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뮈텔 주교

기사입력 2009-02-20 오전 9:23:33

뮈텔 主敎

1898년 5월 29일 종현성당(현 명동성당) 축성 예식을 집전한 것은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1854-1933)였다. 그는 1881년 조선에 입국해 4년간 선교사로 활동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1891년 조선교구장으로 다시 조선에 들어와 별세 때까지 42년간 조선교구를 지휘했다.

뮈텔 주교의 긴 재임 기간 중 조선은 숱한 격변을 겪은 끝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조선 주재 서양인의 한 사람으로서 뮈텔 주교의 입장은 조선천주교회의 행로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조선관을 결정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조선 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뮈텔 주교는 '어글리 미셔너리'였다. 그가 남긴 재임 중의 일기에는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깔보고 무시하는 태도, 교회의 이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책략을 구사하는 모습이 도처에 나타나 있다. 그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지지하여 3·1운동 때는 천주교인과 신학생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엄격히 금지했다. 안중근 의사의 영세신부 빌렘이 安 의사의 사형 집행 전에 고해성사 받으러 가는 것마저 가로막고 결국 빌렘을 조선에서 쫓아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 개신교회보다 천주교회의 독립운동 기여도가 낮았던 일차적 이유가 뮈텔 주교의 태도에 있었다고 지목된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사가들에게 오랫동안 당혹스러운 문제로 남아 있다. 몇 년 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뮈텔 주교에 관한 연구 발표를 놓고 논란이 일었을 때 최석우 신부의 논평에도 이런 당혹감이 담겨 있었다: "그분은 조선인의 육신보다는 조선인의 영혼을 더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명동성당 축성 백주년을 기해 김수환 추기경이 30년간 맡아 온 서울대교구장 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재임 기간은 한국 사회 안에서 '명동성당'의 의미를 바꿔놓았다. 민주화와 사회 정의의 상징으로 명동성당이 온 국민의 마음에 자리 잡은 것은 누구보다 金 추기경의 공로다.

한국 교회사를 보는 사람들은 대개 金 추기경을 훌륭한 교구장으로, 뮈텔 주교를 그 반대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진흙 없이 연꽃이 피지 못하듯, 오늘의 한국 가톨릭교회와 金 추기경의 성취는 바깥 사회를 외면하고 교회에만 매달렸던 뮈텔 주교의 집념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다. 역사란 부끄러운 부분도 자랑스러운 부분도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임을 되새기게 해주는 것이 우리 가톨릭교회사의 가르침이다.

▲ 명동성당의 옛 모습. 1898년 납작납작한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깨뜨리고 솟아오른 종탑은 조선의 전통과 융화될 수 없는 이질감의 상징이었다. 외세에 업혀 세워진 저 종탑은 오랫동안 한국사의 흐름 밖에 서 있었다. 주변의 고층건물 틈에서 그 이질감을 삭혀버린 이제 명동성당은 한국 사회를 굽어보는 대신 떠받쳐주는 존재가 되었다. ⓒ프레시안

  이 글을 쓰던 시절까지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수장을 넘어 양심의 대명사로서 한국 사회의 존경을 널리 모으던 분이었다. 그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있는 동안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엄혹한 유신시대에서 5공에 이르기까지 정권의 폭력이 인권을 위협할 때 거듭거듭 마지막 보루가 되어준 것이 김 추기경의 양심이었다. 6월 항쟁 막바지, 명동성당에 피신해 있던 운동가들을 체포하러 경찰이 들어오려 하자 "나를 먼저 잡아가라"고 막아선 것이 그 하이라이트였다.

최근 10년 여 동안 김 추기경을 정신적 지도자로 받들던 진보 진영의 시선은 착잡하게 변해 왔다. 진보 투쟁을 온 몸으로 뒷받침해 온 것과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에 대해 "시기상조"라며 부정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 변화에 배신감을 표명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지나친 욕심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는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이이전에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었다.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가톨릭교회를 잘 이끌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된 부산물이었다.

가톨릭교회 신자 중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으며, 우파도 있고 좌파도 있다. 교회 수장으로서 그는 가난한 사람과 좌파만 아끼고 부자와 우파를 내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사회적 약자의 보호에 앞장선 것은 약자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이고, 진보 진영을 뒷받침해 준 것은 독재 정권의 압제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것은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의 일이었으니, 그만큼이라도 한국의 권력 구조가 균형을 잡은 상황에서 특정한 정치 노선에 계속 치우친다는 것은 거대 종교 지도자로서 적절치 못한 일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한국 가톨릭교회사와 관련된 분야를 연구해 온 필자로서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관련된 김 추기경의 업적이 교회사의 맥락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본다. 말년의 정치적 퇴행(?)도 그 맥락에서 적절한 것으로 본다.

칼럼에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뮈텔 시대(1891~1933)를 언급했거니와, 그 이전의 교회사는 박해의 역사였다. 조선조 말기의 가톨릭 박해를 '어리석은 쇄국 정책'으로 가볍게 몰아붙이는 이들이 많지만, 조금만 깊이 살펴봐도 박해 정책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개항 이전의 조선 왕조는 '천명'을 가진 '천자'를 중심으로 한 '천하체제'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천명'을 능가하는 권위의 '천주'를 받드는 서학, 즉 천주교의 세계관은 이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까지는 이 모순을 어떻게든 해소 내지 완화하려는 노력이 서학 내에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로 펼쳐진 신유박해 과정에서 황사영 백서가 튀어나온 뒤로는 화해의 길이 사라졌다. 황사영 백서는 청나라 황제를 움직여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관용하도록 압력을 넣게 해 달라든가, 서양 해군을 보내 조선 국왕을 굴복시켜 달라는 등의 청원을 담은 것이었으니, 조선의 전통 질서에 용납될 수 없는 패륜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서양 군사력이 중국을 유린하는 상황에 접어들면서 이 갈등은 거듭거듭 증폭되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이 1868년의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었다. 국왕 조부의 묘를 훼손한 이 사건에 천주교도들이 가담한 사실은 조선의 권력층만이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서양 오랑캐와 천주교도를 모두 짐승처럼 보게 만들었다.

개항 후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었을 때, 개신교 선교사들보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조선 정부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일이 많았던 것은 갈등의 역사가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뮈텔 주교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고, 그 모습이 그가 남긴 일기에 그대로 남아있다. 조선 왕조의 멸망은 그에게 반가운 일이었고, 선교 발전을 위해 일제와의 협력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가톨릭 신자로서 민족주의를 추구한 이들도 많았지만 뮈텔 주교로 대표되는 교회 지도부는 20세기 전반부 동안 한국의 민족주의를 등진 행로를 걸었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열망이 좌절을 겪고 있던 20세기 후반부에는 김 추기경을 비롯한 가톨릭 지도자들이 민주화의 길을 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

뮈텔 주교는 복음주의 성향의 선교사였다. 선교 대상 사회를 해체해 개인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그 단계에서 가톨릭교회는 한국 사회와 유리된 집단이었다. 그 분위기는 5·16 때 장면 총리가 수녀원에 피신하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그런 상태에 있던 가톨릭교회를 한국 사회의 중요한 축으로 키워낸 것이 김 추기경의 공로다. 과거를 드러나게 비판하지 않으면서 밝은 장래를 위해 오늘의 할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교회의 '역사 바로잡기'를 해낸 것이다.

김 추기경의 말년 행적을 놓고 원래의 성향이 보수니 어쩌니 하는 말들도 있다. 정치가가 아닌 종교인에 대해 쓸 데 없는 논란이라 생각한다. 현대 세계에서도 종교가 얼마나 훌륭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지 그분은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설령 그분이 개인적으로 진보 성향을 가진 분이더라도, 민주화가 어느 정도 성취된 단계에서 중립을 취한 것은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유가에서 말하는 '지어지선'(止於至善)에도 부합하는 자세 아니겠는가.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누가 '영혼 없는 경찰'을 만드는가?

기사입력 2009-02-18 오전 6:19:56

사오정의 시대

손오공과 사오정이 함께 면접을 보러 갔다. 오공이 먼저 들어갔다.

면접관이 물었다. "좋아하는 축구 선수가 누구지요?"
오공이 대답했다. "전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이동국입니다."

면접관이 물었다. "코소보가 어디인가요?"
오공이 대답했다. "발칸반도의 중앙부에 있는 산악지대입니다."

면접관이 또 물었다. "초능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오공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과학적으로 입증은 안됐지만 그럴싸한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합격하고 나온 오공에게 오정이 요령을 물었다. 오공은 상세하게 가르쳐줬다. 잠시 후 오정의 차례가 되어 면접실에 들어갔다.

면접관이 물었다. "이름이 뭐지요?"
오정의 준비된 대답. "전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이동국입니다."

면접관이 놀라서 물었다. "뭐야? 당신 어디서 왔어?"
오정은 늠름하게 대답했다. "발칸반도의 중앙부에 있는 산악지대입니다."

면접관이 기가 막혀 "이 사람 바보 아냐?" 하자 오정은 자신 있게 대꾸했다. "과학적으로 입증은 안됐지만 그럴싸한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말귀를 철저하게 못 알아듣는 사오정이 사회에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가 뭘까. 우리가 현실에서 답답하게 느끼는 현상을 희화화해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알아들을 만한 메시지를 받고도 시치미 떼는 누군가를 떠올려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오정을 재미있어 한다.

몇 해 전에는 덩달이 시리즈가 유행했다. 이야기의 맥락은 살피지 않고 글자에만 집착하는 것이 덩달이의 장기였다. 그 역시 숲을 볼 생각은 않고 나무만 보려 드는 누군가를 떠올려줬기에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덩달이와 사오정의 모델은 누구일까. 그 시절이나 이 시절이나 사회의 기대를 모으고, 또 그 기대를 어그러뜨려 사회의 비난을 모은 것은 정치권이다. 다른 모델이 누가 있겠는가. 정치권 안에서 누가 누구보다 더 모델로 적확하다고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덩달이는 글자에라도 집착했다. 사오정은 아예 신경도 안 쓴다. 국민의 개혁 요구를 빙자해 사정의 칼날을 자의적으로 휘두르던 시절이 덩달이의 시대였다면, 여야가 바뀌기 전에 자기네가 하던 주장은 까맣게 잊어먹고 상대당의 약점 잡기에만 골몰하는 지금이 사오정의 시대일까. 사오정 다음에는 어떤 캐릭터가 정치권을 그려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 지난 1월 30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강연하는 한승수.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엘리트 관료인 그가 국회에서 '메일' 갖고 말장난하는 모습을 보면 '엘리트'가 '영혼 없는'과 같은 뜻이던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렇다. 영혼 없는 공무원도 있을 수 있다. 영혼 없는 대통령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영혼 없는 주권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공무원을 영혼 없는 공무원이 되라고 몰아붙여서야 되겠는가? ⓒ뉴시스

  10년 전에 쓴 이 글을 꺼내 보며 글쓰기가 참 조심스러운 일이란 생각을 새삼 한다. 어떤 자들을 보고 사오정을 떠올렸던 것인지 지금 잘 생각도 나지 않지만, 무조건 미안하다. 요즘 한국 정부를 대표한다는 사람들 몇몇이 보여주는 사오정스러움에 비길 만한 일은 그 시절이고 그 전이고 단연코 없었다. 당시로서는 뭔가 답답한 꼴을 보며 울화통을 터뜨린 것이었겠지만, 내가 사오정을 너무 우습게 봤었다. 사오정에게 정말 미안하다.

일국의 총리란 사람이, 그것도 유엔총회 의장까지 지내봤다는 사람이 국회 답변에서 '메일'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한다는 소리 좀 들어보라. "제가 영어를 좀 한다. 외국에선 메일 그러면 편지를 얘기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

청와대가 용산 참사에 대한 비판 여론을 호도하려고 획책한 사실을 덮을 수 있는 데까지 덮어주려는 한승수의 '충정'은 알겠다. 그런데 그 충정을 관철하기 위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자기가 영어 좀 한다는 사실을 내세우고 낱말풀이 해주는 것뿐이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미국인들은 편지를 메일이라 한다. 따라서 한국인들도 편지 아닌 것을 메일이라 하면 안 된다. 청와대에서 경찰로 메일을 보냈다고 하는데, 보낸 것이 편지가 아니었다면 그것을 메일이라고 해선 안 된다?" 그 정도 영어가 몇 점짜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논리는 낙제점이고 정치력은 빵점이다.

한승수의 경력을 나는 잘 모른다. 허나 국회에 답변하는 총리 입장에서 자기 말의 신뢰성을 높이겠다고 "제가 영어를 좀 한다" 하는 말을 앞세우는 것을 보면 일을 어떤 식으로 하는 사람인지 짐작이 간다. 자기 일을 찾아서 할 줄은 모르고, 일 시켜줄 사람 찾아 "내가 뭐는 좀 하니까" 시켜달라고 매달리는 사람. 시킨 일 하는 데 중치 이상은 갔기에 오늘의 위치에 이르렀겠지. 그런데 지금 'mail' 단어 하나 붙잡고 늘어져 덩달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중치 이상 가는 짓일까? 이런 사람이 이런 꼴 보이는 건 그 사람 자신보다 그 사람에게 누가 어떤 일을 시켰는가에 문제가 있다.

총리에게 일을 시키는 건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총리에게 어떤 일을 어떻게 시키는 지 세세한 내용은 몰라도, 대통령이 원하는 일을 대통령이 익숙한 방식으로 하라는 압박감이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에게 익숙한 방식은 어떤 것인가?

지난 월말의 TV '원탁 대화'에서 이명박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경제 정책의 오류를 지적하는 질문에 "모든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라니! 듣기 싫은 소리가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원리주의 종교의 '무류성(無謬性)' 수준이다. 남북 관계 악화에 대해선 "60년 분단 중 한 1년 정상화를 위해 경색된 것은 있을 만한 일"이라고 한다. 60년 분단만 보이고 긴장 완화 노력의 10년은 보이지 않는가보다. 용산 참사에 대해선 "모든 것을 폭력, 힘으로 하면 되지 않는다."고 한다. 폭력과 힘을 앞세운 '속도전'은 누가 주문한 것인가?

이 정도라도 사오정이 자리 뺏길까봐 불안해질 만한데, 여기서 그친 것도 아니다. '회전문 인사' 얘기에 "어떤 분이 그러냐?"고 반문을 하는 데는 그야말로 할 말이 없다. 용산의 특공대 투입 문제가 나오자 "완전히 일방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면서 자기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한다. 사오정도 두 손 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끔찍한 얘기는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를 용산 참사 책임으로부터 감싸며 "경찰이 잘못하다간 우리만 당한다고 생각한다면 누가 일하겠느냐"고 따지는 것이다. 공권력 남용으로 국민을 죽이는 결과가 나타나도 자기 뜻에 따라 뛰어주기만 하면 지켜주겠다는 것이다. "이번 문제도 앞뒤를 가리지 않고 한다면 공직자가 누가 일하겠느냐"고도 한다. 일을 열심히 한다면 결과가 잘못되어도 책임을 묻지 않아야 일할 의욕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자기 사회를 아끼는 마음이 있다.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보수를 비롯해 적절한 조건을 마련해주면 당장 드러나지 않아도 자기 업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름대로의 양심도 지키면서 역할도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제대로 된 공직 사회다. 그런데 사람의 본성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공무원을 '영혼 없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래야 그 이기심을 자극함으로써 자기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과 공무원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이기심에 따라서만 움직이게 만들면 권력을 사유화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국가를 하나의 폭력 조직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들이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시도가 좌절되기까지 이 사회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다. 용산의 희생자들은 그 시작일 뿐이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공룡의 고민

기사입력 2009-02-16 오전 7:59:18

공룡의 고민

지금으로부터 6500만 년 전, 백악기 말기의 지구는 공룡의 세계였다. 이 거대한 파충류는 그때까지 1억6000만 년간이나 지구의 표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공룡이 사라졌다. 공룡의 퇴장에는 불과 100만 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100만 년이라면 지질학상 '눈 깜짝할 순간'이다.

공룡의 급격한 절멸(絶滅)은 오랫동안 지질학계의 큰 수수께끼였다. 이 수수께끼에 가장 그럴싸한 해답을 10년 전 버클리 대학의 루이스 알바레스 교수가 제시했다. 소행성의 충돌에 따른 충격 때문이라는 것이다.

백악기가 끝나는 시점의 지층을 연구한 결과 이 소행성의 직경은 직경 11킬로미터 정도였으리라고 알바레스는 추정했다. 직경 11킬로미터짜리 소행성의 충돌은 현존하는 핵폭탄을 모두 합친 것보다 몇 십 배의 위력이다. 먼지와 파편이 대기권을 채워 1년 동안은 햇빛이 지구 표면에 이르지 못했고, 따라서 광합성이 거의 중단되는 등 엄청난 충격이 생태계에 닥쳤다. 이 충격의 여파 속에 공룡은 사라지고, 아직 진화의 초기 단계에 있던 포유류가 살아남아 그 공백을 메우게 됐으리라는 것이다.

포유류는 견뎌낸 충격을 왜 공룡은 견뎌내지 못한 것일까. 생물학자들은 '전문성'의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평상 상태에서 다른 동물의 위협을 받지 않던 공룡은 제한된 종류의 먹이만을 취하는 습성을 키우고 있어서 생태계의 기본 조건 변화에 적응할 여지가 적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여당은 집권자의 그늘 속에서 몸집만 키워온 공룡이다. 한나라당이 현직 대통령의 탈당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한지는 한 달 남짓 됐지만 역시 다음 대통령의 배출에 희망을 걸고 버텨 왔다. 이제 그 희망마저 잃은 상황에서 새로운 위치에 새로운 자세를 갖출 수 있을지, 한국 정치발전의 시금석으로 관심을 모으는 일이다.

공룡의 고민은 한나라당만의 것이 아니다. 경제대국의 자만심이 금융 공황의 충격 속에 적응의 방향을 잘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은 국가 전체의 명운이 달린 문제다. 더 크게 보면 '엘니뇨' 현상을 둘러싼 금년의 갖가지 이상기후는 인류 전체의 명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변화 속의 적응이 모두에게 절실한 과제가 돼가고 있다. 한국 최대의 정치 조직인 한나라당의 건강한 생존 여부는 그래서 더더욱 관심이 가는 일이다.

▲ 한나라당의 지금 얼굴들. 두어 명 당 인사가 입각하면 '소통'이 잘 되리라고 이들은 정말로 믿은 것일까? 지난 1년 동안의 퇴행적 모습으로 계속 깎여나가고는 있지만, 한나라당은 아직도 이명박보다 훨씬 높은 지지율을 지키고 있다. 자리 몇몇 바라는 소소한 욕심 때문에 '공당'으로서의 역할이 마비된 한나라당, 야당 시절보다 더 큰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능까지도 마비되어 있는 것인가? ⓒ프레시안

  한국에서 거대여당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54년 5·20 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자유당이다. 1951년 말 이승만이 원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추진을 위해 결성된 자유당은 같은 이름의 두 개 당이 며칠 상관으로 만들어지는 등 초기에는 계파 투쟁이 치열했지만, 1954년 초 이범석이 축출되고 이기붕이 총무부장으로 당을 운영하면서 이승만 총재의 완전한 소유물이 되었다. 첫 총선에서 203석 중 114석을 획득하고 무소속 의원들을 포섭해 137석에 이른 자유당은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으나 4·19 혁명으로 이승만과 함께 퇴장했다.

자유당에 이어 독재의 도구로 만들어진 거대여당이 박정희의 공화당이었다. 군사반란 세력이 준비해 두었다가 1963년 초 정치 활동 재개가 허용되자마자 창당을 선포한 공화당은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기능확대된 현대적 정당을 지향했다. 그 결과 정책 개발과 원외 활동을 확장하는 효과를 얼마간 이루기도 했지만, 독재정권 유지라는 기본 임무에 파묻혀 권위주의 체제를 벗어날 수 없었다. 1973년 유신체제에 접어들자 그 나마의 정당 기능도 퇴행해 버리고 완벽한 거수기 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80년 10월 해산된 공화당의 뒤를 이은 것이 전두환의 민정당이었다. 민정당은 공화당의 인적 자원뿐만 아니라 물적 자원도 넘겨받았다. 당시의 정당법에는 해산된 정당의 재산이 "당해 정당과 유사한 목적을 가진 정당이나 단체기부하거나 기타 다른 처분 등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민정당은 더도 덜도 아닌 공화당의 후신이었지만 전두환에게 불편한 유산을 배제하기 위해 간판을 바꿔단 것이었다.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은 모두 독재자의 사유물로서 독재의 도구였다. 물론 모두 당시 한국의 최대 정당인만큼 독재자의 졸개에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정치다운 정치를 위해 참여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독재자의 의지를 거스르는 행보는 있을 수 없는 철저한 권위주의 정당이었다.

1987년 이후 선거다운 선거가 시작되면서 독재자의 사유물로서 거대여당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래서 권력의 독점이 아닌 과점 체제로 전환한 것이 1990년 초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자당이었다. 민자당은 여러 계파의 협력과 경쟁 속에 정치조직으로서의 기능이 활성화되었지만, 기본 틀은 민정당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권력의 그늘에서 검은 정치 자금에 의존하는 행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권력 과점 체제로서 민자당의 구조는 1995년 말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1997년 말 한나라당으로 다시 바꿀 때까지 계속되었다.

칼럼은 1997년 말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 시점에서 쓴 것이다. 국회에서는 제1당이지만 야당이 됨으로써 한나라당을 덮어주던 권력의 그늘이 크게 줄어들게 된 시점이었다. 그로부터 11년, 한 때 제2당으로 물러서기까지 했던 한나라당이 다시 거대여당의 자리로 돌아왔다.

1963년 이래 35년간 권력의 그늘에서만 서식해 온 거대여당의 전통을 잃어버린 한나라당이 10년간의 야당 행로를 견뎌내고 원래의 자리를 되찾은 것은 장한 일이다.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건전한 발전을 모색해 온 노력 또한 적지 않음을 흔쾌히 인정한다. 신한국당 시절과 비교하면 인적 구성에 있어서도 경륜과 실력을 가진 인물이 비중을 크게 늘렸다.

이런 변화를 놓고 본다면 한나라당은 신한국당 이전의 거대여당에 비해 당연히 더 뛰어난 정치력을 기대할 만한 정당이다. 가치관에 있어서야 표방하는 '보수'를 벗어나 진보적 개혁에 앞장설 것을 바랄 일이 아니지만, 정책을 개발하고 국회를 운영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21세기 정당다운 모습을 얼마간이라도 보여줄 위치에 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한나라당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입법 전쟁'에 내몰려 내용도 모르는 법안을 통과시키느라 최소한의 체면도 지키지 못하고, 용산 참사에 대한 민심을 조금이라도 살펴보자는 동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역사상 최고로 화려한 '비리 백화점'으로 인정받는 통일부 장관 후보를 감싸주기에 바쁘다.

왜 이럴까? 한나라당이 밉기보다 불쌍하다.

서슬 푸른 박정희 아래 공화당에서도 몇 차례 '항명' 사태가 있었다. 지금 뒤져보니 1965년의 인사 항명 파동, 1969년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 사태, 1971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결의안 사태 등이 있었다. 한나라당 있는 사람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명박 집단이 회귀하고자 하는 목표가 어느 시절인가를. 경제개발이라도 하던 60년대가 아니라 이권 나눠먹기만 하던 50년대 자유당 시절이란 것을.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