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현대 속의 부족국가

기사입력 오전 11:47:51

현대 속의 부족국가

은(殷)나라 왕실 세계를 보면 형제 간 계승이 태반이다. 이에 비해 그 뒤의 주(周)나라는 부자 간의 계승이 엄격히 지켜졌다. 즉위 1년 미만에 왕이 죽은 경우 세 차례를 빼면 형제계승이 거의 없었다.

부자 계승 원칙은 그 이래 중국 왕조 체제의 뼈대가 되었다. 아무리 큰 능력과 세력을 가진 인물이라도 적장자(嫡長子)가 아니면 보위(寶位)를 쳐다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갈등의 소지를 원천봉쇄한 것이다. 이 원칙은 조선에도 전해져 태종, 세조처럼 실력으로 왕위를 차지한 임금들에게 큰 정치적 부담을 주었다.

주나라에서 부자 계승이 확립된 것은 누구보다 주공(周公)의 공로였다. 은나라를 정복한 무왕(武王)은 죽을 때 동생 주공에게 어린 아들 성왕(成王)의 섭정을 맡겼다. 얼마 후 다른 동생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은나라 잔당과 결탁해 반기를 들면서 주공이 조카 성왕의 자리를 넘본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이 반란을 평정함으로써 주나라 체제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부자 계승의 원칙이 기정사실이 된 후세 사람들은 주공이 성왕 모신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그러나 주공 당시에는 힘 있는 아저씨가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의 자리를 지킨 것이 공자가 주공을 성인(聖人)으로 받든 까닭이다.

주공의 처신은 도덕적으로뿐 아니라 시스템공학의 관점에서도 의미 있는 것이다. 형제 계승의 시스템에서는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추장의 의미에 임금 자리가 머물러 있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국가의 힘이 임금 개인의 능력 범위에 제한을 받는다. 이 한계를 뛰어넘는 천자(天子)체제를 세운 주공을 중국 역사의 개창자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통령이 행정 집행의 기능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모든 일에 초월적 권력을 행사해 온 대한민국 전통은 추장이 거느리는 부족국가 수준이다. '박정희 신드롬'을 보거나, 대통령 또는 후보의 가족 문제가 허구한 날 정치권을 뒤덮는 것을 보거나 우리 국민이 대통령에 거는 기대는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 쌓이고 쌓인 실정과 비행으로 대통령의 권위가 만신창이가 된 오늘날이기에 더욱더 답답하다. (1997년 8월)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실패한'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정상화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프레시안
 

  국가 원수로서 최초의 '대통령(president)'은 1776년 미국 독립과 함께 취임한 조지 워싱턴이었다. 18세기 초 공화국으로 독립한 중남미 국가들이 흔히 대통령제를 채택했고, 유럽에서는 1848년 프랑스의 제2공화국이 처음으로 대통령제를 실시했다. 공화정이 확산됨에 따라, 그리고 옛 식민지들의 독립에 따라 대통령을 두는 나라는 계속 늘어나 지금은 150개국에 이른다.

대통령제가 공화정을 시작하는 나라에서 널리 선택받는 이유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익숙해 있던 왕의 존재를 대통령이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하지만, 국민은 누군가가 과거의 왕처럼 포괄적 책임을 져주어야 마음을 놓을 수 있다. 대통령은 공화제 국가의 국가원수 치고는 전제군주와 너무 비슷한 존재다.

선진국 중에는 대통령 중심제가 별로 없다. 유럽 국가에는 대통령이 있더라도 대개 국가 원수로서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며, 정부 수반을 겸하는 프랑스의 대통령도 제한된 범위의 권력만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나라는 대개 정치적 후진국들이다. 미국만 해도 부시 하나 잘못 뽑아놓고 나라 꼴이 얼마나 망가졌나 보면 정치제도 면에서는 선진국이 못 된다. 토크빌 시절 이후 세상의 변화를 따라오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미국은 3권 분립과 견제·균형의 원리가 정권 운용에 어느 정도 통하는 편이다. 그밖의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는 대개 대통령이 절대에 가까운 권력을 쥔다. 우리나라 경우도 그렇지만, 헌법상으로 3권 분립을 규정해 놓아도 사회의 민주 역량이 부실한 상황에서는 행정권의 현실적 힘이 다른 2권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입김 속에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을 따라 대통령 중심제를 취했다. 그 후 60여 년간 대통령의 존재가 이 나라에 가져온 득실을 한 번 따져보자.

우선 대통령의 자리가 독재자에게 이용당한 사례들을 생각해야겠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으면 헌법상의 주권재민 원리가 사문화되기 쉽다는 사실을 대한민국 역사가 확인해 준다.

분단 건국을 주도한 이승만은 통일국가 제창자들 대부분이 보이코트한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후 그가 국민 직선제로 개헌을 행한 것은 국회의 지지를 유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쥐고 있는 행정력으로 쉽게 주무를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이다. 박정희는 군사정권이 실질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힘과 돈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유신 후 '체육관 선거'로 바꾼 데는 비용 절감의 의미만이 있을 뿐이다.

대통령이 어느 정도 요건이 갖춰진 선거를 통해 뽑히게 된 것은 1987년 이후의 일이다. 대통령제의 문제점은 여기서부터 더 극명해진다. 그 전까지는 뽑는 과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뽑힌 사람이 엉망이었다고 볼 여지도 있지만, 선거가 큰 하자 없이 치러졌는데도 대통령의 존재가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면 이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5년 동안 대통령을 둘러싼 권력 구조는 독재시대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었다. 비자금과 공권력을 이용해 헌법상의 권한을 넘어서는 힘을 대통령이 지킨 것이다. 개인 비리를 위해서든, 선의의 정책 추진을 위해서든 초헌법적 권력을 대통령이 행사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어두운 전통을 마감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소위 권력기관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스스로 삼가고 비자금으로 지지 세력을 조종하지도 않았다. 대통령으로서 그의 역할은 두 겹이었던 셈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업무 수행, 그리고 대통령직 정상화를 위한 보이지 않는 노력.

일상적 업무 수행에서 그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하기 힘들다. 심심찮게 '노빠' 소리를 들을 만큼 그를 높이 평가하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인간 노무현'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에 대해서는 쉽게 성공을 우길 수 없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북관계부터 그렇다. 전향적 자세를 임기 내내 견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기 말에 이르러서야 정상회담을 치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성과를 충분히 정착시킬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퇴행 정책에 쐐기가 약하게 되었다. 정상회담이 늦어진 데는 투명성을 위해 뒷거래를 마다한 이유가 클 것이다.

탄핵도 그렇다. 정당한 탄핵 사유가 없었다는 사실은 '관습 헌법'이란 기발한 창작을 해낸 헌법재판소조차 인정한 사실이다. 탄핵은 당시 야당의 부당한 행패로 인식되어 직후의 총선에서 그 응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국정에 공백이 생긴 데는 노 대통령의 책임도 있다. 대통령이 돈과 권력으로 선거에 은밀히 개입하던 관행을 배척한 결과다.

대연정 제안에도 같은 문제가 작용했다. 열린우리당이 국회 과반수를 확보한 상황에서도 그는 '속도전'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의 초헌법적 권력을 깎아내면서 국회의 헌법상 기능을 제대로 살려내려고 꾸준히 노력했으며, 대연정 제안도 그 뜻을 담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권력 조정을 원하지 않는 한나라당의 거절을 당했을 뿐 아니라 여당의 반발까지 불러와 레임덕 현상을 가속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 노무현'은 실패자였다. 퇴임 후 가족, 친지, 측근 등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형편없는 곤경에 빠져든 대통령을 어떻게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말할 수 있나? 퇴임 1년도 안돼 남북관계, 복지·분배 등 주요 정책이 모두 거꾸로 뒤집히기에 이른 대통령을 어떻게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말할 수 있나?

그러나 보이지 않는 측면, 대통령직을 정상화한다는 측면에서는 큰 성과를 이룩한 5년이었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라고 평한 이도 있거니와, 나는 "그런 식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무사히 퇴임할 수 있었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5년간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대통령직을 둘러싼 권위주의 타파를 향한 것이었다고 나는 본다. 대한민국 정치사의 가장 중요한 인프라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고 그만큼 큰 보람을 느낀 일이 대통령직 정상화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정책은 정권이 바뀐 뒤 뒤집히더라도 현실 조건에 의해 합리적 한계가 있을 것이고, 권위주의 타파는 비가역적 문화 전환이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퇴임 후 1년간 그는 권위주의의 부활을 목격했다. 되살아난 권위주의가 경제정책과 대북정책을 독단으로 몰고 가고 민주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평화적이고 해학적인 '촛불 문화'는 그의 체취를 풍겼다. 그러나 군화발과 물대포 앞에서 너무 무력했다. 그리고 촛불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를 노리고 달려들 때, 진보 진영에서도 그의 곁에 선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통령 노무현'의 어려움은 '제왕적 대통령'이기를 거부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대통령직을 5년간 종사할 하나의 직업으로 택했다. 계약 기간 끝나고는 고향에 돌아가 유유자적하며 농촌 발전이라는 또 하나의 인프라 사업에 힘을 쏟으려 했다. 그런데 제왕적 대통령 노릇 요구가 봉하 마을까지 따라왔다. '통치 기록' 반환 요구, 비리 수사를 빙자한 정치적 탄압, 모두 그를 제왕적 대통령으로 간주한 공세였다.

한국 사회는 정말로 아직까지 제왕적 대통령을 필요로 하는가? 대통령 바뀌고 1년 남짓 사이에 바뀌어진 상황을 보면 그런 것도 같다.

그러나 이것이 정상적 상황이 아님을 사회가 깨달을 때가 되었다. '제왕적'이란 말의 근거가 된 근대 이전의 '제왕'도 한국 대통령처럼 제왕적이지는 않았다.

앞에 붙인 글에서 보듯 3000년 전 사람들도 절대권력이 지닌 문제점을 알아보고 있었다. 임금의 자격을 능력보다 혈통에 둠으로써 최고 권력의 의미를 제한했던 것이다. 근대적 변화를 겪은 뒤의 서양인들은 '동양적 전제정치(oriental despotism)'를 손쉽게 조롱했지만, 그 전제정치란 것이 수천 년간 질서의 뼈대 노릇을 할 만큼 조화와 균형을 갖춘 것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그보다 훨씬 미개한 상태로 돌아가 있다.

이명박의 대통령직 수행에 불만과 분노를 가진 사람들이 그의 하야를 요구한다. 나는 하야를 요구할 생각이 없다. '제왕적' 권력을 포기하고 헌법대로 직책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하야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 거다. 정 힘들면 대통령직 없애버리든지. 노 대통령처럼 정성을 쏟고도 정상화시킬 수 없는 자리라면 차라리 없애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한 언론인의 반성

기사입력 오후 5:47:58

한 언론인의 반성

민주당이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둔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원들 못지않게 패배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파헤치기에 열 올리던 언론인들이다.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 오버홀서는 언론이 심판자의 역할을 자임하던 종래의 오만을 반성할 기회라고 말한다. 언론은 사실을 만들어내는 기관이 아니라 전달하는 기관일 뿐이며, 그것도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실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는 선거 몇 달 전부터 클린턴의 스캔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무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오버홀서는 지적한다. 대통령을 평가하려면 대통령 업무의 수행 실적을 보면 됐지, 사생활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유권자들의 뜻을 언론이 묵살해 왔다는 것이다. 워터게이트의 환상에서 언론인들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자아비판이다.

언론의 영향력이 미국 못지않게 막중해진 우리 사회에서도 깊이 음미해볼 만한 지적이다. 특히 <조선일보>와 최장집 교수 사이의 사상 검증 논쟁에서 요긴한 문제점들이 겹쳐짐을 느낀다.

공인 자격의 검증은 언론의 임무라고 신문 측은 주장한다. 그런데 이번 검증 대상은 공인으로서의 활동이 아니라 학술 문헌이다. 학술 활동 내용을 검증하려면 학술적 방법에 따라야만 한다. 갈릴레오의 종교재판도 당대 일류 학자들의 견해를 수집했다. 거두절미한 표현 몇 가지가 '사회 통념'에 벗어난다고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문제 삼은 것은 '심판자' 역할의 자부심이 지나쳤던 것이 아닌가 반성이 필요한 일이다.

독자의 관심에 충실히 부응하려는 자세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온 국민의 관심은 경제난 극복과 남북 관계의 전개 등 미래의 문제에 쏠려 있다. 중요한 과제에 사회의 관심이 제대로 모이지 못하고 있는 때라면 언론이 이를 어느 정도 일깨워줄 수도 있겠지만, 철 지난 파당적 정쟁이나 냉전적 대립 사고의 부활에 언론의 사명을 걸 수는 없다.

분쟁토론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언론 최고의 사명임을 새삼 깨달았다고 오버홀서는 술회한다. 이 또한 오늘의 한국 언론이 깊이 새겨들을 말이다. 칼에도 활인(活人)의 칼과 살인(殺人)의 칼이 있듯 펜에도 살리는 펜과 죽이는 펜이 있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언론이 추상같은 자세로 절대 권력 앞에 맞서주기를 국민이 원했다. 그러나 이제는 심판자보다 봉사자로서의 언론을 독자들이 바라는 시대가 되고 있다.

  2001년까지 10년 동안 정규직은 아니라도 객원 연구위원, 객원 논설위원 등의 위치에서 <중앙일보>에 의지해 활동했다. 1998년 말에 쓴 위 글도 <중앙일보>에 실었던 것이다.

1990년 교수직을 그만두면서 꼭 언론계에서 일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중앙일보>에 칼럼을 쓰게 되었고, 그 인연에 대해 지금까지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중앙일보> 일을 하는 동안에도 '조·중·동'의 지나친 보수성을 비판하는 얘기는 있었다. 그러나 내겐 그리 큰 문제가 느껴지지 않았다. <중앙일보> 색깔을 의식해서 펜을 굽힐 필요를 거의 느낀 일이 없다. 거기 썼던 글을 여기 옮겨 담아 놓아도 별로 어색한 느낌이 안 든다.

2006년 귀국한 후에도 <중앙일보>를 당연히 구독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보는 이 신문이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몇 달 받는 대로 쌓아놓기만 하다가 결국 구독을 끊었다.

<중앙일보>에서 함께 일하던 유영구 선생을 몇 해만에 다시 만났을 때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이 일이 생각났다. "유 선생, <중앙일보>를 한참 안 보다가 보려니까 왜 그렇게 읽기 힘들지? 신문이 바뀐 걸까, 내가 바뀐 걸까?" 유 선생이 크게 웃고 대답한다. "선생님, 그때는 정운영 선생님도 <중앙일보>에 글 쓰실 때였어요."

나보다 <중앙일보>가 더 많이 변한 모양이다. 허기야 나는 몇 달 전 이 자리에서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하던 중에도 스스로 밝힌 것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보수주의로 일관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앙일보>가 보수에서 수구로 그 사이에 바뀐 것일까?

<중앙일보> 일을 하던 당시 함께 '조·중·동'으로 불리면서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사이에 큰 차이를 느끼고 있었다. 위에 옮겨놓은 글도 <조선일보>의 색깔 논쟁 비판한 것을 <중앙일보>에 올리는 데 아무 스스럼이 없었다.

그런데 귀국 후 몇 달 동안 받아본 <중앙일보>는 <조선일보>를 많이 닮아 있었다. 괜찮은 보수 신문이었는데, 아깝다. 아깝기는 하지만 그리 크게 상심하지는 않는다. 이념 문제가 아니라 전술 문제이기 때문에 상황이 바뀌기만 하면 원래 면목을 회복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정작 큰 실망을 느끼는 것은 '진보 신문'의 변하는 모습이다.

<중앙일보> 끊은 후 2년간 신문 구독을 않고 지내다가 작년 촛불 사태 중에 <경향신문> 구독을 시작했다. 촛불 현상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가 바뀌면서 <경향신문>도 자꾸 읽기가 힘들어졌다. '박연차 게이트' 빨대질에 누구보다 덜 빨아먹을까봐 안달이 난 꼴이었다. 오늘(5월 29일) 아침 만평에 김용민 화백이 "받아쓰기식 중계 만평 책임을 통감하며 반성합니다" 하는 반성문을 올렸지만, 그게 시원찮은 짓이란 사실을 이제 와서 알았단 말인가? 1년 전엔 괜찮은 신문 같아 보이던 것이 1년 뒤에 이런 '찌라시' 꼴을 보이는 건 웬 까닭일까?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꽤 아는 친구에게 얼마 전 물어보니 '진영 논리' 때문이라고 설명해 준다. 촛불 때는 'MB 대 반MB'의 단순한 진영 구도였지만, 박연차 때는 소위 진보 진영 내의 복잡한 갈등이 신문의 태도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오늘 <경향신문> 만평의 반성문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통해 '노무현 대 MB'의 구도로 갑자기 바뀌는 상황에 놀라 황급히 대응하는 것뿐이라면 정말 실망스러운 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며"란 제목의 사설은 실망스러운 쪽을 보여준다. "언론의 책임론"이 몇 줄 들어 있지만, "이른바 보수 언론들"을 가리킨 얘기고, 끝에 "<경향신문>도 그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을 겸허하게 새기고자 한다." 한 줄이 달랑 붙어 있다.

이것이 정말 "겸허하게 새기는" 자세인가? 언론답지 못한 꼴을 그 동안 보인 데 대해 일 터지고 1주일이 다 된 지금까지 새겨놓은 것이 아직 없어서 이제부터 새기겠단 말인가? 몇 달 동안 노 전 대통령 관계 보도 자세를 놓고 "이른바 보수 언론들"과 자신을 차별화할 의미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오버홀서가 반성한 자세를 보라. 그를 비롯한 미국 언론인들은 허위 사실을 내세운 것도 아니고 도덕적으로도 정당한 방향으로 펜을 놀렸다. 기사와 논설을 통해 미국을 더 정의로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뜻이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을 때 "분쟁을 토론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언론 최고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했음을 오버홀서는 반성했다.

내가 왜 '조·중·동'은 놔두고 하필 어려운 여건에서 좋은 신문 만들려 애쓰는 <경향신문>에게 투정을 쏟아내나? <경향신문>이 한국 사회에서 '조·중·동'보다 더 중요한 신문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분도 신문 보고 마음 상했다면 '조·중·동' 보고 상했겠는가?

그리고 좋은 신문 만들기에 진정으로 열악한 여건 가진 게 '조·중·동'이다. 돈 사정은 좋은 신문 만드는 여러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조·중·동'은 돈 사정 한 가지가 우월한 대신 다른 중요한 조건들이 그에 희생당하고 있다.

<경향신문>이 '조·중·동'보다 더 좋은 신문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조·중·동' 따라서 빨대질을 하나? 자기 진영, 그나마 '진보 진영'을 잘게 쪼갠 좁은 파벌에 공헌하는 것과 언론의 기본 사명에 충실한 것, 어느 쪽을 바라볼 것인지 통렬한 반성을 바란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내가 진보 신문을 자처하는 <경향신문>을 왜 구독하는가? 한국에서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의 구분에 큰 의미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찌라시와 신문의 차이다. <경향신문>이 '진보'에 집착하기보다 '좋은 신문'을 만들어주기 바란다.

지금 같아서는 신문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검찰청사 有感

기사입력 오후 4:20:38

검찰청사 有感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판사가 될 수도 있고 검사가 될 수도 있다. 30년 전까지는 판사의 길이 더 인기 있었다. 판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된 국가기관으로서 막중한 권위를 가진 몸임을 생각하면 그럴싸한 일이었다. 국회의원에도 판사 출신이 검사 출신보다 많았다. 판사로 뽑힐 자격이 되는 연수원생이 검사를 지망한다면 특별한 뜻을 가진 사람으로 보곤 했다.

70년대 들어 이런 사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검찰을 지망하는 우수한 연수원생이 늘어나 때에 따라서는 법원을 앞지르기까지 하게 됐다.

스스로 3D 직종이라 칭하는 검사의 인기가 늘어난 까닭이 무엇일까. 국가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배당된 사건을 받아 판결만 하는 판사의 수동성보다 사건을 찾아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검사의 능동성이 국가와 사회에 더 훌륭한 공헌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론 검사의 길이 출세에 더 유리하다는 인식도 늘어났다. 판사보다 검사가 언론의 각광을 받는 일이 많아졌고 정계 진출도 많아졌다. 재력가들은 학교 후배나 먼 친척 중에라도 검사가 있으면 후원자 노릇을 맡으려 안달이라고 한다. 권력기관으로서 검찰의 비중도 크게 늘어났다.

대법원과 대검찰청이 덕수궁 옆에 있을 때, 두 건물의 모습은 두 기관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냈다. 고풍 어린 법원청사가 '권위'를 몸으로 말해준다면 멋대가리 없는 현대식 검찰청사는 '기능'의 상징으로 보였다.

그런데 서초동으로 옮기며 양쪽 건물의 차이가 크게 줄어들었다. 외장만 다를 뿐, 규모나 기본 형태가 거의 똑같게 된 것이다. 서초동뿐 아니라 1980년대 이후 지은 전국 각지의 법원과 검찰 건물이 모두 이런 식이다.

법정 중심의 법원 건물과 사무실 위주의 검찰 건물을 한 켤레 신발처럼 꼭 맞춰 지은 것은 검찰의 권위를 법원과 대등하게 보이려는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80~90년대는 이런 의지가 관철된 시기였다.

얼마 전 청주지검에서 '검찰 갤러리'를 열었다. 청사 건물의 여유를 지역사회에 문화 공간으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뜻은 좋지만 과연 범죄인을 수사하는 검찰청사가 그런 목적에 적합한 것인지 의아하기도 하다. 법원청사에 지지 않게 웅장하게 지어놓고 보니 과분한 공간을 가지게 된 것도 같다.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청사를 지어도 이 건물을 등지는 예비 법조인이 늘어나고 있다. '권력의 시녀'가 되기보다 세계화시대의 선두주자를 바라보고 로펌으로 최정예 연수원생들이 빠져나가는 것이다. 특히 검찰 외면 추세가 몇 년째 극심해서 관계자들의 걱정이 태산이라고 한다. 옛날의 왕조들도 망할 무렵에 화려한 궁궐을 지은 일이 많았던 생각이 난다.

▲ 4월 30일 대검찰청 앞에 도착한 노무현 전 대통령. 왜 대한민국 검찰은 '못하는 짓'이 없는 것일까? 이성도, 윤리도, 상식도, 원칙도 왜 검찰의 '광란'을 억제해 주지 못하는 것일까? 군사독재 시절에 만들어진 권력의 파편 하나가 21세기 깊숙이까지 살아남아 한국 사회의 내출혈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는 것일까? 제거 수술의 필요성이 시급하다. ⓒ프레시안

  생각해 보니 나이 육십이 되도록 피의자는커녕 참고인으로도 검찰 신세를 져본 일이 없다. 그렇게 그야말로 법 없이 살아온 나도 요즘 와서는 한국 검찰이 이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드는 존재란 생각이 든다.

검찰이 할 노릇은 못하면서 못된 짓만 하는 것을 비난할 때 "권력의 주구"란 말을 많이 쓴다. 그런데 근년에는 검찰이 주구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독재정권 때는 주구 맞았다. 그러나 민주화시대 들어 검찰의 '독립성'이 보장되기 시작했다. 힘은 그대로 가진 채 정권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되었으니 주인 없는 들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조직의 이기성에 대한 흥미로운 지적들이 있다. 로널드 코스는 <기업의 본질(The Nature of the Firm)>(1937)에서 조직의 역량이 조직의 목적 달성보다 조직의 자기 보전을 위해 우선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을 지적했다. 더 널리 알려진 것으로 사회조직의 자기증식성을 지적한 '파킨슨의 법칙(Parkinson's Law)이 있다. 직업적으로 종사하는 조직 구성원들이 승진 기회와 권한 확대를 위해 조직의 확장을 꾀하고 축소에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검찰은 독재시대에 통치의 도구로 삼기 위해 권력기관으로 키워놓은 것이다. 독재 권력이 사라졌으면 검찰도 권력기관 아닌 봉사기구로 환원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노무현 정부와 검찰 사이의 긴장 관계는 이 당위성에 대한 검찰의 저항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도 이 당위성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 권력은 살아남아 이명박 시대를 맞았다. 지금의 검찰 권력은 이명박 정권이 만들어준 것이 아니다. 군사독재의 유물이 스스로를 지켜내 한국 사회의 '괴물'로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의 검찰은 어둠 속의 권력답게 국민을 괴롭히고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것을 역할로 삼고 있다. 물론 검찰 구성원 전부를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수뇌부'라 흔히 지칭되는 엘리트 그룹이 이 사회 특권층의 주축으로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이 사회의 특권 구조를 유지, 강화하는 데 검찰 조직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적 잣대만을 들이대는 게 아니다. 헌법을 초월하는 권력을 검찰이 가지는 것은 국가 안보의 취약점이기도 하다.

병참기지를 교통 요충지에 집중시켜 놓으면 물류 비용을 줄이고 능률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집중은 전략적 취약점이 될 수 있다. 적군이 좁은 범위만 공격해도 쉽게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 집중도 마찬가지다. 독재국가는 지도자의 안위가 곧바로 국가 안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대한민국 옆에 '삼성돈국'이란 적성국가가 있다 치자. 삼성돈국이 대한민국을 식민지로 삼고 싶을 때, 선전포고를 하고 정면으로 침공하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검찰이란 불법 권력이 요충을 장악하고 있으면 손쉽게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검찰 수뇌부만 포섭하면 된다. 검찰 수뇌부에게는 자기네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한민국을 실질적 식민지로 만드는 데 협조할 동기가 있다. 수십 명만 꾸준히 '관리'하면 대한민국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 저항을 봉쇄하는 데 검찰과 언론만큼 유능한 협조자가 어디 있는가?

국가의 검찰 기능을 아주 없애자는 게 아니다. 기능은 남겨두되 권력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약화시키자는 것이다. 그토록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가 검찰에 꼭 필요한 것인가? 정연한 지휘 체계가 능률에는 조금 보탬이 되는 면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바로 그 경직성이 검찰을 국가의 암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용산 사태를 놓고는 수사 기록을 제출하라는 법원의 명령조차 거부하고 있는 대한민국 검찰이다. 법원의 명령이 없더라도 모든 수사 기록을 피의자에게 공개하는 것은 검찰 직업 윤리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형사 사건은 정부 대 개인의 소송인데, 검찰이 정부 측 소송대리인이지만 국가 공무원으로서 국민을 보호할 책임도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주변에 대한 수사는 어땠는가? 몇십억 원 뇌물의 혐의를 잡아냈다고 주장하는데, 감사원에서 검찰 장부를 한 번 조사해 보면 좋겠다. 검사들 월급을 비롯해서 국민 혈세를 쏟아 부은 금액이 더 크겠다. 게다가 '빨대질'은 또 어떻고? 직업 윤리는커녕 시정잡배의 기본 상식에도 못 미치는 언론플레이는 그야말로 막가파 수준이었다.

미국처럼 선거로 뽑거나 단기간 계약직인 검사는 이런 미친 짓을 할 이유가 없다. 한국의 검사는 양심에 따라 업무를 수행할 수 없게 하는 조직에 묶여 있다. 검사동일체 원칙을 제거했다고 하지만,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가 그대로 있는 한 이름만 없어진 것일 뿐이다.

돌아가신 분이 남긴 글에 "아무도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그는 자신을 핍박한 사람들의 인간성 문제보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제도와 환경에서 더 큰 문제를 본 것이다. 이번 사태를 놓고 검찰의 문제점을 생각한다면 몇몇 사람의 문책 따위로 넘어갈 일이 아니다. 검찰을 혁파해야 한다. 일선 검사들이 양심과 소신에 따라 업무에 임하게 함으로써 '수뇌부'가 권력을 참칭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