더 심해지지 않을까? "해먹어도 치사하게 해먹었다"고 하는 노까들과 "드셔도 참 서민답게 드셨다"고 하는 노빠들 사이에? ⓒ프레시안

  지난 1월 23일 이 자리에 올린 10년 전 칼럼 "황제의 꿈"은 진시황 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법치 원칙 회복과 함께 지도력 육성과 도덕성 강화를 위한 꾸준한 노력을 우리 사회는 필요로 한다"고 결론 맺은 것이었다. (☞관련 기사 : 황제의 꿈)

며칠 전 '박동천 칼럼' "'진시황 식 법치'로 가는가?"를 보니 법치를 "법으로 다스림"과 "법이 다스림"으로 구분한 것이 눈에 띈다. 중국 고대에 형성된 법가 사상과 서양 근대에 만들어진 법치 관념을 멋지게 대비한 시각이다. 20세기 초까지 지속된 중국의 황제 제도의 전제적 성격이 이 시각에 잘 포착된다. (☞관련 기사 : '진시황식 법치'로 가는가?)

그러나 현실은 관념처럼 산뜻하게 재단되지 않는 구석이 많다. 중국의 경우 "법으로" 다스린다 하지만,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법이" 다스리는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었다.

당 태종(627~649)은 가장 강력한 전제권력을 누린 중국 황제의 하나다. 태자였던 형을 제거하고 그가 황제가 되는 과정에는 목숨을 걸고 보필한 심복들이 있었다. 그가 제위에 오른 10여 년 후 심복의 하나인 당인홍(黨仁弘)이 비리 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자 태종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법이란 하늘이 임금에게 내려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사사로운 정으로 당인홍을 풀어주고자 하니, 이는 법을 어지럽히고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짓이다. 남교(南郊)에 멍석을 깔아 하늘에 죄를 고하고 거친 밥을 먹으며 사흘 동안 근신하여 이 죄를 풀고자 한다."

현대의 법치에서도 용인되는 국가 원수의 사면권 행사를 위해 막강한 전제군주 태종이 이런 요란을 떤 것을 한낱 제스처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제스처에도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스처라도 이 제스처는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판결에 이르는 과정에 은밀히 개입하지 않고 판결을 존중하는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태종의 처남이자 중신이던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봉칙 편찬한 <당률소의(唐律疏議)>가 태종 사후 반행된(653) 사실에 이 에피소드를 비쳐볼 수 있다. 당시의 당나라에서는 법치의 확립이 절실한 과제였던 것이다. 제도적으로 볼 때 당시의 법은 의회 아닌 천자가 정하는 것이었으니, 법이 통치의 주체가 아닌 도구였다고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천자 자신의 노력에 따라 법을 통치의 주체에 가깝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법을 만드는 것이 천자 아닌 의회라 하여 통치의 주체로서 법의 위상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천자가 만들더라도 천자 자신이 지키면 법이 통치의 주체가 되는 것이요, 의회가 만들더라도 의회 스스로 법을 잘 지키지 않으면 통치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법을 만드는 과정 역시 천자의 이름으로 만들더라도 엄정한 절차를 밟을 수 있는 반면 의회에서 만들더라도 날치기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법이' 다스리게 하기보다 '법으로' 다스리고 싶은 유혹을 권력자는 느낀다. 진나라에 법치의 뿌리를 심었던 상앙(商鞅)이 권력을 잃고 법망에 걸려 탄식한 이래 법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집행하는가 하는 것은 중국사 전개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 중세 유럽이 로마제국의 법체계를 잃어버리고 약육강식의 정글에 빠져 있는 동안 수당(隋唐) 제국은 고대 제국의 법질서를 회복하고 발전시켰다. 법의 과용과 남용이 이후 중국사에서 거듭 문제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법치의 원리는 중세를 통해 유럽 문명보다 중국 문명에서 더 큰 비중을 지켰다.

1748년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을 들고 나올 때는 인간을 초월하는 자연 법칙을 과학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에 뒤따라 인간 세상에서도 불변의 법칙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유럽 사상계에 떠돌고 있었다. 이 불변의 법칙을 법률로 제도화한다면 '법이'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근대적 법치 정신의 출발점이었다.

법치의 전통이 약하던 근대 초기의 유럽에서는 이상적 법치에 대한 환상을 억제하는 경험이 적었다. 중국에는 진시황 이후 그런 환상이 사회를 지배한 일이 없다. 사마천이 <사기>에 '혹리열전'을 두고 형정(刑政)보다 예덕(禮德)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런 환상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그 태도는 중국 문명의 꾸준한 전통의 하나가 되었다.

예덕이 경시되고 형정만이 힘을 쓰는 '도필리의 세상'에서 법은 과용되고 남용된다. 현 정권에서 현행법을 확대 해석하여 국민의 헌법상 권리를 제한하고 정략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도필리의 세상을 만드는 길이다. 그러던 끝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돈 문제로 검찰의 조사를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다.

청렴과 도덕성을 내세우던 노무현 씨의 일이기에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된 사안이 전임자들의 권력형 비자금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경미한 것으로 보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갑남을녀 수준의 돈 문제로 그토록 중요한 상징성을 지켜내지 못하다니. 무제 때 장탕이 걸려든 일의 내용을 상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경미한 것이었기에 그토록 억울해 했으리라.

평소 "구시대의 마지막 인물"이 되고자 하던 노 씨의 염원이 이런 고통을 통해서라도 이뤄지기 바란다. 청렴의 상징성이 깨어지더라도 도덕적 상징성은 살아남을 여지가 있다. 이제부터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일이다. 진정한 도덕은 세속과 등진 성인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고민과 고통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도필리의 세상을 막는 길이 여기에 있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解寃相生의 섬, 제주도

기사입력 오전 11:36:37

동백꽃 지는 계절

지금은 제주에서 동백꽃 지는 철이다. 50년 전의 4월 초에도 그랬다.

강요배 화백의 4·3 역사화전이 '동백꽃 지다'라는 제목으로 열린다. 전시회의 타이틀 작 '동백은 지다'는 꽃잎이 흐트러지지도 않은 채 통째로 '툭' 떨어져버리는 동백꽃의 낙화 속에 50년 전 제주민의 수난을 그린 것이다. 민중의 수난으로 4·3의 본질을 보는 그의 시각은 6년 만의 전시회에 보태는 신작 몇 점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한 지역의 특정한 사건으로보다 역사 전반의 비극성으로 눈길이 옮겨진 것이다.

역시 제주 출신의 작가 현길언 씨는 4·3을 '미친 시대의 광기(狂氣)'라 부른다. 광기는 합리적 이해와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학술적 접근과 정치적 해법은 4·3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도, 그 상처를 아물리는 데도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오히려 문학과 예술의 직관적 접근과 정서적 카타르시스에서 그는 더 긴요한 몫을 기대한다.

그러나 학술에도, 정치에도 그 나름의 몫은 있다. 수십 년간 4·3의 비극성을 떠올리지도 못하도록 봉쇄해 온 '공산 폭동'론은 독재정권 시절의 유물이 되었지만 아직도 사법적으로는 그 그림자를 치우지 않고 있다. 국회의 진상조사위 구성도 의원 과반수의 발의서명을 받아놓은 채 해를 넘기며 서랍 속에서 잠만 자고 있었고, 학술적 규명도 아직 본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50년 전의 4월 3일 새벽 500명 가량의 무장대가 5·10 선거 반대와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추방을 내걸고 제주 각지의 경찰지서를 습격한 것은 공산 폭동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간 2만여 인명을 앗아간 내전 내지 학살 사태 전체를 그렇게 규정할 수는 없다. 어떻게 지역 주민의 10분의 1이 폭도로 소탕될 수 있었단 말인가.

1년간의 유혈 사태도 비극이었지만, 그 슬픔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하고 지낸 40여 년의 세월은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피해자의 유족들은 슬픔과 억울함을 펼쳐내기는커녕 연좌제의 피해까지 겹쳐서 겪어야 했던 세월이었다. 아마 이것이 더 먼저 풀어야 할 비극일지도 모른다.

발발 50주년 기념행사 중 '해원상생(解寃相生)굿'이 특히 눈길을 끈다. 4·3은 폭동이고 항쟁이고를 떠나 하나의 참혹한 비극이었다. 시비곡직보다 비극성을 더 질실히 음미할 사건은 4·3 외에도 우리 현대사에 숱하게 많다.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굿판을 바란다.

▲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꽃잎이 흐트러지지도 않은 채 통째로 '툭' 떨어져버리는 동백꽃의 낙화 속에 60년 전 제주민의 수난을 그린 이 작품에서 화가는 역사의 비극을 자연에 대비시킨다. 특이한 자연 조건 속에 특이한 비극적 역사를 겪어 온 제주가 한국의 일부분으로 편안한 자리를 누릴 때 한국 사회도 21세기를 향한 올바른 자세를 갖출 것이다. ⓒ보리출판사

제주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독특한 의미를 가진 변방이었다. "삼수 갑산을 가더라도" 하고 북방의 오지를 들먹이는 관용어도 있지만, 산으로 막힌 삼수 갑산보다도 더 두터운 격절성을 바다로 막힌 제주는 가지고 있었다. 제주는 삼국시대부한국사에 모습을 나타냈지만 그 역사가 한국사에 통합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105년 탐라'국(國)'이 탐라'군(郡)'으로 바뀌면서 왕제(王制)를 없앴다는 기사, 그리고 1211년 제주로 이름을 바꾸면서 고려 조정에서 부사와 판관을 두었다는 기사를 통해 제주가 고려 영토로 편입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주의 역사와 본토의 역사 사이에는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남아 있었다.

1260년대부터 한 세기 동안 지속된 몽골 지배가 제주의 특이한 위치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마지막 저항 세력 삼별초를 1273년 제주에서 진압한 뒤 원나라는 제주를 고려 본국과 별도로 관리했다. 탐라총관부를 두고 일본 정벌의 기지로 삼았다가 후에는 목마장으로 경영했다. 1295년 이후 고려 행정체계에 회복된 뒤에도 원나라는 목호(牧胡)를 통해 제주에 대한 실질적 관리를 계속했다.

1370년대에 원나라가 쇠퇴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난 명나라를 가까이 하는 정책을 취할 때 제주의 목호들이 이에 저항해 난을 일으킨 것은 한 세기 동안 원나라가 제주에 쌓아놓은 체제가 강고했음을 보여준다.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 조정은 최영을 필두로 하는 2만5000명의 군대를 보냈다 한다. 당시 제주 인구가 5만 이하로 추정됨을 감안하면 '목호의 난'은 일부 친원 세력의 책동이라기보다 제주민의 전면적 저항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서서는 제주에 안정된 통치가 행해졌다. 1416년 섬 북쪽에 제주 목(牧)을, 남쪽에 정의와 대정의 두 현(縣)을 설치한 것이 50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안정된 통치는 제주민을 본토에 비해 열악한 조건에 묶어놓았다. 조선조 후기 내내 시행된 '출륙(出陸) 금지령'이 대표적인 제약이었다. 인적·물적 차단을 통해 제주는 마치 조선의 식민지처럼 관리되었다. 500년 동안 제주인은 조선 왕조의 정규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면서 파견된 목사와 현령들의 통치를 받았을 뿐이다.

19세기 말 개항 이후의 상황이 제주에 변화의 물결을 몰고 왔다. 일본 상인들을 통해 제주 해산물에 수출의 길이 열리면서 경제 발전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일본의 공헌을 중시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는 통상 지나치게 극단화하는 경향 때문에 문제가 있지만 현상적으로 타당한 면이 있다. 제주의 경우는 이 타당한 면이 비교적 큰 편이다.

조선시대에 제주의 수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수출의 길이 좁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영향력과 통치 덕분에 제주 수산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수산물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마음껏 밖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재일동포 사회의 향우회가 제주 출신은 마을 단위로까지 조직되어 있다. 다른 지역 출신 향우회가 군 단위나 도 단위로 조직된 것과 대비된다. 제주 사람들이 워낙 일본으로 많이 건너갔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제주의 청년들이 일본과 조선의 여러 고등교육기관으로 유학함으로써 제주의 인적 자원도 개발되었다. 조선조 내내 제주 사람이 성균관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던 상황과 비교해 보라.

이런 배경 위에서 일본의 패망은 제주에 민족 해방이라는 기쁨에 앞서 엄혹한 현실 문제를 가져왔다. 해방 당시 제주도에는 약 15만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후 몇 달 동안 외지에 나가 살던 제주인 10여만 명이 귀환했다. 인구는 곱절 가까이 급격히 늘어났는데 산업과 교역이 침체하고 마비되어 극심한 생활고가 만연하고 그 위에 외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다양한 정치의식도 활발하게 작용해 제주도는 미군정의 치안 취약 지대가 되었다.

제주도의 치안 문제가 경찰과 반공단체의 개입을 불러오고, 이 개입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 끝에 1948년 4월 3일 대규모 민중봉기가 터져 나왔다. 이후 1년간 치열하게 벌어진 이 항쟁을 반공 독재정권이 '공산 폭동'으로 규정함에 따라 제주인들의 질곡은 수십 년간 더 계속되었다.

질곡을 무릅쓰고 제주는 다시 일어섰다. 한국의 경제 발전과 소비수준 향상으로 제주의 관광 자원과 특산물이 시장을 찾음으로써 경제적 흥기가 가능하게 된 것이지만 제주의 흥기는 경제적 흥기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가 반공 독재 분위기에서 겨우 빠져나올 때 <제민일보>를 앞세운 제주인들의 4·3 바로보기 운동은 민주화시대 한국 사회의 과거사 정리 사업에 선구가 되었다. 제주의 정신적 흥기가 한국 사회를 선도한 것이다.

▲ <동백꽃 지다>(강요배 그림, 김종민 증언 정리, 보리출판사 펴냄). ⓒ프레시안
제주는 그 특이한 위치 때문에 한국의 역사 속에서 많은 피해를 입어 왔다. 바다 속의 섬이 반도국가에 귀속된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말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동안 제주의 지리적 조건은 모처럼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기 시작하고 있다. 한국 자체가 세계화의 흐름에 휩쓸린 이제, 그 개방적 자세의 첨단에 제주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의 자치가 일반 지방자치와 다른 차원의 '특별 자치'가 되어야 할 필요는 제주인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합의를 모아가고 있다.

'제주올레'란 이름의 특이한 움직임이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걸어 다닐 길을 확보하자는 소박하다면 소박한 운동이지만,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자는 큰 뜻이 담긴 운동이기도 하다. 제주가 있음으로 해서, 육지와 다르다는 지리적 특이성 때문에 고통 받아 온 제주가 있음으로 해서 한국이 어떤 혜택을 받아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이 운동의 정신과 함께 제주를 제대로 아끼는 마음이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지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