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히틀러의 웃음

기사입력 오전 7:25:31

히틀러의 웃음

칼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하수인이었다. SS 간부로서 1938년 비엔나에서, 그리고 이듬해에는 프라하에서 유태인 청소를 지휘했고, 1942년 이후에는 수용소의 집단 학살을 기획하고 관리했다. 그가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요원들에게 체포돼 예루살렘에 압송되었을 때 이 '살인마'의 재판은 세계의 이목을 모았다. 1961년 12월 이스라엘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62년 5월 교수형이 집행됐다.

아이히만의 재판과 처형에 대해서는 많은 글이 나왔거니와, 가장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이다. 독일 유태인 출신으로 나치 박해를 피해 41년 미국에 이주한 아렌트는 전체주의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가진 학자였다.

아렌트가 많은 유태인들을 격분시킨 논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박해 당시 유태인 사회 지도층이 나치의 통제에 협조했다는 것이다. 이런 협조 없이 몇 년 안 되는 기간 동안 500만 이상을 처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아렌트는 지적했다. 본의가 아니었더라도 '결과적으로' 협조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또 이 지적에 일반 유태인들이 발끈하는 것도 쉽게 이해가 가는 일이다.

또 하나의 논점은 보다 미묘한 것이었다. 아렌트는 히틀러와 아이히만을 '악마'가 아닌 비속한 인물들로 그렸다. 20세기는 과거와 달리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특이성이 없는 비속한 인물들이 술수만으로 권력을 쥐고 엄청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비속성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관점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을 가장 두드러진 예로 그는 꼽았다.

유태인들이 이 논점에 분노한 것은 대학살이 유태인 정체성(正體性)의 근거가 돼 있기 때문이었다. 악마적 범죄에 희생당했다는 비극성은 이스라엘의 호전적 대 아랍 정책까지도 정당화시켜 주는 시오니즘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 희생을 비속한 인간들의 비속한 범죄로 격하시키는 것을 시오니즘에 대한 모욕으로 유태인들은 받아들였다.

히틀러의 웃는 얼굴을 만들어 담은 껌 광고에 독일 대사관이 항의한 배경에도 비슷한 상징성이 작용한 것 같다. 히틀러를 완벽한 악마로 규정해야만 나치즘의 죄악을 일반 독일인들로부터 절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이 광고를 봤다면 뭐라 했을까.

▲ 히틀러의 웃음.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최고 전범으로 '악마' 취급을 받았지만 한나 아렌트는 그가 천박한 욕망에 휘몰린 일개 선동 기술자에 불과하다고 논했다. 건전한 인간관을 가지지 못한 지도자가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보여준 극단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히틀러의 세기적 범죄를 증오 아닌 경멸의 대상으로 직시한 아렌트의 지성에 경의를 표한다. ⓒ프레시안

  한나 아렌트의 'banality of evil'이란 말을 인용할 때 나는 '악의 비속성'이라고 써 왔다. 그런데 아렌트의 책 우리말 번역서에는 이것이 '악의 평범성'이라고 흔히 옮겨져 왔음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사전적인 뜻으로는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하다. 그런데 아렌트가 이 말을 통해 내세운 논점을 놓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평범성'엔 아쉬운 느낌이 든다. 전통적인 '악(evil)'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아렌트가 보는 20세기의 악은 경멸의 대상이다. 천재성도 용기도 보여주지 않고 그저 천박한 탐욕에 몰려 저질러지는 악, 그에 대한 아렌트의 경멸감이 '평범성'에는 제대로 담기지 않는다.

아렌트가 말하는 비속성은 근대문명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조업 현장에서는 명장(名匠)이 사라졌다. 싸움터에서는 용사(勇士)가 없어졌다. 천재(天才)조차도 20세기의 천재는 기능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20세기 예술계의 거장(巨匠)들은 복사바다 속에 빠져버렸다.

비속화 현상은 전쟁에서 제일 두드러진다. 전사와 전사 사이의 육박전은 비중이 떨어지다 못해 20세기 말의 전쟁에서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전쟁의 주류는 눈먼 대량 살상 무기의 몫이 되었다. 공격당할 위험이 없는 곳에서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상대방을 인간으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다. 옛날의 전사들이 자기 뜻에 목숨을 걸던 고귀한 활동이던 전쟁이 한낱 물량적 경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쟁만이 아니라 일반 경쟁이나 투쟁에서도 20세기 세계에서는 비속화의 추세를 널리 읽을 수 있다. 돈벌이에서도 개인의 능력과 노력보다 자본의 힘이 압도적인 작용을 하게 되었고, 학생들의 공부도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어느 분야에서나 '기득권'을 쌓고 활용하는 것이 '도전'보다 유리한 전략으로 채택되는 환경이 굳어지고 있다.

비속화 추세가 가장 두드러진 분야의 하나가 정치다. 유행하고 있는 '정치공학'이란 말은 아마도 '정치철학'과 대비되는 뜻일 것이다. 정치가 무엇인가. 한 사회의 진로를 결정해 나가는 과정이다. 진로 결정을 위해서는 철학으로서 가치관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정치에서는 가치관도 철학도 가지지 않은 테크니션들이 선거 승리를 위한 기술만을 가지고 폴리티션들의 설 땅을 빼앗는 그레셤의 법칙이 판을 친다.

지난 가을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 작업을 하면서 뉴라이트가 '성공'의 의미를 외면하며 '승리'에만 집착하는 행태를 지적한 바 있다. 정치철학 실종의 극단적 사례라 할 것이다. 정권 운용을 위한 승리만을 추구할 뿐, 국가 운영의 성공은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이다.

정치의 비속화 추세는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2차 대전 후의 미국을 보더라도 나름의 정치철학을 가졌다고 할 만한 대통령이 몇 안 된다. 아이젠하워야 워낙 인기 높은 전쟁 영웅이라 대통령이 된 것이고, 카터와 오바마 정도 철학을 가진 대통령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에 앞서 닉슨과 부시가 워낙 국민을 지겹게 만들어 놓은 상황 덕분이었다.

정치공학의 달인으로 자타가 공인한 닉슨의 전략 노선을 설명하는 '미치광이 이론(Mad Man's Theory)'이란 것이 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 미국이 어떤 극한적 대응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상대방에게 심어주는 것이 미국의 국익을 증진시켜 준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의 대 베트남 전략 중에는 이 이론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것이 많았다.

당시에는 이 전략이 얼마만큼의 전술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미국의 국가정체성은 그로 인해 크게 훼손되었고 미국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다. 국가 사회의 큰 '성공'을 생각지 않고 목전의 '승리'만을 추구한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행태를 보며 미치광이 이론을 떠올릴 때가 많다. <PD수첩> 탄압에서 언론법 '입법 전쟁'까지, "상식? 상식이 더 센지 우리 힘이 더 센지 한번 붙어보자!"는 식으로 계속 밀어붙이기만 한다. 지금의 승리만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장래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네가 힘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이 힘으로만 결정되는 형세를 만들려 든다.

아렌트가 히틀러와 스탈린을 지목해 말한 '비속한 악'이 바로 이런 것이다. '사회의 성공'이란 거대한 욕심이 아니라 남에게 이기고 남보다 많이 갖기 위한 천박한 욕심만이 춤춘다. 힘 있는 사람들이 사회 전체의 성공을 외면하는 이런 사회는 망하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사회가 망했던 것처럼.

이 미치광이 행태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요즘 공격에서 절정에 달한 감이 있다. 부인과 아들을 '참고인'으로 소환했으면 '피의자'는 노 전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 박연차의 진술을 인용한 '검찰 관계자'들의 폭로는 갈 데까지 갔다. "무는 호랑이는 짖지 않는다"던데 왜 이렇게들 짖어댈까? 정말로 우리의 전임 국가 원수에게 문제가 있다면 조용히 살펴봐서 피할 수 없는 문제가 확인될 때 어쩔 수 없이 발표하는 것이 '상식'이고 '예의' 아닌가? 왜 이렇게 속 보이도록 떠들어대는 걸까?

노 전 대통령은 부인이 박연차의 돈을 받은 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다. 액수는 3억 원 더하기 100만 달러인 모양이다. 이것만으로도 많은 국민이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은 그가 워낙 청렴과 도덕성을 간판으로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권력형 비리' 축에 낄 수도 없음은 물론, 지금으로서는 '비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사안이다.

그런데도, '무죄 추정의 원칙'과 '피의 사실 공표 금지 원칙' 때문에 ○○일보사 ○사장 이름이 신문 지상에 오르지도 못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검찰 관계자'는 전임 국가 원수의 피의 사실에 대한 자칭 뇌물 공여자의 진술 내용을 중계 방송하기 바쁘다. 당장 언론이 잘 받아먹어 주니까 목전의 승리에 도취된 꼴이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이 요 며칠간 발표한 글에 거짓이 없다는 데 10만원 걸 용의가 있다. 그가 거짓말을 일체 않는 성인군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해서 안 될 자리를 살필 줄은 아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다른 나라 대통령의 정책 공약을 놓고 "선거 때 무슨 소리는 못 하냐?"는 사람과는 전연 다른 사람이다.

Posted by 문천